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엮은이의 말 사이와 너머를 읽기
기획 _ 세상을 이해하는 힘, 문해력
학습격차와 문해력 교육 │ 한희정
‘글 못 읽는 아이들’이라는 괴담 │ 조현정
나를 넘어서는 공생의 리터러시 │ 현병호
민주시민사회의 기반이 되는 문해력 교육 │ 김영득
단상 똑똑한 이는 많은데 왜 혐오가 늘어날까 │ 엄기호
논단 자기주도학습이 미래교육의 방향일까 │ 남미자
만남 여교사들의 체육교육공동체, ‘원더티처’ │ 홍유진
배움터 이야기 마을 속의 날갯짓, 날다학교 │ 김기수
지상 강좌 남자 청소년 성교육 어떻게 할까 │ 이유정
교육 동향 학교 안의 기후위기교육 다시 보기 │ 윤상혁
살며 배우며 나답게, 성인 ADHD로 살아가기 │ 천승원
또 하나의 창 엄마들의 글쓰기 │ 최은경
부모 일기 “내 동생은 귀요미 장애인!” │ 최세민
열린 마당 그림책으로 만난 어린이 세계(3)_안개 할머니 │ 강영아
함께 읽는 책 모든 아픔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 이은미《아픔이 길이 되려면》
함께 보는 영화 이름을 찾은 소녀들 │ 최정현 《미싱타는 여자들》
독자 인터뷰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 │ 김영식
독자 모임 │ 새로 나온 책 │ 소자보
◉ 본문 미리 보기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디어를 너무 많이 봐서, 책을 안 읽어서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요. 모든 학습의 토대라며 문해력을 강조하는 책과 학원 정보도 쏟아집니다. 요즘 아이들이 정말 그런지,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문해력이란 무엇인지 되물어보았으면 합니다. 문해력을 둘러싼 논란에서 과연 어른들은 자유로운가 하는 질문도 함께 던지면서요. _ 엮은이의 말
아이들의 삶의 경험과 배움에 다가가려면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아이들이 진짜 문해력을 가꾸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적절히 돕고 있는가. 유튜브의 언어와 교실의 언어, 가정의 언어를 보듬으며 연결해주고 있는가? 혐오 표현이라 단정 짓기 전에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삶의 맥락을 읽어보려 하고 있는가? 그래서 발달 중인 아이들의 개념체계가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정초되도록 애쓰고 있는가? _ 한희정, <학습격차와 문해력 교육>
섬세한 접근 없이 청소년의 문해력 수준이 낮다는 주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청소년의 미디어 사용에 관한 무조건적 제재와 교육혁신에 대한 반작용으로 쉽게 뻗어간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진단으로 엉뚱한 처방을 내리게 된다. 그 배경에는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찾고, 획일화된 평가 중심 교육에서 탈피하고 있는 세대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이 있다. _ 조현정, < ‘글 못 읽는 아이들’이라는 괴담>
나만 읽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읽어내고 있다는 것, 이 평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리터러시는 나만 개별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도 개별화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읽어내는 자로서 서로 만났을 때 비로소 리터러시는 서로를 해방하는 힘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읽지 못하는 자, 읽지 않으려는 자로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말해 읽기를 통해 나만 개별화되고 있다는 오만과 교만,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_ 엄기호, <똑똑한 이는 많은데, 왜 혐오가 늘어날까>
학습자가 낯선 것과의 만남에서 스스로 의미 구성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개입이 없으면 그것은 자칫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상호주관적 앎이 될 수 있도록 상호주관적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수업에서 그 과정은 대개 교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의미한 학습을 위해서는 교사의 세밀한 기획 같은 주도적 행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미래교육 담론에서 강조하고 있는 학습자 주도성은 개별 학습자의 자유와 선택만을 강조한다. 현재 미래교육 담론에서 논의되는 학습자 주도성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_남미자, <자기주도학습이 미래교육의 방향일까>
시민성은 기본적으로 ‘존엄’에 대한 사유다. 따라서 시민성의 확장은 존엄의 확장이라는 의미다. 근대 교육 체제는 인간이라는 종 그중에서도 ‘백인 남성’을 불평등한 세계의 최상위층에 위치시키고 비非백인, 비非남성, 어린이, 장애인, 그리고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인간을 피부색, 성별, 나이, 정상성, 지능 등에 따라 계급화시키는 근대 교육 체제의 기본전제에 대한 성찰과 전환의 사유 없이는 어떤 기후위기교육도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다. _ 윤상혁, <학교 안의 기후위기 교육 다시 보기>
