수신 확인 바람
- 교사를 위한 커뮤니케이션론
수신과 발신
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발신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아이들이 발신하는 다양한 신호를 제대로 수신할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근대학교 시스템은 교사들이 발신만 해도 웬만큼 굴러가게 세팅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훈육이지 교육이 아니다. 교육현장이라면 교사와 아이들, 또 아이들끼리 신호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성장이 일어나야 한다. 엄마는 갓난아이가 발신하는 다양한 신호를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을 신호로 변환할 줄 아는 능력은 부모와 교사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능력이다. 수신 감도가 좋은 안테나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도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감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이 교사 양성의 중요한 과정이 되어야 마땅하건만, 근대적 교사 양성과정은 발신 위주로 짜여 있어 교사로서 역량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회가 지속가능하려면 부모와 교사의 역할은 누구나 맡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아기를 낳으면 부모가 되듯이, 누구나 교사라는 포지션에 서면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사회구조를 만든다. 일단 아이들이 교사를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존재로 여기도록 기본값이 설정된다.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나 마을 어른들은 젊은 교사에게도 존칭을 쓰고 깍듯이 대한다. 평범한 사람도 훌륭한 인간으로 비치도록 구조적으로 짜놓은 것이다. 성추행 교사나 폭력 교사 등 일부 불량 교사가 나와도 이 구조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야 사회가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교사라는 포지션에 서기만 해도 교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아이들의 성장을 교사에게 일임하지 않을 뿐더러, 교사에 대한 존경심도 예전 같지 않다. 아이들도 교사를 학원강사와 별 다르지 않은 직업인으로 바라본다. 아무나 교사 노릇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다. 아이들의 성장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아이들과 소통할 줄 아는 교사의 자질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교사들은 아이들의 신호를 수신하는 데 점점 더 애를 먹고 있다. IMF 이후 교직이 인기직종이 되면서 모범생 중의 모범생들이 교사가 되고 있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다투기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그런 점에서 수업시간보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진짜 교육이 일어나는 시간일 수 있다. 시험공부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중산층의 모범생 출신 교사들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아이들의 사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소외계층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에 가까운 신호들을 알아채기도 힘들다. 교사들은 수신 기능이 약화된 데 반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신호는 더 복잡해졌다. 소통이 힘들 수밖에 없다. 교직은 수많은 아이들이 발신하는 복잡한 신호를 순간순간 캐치하고 제대로 해석해야 하는 난이도 높은 직종이다. 차선도 없고 신호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복잡한 도심에서 차를 운전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한적한 읍내의 신호체계에 익숙한 운전자에게는 위험한 상황이다. 교사를 뽑을 때는 파란불, 빨간불 신호만 분별하면 되는 단순한 신호체계에 적합한 사람인지 신호등도 차선도 없는(또는 너무 많은 신호등과 표지판으로 뒤덮인) 도로에 적합한 사람인지 잘 살펴야 한다. 도심 운전은 웬만한 운전자라면 하다 보면 익숙해지지만 교육현장은 그렇지 않다. 날마다 누군가는 사고를 치고 생전 처음 겪는 일을 계속 맞닥뜨리는 곳이 교육현장이다. 그러므로 교사 양성과정과 임용과정에서는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고 점검해야 한다. 서머힐에서 니일은 교사 면접을 볼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아이들이랑 바닷가를 갔는데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도 한 아이가 돌아가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수신과 발신 능력을 동시에 점검하는 질문이다. 교사 양성과 임용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사회 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의 신뢰장치는 삐걱거리기 시작한 지 오래고, 더 이상 아무나 교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범생 출신의 엘리트 교사가 좋은 교사인 것도 아니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표준화 시대의 교사양성과정으로 좋은 교사를 양성하기는 힘들다. 전방위적인 연결의 시대, 소통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요구된다. 관건은 수신 능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이다.
