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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 저자 패트릭 J. 드닌
  • 옮긴이 이재만
  • 발간일 2025년 6월 10일
  • ISBN  979-11-91621-20-4(03300)
  • 책값 19,000원



개인의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주의 교육은 왜 실패하는가?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성 확대’를 목표로 개인을 해방해왔지만 개인주의가 심화될수록 개인의 권리를 보장할 국가의 권력 또한 강화된다. 자유주의 안에서 개인주의와 국가주의가 나란히 전진하는 것이다. 패트릭 드닌 교수는 이러한 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논증하고 정치, 경제,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그 모순이 어떻게 발현되고 심화되는지 다각도로 조명한다.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완성해가고 내적 논리를 분명히 할수록, 즉 성공할수록 실패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자유주의 원리에 기초한 교육이 왜 실패하는지를 말해준다. 


차례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

자유교육을 자유주의로부터 구출해야 하는 이유 


서론    자유주의의 종말      

1장     지속 불가능한 자유주의      

2장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통합하기      

3장     반문화로서의 자유주의      

4장     기술과 자유 상실      

5장     자유학예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6장     새로운 귀족정      

7장     시민권의 퇴화      

결론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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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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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펴낸이의 말

자유교육을 자유주의로부터 구출해야 하는 이유

 

오늘날 세계 법질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미국 헌법과 나폴레옹 민법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근대의 이념 위에 법체계를 세운 대표적인 성문법으로 그 중심 가치는 ‘자유’다. 자유와 평등, 개인과 사회의 긴장 관계를 형제애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의 룰이다. 하지만 오늘날 평등과 박애는 자유주의의 면피용 또는 구색용 가치에 머문다. 1980년대에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 요소를 제거하여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로 돌아가고자 한다. 능력주의를 예찬하며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배경에는 자유를 기조로 하는 법의 지배력이 작동하고 있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의 긴장 관계를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가진 자들의 자유를 옹호하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이해되면서 보수의 이데올로기로 간주되고, 민주와 정의를 주장하면 좌파로 규정되는 실정이다. 단체나 조직 이름에 ‘자유’가 있는지 ‘민주’가 있는지를 보면 대충 정치적 색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저마다 맹점을 갖고 있어, 앉은뱅이를 업고 가는 장님처럼 서로에게 눈과 다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오히려 서로의 맹점이 부각되고 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반국가세력 척결을 외치며 친위 쿠데타를 벌인 이가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처럼.

자유주의는 근대를 꿰는 이데올로기이자,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데 기독교와 함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원래 리버럴리티는 ‘너그러움’을 뜻하는 공동체 윤리로,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공공선이 그 핵심 가치였다. 이 리버럴리티가 20세기 들어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귀착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역사학자 헬레나 로젠블랫은 이처럼 ‘쪼그라든 자유주의’로 말미암아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충돌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분석한다.(『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385-387pp) 그는 관대함을 중시한 고대의 리버럴리티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책에서 드닌은 ‘쪼그라든 자유주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자체에 내재된 모순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관례적인 좌파 - 우파 스펙트럼으로 이 책을 분류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서 이런 시각은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유주의와 자유교육

 

고대 로마인들이 규율을 훈련함으로써 갖게 되는 자제력을 자유의 토대로 보았던 것과 달리 근대인들은 개인의 선택을 중요시하는 자유관을 갖고 있다. 개인의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개인주의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속하고 살면서 맺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선택을 제약당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외면한다. 개인의 성적 자율성이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듯이 자율성이란 가치를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기본 전제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자율에 기초한 자유교육이 실패하게 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구의 자유교양교육 또는 자유학예는 원래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한 학문 또는 예술로서,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는 자제력과 공동선을 위한 관대함을 기르는 것이었다. 3학4과로 이루어진 7자유학예는 지배계급의 자녀들이 자라서 지배자가 되었을 때 필요한 지식과 교양을 가르쳤다. 오늘날의 인문학에 해당하는 3학은 말과 글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문법과 수사학, 논리학으로 구성되며, 4과는 실용적 학문으로 (징세 등 행정 실무력을 기르는) 수리학, (토지를 측량하는) 기하학,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여 농사를 감독하는) 천문학, (정서를 교화하는)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산노동을 하는 계급과 이들을 지배하는 계급으로 나뉜 신분사회를 전제로 한 교육과정이었다.

