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화의 작용과 부작용
우리말에서 ‘다름’과 ‘틀림’이 혼용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보편화된 지도 꽤 되었지만 언어 습관은 쉬 바뀌지 않는다. 집단무의식이 언어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라서 좋아요』라는 그림책이 있다. 저마다의 장점으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으니 달라서 좋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다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름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 주류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와 ‘남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은 ‘다름’에 더 예민하다. ‘우리는 다 다르다’는 것을 천명하고, 그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한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다수의 폭력임을 고발한다. ‘우리는 다 다르다’는 부산에 있는 대안학교인 ‘우다다학교’의 본명이기도 하다. 획일화 교육을 부정하고, 이 아이들이 ‘다 다른’ 아이들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획일화, 표준화 교육의 폐해에 찌든 한국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같은 속도로 뭔가를 학습해야 하는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학교 시스템이 모든 아이들에게 맞을 리가 없다. 그 시스템에 맞지 않는 아이들을 나무라는 것은 사실 적반하장 격이다. 다 다른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배움터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代案’교육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은 사실상 표준화 교육의 ‘대안對案’으로서, 표준화의 ‘대안對岸’에 자신의 포지션을 잡았음을 천명한 것이다.
근대화는 곧 표준화이기도 하다. 표준화는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세상을 두루 통하게 만든다. 소통의 범위가 확대된다. 표준말 역시 언어라는 소통 수단을 공유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족집단 간의 차이를 좁히는 표준화가 진행된 결과 이제는 국가 단위, 전 지구적 단위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표준화 교육은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토대를 넓히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사회의 성숙도에 따라 부작용의 정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준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부작용이 두드러진 셈이다. 대안교육 진영은 표준화 교육의 부작용을 비판하느라 그 필연성과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한 면이 있다.
표준화는 다름보다 ‘같음’에 주목한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고유성보다 인간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른 학습 단계의 기준을 만들어서는 같은 연령의 아이들을 같은 학년, 같은 반에 몰아넣고 같은 교과서를 안겨주고는 같은 속도로 배우라고 한다. 표준화 교육은 이처럼 자칫 획일화로 이어지지만, 그 부작용 못지않게 긍정적인 효과도 크다.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사는 다양한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 교육함으로써 동질감과 연대감을 갖게 만든 것은 근대학교로 구현된 보편교육의 가장 큰 교육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표준화 교육이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줄 세움으로써 과도한 경쟁을 낳고 협동과 연대의식을 해친 측면도 있지만, 근대학교는 다양한 친구들을 쉽게 사귈 수 있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사회화 기구의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구성원들의 연대의식을 기르는 것이다. 소속감과 동질감은 아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가는 데 큰 동력이 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보다 친구를 더 찾는 것은 사회화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학교는 그 과정을 매우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사회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의무교육 제도는 학교가 그 기능을 하게끔 지원한다. 인적자원을 양성하는 국가주도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제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아동의 노동착취를 막고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소외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의 본래 목적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제도를 입안한 이들이 설령 이를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부작용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 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키우고 부정적인 효과를 줄이는 것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비결이다. 부작용을 무조건 비판만 하기보다 적절히 대응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점점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 도덕경에서 예찬하는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이웃마을과도 왕래하지 않는’ 전근대 사회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 다른 우리’의 딜레마
하지만 표준은 자칫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 십상이다. 표준어가 공용어로 자리 잡으면 방언은 잘려져 나간다. 표준 성적에 미달하는 학생은 반 평균을 ‘갉아먹는’ 쥐 신세가 되어 사람대접 받기도 힘들다. 표준 신장에 미달하는 아이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표준 체중을 넘는 아이는 다이어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표준은 은연중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재게 된다.
‘우리’ 사회가 ‘우리’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과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는 것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표준강박증에 걸린 사회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표준화의 압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일까. 워낙에 동질성이 강화되기 쉬운 지정학적 조건 탓도 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주거의 표준화를 이룬 것도 그 반증의 하나일 수 있다. 대도시에 사는 한국인들은 ‘십중팔구’ 아파트에 산다.