오해와 이해 사이
수신은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매우 복잡해서 자칫하면 오해하기 좋게 짜여 있다. ‘잘~한다’, ‘잘한다’처럼 같은 단어가 미묘한 발성의 차이로 정반대의 의미를 전하는 경우도 많다. ‘적당한’ 표현을 찾는 일을 ‘적당히’ 하다 보면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쌀을 사러 갈 때 우리는 쌀을 ‘팔러’ 간다고 말한다. 같은 음식인데도 채소나 고기의 경우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는 이런 표현을 왜 굳이 쓰는 걸까. 대부분의 언어는 단어의 장단과 높낮이에 따라, 또 앞뒤 말과의 맥락에 따라 미묘하게 의미가 달라진다. 성조가 있는 언어가 아니어도 비슷한 용례에 예민하지 않으면 소통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언어의 이러한 면이 커뮤니케이션 수신 감도를 예민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눈빛이나 손짓발짓, 표정이 더 중요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말과 몸짓이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관계를 제대로 맺기 힘들다. 이런 애매모호함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만 사실 이 애매함이야말로 경계가 모호한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적당히’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정반대 개념으로도 쓰이듯이, 적절함과 적당함은 애매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 애매모호한 기준과 정도를 그때그때 잘 가늠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성패를 좌우한다. 자크 라캉은 강의할 때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일부러 그렇게 난해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오해를 감수하더라도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듣는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발신보다 수신이 더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발신자 없이도 수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수신은 발신자의 메시지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사람들이 외치는 ‘오 필승 코리아’ 응원가를 외국인들은 ‘오 피스(Peace) 코리아’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평화라니! 아름다운 오해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신된 메시지는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고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느끼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아름다운 오해가 아닌 ‘곤란한’ 오해가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이어진다. 연결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난다(수신, 발신의 한자어 信은 신뢰를 뜻한다.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신뢰는 상호간에 발신과 수신이 더 활발히 일어나게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아름다운 오해가 아닌 불편한 오해를 하는 경우에는 서로 간에 불신과 척력이 작용하면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흔히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곤 한다. “오늘 참 날씨가 좋네요.” “그렇네요.” 이처럼 하나마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수신 확인인 셈이다. 언제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상태에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토대를 한 번 더 다지는 것이다. 그럴 때 관계는 깊어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서로의 메시지가 수신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쁨은 우리네 삶의 본질을 이룬다. 서로 공을 주고받는 단조로운 놀이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사를 주고받는 것도 그렇다. 섹스 같은 내밀한 행위도 그 본질은 수신 확인이다.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을 수시로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요즘 자해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올 정도로 눈에 띄게 늘고 있는 듯하다. 손목을 긋고는 인증샷을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놀이처럼 번지고 있는 자해 인증샷은 인정욕구에 목마른 십대들의 이상행동으로 비치고 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볼 문제다. 심리전문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자해 인증샷은 인정보다 연결에 대한 욕구의 새로운 변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자신이 공동체나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해나 ‘관종’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해가 유행하기 전 청소년들 사이에서 ‘잉여’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신을 ‘잉여’로 느끼는 자의식이 무의식을 자극함으로써 공동체나 주변 사람과의 연결지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 욕구가 자해나 관종으로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일베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관종’ 증상을 보이는 정치인들도 공동체와의 연결고리가 약하거나 타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연결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주목할 일이다.
반복과 즉흥성
교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이 아이에게 한 말을 저 아이한테도 해야 하고, 이 학급에서 한 강의를 저 학급에서 또 해야 한다. 강의노트를 십 년, 이십 년 우려먹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그런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교사 노릇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드물지만 같은 이야기를 매번 열정적으로 하는 교사들이 있다. 아이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아이들 같지만 반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아이들이 다르다. 아이들과 교감할 수 있는 교사는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즉흥성이다. 훌륭한 연주자는 다른 연주자나 청중들의 분위기를 읽고 거기에 맞춰 연주한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마치 처음인듯 연주한다. 연주할 때마다 곡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달라지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청중들 분위기에 따라 구성이 조금씩 바뀌고 호흡이 달라진다. 강연자 스스로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내용(콘텐츠)은 비슷하지만 형식 또는 맥락(컨텍스트)이 달라지면서 내용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겨난다. 