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엮은이의 말
기획특집 _ 이야기의 힘
엄마의 천일야화 | 윤은숙
이야기 밥상과 삼남매 극장 | 정가람
이야기란 무엇인가 | 신동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는 아이들 | 김희동
단상_서사적 인간, 이야기하는 존재 | 장희숙
또 하나의 창_ 어린 미적 인간을 위하여 | 고영직
잊을 수 없는, 세월_ 세월호의 약속, 광화문을 지키는 사람들 | 편집실
통념 깨기_ 하라는 공부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 김경림
톺아보기_ 자유학기제, 교육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 정병오
살며 배우며_ 대학 밖에서 길을 찾다 l 양지유
대안교육 이야기_ 대안 그 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언어 찾기 | 한낱
교육 비평_ 돈 받은 만큼만 일할 거예요 | 양영희
부모 일기_ 즐거움이 모락모락, 동네 육아 이야기 | 이금비
지상 강좌_ 압도적인 어머니의 탄생 | 우치다 타츠루
열린 마당_ 게임의 긴 터널을 지나 | 엄호영
교사 일기_ ‘거기’ 다니는 아이들 | 성태숙
서평_ 체르노빌, 지나간 일은 미래를 닮았다 | 현호섭
풍향계_ 청소년에게 삶의 전환을 위한 배움을! | 편집실
애국심을 강요하는 사회 | 편집실
새로 나온 책 182 소자보 184 민들레 읽기 모임 186
엮은이의 말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곧잘 구성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하셨습니다. 천하의 불효자가 뒤늦게 철이 들어 개로 다시 태어난 어머니를 업고 다녔다는 얘기는 들을 때마다 코끝이 찡했고, 방귀 뀌다 소박맞은 며느리 얘기를 들을 때면 손등에다 입을 대고 푸푸~ 방귀소리를 내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는 “아이구, 얘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데이” 하며 손을 저으셨지요.
좀 자라서 그 말씀을 떠올렸을 때는 귀찮은 손녀를 떼어내느라 그러셨나 보나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좀 다르게 읽힙니다. ‘얘기만 좇아다니느라 일은 언제 하고 돈은 언제 버느냐’ 그런 뜻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삶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 세상일에 호기심이 많고 사람들과 둘러앉기를 좋아해서, 소박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삶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아이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에서 시작한 기획이지만, 생각의 뿌리를 뻗어가다 보니 결국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존재구나 하는 걸 깨닫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로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내력부터 젊은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해 나를 낳은 이야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내가 다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이야기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삶의 주체가 되고, 생이 끝나면 그 일생의 서사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한 편의 이야기로 남습니다. 저마다 슬프고 재미있어서, 얼마나 가치가 있고 위대한가는 서로 견주어보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마지막 호는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를 넘어서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우리 존재를 확인하고, 되찾아야 할 이야기, 간직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서사를 잃어가는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에 주목하는(혹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이란 책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
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에”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엄마 혹은 아빠이거나 친구 혹은 친척이며 국민이자 시민인 우리는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그 맥락 속에서 내게 이로운 것과 남에게 이로운 것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국민을 ‘복면 쓴 IS’에 비유하며 협박을 해도 아랑곳없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비인간적인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을 위해 기도하고, 프랑스에서 테러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거꾸로 가려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저항하는 이 노력들이 결국 나와 우리의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써내려가는 ‘눈물겨운 이야기’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올 한 해 『민들레』도 배움의 기쁨, 날카로운 성찰과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책이 되었던가, 가만히 돌아보며 조금 이른 세밑 인사를 드립니다.
2015년 12월 장희숙
목차
엮은이의 말
기획특집 _ 이야기의 힘
엄마의 천일야화 | 윤은숙
이야기 밥상과 삼남매 극장 | 정가람
이야기란 무엇인가 | 신동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는 아이들 | 김희동
단상_서사적 인간, 이야기하는 존재 | 장희숙
또 하나의 창_ 어린 미적 인간을 위하여 | 고영직
잊을 수 없는, 세월_ 세월호의 약속, 광화문을 지키는 사람들 | 편집실
통념 깨기_ 하라는 공부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 김경림
톺아보기_ 자유학기제, 교육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 정병오
살며 배우며_ 대학 밖에서 길을 찾다 l 양지유
대안교육 이야기_ 대안 그 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언어 찾기 | 한낱
교육 비평_ 돈 받은 만큼만 일할 거예요 | 양영희
부모 일기_ 즐거움이 모락모락, 동네 육아 이야기 | 이금비
지상 강좌_ 압도적인 어머니의 탄생 | 우치다 타츠루
열린 마당_ 게임의 긴 터널을 지나 | 엄호영
교사 일기_ ‘거기’ 다니는 아이들 | 성태숙
서평_ 체르노빌, 지나간 일은 미래를 닮았다 | 현호섭
풍향계_ 청소년에게 삶의 전환을 위한 배움을! | 편집실
애국심을 강요하는 사회 | 편집실
새로 나온 책 182 소자보 184 민들레 읽기 모임 186
엮은이의 말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곧잘 구성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하셨습니다. 천하의 불효자가 뒤늦게 철이 들어 개로 다시 태어난 어머니를 업고 다녔다는 얘기는 들을 때마다 코끝이 찡했고, 방귀 뀌다 소박맞은 며느리 얘기를 들을 때면 손등에다 입을 대고 푸푸~ 방귀소리를 내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는 “아이구, 얘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데이” 하며 손을 저으셨지요.
좀 자라서 그 말씀을 떠올렸을 때는 귀찮은 손녀를 떼어내느라 그러셨나 보나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좀 다르게 읽힙니다. ‘얘기만 좇아다니느라 일은 언제 하고 돈은 언제 버느냐’ 그런 뜻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삶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건 세상일에 호기심이 많고 사람들과 둘러앉기를 좋아해서, 소박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삶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아이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에서 시작한 기획이지만, 생각의 뿌리를 뻗어가다 보니 결국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존재구나 하는 걸 깨닫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로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내력부터 젊은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해 나를 낳은 이야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내가 다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이야기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 삶의 주체가 되고, 생이 끝나면 그 일생의 서사는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한 편의 이야기로 남습니다. 저마다 슬프고 재미있어서, 얼마나 가치가 있고 위대한가는 서로 견주어보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마지막 호는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를 넘어서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우리 존재를 확인하고, 되찾아야 할 이야기, 간직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서사를 잃어가는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에 주목하는(혹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이란 책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
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에”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엄마 혹은 아빠이거나 친구 혹은 친척이며 국민이자 시민인 우리는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그 맥락 속에서 내게 이로운 것과 남에게 이로운 것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국민을 ‘복면 쓴 IS’에 비유하며 협박을 해도 아랑곳없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비인간적인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을 위해 기도하고, 프랑스에서 테러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거꾸로 가려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저항하는 이 노력들이 결국 나와 우리의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써내려가는 ‘눈물겨운 이야기’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올 한 해 『민들레』도 배움의 기쁨, 날카로운 성찰과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책이 되었던가, 가만히 돌아보며 조금 이른 세밑 인사를 드립니다.
2015년 12월 장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