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비출산 시대, 결혼한 여자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희생자나 조력자가 아닌 삶의 주체로서의 ‘아내’ ‘엄마’ ‘며느리’는 가능할까?
좌충우돌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82년생 김지영’들의 생기발랄한 이야기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해피 ‘엔딩’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여성은 결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성차별을 실감한다. 엄마니까, 아내니까, 며느리니까, 여자니까 감당하고 참아야 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성이 침묵해야 한다.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수많은 육체/감정노동은 가려진다. 그렇게 결혼한 여자는 ‘취집녀’, ‘경단녀’, ‘아줌마’, 도로 위의 폭탄 ‘김여사’,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으로 커피를 마시고 아이 교육에나 목매는 ‘맘충’이 된다.
이런 부당함과 괴로움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한 열 명의 기혼여성들이 모여서 책을 썼다. 고립육아를 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엄마, 시가에 대해 할 말 많은 며느리, 남편보다 더 많이 벌면서 가사와 육아까지 도맡은 직장인, 육아휴직 중인 전업주부,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결국 회사를 차린 창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다.
연령, 소득 수준, 가치관은 제각각이지만,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으로 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본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반년 동안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일상의 투쟁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견고한 가부장제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내보려 애쓴다. 가부장제의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 잘못된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 결혼하고 애 낳은 여성으로서,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나 자신’으로 남기 위해 치열하게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남편과 업무분담각서를 쓰는 방법에서부터 주 양육자 바꾸기, 시어머니와의 연대, 애 낳은 엄마의 ‘엄마기’ 선언, 집안에 나만의 공간 만들기, 결혼방학과 결혼졸업, 주부를 위한 월차 제도와 주 5일 근무제까지. 가부장제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곁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생기 넘치는 이야기들을 책에 담았다. 결혼한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 갈등, 아픔, 그리고 작지만 단단한 기쁨을 만나볼 수 있다.
추천사
권김현영 (여성학자)
지금의 성차별 문제를 가부장제로 설명하는 건 낡은 분석이라는 주장이 있다. 맞다. 당연히 ‘가부장제’라는 말로는 성차별 구조를 분석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해서 낡은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니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억압의 양식과 싸우려면 우리 역시 유연하고 동시에 단단해져야 한다. 각자 선 자리에서 작은 승리와 변화를 축적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들처럼 말이다. 이 책은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여자들이 가부장제의 내부에서 전선을 만들어간 일상을 기록한다. 기혼유자녀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부장제를 ‘드디어’ 낡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장면이라 할 만하다.