우리는 표준에 맞추어 살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표준에 넌더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도시의 표준화된 주택에 질린 이들은 전원주택을 찾기도 하고, 아파트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 중에는 멀쩡한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며 자신만의 인테리어를 추구하기도 한다. 도시의 표준화된 삶에 지친 이들은 귀농 귀촌을 시도한다.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공동체를 지향한다. 시골에서 생태공동체를 만들거나 도시에서 뜻 맞는 이들끼리 마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곧 딜레마에 봉착한다. 나와 다른 잣대를 가진 타인과 공동체를 이룬다는 게 쉽지 않은 게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려고 애쓰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지만 그 비슷함 속에서 우리는 또 서로 다름을 너무 쉽게 찾아내고야 만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은 진보적인 이들일수록 다름에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는 이해관계가 같으면 쉽게 결속하지만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모이는 진보는 서로가 공유하는 그 최소한의 보편성에 기반하지 않으면 쉽게 분열된다. 보편성은 서로 다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공유하는 보편성보다 서로 다른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면 갈등이 불거지기 마련이다. 보편성의 잣대가 아닌 저마다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분열될 수밖에 없다.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 안에도 수많은 색깔의 편차가 존재한다. 작은 차이에도 서로를 못 견뎌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려고 애쓰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딜레마다. ‘다 다르고 싶어 하는 우리’라는 딜레마. ‘다 다르다’는 것을 천명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섣불리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들어갔을 때, 2인3각으로 달릴 때처럼 서로의 미세한 호흡 차이만으로도 발이 걸려 넘어진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많은 공동체들이 판판이 깨어지는 까닭도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딜레마’는 곧 ‘우리(울)’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다 다른 이들이 모여 어느덧 ‘우리’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알게 모르게 표준화에 길든 우리는 다른 것을 너무 쉽게 한데 묶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공동체성을 기른다면서 우리는 곧잘 서로의 다리를 묶어 2인3각 달리기를 하지만, 잠시 재미삼아 달리는 것은 몰라도 일상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팀이 된다고 해서 축구를 2인3각으로 하진 않는다.
육아공동체든 교육공동체든 팀플레이를 잘 하기 위한 것이지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보편성에 기반한다는 것은 서로 통하는 지점을 아는 것이다. 패스를 잘 주고받는 것이다. 서로의 장단점과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공유하는 지점을 보고 같은 방향을 향할 때 팀플레이가 살아난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 다른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일반화의 오류’는 있어도 ‘보편화의 오류’라는 말이 없는 까닭은 보편성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하는 보편성에 기반하지 않는 ‘우리’는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고 만다. 다른 것을 함부로 묶으면 끈이 끊어진다. 그렇다면 같은 것끼리 묶으면 될까? 그런데 과연 ‘같은 것’이 있을까? 타자는 나와 다른 호흡으로 걷는 사람, 다른 잣대로 세상을 재는 사람이다. 그런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면서 그와 함께 ‘우리’가 되는 일은 서로가 공유하는 보편성을 기반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 다리 길이도 호흡도 다른 너와 내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보편성이지 서로의 다리를 묶는 것이 보편성은 아니다.
보편성에 주목하기
같음과 다름을 전체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다 같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지만 다 다른 사람이듯이, 우리를 묶는 보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한 속성일 뿐이다. 하지만 그 보편성에 기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될 수 있다. 다른 것들 사이에서 같은 점(보편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팀플레이가 가능해진다.
표준화 역시 보편성에 기반한다. ‘윈도우’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의 표준을 만들 때는 컴퓨터를 쓰는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을 면밀히 연구해서 최적의 시스템을 설계한다. 자판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토대, 곧 열 손가락을 갖고 있고, 어떤 손가락을 더 자유롭게 쓰고, 어떤 자음과 모음을 더 많이 쓰는지를 면밀히 연구하여 가장 효율적인 자판 배열을 만들어 내면, 그것이 표준이 된다.