강연을 많이 하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강연 원고를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준비한 원고를 읽듯이 강의하면 학생들이나 청중의 반응이 신통찮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자신도 자기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므로 당연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스스로 흥미진진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강연자도 청중도 만족도가 더 높다고 한다. 말하자면 즉흥성이란 ‘지금 여기’에서 연주자 또는 강연자와 청중이 함께 만들어 내는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연이나 연주는 청중과 함께 만드는 공동의 작품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다. 청중과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장에 동조할 수 있을 때 즉흥연주나 살아 있는 강의가 가능하다. 그 자리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충실하기, 공자가 말한 충忠의 본질이다. 이는 곧 인仁으로도 통한다. 그런 점에서 즉흥성의 본질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성을 발휘하려면 반복하는 일의 내용보다 형식에 눈을 떠야 한다. 형식이 내용을 어떻게 미묘하게 변화시키는지 관찰하는 일은 고도의 수신 기술이다. 반복의 교육적 가치는 여기에 있다. 맥락, 형식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반복이 사실상 반복이 아닌 게 된다. 도공이 그릇을 빚기 전에 흙을 치대어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듯이 맥락을 치밀하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창조성은 그 과정에서 솟아난다. 뇌의 시냅스에 새로운 연결지점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같은 그림책이나 비디오를 열 번, 스무 번 볼 수 있는 것은 내용은 알지만 그것이 새로운 맥락 속에서 매번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새로운 형식 속에서 의미가 새롭게 읽히는 것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내용에 집중하느라 형식을 읽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많지만,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같은 이야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다르게 변주되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면 이야기 소재는 같아도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열 번째 하는 이야기를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교사의 마음은 열 번째 듣는 이야기를 처음 듣듯 들을 수 있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가 읽힌다. 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는 것이다.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순간이다. 뇌의 시냅스가 활성화될수록, 맥락을 치밀하게 만들수록 수신 성능이 좋아진다. 맥락은 뇌의 시냅스와 닮았다. 시냅스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뇌는 계속 변화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면 의미가 달라진다. 뇌의 작동 방식과 인간의 학습 방식은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뇌 구조가 학습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 진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뇌 또한 맥락 속에서 정보를 찾고 학습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반복은 뇌가 발달하는 데 필요한 양식인 셈이다.
수신 감도 높이기
수신 능력은 곧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상반되는 신호들 속에서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를 구분할 줄 알고,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고, 인과관계를 아는 능력이다. 독해력도 비슷하다. 주어와 술어를 연결 짓고, 숨은 전제를 찾고, 행간에 녹아 있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 단어나 문장이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지를 아는 것이다.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으라”고 말했다.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를 알면 의미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글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맥락 속에서 대충 그 뜻을 짐작하기도 한다. 또 같은 낱말도 다른 맥락에서 쓰이면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관계 속에 존재하듯 언어 또한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언어감각을 기르면 자연스럽게 맥락을 이해하는 힘이 생긴다. 주어와 술어를 제대로 연결할 줄 모르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비슷한 단어의 뉘앙스 차이를 아는 것도 미묘한 신호를 포착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쓸 줄 알며, 한 단어를 다양한 맥락으로 풀어낼 줄도 안다. 원래 언어라는 것이 맥락 속에서 가지를 뻗듯이 파생되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십대 시기에는 특히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언어가 빈약하면 수신도 발신도 힘들다. 요즘 아이들이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는 것은 언어가 빈약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짱나’ ‘대박’ 같은 단순한 단어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커뮤니케이션에 서툰 것은 당연하다. 요즘 인터넷에 범람하는 가짜뉴스는 맥락이 거세되거나 왜곡된 메시지다. 보수매체가 흔히 그러듯이 의도를 갖고 악의적으로 그러기도 하고, 맥락에 둔감하거나 수신 기능이 떨어져 그러기도 한다. 뉴스의 사회적 맥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가짜뉴스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구성원 전반의 수신 능력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 교육의 역할이다. 유머감각도 수신 능력과 관련이 깊다. 유머는 맥락을 의외의 방향으로 비트는 것이다. 악의적으로 비트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해학으로 비튼다.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맥락이 바뀔 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복되면서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터진다. 맥락을 자유자재로 비틀 수 있으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유머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맥락에 둔감하거나 언어의 시냅스가 빈약한 사람이다. 수신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반복 역시 맥락을 치밀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맥락을 파악하는 힘을 길러준다. 같은 그림책이나 비디오를 열 번 스무 번 보는 아이들은 스스로 수신 감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어른도 영화나 책을 그렇게 볼 수 있다. 관점을 달리 하면서 보면 같은 영화가 다르게 읽힌다. 