은유 (작가)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고 애 낳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도리질쳤다. 아이가 싫기보다 육아가 힘들었고, 살림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 괴로웠다. 그 일상의 굴레를 풀어낼 방법도 몰랐고 동료도 없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미리 읽었더라면 답변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필자들은 막힌 삶에 출구를 낸다. ‘그림자노동 목록’을 작성하고 ‘주부 월차제’를 도입해 자기 내면의 공간을 확보한다. 타인이라는 지옥을 포기하지 않고 동등한 반려관계를 도모한다. 무엇보다 인내, 헌신, 자애 같은 ‘엄마의 인성’ 함양이 아니라 한 존재의 자유, 욕망, 권리라는 ‘엄마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운다는 점에서 앞서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더 나은 엄마가 되는 것과 더 나은 자신이 되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가부장제의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자식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엄마들의 분투는 가부장제로 인한 존재의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본문 가운데
훗날 나는 집안일을 하나도 모르는 그와 역할을 나눌 때, 항목을 세세히 적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 단어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 각서를 다시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청소’만 해도 정리 정돈, 먼지 털기, 불필요한 물건 버리기, 청소기 먼지통 비우기, 걸레 빨기 등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빨래’는 세탁물 모으기, 세탁기 돌리기, 널기, 걷기, 개기, 옷장에 넣기 등의 연결된 일들이 있다. 이런 구체적인 항목 없이 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정했더니, 남편이 맡은 일조차 상당 부분 내가 하는 형국이 되었다. _‘나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가운데
제 몸만 챙기면 되던 인간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갑자기 삶을 통째로 내어주어야 한다. 이 과정을 ‘엄마라면 당연하다’며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은 폭력적이다. 한 인간을 책임지기 위한 새로운 정체성을 완성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라는 질문에 “너만 힘든 것이 아니야.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힘든 건 당연한 거야”라는 답이 간절했다. 문제는 나의 모성이 아니었다. _‘비육아체질’ 가운데
생계 부양의 리스크를 둘이 나누게 되면서 남편은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처자식 위해 억지로 회사에 다니는 거라며 울상을 짓고 세상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짊어진 듯 비통해했지만 그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가 당장 직장을 그만둔다 해도 우리 가족이 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남편이 징징거리면 이때다 싶어서 쿨하게 대꾸한다. “그만둬, 내가 책임질게.” 꼭 한 번 해보고 싶던 말. _‘일인분의 자립을 위하여’ 가운데
“그걸 왜 친정 엄마 시켜요?” “착취 아니에요?” “돈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일제면 한 달 최소 이삼백인데.”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 시간,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가해자가 된 입장을 잘 정리해보세요.” 내가 가해자라고? 엄마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 낱말에 목구멍이 컹 했다. “이제 엄마 오시지 말라고 해요”라는 말에는 내 입에서 쏜살같이 한마디가 튀어 나갔다. “엄마 없으면 안 돼요!” _‘55년생 오한옥’ 가운데
지은이 | 엄마페미니즘탐구모임 부너미
결혼한 여성들이 모여 페미니즘을 탐구하는 모임입니다.
언제까지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순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된 엄마들이 모여 함께 읽고, 쓰고, 듣고, 말합니다.
정현주 | ‘질문’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
아이린 | 외벌이를 하고 싶은 워크홀릭
이성경 | 노는 사람 취급 받아 울컥한 돌봄노동자
류원정 | 집 안에 자기만의 서재를 가진 여자
이예송 | 타고난 육아체질은 없다고 믿는 비육아체질
유보미 | 아들과 함께 페미니즘 하는 중
신나리 | 일인분의 자립을 위해 분투 중
효규 | 엄마, 아내가 아닌 ‘나’가 되고 싶은 워킹맘
가연 | 시어머니가 보면 서운해할 것 같아 필명을 쓴 매너 있는 여자
조슬기 | 39년째 딸, 10개월째 엄마
은주 | 페미니즘으로 남편, 아이와 함께 자유로워지는 중
차례
들어가며 | 가부장제의 최전선에서
1 김지영 씨, 잘 지내나요? _정현주
내 친구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 기어코 당도한 엄마라는 삶 | 여성이라는 굴레 | 김지영이 가지 않은 길 | 모성애를 의심받을지언정 | 알아야겠다, 괴로움의 이유를 | 아직도 바뀌지 않은 무언가 | 수없이 도돌이표를 지나고 나면 | 김지영 씨 잘 지내나요?