유교 문화권의 전통 교과였던 공자의 6예(예禮, 악樂, 사射, 어御,서書, 수數) 역시 지배계급을 위한 교육과정이었다. 논어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기己는 나, 인人은 남 다시 말해 다스림의 대상인 민중이다. 자신을 가다듬은 다음 남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정치철학이다. 6예 중 사(射, 활쏘기)는 자신의 신체와 소통하는 훈련 과정이며, 어(御, 승마)는 짐승을 다스리는 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단순히 승마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와 커뮤니케이션을 훈련하는 과정이다. 승마술이 피지배 계급을 말 다루듯 다룰 줄 아는 능력으로도 이어진다고 보았을 것이다. 활쏘기와 승마는 신체 훈련을 통한 마음수련 과정으로, 수기치인의 교육목표를 위한 전인적 교육과정이었던 셈이다.

신분사회가 무너지면서 교육은 계급의 벽을 넘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보편교육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공자의 6예와 7자유학예는 국민공통 기본교과로 개편되었다. 개별적인 수련 과정이었던 활쏘기나 승마 대신 집단적인 신체 훈련인 국민체조가 보급되었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필요해진 경제계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참정권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권리도 부르주아 계급을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하지만 머리 좋고 운 좋은 소수의 노동자 자녀들을 제외하면 고등교육은 여전히 중산층 자녀들 위주로 이루어져왔다. 계급의 벽은 사라졌지만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의 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자의 6예는 전인교육 측면에서 서구의 7자유학예보다 수준 높은 교육과정이었지만,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전인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통사회에서 수기치인 철학을 실제로 구현한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대개는 피지배 계층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 되었을 따름이다. 아서왕 전설에서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 중세의 기사들이 실제로는 약탈자였듯이. 이제 동아시아의 엘리트들은 활쏘기 대신 골프를 배우고, 말 대신 고급 승용차를 탄다. 골프채를 휘두르며 또 포르쉐를 몰면서도 커뮤니케이션 훈련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도, 원하는 학생도 없을 것이다.

서구에서 자유학예가 쇠퇴했듯이 유교 문화권에서 공자의 6예는 더 이상 의미 있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학교교육에서는 읽기와 쓰기書, 셈하기數 정도가 강조될 뿐이다. 산업구조가 바뀌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경쟁이 심화되면서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위상은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이제는 대학에서도 인문학보다 실용 학문을 더 선호한다. 고대 로마 시대나 오늘날이나 소수의 지배계층을 위한 엘리트 교육은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지만 현대에는 인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쪽으로 교육의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예전에는 중인계급이 받았던 실용 교육이 오늘날에는 최고 엘리트들을 위한 교육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공동선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이 속한 금융기관이나 글로벌 기업을 위해 일한다.

 

원죄설과 천부인권설

 

근대 정치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 실존과는 사뭇 다른 가상의 존재를 상정한다. 실상 모든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사회 속에 태어나며 공동체의 규율을 따름으로써 비로소 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들이 천부인권을 지키기 위해 정부를 수립하고자 계약을 맺었다는 가상의 시나리오에 기반한다. 자유주의가 정치철학을 넘어 경제와 사회 전반의 원리로 작용하면서 사회적 유대관계가 약화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계약에 기반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를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경전보다 법전에 기대어 자유를 추구해온 것이 근대의 역사다. 종교적·영성적 자유와 정치적·사회적 자유의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인간의 성숙과 좋은 삶을 도모하고자 하는 점에서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사회를 이루기 위해 계약을 맺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 일부를 양도했다는 루소의 사회계약설 또한 자유의 근원이 사실상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신의 율법과 사랑 대신 인간들 사이의 계약을 제시한 셈이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는 루소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의 규범까지도 넘어서는 초인을 꿈꾸었다. 초인의 다른 이름은 자유인일 것이다.

경전도 법전도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 이용될 때가 더 많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또한 가진 자들의 자유를 확대해온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이상만큼은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전과 법전은 자유주의와 맥이 닿는다. 자유주의의 샘에서 솟아난 근대의 모든 사상은 신의 도움을 빌지 않고(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또는 원죄설에 기대지 않고)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지를 탐구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자리에 자연법을 놓은 천부인권설이 원죄설 못지않게 부작용을 낳으면서 자유의 근원을 자신에게서 찾고자 하는 모순을 넘어서고자 신의 자리에 타자他者를 가져다놓은 것이 현대철학이다.