어린이 권장도서, 청소년 필독도서 따위를 다 읽는 것이 독해력을 기르는 좋은 방법은 아니다. 건성건성 백 권을 읽는 것보다 좋은 책 (문장도 훌륭한) 한 권을 열 번 읽는 편이 낫다. 이야기 또한 맥락을 이해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야기는 그 속에 다양한 맥락이 얽혀 있는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 속에 또 다른 맥락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같은 이야기도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아이와 비디오를 보면서 자란 아이는 수신 능력이 다를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과의 소통이 훨씬 쉬워질 수 있다. 이야기는 주고받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행위는 연결되어 있음을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에 닿아 있다. 원래 이야기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주는 것이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이제는 이야기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귀에 익은 음성으로 듣는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좀더 친근한 곳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삶을 공유하고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간다.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삶의 토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수신은 결국 ‘듣기’다. ‘말 좀 들어라’는 말은 단순히 듣는(hearing) 것을 넘어 귀담아 들으라(listening)는 말이다. ‘약이 잘 듣는다’는 표현은 약효가 몸에 스며들어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영어나 일본어에도 비슷한 용례가 있는 걸 보면, 듣는 행위가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들음은 수동적인 행위이지만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귀를 여는 것은 곧 신뢰 속에서 마음을 여는 것이자 유연해지는 것이다. 유연함은 맥락을 풍성하게 하고 유머가 살아 숨쉬게 한다. 교육현장은 수신 감도를 높이는 다양한 교육과정을 갖출 필요가 있다. 수신 능력은 언어 감각을 통해 기를 수도 있지만 몸을 통해 기를 수도 있다. 신체 감각을 기르는 무예, 무도의 목적 또한 궁극적으로는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이다. 몸의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은 곧 신체의 맥락을 치밀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몸을 유연하게 해서 에너지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이 발신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몸의 길이든 언어의 길이든 수신 능력을 높이는 데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수신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기 마련이다. 물론 두 가지 길을 다 택할 수도 있다. 특히 십대 시기에는 신체와 언어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인 만큼 신체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적절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곧 성장의 맥락을 놓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현병호 · 발행인
mindle1603@gmail.com
수신 확인 바람
- 교사를 위한 커뮤니케이션론
수신과 발신
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발신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아이들이 발신하는 다양한 신호를 제대로 수신할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근대학교 시스템은 교사들이 발신만 해도 웬만큼 굴러가게 세팅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훈육이지 교육이 아니다. 교육현장이라면 교사와 아이들, 또 아이들끼리 신호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성장이 일어나야 한다. 엄마는 갓난아이가 발신하는 다양한 신호를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을 신호로 변환할 줄 아는 능력은 부모와 교사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능력이다. 수신 감도가 좋은 안테나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도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감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이 교사 양성의 중요한 과정이 되어야 마땅하건만, 근대적 교사 양성과정은 발신 위주로 짜여 있어 교사로서 역량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회가 지속가능하려면 부모와 교사의 역할은 누구나 맡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아기를 낳으면 부모가 되듯이, 누구나 교사라는 포지션에 서면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사회구조를 만든다. 일단 아이들이 교사를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존재로 여기도록 기본값이 설정된다.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나 마을 어른들은 젊은 교사에게도 존칭을 쓰고 깍듯이 대한다. 평범한 사람도 훌륭한 인간으로 비치도록 구조적으로 짜놓은 것이다. 성추행 교사나 폭력 교사 등 일부 불량 교사가 나와도 이 구조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야 사회가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교사라는 포지션에 서기만 해도 교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아이들의 성장을 교사에게 일임하지 않을 뿐더러, 교사에 대한 존경심도 예전 같지 않다. 아이들도 교사를 학원강사와 별 다르지 않은 직업인으로 바라본다. 아무나 교사 노릇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다. 아이들의 성장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아이들과 소통할 줄 아는 교사의 자질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교사들은 아이들의 신호를 수신하는 데 점점 더 애를 먹고 있다. IMF 이후 교직이 인기직종이 되면서 모범생 중의 모범생들이 교사가 되고 있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다투기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그런 점에서 수업시간보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진짜 교육이 일어나는 시간일 수 있다. 시험공부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중산층의 모범생 출신 교사들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아이들의 사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소외계층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에 가까운 신호들을 알아채기도 힘들다. 교사들은 수신 기능이 약화된 데 반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신호는 더 복잡해졌다. 소통이 힘들 수밖에 없다. 교직은 수많은 아이들이 발신하는 복잡한 신호를 순간순간 캐치하고 제대로 해석해야 하는 난이도 높은 직종이다. 차선도 없고 신호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복잡한 도심에서 차를 운전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한적한 읍내의 신호체계에 익숙한 운전자에게는 위험한 상황이다. 