2 나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_아이린
헛똑똑이가 만든 업무분담각서 | 설거지 때문에 일상이 불행하다고? | 너의 일상을 내게 알리지 말라 | ‘맛있는 음식이 있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 | 나는 노동을 선택할 수 없다 | 여자와 사는 게 낫다
3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_이성경
나는 ‘마누라’가 싫다 | 육아를 선택하니 맘충이 되었네 |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처지 |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해 국민연금에 가입하다 | 남편이 진화했다
4 여자들의 서재 _류원정
남편을 위한 서재 | 여자의 공간을 처음으로 만나다 | 서재를 만들 용기, 여자가 | 내 서재에서 나를 찾아가다 |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를
5 비육아체질 _이예송
엄마 준비 | 수술해주세요 | 밥 젖젖, 간식 젖젖 |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 우울증이 아니라 ‘엄마기’입니다 | 나는 비육아체질이다
6 아들과 함께 젠더 경계 허물기 _유보미
엄마처럼 키우긴 싫어 | 빠방이는 남자가 하는 건데? | 아들한테 간호사가 되라는 건 너무해 | 엄마도 나한테 뽀뽀하잖아! | 엄마는 고추 없어? | 아들과 함께 젠더 경계 허물기
7 일인분의 자립을 위하여 _신나리
내가 왜 돈 벌어야 해? 집안일도 혼자 다 하는데? | 내가 ‘경력단절여성’이라고요? | 돈 때문에 치사해지기 싫었는데 | 내가 돈을 벌고 싶은 이유, 일인분의 자립을 위해서 | 돈, 그게 뭐라고 어깨를 펴게 하나 |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8 여자라서 꾸는 꿈 말구요, 나라서 꾸는 꿈 _효규
오빠는 검사, 나는 교사 | 아이를 가진 여자는 나가라 | 다시 꿈꿀 수 있을까? | 일은 일류, 육아는 이류, 가사는 삼류 | 양육자도 일할 수 있는 회사 | 주 양육자를 바꿀 수 있을까 | ‘여자’라서가 아니라 ‘나’라서 꾸는 꿈
9 이제야,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궁금하다 _가연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시작 | ‘처갓집’ 간판만 봐도 화가 났다 | ‘며느리’에서 한 ‘사람’으로 | 시가의 전화를 거부할 자유 | 변화의 시작은 작은 균열에서부터 | “나는 여자 편”이라는 시어머니 | 가벼운 관계가 더 깊은 정을 만든다
10 55년생 오한옥 _조슬기
할머니의 삶 |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 이사 와 | 엄마 없으면 안 돼요 | 너도 네 엄마 같은 엄마가 되겠지 | 손가락을 뒤로 돌려 나를 가리키다 | 나의 엄마, 55년생 오한옥 씨
11 아내 페미니스트, 엄마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_은주
나의 이야기는 미안함에서 시작된다 | 모든 게 미안한 나 | 가장이 되지 못해 미안한 남편 | 다시 만난 페미니즘 |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 | 좀 더 나은 우리, 좀 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_결혼한 여자들의 페미니즘
비혼, 비출산 시대, 결혼한 여자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희생자나 조력자가 아닌 삶의 주체로서의 ‘아내’ ‘엄마’ ‘며느리’는 가능할까?
좌충우돌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82년생 김지영’들의 생기발랄한 이야기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해피 ‘엔딩’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여성은 결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성차별을 실감한다. 엄마니까, 아내니까, 며느리니까, 여자니까 감당하고 참아야 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성이 침묵해야 한다.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수많은 육체/감정노동은 가려진다. 그렇게 결혼한 여자는 ‘취집녀’, ‘경단녀’, ‘아줌마’, 도로 위의 폭탄 ‘김여사’,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으로 커피를 마시고 아이 교육에나 목매는 ‘맘충’이 된다.
이런 부당함과 괴로움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한 열 명의 기혼여성들이 모여서 책을 썼다. 고립육아를 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엄마, 시가에 대해 할 말 많은 며느리, 남편보다 더 많이 벌면서 가사와 육아까지 도맡은 직장인, 육아휴직 중인 전업주부,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결국 회사를 차린 창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다.
연령, 소득 수준, 가치관은 제각각이지만,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으로 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본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반년 동안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일상의 투쟁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견고한 가부장제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내보려 애쓴다. 가부장제의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 잘못된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 결혼하고 애 낳은 여성으로서,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나 자신’으로 남기 위해 치열하게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남편과 업무분담각서를 쓰는 방법에서부터 주 양육자 바꾸기, 시어머니와의 연대, 애 낳은 엄마의 ‘엄마기’ 선언, 집안에 나만의 공간 만들기, 결혼방학과 결혼졸업, 주부를 위한 월차 제도와 주 5일 근무제까지. 가부장제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곁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생기 넘치는 이야기들을 책에 담았다. 결혼한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 갈등, 아픔, 그리고 작지만 단단한 기쁨을 만나볼 수 있다.