표준을 만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할 때 먼저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표준화의 가치를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가치에 눈을 뜨는 것도 필요하지만 표준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보편성에 기반한 표준화는 자칫 섣부른 일반화나 획일화로 이어지지만 그 부작용을 경계하면서 보편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보편성을 발견하는 것은 다름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 다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공유하고 있는 토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다.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아는 것을 우리는 흔히 깨달음이라 일컫는다. 만물이 하나라는 말은 모두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꿰는 하나가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고유성에 기반한 교육을 지향해야 하지만 보편교육의 가치를 놓쳐서도 안 된다. 고유성과 보편성은 존재를 구성하는 양면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추구하지만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으면 인간사회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 다른 우리’처럼 두 마리 토끼를 좇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꾀하는 것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것들 사이에서 같음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인간은 다 다르기도 하지만 또한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서는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유전자 차원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인종적 차이보다 백인들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이 게놈 연구의 결과다. 알고 보면 인간과 쥐의 유전자 차이도 크지 않다. 심지어 초파리와 인간 사이에도 생각보다 유전자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포유류의 차원, 생물 차원에서는 다른 점보다 공통된 점이 더 많은 것이다.
생물종이든 인종이든 성이든 언뜻 보아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도 알고 보면 같은 점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인간이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너와 내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백인이 유색인을 차별하듯이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지 않는 것이 공생의 기본이다. 잣대를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겸손의 문제이기도 하다.
잣대는 미세한 눈금으로 차이를 인식하게 만든다. 식용버섯과 독버섯을 구분하는 것처럼 미세한 차이를 분간할 줄 아는 것이 생존상 필요한 능력이긴 하지만 생존을 넘어선 연대와 공동체성을 추구한다면 다름보다 같음에 더 주목할 일이다. 차이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보편성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2인3각으로 달리는 훈련을 하기보다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거리가 벌어졌을 때 앞선 이가 기다려주는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공동체는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자각함으로써 한 사람이 되고, 보편성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이 된다.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난 길을 아는 존재다.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넘어서 세상과 연결되고 신과 연결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교육은 그것을 도와주는 일이다.
* 이 글은 민들레 122호에 실렸습니다.
현병호 · 발행인
mindle1603@gmail.com
표준화의 작용과 부작용
우리말에서 ‘다름’과 ‘틀림’이 혼용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보편화된 지도 꽤 되었지만 언어 습관은 쉬 바뀌지 않는다. 집단무의식이 언어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라서 좋아요』라는 그림책이 있다. 저마다의 장점으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으니 달라서 좋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다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다름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 주류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와 ‘남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은 ‘다름’에 더 예민하다. ‘우리는 다 다르다’는 것을 천명하고, 그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한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다수의 폭력임을 고발한다. ‘우리는 다 다르다’는 부산에 있는 대안학교인 ‘우다다학교’의 본명이기도 하다. 획일화 교육을 부정하고, 이 아이들이 ‘다 다른’ 아이들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획일화, 표준화 교육의 폐해에 찌든 한국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같은 속도로 뭔가를 학습해야 하는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학교 시스템이 모든 아이들에게 맞을 리가 없다. 그 시스템에 맞지 않는 아이들을 나무라는 것은 사실 적반하장 격이다. 다 다른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배움터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안代案’교육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은 사실상 표준화 교육의 ‘대안對案’으로서, 표준화의 ‘대안對岸’에 자신의 포지션을 잡았음을 천명한 것이다.
근대화는 곧 표준화이기도 하다. 표준화는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세상을 두루 통하게 만든다. 소통의 범위가 확대된다. 표준말 역시 언어라는 소통 수단을 공유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족집단 간의 차이를 좁히는 표준화가 진행된 결과 이제는 국가 단위, 전 지구적 단위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표준화 교육은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토대를 넓히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사회의 성숙도에 따라 부작용의 정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급격하고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준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부작용이 두드러진 셈이다. 대안교육 진영은 표준화 교육의 부작용을 비판하느라 그 필연성과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한 면이 있다.