교사를 뽑을 때는 파란불, 빨간불 신호만 분별하면 되는 단순한 신호체계에 적합한 사람인지 신호등도 차선도 없는(또는 너무 많은 신호등과 표지판으로 뒤덮인) 도로에 적합한 사람인지 잘 살펴야 한다. 도심 운전은 웬만한 운전자라면 하다 보면 익숙해지지만 교육현장은 그렇지 않다. 날마다 누군가는 사고를 치고 생전 처음 겪는 일을 계속 맞닥뜨리는 곳이 교육현장이다. 그러므로 교사 양성과정과 임용과정에서는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고 점검해야 한다. 서머힐에서 니일은 교사 면접을 볼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아이들이랑 바닷가를 갔는데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도 한 아이가 돌아가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수신과 발신 능력을 동시에 점검하는 질문이다. 교사 양성과 임용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사회 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의 신뢰장치는 삐걱거리기 시작한 지 오래고, 더 이상 아무나 교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범생 출신의 엘리트 교사가 좋은 교사인 것도 아니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표준화 시대의 교사양성과정으로 좋은 교사를 양성하기는 힘들다. 전방위적인 연결의 시대, 소통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요구된다. 관건은 수신 능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이다.
오해와 이해 사이
수신은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매우 복잡해서 자칫하면 오해하기 좋게 짜여 있다. ‘잘~한다’, ‘잘한다’처럼 같은 단어가 미묘한 발성의 차이로 정반대의 의미를 전하는 경우도 많다. ‘적당한’ 표현을 찾는 일을 ‘적당히’ 하다 보면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쌀을 사러 갈 때 우리는 쌀을 ‘팔러’ 간다고 말한다. 같은 음식인데도 채소나 고기의 경우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는 이런 표현을 왜 굳이 쓰는 걸까. 대부분의 언어는 단어의 장단과 높낮이에 따라, 또 앞뒤 말과의 맥락에 따라 미묘하게 의미가 달라진다. 성조가 있는 언어가 아니어도 비슷한 용례에 예민하지 않으면 소통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언어의 이러한 면이 커뮤니케이션 수신 감도를 예민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눈빛이나 손짓발짓, 표정이 더 중요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말과 몸짓이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관계를 제대로 맺기 힘들다. 이런 애매모호함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만 사실 이 애매함이야말로 경계가 모호한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적당히’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정반대 개념으로도 쓰이듯이, 적절함과 적당함은 애매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 애매모호한 기준과 정도를 그때그때 잘 가늠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성패를 좌우한다. 자크 라캉은 강의할 때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일부러 그렇게 난해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오해를 감수하더라도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듣는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발신보다 수신이 더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발신자 없이도 수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수신은 발신자의 메시지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사람들이 외치는 ‘오 필승 코리아’ 응원가를 외국인들은 ‘오 피스(Peace) 코리아’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평화라니! 아름다운 오해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신된 메시지는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고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느끼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아름다운 오해가 아닌 ‘곤란한’ 오해가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이어진다. 연결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난다(수신, 발신의 한자어 信은 신뢰를 뜻한다.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신뢰는 상호간에 발신과 수신이 더 활발히 일어나게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아름다운 오해가 아닌 불편한 오해를 하는 경우에는 서로 간에 불신과 척력이 작용하면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흔히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곤 한다. “오늘 참 날씨가 좋네요.” “그렇네요.” 이처럼 하나마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수신 확인인 셈이다. 언제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상태에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토대를 한 번 더 다지는 것이다. 그럴 때 관계는 깊어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서로의 메시지가 수신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쁨은 우리네 삶의 본질을 이룬다. 서로 공을 주고받는 단조로운 놀이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사를 주고받는 것도 그렇다. 섹스 같은 내밀한 행위도 그 본질은 수신 확인이다.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을 수시로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요즘 자해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올 정도로 눈에 띄게 늘고 있는 듯하다. 손목을 긋고는 인증샷을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놀이처럼 번지고 있는 자해 인증샷은 인정욕구에 목마른 십대들의 이상행동으로 비치고 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볼 문제다. 심리전문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자해 인증샷은 인정보다 연결에 대한 욕구의 새로운 변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자신이 공동체나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해나 ‘관종’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해가 유행하기 전 청소년들 사이에서 ‘잉여’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신을 ‘잉여’로 느끼는 자의식이 무의식을 자극함으로써 공동체나 주변 사람과의 연결지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 욕구가 자해나 관종으로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일베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관종’ 증상을 보이는 정치인들도 공동체와의 연결고리가 약하거나 타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연결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주목할 일이다.