추천사
권김현영 (여성학자)
지금의 성차별 문제를 가부장제로 설명하는 건 낡은 분석이라는 주장이 있다. 맞다. 당연히 ‘가부장제’라는 말로는 성차별 구조를 분석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해서 낡은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니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억압의 양식과 싸우려면 우리 역시 유연하고 동시에 단단해져야 한다. 각자 선 자리에서 작은 승리와 변화를 축적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들처럼 말이다. 이 책은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여자들이 가부장제의 내부에서 전선을 만들어간 일상을 기록한다. 기혼유자녀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부장제를 ‘드디어’ 낡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장면이라 할 만하다.
은유 (작가)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고 애 낳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도리질쳤다. 아이가 싫기보다 육아가 힘들었고, 살림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 괴로웠다. 그 일상의 굴레를 풀어낼 방법도 몰랐고 동료도 없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미리 읽었더라면 답변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필자들은 막힌 삶에 출구를 낸다. ‘그림자노동 목록’을 작성하고 ‘주부 월차제’를 도입해 자기 내면의 공간을 확보한다. 타인이라는 지옥을 포기하지 않고 동등한 반려관계를 도모한다. 무엇보다 인내, 헌신, 자애 같은 ‘엄마의 인성’ 함양이 아니라 한 존재의 자유, 욕망, 권리라는 ‘엄마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운다는 점에서 앞서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더 나은 엄마가 되는 것과 더 나은 자신이 되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가부장제의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자식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엄마들의 분투는 가부장제로 인한 존재의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본문 가운데
훗날 나는 집안일을 하나도 모르는 그와 역할을 나눌 때, 항목을 세세히 적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 단어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제 와 각서를 다시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청소’만 해도 정리 정돈, 먼지 털기, 불필요한 물건 버리기, 청소기 먼지통 비우기, 걸레 빨기 등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빨래’는 세탁물 모으기, 세탁기 돌리기, 널기, 걷기, 개기, 옷장에 넣기 등의 연결된 일들이 있다. 이런 구체적인 항목 없이 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정했더니, 남편이 맡은 일조차 상당 부분 내가 하는 형국이 되었다. _‘나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가운데
제 몸만 챙기면 되던 인간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갑자기 삶을 통째로 내어주어야 한다. 이 과정을 ‘엄마라면 당연하다’며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은 폭력적이다. 한 인간을 책임지기 위한 새로운 정체성을 완성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라는 질문에 “너만 힘든 것이 아니야.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힘든 건 당연한 거야”라는 답이 간절했다. 문제는 나의 모성이 아니었다. _‘비육아체질’ 가운데
생계 부양의 리스크를 둘이 나누게 되면서 남편은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처자식 위해 억지로 회사에 다니는 거라며 울상을 짓고 세상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짊어진 듯 비통해했지만 그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가 당장 직장을 그만둔다 해도 우리 가족이 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남편이 징징거리면 이때다 싶어서 쿨하게 대꾸한다. “그만둬, 내가 책임질게.” 꼭 한 번 해보고 싶던 말. _‘일인분의 자립을 위하여’ 가운데
“그걸 왜 친정 엄마 시켜요?” “착취 아니에요?” “돈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일제면 한 달 최소 이삼백인데.”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 시간,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가해자가 된 입장을 잘 정리해보세요.” 내가 가해자라고? 엄마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 낱말에 목구멍이 컹 했다. “이제 엄마 오시지 말라고 해요”라는 말에는 내 입에서 쏜살같이 한마디가 튀어 나갔다. “엄마 없으면 안 돼요!” _‘55년생 오한옥’ 가운데
지은이 | 엄마페미니즘탐구모임 부너미
결혼한 여성들이 모여 페미니즘을 탐구하는 모임입니다.
언제까지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순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된 엄마들이 모여 함께 읽고, 쓰고, 듣고, 말합니다.