[ 격월간 민들레 141호]
◉ 목차
엮은이의 말 사이와 너머를 읽기
기획 _ 세상을 이해하는 힘, 문해력
학습격차와 문해력 교육 │ 한희정
‘글 못 읽는 아이들’이라는 괴담 │ 조현정
나를 넘어서는 공생의 리터러시 │ 현병호
민주시민사회의 기반이 되는 문해력 교육 │ 김영득
단상 똑똑한 이는 많은데 왜 혐오가 늘어날까 │ 엄기호
논단 자기주도학습이 미래교육의 방향일까 │ 남미자
만남 여교사들의 체육교육공동체, ‘원더티처’ │ 홍유진
배움터 이야기 마을 속의 날갯짓, 날다학교 │ 김기수
지상 강좌 남자 청소년 성교육 어떻게 할까 │ 이유정
교육 동향 학교 안의 기후위기교육 다시 보기 │ 윤상혁
살며 배우며 나답게, 성인 ADHD로 살아가기 │ 천승원
또 하나의 창 엄마들의 글쓰기 │ 최은경
부모 일기 “내 동생은 귀요미 장애인!” │ 최세민
열린 마당 그림책으로 만난 어린이 세계(3)_안개 할머니 │ 강영아
함께 읽는 책 모든 아픔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 이은미《아픔이 길이 되려면》
함께 보는 영화 이름을 찾은 소녀들 │ 최정현 《미싱타는 여자들》
독자 인터뷰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 │ 김영식
독자 모임 │ 새로 나온 책 │ 소자보
◉ 본문 미리 보기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디어를 너무 많이 봐서, 책을 안 읽어서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요. 모든 학습의 토대라며 문해력을 강조하는 책과 학원 정보도 쏟아집니다. 요즘 아이들이 정말 그런지,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문해력이란 무엇인지 되물어보았으면 합니다. 문해력을 둘러싼 논란에서 과연 어른들은 자유로운가 하는 질문도 함께 던지면서요. _ 엮은이의 말
아이들의 삶의 경험과 배움에 다가가려면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아이들이 진짜 문해력을 가꾸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적절히 돕고 있는가. 유튜브의 언어와 교실의 언어, 가정의 언어를 보듬으며 연결해주고 있는가? 혐오 표현이라 단정 짓기 전에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삶의 맥락을 읽어보려 하고 있는가? 그래서 발달 중인 아이들의 개념체계가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정초되도록 애쓰고 있는가? _ 한희정, <학습격차와 문해력 교육>
섬세한 접근 없이 청소년의 문해력 수준이 낮다는 주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청소년의 미디어 사용에 관한 무조건적 제재와 교육혁신에 대한 반작용으로 쉽게 뻗어간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진단으로 엉뚱한 처방을 내리게 된다. 그 배경에는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찾고, 획일화된 평가 중심 교육에서 탈피하고 있는 세대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이 있다. _ 조현정, < ‘글 못 읽는 아이들’이라는 괴담>
나만 읽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읽어내고 있다는 것, 이 평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리터러시는 나만 개별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도 개별화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읽어내는 자로서 서로 만났을 때 비로소 리터러시는 서로를 해방하는 힘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읽지 못하는 자, 읽지 않으려는 자로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말해 읽기를 통해 나만 개별화되고 있다는 오만과 교만,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_ 엄기호, <똑똑한 이는 많은데, 왜 혐오가 늘어날까>
학습자가 낯선 것과의 만남에서 스스로 의미 구성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개입이 없으면 그것은 자칫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상호주관적 앎이 될 수 있도록 상호주관적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수업에서 그 과정은 대개 교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유의미한 학습을 위해서는 교사의 세밀한 기획 같은 주도적 행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미래교육 담론에서 강조하고 있는 학습자 주도성은 개별 학습자의 자유와 선택만을 강조한다. 현재 미래교육 담론에서 논의되는 학습자 주도성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_남미자, <자기주도학습이 미래교육의 방향일까>
시민성은 기본적으로 ‘존엄’에 대한 사유다. 따라서 시민성의 확장은 존엄의 확장이라는 의미다. 근대 교육 체제는 인간이라는 종 그중에서도 ‘백인 남성’을 불평등한 세계의 최상위층에 위치시키고 비非백인, 비非남성, 어린이, 장애인, 그리고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인간을 피부색, 성별, 나이, 정상성, 지능 등에 따라 계급화시키는 근대 교육 체제의 기본전제에 대한 성찰과 전환의 사유 없이는 어떤 기후위기교육도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다. _ 윤상혁, <학교 안의 기후위기 교육 다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