반복과 즉흥성
교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이 아이에게 한 말을 저 아이한테도 해야 하고, 이 학급에서 한 강의를 저 학급에서 또 해야 한다. 강의노트를 십 년, 이십 년 우려먹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그런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교사 노릇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드물지만 같은 이야기를 매번 열정적으로 하는 교사들이 있다. 아이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아이들 같지만 반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아이들이 다르다. 아이들과 교감할 수 있는 교사는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즉흥성이다. 훌륭한 연주자는 다른 연주자나 청중들의 분위기를 읽고 거기에 맞춰 연주한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마치 처음인듯 연주한다. 연주할 때마다 곡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달라지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청중들 분위기에 따라 구성이 조금씩 바뀌고 호흡이 달라진다. 강연자 스스로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내용(콘텐츠)은 비슷하지만 형식 또는 맥락(컨텍스트)이 달라지면서 내용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겨난다. 강연을 많이 하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강연 원고를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준비한 원고를 읽듯이 강의하면 학생들이나 청중의 반응이 신통찮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자신도 자기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므로 당연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스스로 흥미진진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강연자도 청중도 만족도가 더 높다고 한다. 말하자면 즉흥성이란 ‘지금 여기’에서 연주자 또는 강연자와 청중이 함께 만들어 내는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연이나 연주는 청중과 함께 만드는 공동의 작품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다. 청중과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장에 동조할 수 있을 때 즉흥연주나 살아 있는 강의가 가능하다. 그 자리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충실하기, 공자가 말한 충忠의 본질이다. 이는 곧 인仁으로도 통한다. 그런 점에서 즉흥성의 본질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성을 발휘하려면 반복하는 일의 내용보다 형식에 눈을 떠야 한다. 형식이 내용을 어떻게 미묘하게 변화시키는지 관찰하는 일은 고도의 수신 기술이다. 반복의 교육적 가치는 여기에 있다. 맥락, 형식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반복이 사실상 반복이 아닌 게 된다. 도공이 그릇을 빚기 전에 흙을 치대어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듯이 맥락을 치밀하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창조성은 그 과정에서 솟아난다. 뇌의 시냅스에 새로운 연결지점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같은 그림책이나 비디오를 열 번, 스무 번 볼 수 있는 것은 내용은 알지만 그것이 새로운 맥락 속에서 매번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새로운 형식 속에서 의미가 새롭게 읽히는 것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내용에 집중하느라 형식을 읽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많지만,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같은 이야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다르게 변주되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면 이야기 소재는 같아도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열 번째 하는 이야기를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교사의 마음은 열 번째 듣는 이야기를 처음 듣듯 들을 수 있는 아이의 마음과 같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가 읽힌다. 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는 것이다.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순간이다. 뇌의 시냅스가 활성화될수록, 맥락을 치밀하게 만들수록 수신 성능이 좋아진다. 맥락은 뇌의 시냅스와 닮았다. 시냅스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뇌는 계속 변화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면 의미가 달라진다. 뇌의 작동 방식과 인간의 학습 방식은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뇌 구조가 학습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 진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뇌 또한 맥락 속에서 정보를 찾고 학습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반복은 뇌가 발달하는 데 필요한 양식인 셈이다.