정현주 | ‘질문’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
아이린 | 외벌이를 하고 싶은 워크홀릭
이성경 | 노는 사람 취급 받아 울컥한 돌봄노동자
류원정 | 집 안에 자기만의 서재를 가진 여자
이예송 | 타고난 육아체질은 없다고 믿는 비육아체질
유보미 | 아들과 함께 페미니즘 하는 중
신나리 | 일인분의 자립을 위해 분투 중
효규 | 엄마, 아내가 아닌 ‘나’가 되고 싶은 워킹맘
가연 | 시어머니가 보면 서운해할 것 같아 필명을 쓴 매너 있는 여자
조슬기 | 39년째 딸, 10개월째 엄마
은주 | 페미니즘으로 남편, 아이와 함께 자유로워지는 중
차례
들어가며 | 가부장제의 최전선에서
1 김지영 씨, 잘 지내나요? _정현주
내 친구들은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 기어코 당도한 엄마라는 삶 | 여성이라는 굴레 | 김지영이 가지 않은 길 | 모성애를 의심받을지언정 | 알아야겠다, 괴로움의 이유를 | 아직도 바뀌지 않은 무언가 | 수없이 도돌이표를 지나고 나면 | 김지영 씨 잘 지내나요?
2 나의 노동에는 이름이 없다 _아이린
헛똑똑이가 만든 업무분담각서 | 설거지 때문에 일상이 불행하다고? | 너의 일상을 내게 알리지 말라 | ‘맛있는 음식이 있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 | 나는 노동을 선택할 수 없다 | 여자와 사는 게 낫다
3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_이성경
나는 ‘마누라’가 싫다 | 육아를 선택하니 맘충이 되었네 |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처지 | 남편은 내 돌봄노동에 빚이 있다 |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해 국민연금에 가입하다 | 남편이 진화했다
4 여자들의 서재 _류원정
남편을 위한 서재 | 여자의 공간을 처음으로 만나다 | 서재를 만들 용기, 여자가 | 내 서재에서 나를 찾아가다 |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를
5 비육아체질 _이예송
엄마 준비 | 수술해주세요 | 밥 젖젖, 간식 젖젖 |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 우울증이 아니라 ‘엄마기’입니다 | 나는 비육아체질이다
6 아들과 함께 젠더 경계 허물기 _유보미
엄마처럼 키우긴 싫어 | 빠방이는 남자가 하는 건데? | 아들한테 간호사가 되라는 건 너무해 | 엄마도 나한테 뽀뽀하잖아! | 엄마는 고추 없어? | 아들과 함께 젠더 경계 허물기
7 일인분의 자립을 위하여 _신나리
내가 왜 돈 벌어야 해? 집안일도 혼자 다 하는데? | 내가 ‘경력단절여성’이라고요? | 돈 때문에 치사해지기 싫었는데 | 내가 돈을 벌고 싶은 이유, 일인분의 자립을 위해서 | 돈, 그게 뭐라고 어깨를 펴게 하나 |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8 여자라서 꾸는 꿈 말구요, 나라서 꾸는 꿈 _효규
오빠는 검사, 나는 교사 | 아이를 가진 여자는 나가라 | 다시 꿈꿀 수 있을까? | 일은 일류, 육아는 이류, 가사는 삼류 | 양육자도 일할 수 있는 회사 | 주 양육자를 바꿀 수 있을까 | ‘여자’라서가 아니라 ‘나’라서 꾸는 꿈
9 이제야,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궁금하다 _가연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시작 | ‘처갓집’ 간판만 봐도 화가 났다 | ‘며느리’에서 한 ‘사람’으로 | 시가의 전화를 거부할 자유 | 변화의 시작은 작은 균열에서부터 | “나는 여자 편”이라는 시어머니 | 가벼운 관계가 더 깊은 정을 만든다
10 55년생 오한옥 _조슬기
할머니의 삶 |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 이사 와 | 엄마 없으면 안 돼요 | 너도 네 엄마 같은 엄마가 되겠지 | 손가락을 뒤로 돌려 나를 가리키다 | 나의 엄마, 55년생 오한옥 씨
11 아내 페미니스트, 엄마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_은주
나의 이야기는 미안함에서 시작된다 | 모든 게 미안한 나 | 가장이 되지 못해 미안한 남편 | 다시 만난 페미니즘 |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 | 좀 더 나은 우리, 좀 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