표준화는 다름보다 ‘같음’에 주목한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고유성보다 인간의 보편성에 주목한다.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른 학습 단계의 기준을 만들어서는 같은 연령의 아이들을 같은 학년, 같은 반에 몰아넣고 같은 교과서를 안겨주고는 같은 속도로 배우라고 한다. 표준화 교육은 이처럼 자칫 획일화로 이어지지만, 그 부작용 못지않게 긍정적인 효과도 크다.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사는 다양한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 교육함으로써 동질감과 연대감을 갖게 만든 것은 근대학교로 구현된 보편교육의 가장 큰 교육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표준화 교육이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줄 세움으로써 과도한 경쟁을 낳고 협동과 연대의식을 해친 측면도 있지만, 근대학교는 다양한 친구들을 쉽게 사귈 수 있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사회화 기구의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구성원들의 연대의식을 기르는 것이다. 소속감과 동질감은 아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가는 데 큰 동력이 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보다 친구를 더 찾는 것은 사회화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학교는 그 과정을 매우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사회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의무교육 제도는 학교가 그 기능을 하게끔 지원한다. 인적자원을 양성하는 국가주도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제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아동의 노동착취를 막고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소외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의 본래 목적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제도를 입안한 이들이 설령 이를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부작용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 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키우고 부정적인 효과를 줄이는 것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비결이다. 부작용을 무조건 비판만 하기보다 적절히 대응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점점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 도덕경에서 예찬하는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이웃마을과도 왕래하지 않는’ 전근대 사회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 다른 우리’의 딜레마
하지만 표준은 자칫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 십상이다. 표준어가 공용어로 자리 잡으면 방언은 잘려져 나간다. 표준 성적에 미달하는 학생은 반 평균을 ‘갉아먹는’ 쥐 신세가 되어 사람대접 받기도 힘들다. 표준 신장에 미달하는 아이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표준 체중을 넘는 아이는 다이어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표준은 은연중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재게 된다.
‘우리’ 사회가 ‘우리’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과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는 것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표준강박증에 걸린 사회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표준화의 압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일까. 워낙에 동질성이 강화되기 쉬운 지정학적 조건 탓도 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주거의 표준화를 이룬 것도 그 반증의 하나일 수 있다. 대도시에 사는 한국인들은 ‘십중팔구’ 아파트에 산다.
우리는 표준에 맞추어 살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표준에 넌더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도시의 표준화된 주택에 질린 이들은 전원주택을 찾기도 하고, 아파트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 중에는 멀쩡한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며 자신만의 인테리어를 추구하기도 한다. 도시의 표준화된 삶에 지친 이들은 귀농 귀촌을 시도한다.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공동체를 지향한다. 시골에서 생태공동체를 만들거나 도시에서 뜻 맞는 이들끼리 마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곧 딜레마에 봉착한다. 나와 다른 잣대를 가진 타인과 공동체를 이룬다는 게 쉽지 않은 게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려고 애쓰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지만 그 비슷함 속에서 우리는 또 서로 다름을 너무 쉽게 찾아내고야 만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은 진보적인 이들일수록 다름에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는 이해관계가 같으면 쉽게 결속하지만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모이는 진보는 서로가 공유하는 그 최소한의 보편성에 기반하지 않으면 쉽게 분열된다. 보편성은 서로 다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공유하는 보편성보다 서로 다른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면 갈등이 불거지기 마련이다. 보편성의 잣대가 아닌 저마다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분열될 수밖에 없다.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 안에도 수많은 색깔의 편차가 존재한다. 작은 차이에도 서로를 못 견뎌하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려고 애쓰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딜레마다. ‘다 다르고 싶어 하는 우리’라는 딜레마. ‘다 다르다’는 것을 천명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섣불리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들어갔을 때, 2인3각으로 달릴 때처럼 서로의 미세한 호흡 차이만으로도 발이 걸려 넘어진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많은 공동체들이 판판이 깨어지는 까닭도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딜레마’는 곧 ‘우리(울)’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다 다른 이들이 모여 어느덧 ‘우리’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알게 모르게 표준화에 길든 우리는 다른 것을 너무 쉽게 한데 묶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공동체성을 기른다면서 우리는 곧잘 서로의 다리를 묶어 2인3각 달리기를 하지만, 잠시 재미삼아 달리는 것은 몰라도 일상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팀이 된다고 해서 축구를 2인3각으로 하진 않는다.