수신 감도 높이기
수신 능력은 곧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상반되는 신호들 속에서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를 구분할 줄 알고,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고, 인과관계를 아는 능력이다. 독해력도 비슷하다. 주어와 술어를 연결 짓고, 숨은 전제를 찾고, 행간에 녹아 있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 단어나 문장이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지를 아는 것이다.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으라”고 말했다.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를 알면 의미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글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맥락 속에서 대충 그 뜻을 짐작하기도 한다. 또 같은 낱말도 다른 맥락에서 쓰이면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관계 속에 존재하듯 언어 또한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언어감각을 기르면 자연스럽게 맥락을 이해하는 힘이 생긴다. 주어와 술어를 제대로 연결할 줄 모르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비슷한 단어의 뉘앙스 차이를 아는 것도 미묘한 신호를 포착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쓸 줄 알며, 한 단어를 다양한 맥락으로 풀어낼 줄도 안다. 원래 언어라는 것이 맥락 속에서 가지를 뻗듯이 파생되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십대 시기에는 특히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언어가 빈약하면 수신도 발신도 힘들다. 요즘 아이들이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는 것은 언어가 빈약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짱나’ ‘대박’ 같은 단순한 단어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커뮤니케이션에 서툰 것은 당연하다. 요즘 인터넷에 범람하는 가짜뉴스는 맥락이 거세되거나 왜곡된 메시지다. 보수매체가 흔히 그러듯이 의도를 갖고 악의적으로 그러기도 하고, 맥락에 둔감하거나 수신 기능이 떨어져 그러기도 한다. 뉴스의 사회적 맥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가짜뉴스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구성원 전반의 수신 능력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 교육의 역할이다. 유머감각도 수신 능력과 관련이 깊다. 유머는 맥락을 의외의 방향으로 비트는 것이다. 악의적으로 비트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해학으로 비튼다.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맥락이 바뀔 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복되면서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터진다. 맥락을 자유자재로 비틀 수 있으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유머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맥락에 둔감하거나 언어의 시냅스가 빈약한 사람이다. 수신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반복 역시 맥락을 치밀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맥락을 파악하는 힘을 길러준다. 같은 그림책이나 비디오를 열 번 스무 번 보는 아이들은 스스로 수신 감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어른도 영화나 책을 그렇게 볼 수 있다. 관점을 달리 하면서 보면 같은 영화가 다르게 읽힌다. 어린이 권장도서, 청소년 필독도서 따위를 다 읽는 것이 독해력을 기르는 좋은 방법은 아니다. 건성건성 백 권을 읽는 것보다 좋은 책 (문장도 훌륭한) 한 권을 열 번 읽는 편이 낫다. 이야기 또한 맥락을 이해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야기는 그 속에 다양한 맥락이 얽혀 있는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 속에 또 다른 맥락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같은 이야기도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아이와 비디오를 보면서 자란 아이는 수신 능력이 다를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과의 소통이 훨씬 쉬워질 수 있다. 이야기는 주고받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행위는 연결되어 있음을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에 닿아 있다. 원래 이야기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주는 것이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이제는 이야기를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귀에 익은 음성으로 듣는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좀더 친근한 곳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삶을 공유하고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간다.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삶의 토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수신은 결국 ‘듣기’다. ‘말 좀 들어라’는 말은 단순히 듣는(hearing) 것을 넘어 귀담아 들으라(listening)는 말이다. ‘약이 잘 듣는다’는 표현은 약효가 몸에 스며들어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영어나 일본어에도 비슷한 용례가 있는 걸 보면, 듣는 행위가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들음은 수동적인 행위이지만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귀를 여는 것은 곧 신뢰 속에서 마음을 여는 것이자 유연해지는 것이다. 유연함은 맥락을 풍성하게 하고 유머가 살아 숨쉬게 한다. 교육현장은 수신 감도를 높이는 다양한 교육과정을 갖출 필요가 있다. 수신 능력은 언어 감각을 통해 기를 수도 있지만 몸을 통해 기를 수도 있다. 신체 감각을 기르는 무예, 무도의 목적 또한 궁극적으로는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이다. 몸의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은 곧 신체의 맥락을 치밀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몸을 유연하게 해서 에너지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이 발신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몸의 길이든 언어의 길이든 수신 능력을 높이는 데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수신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기 마련이다. 물론 두 가지 길을 다 택할 수도 있다. 특히 십대 시기에는 신체와 언어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인 만큼 신체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적절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곧 성장의 맥락을 놓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현병호 ·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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