육아공동체든 교육공동체든 팀플레이를 잘 하기 위한 것이지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보편성에 기반한다는 것은 서로 통하는 지점을 아는 것이다. 패스를 잘 주고받는 것이다. 서로의 장단점과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가 공유하는 지점을 보고 같은 방향을 향할 때 팀플레이가 살아난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 다른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일반화의 오류’는 있어도 ‘보편화의 오류’라는 말이 없는 까닭은 보편성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하는 보편성에 기반하지 않는 ‘우리’는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고 만다. 다른 것을 함부로 묶으면 끈이 끊어진다. 그렇다면 같은 것끼리 묶으면 될까? 그런데 과연 ‘같은 것’이 있을까? 타자는 나와 다른 호흡으로 걷는 사람, 다른 잣대로 세상을 재는 사람이다. 그런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면서 그와 함께 ‘우리’가 되는 일은 서로가 공유하는 보편성을 기반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 다리 길이도 호흡도 다른 너와 내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보편성이지 서로의 다리를 묶는 것이 보편성은 아니다.
보편성에 주목하기
같음과 다름을 전체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다 같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지만 다 다른 사람이듯이, 우리를 묶는 보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한 속성일 뿐이다. 하지만 그 보편성에 기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될 수 있다. 다른 것들 사이에서 같은 점(보편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팀플레이가 가능해진다.
표준화 역시 보편성에 기반한다. ‘윈도우’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의 표준을 만들 때는 컴퓨터를 쓰는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을 면밀히 연구해서 최적의 시스템을 설계한다. 자판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토대, 곧 열 손가락을 갖고 있고, 어떤 손가락을 더 자유롭게 쓰고, 어떤 자음과 모음을 더 많이 쓰는지를 면밀히 연구하여 가장 효율적인 자판 배열을 만들어 내면, 그것이 표준이 된다.
표준을 만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할 때 먼저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표준화의 가치를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가치에 눈을 뜨는 것도 필요하지만 표준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것은 어리석다. 보편성에 기반한 표준화는 자칫 섣부른 일반화나 획일화로 이어지지만 그 부작용을 경계하면서 보편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보편성을 발견하는 것은 다름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 다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공유하고 있는 토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다.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아는 것을 우리는 흔히 깨달음이라 일컫는다. 만물이 하나라는 말은 모두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꿰는 하나가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고유성에 기반한 교육을 지향해야 하지만 보편교육의 가치를 놓쳐서도 안 된다. 고유성과 보편성은 존재를 구성하는 양면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추구하지만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으면 인간사회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 다른 우리’처럼 두 마리 토끼를 좇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꾀하는 것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것들 사이에서 같음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인간은 다 다르기도 하지만 또한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서는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유전자 차원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인종적 차이보다 백인들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이 게놈 연구의 결과다. 알고 보면 인간과 쥐의 유전자 차이도 크지 않다. 심지어 초파리와 인간 사이에도 생각보다 유전자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포유류의 차원, 생물 차원에서는 다른 점보다 공통된 점이 더 많은 것이다.
생물종이든 인종이든 성이든 언뜻 보아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도 알고 보면 같은 점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인간이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너와 내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백인이 유색인을 차별하듯이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지 않는 것이 공생의 기본이다. 잣대를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겸손의 문제이기도 하다.
잣대는 미세한 눈금으로 차이를 인식하게 만든다. 식용버섯과 독버섯을 구분하는 것처럼 미세한 차이를 분간할 줄 아는 것이 생존상 필요한 능력이긴 하지만 생존을 넘어선 연대와 공동체성을 추구한다면 다름보다 같음에 더 주목할 일이다. 차이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보편성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2인3각으로 달리는 훈련을 하기보다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거리가 벌어졌을 때 앞선 이가 기다려주는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공동체는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자각함으로써 한 사람이 되고, 보편성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이 된다.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난 길을 아는 존재다.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넘어서 세상과 연결되고 신과 연결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교육은 그것을 도와주는 일이다.
* 이 글은 민들레 122호에 실렸습니다.
현병호 · 발행인
mindle160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