‘천부인권’이라는 근대의 이념 또한 기독교 원리주의의 변주로 볼 수 있다. 인간이 불가침의 인권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는 원죄설과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허구로, 중세를 지탱해온 이야기에 맞서 근대의 인본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원죄설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선설을 주장하며 원죄설을 폐기한 루소의 고백록이 서구 역사에서 양대 고백록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태생적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태생적 자유인이라는 관점으로 인간관이 180도 바뀐 셈이다. 신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자유의 근원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반면, 인본주의는 자유의 근원이 인간 안에 있다고 천명한다. 천부인권 사상은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운동을 거치면서 근대 헌법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경전에 기초한 율법이 공동체의 유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헌법에 기초한 법률은 개인의 권리 보호에 초점을 맞춘다. 권리는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근대법의 발전은 개인주의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살던 시대가 가고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야 했던 시대, 가문을 위해 청상과부가 수절하고 처녀가 가족들에게 명예살인을 당하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주제 폐지는 개인주의의 승리다.

전통과 공동체의 구속에서 개인을 해방시켜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인류에게 비춘 빛과 함께 그늘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빛이 밝은 만큼 그늘도 짙은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지역사회,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꿈꾸지만,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사회보다 개인이 더 중요해지면서 개인은 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권리 중심의 법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흔히 벌어지는 일처럼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쪽이 법적 책임을 더 많이 지게 되기 때문이다.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사과하면 지는 거다’가 상식처럼 되어 누구도 먼저 사과하지 않고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전념한다. 경전이 가르치는 것이 ‘내 탓이오’라면 법이 가르치는 것은 ‘네 탓이야’인 셈이다. 남 탓을 하는 사람은 성숙하기 힘들다. 빚진 자로서 기꺼이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와, 권리를 가진 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 중에 어느 쪽이 더 지속가능할까. 권리 중심의 현대 헌법이 만들어내는 사회에 내재된 문제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20세기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였던 자유주의와 파시즘, 공산주의 가운데 최후의 승자로 살아남은 것이 자유주의다. 파시즘은 오른편에서, 공산주의는 왼편에서 자유주의를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반세기 가까이 더 분투한 공산주의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판정패를 당한 뒤 자본주의 아류가 되어 변신을 시도 중이다. 파시즘은 일찌감치 KO패를 당한 뒤에도 제3세계에서 명맥을 이어오다 21세기 들어 재도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형제당이 제1당이 되고, 독일대안당은 제2당이 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극우와 중도우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다. 21세기에 인류는 다시금 파시즘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유주의의 성공을 자축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성공의 이면을 들추는 작업은 더욱 필요해 보인다. 이 책에서 드닌은 자유주의는 성공할수록 실패할 운명을 안고 있다고 말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할수록 국가주의 또한 강화되는 본질적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시즘의 부활은 자유주의의 성공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일지 모른다. 미국에서 트럼프 2기 정부가 시작되던 날 정부효율부를 맡은 일론 머스크가 연단에서 나치식 경례를 해서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파시즘에 동조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던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깨인 시민들이 파시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경제가 어려워지고 이민자들로 인한 사회불안이 가중되면서 극우 세력이 점점 득세하고 있다.

정치와 문화는 경제구조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개인의 자율에 기반한 자유주의가 서구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데는 밀농사 체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벼농사와 달리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경작이 가능한 밀농사의 경우 협동문화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거기에 더해 일찍이 시작된 산업화는 사람들을 더욱 개별화시켰다. 기계화된 공장에서는 사람들의 협업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테일러식 분업 시스템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더욱 개별화되게 만들었다. 노동운동은 생산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게 했다. 노조를 만들고 노동쟁의를 벌이면서 강화된 권리의식은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개별성을 부각시키면서 개인주의를 강화한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해야지….’ 개인주의 시대에 어울릴 법한 독백이다. 재산권을 옹호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자유주의가 성공할수록 양극화가 심화된다. 오늘날 교육은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소비 대중을 길러내는 쪽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자기책임론’이 횡행한다. 성적이 나쁜 것도 공부를 게을리한 자기책임이고, 좋은 대학에 못 가는 것도 자기책임이다. 비정규직 문제도 개인의 역량 탓으로 돌린다.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능력이 노력에 비례한다고 믿지만, 타고나는 재능과 가정환경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자기책임론은 모두를 고립시키고 결국 각자도생 사회를 만든다.

드닌은 개인주의가 심화될수록 국가주의 또한 강화되는 구조가 자유주의에 내장된 버그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도 생태주의도 병증을 완화하는 정도에 그칠 뿐 백신 기능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성공할수록 실패하게 되어 있는 자유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으로 드닌은 작은 규모 공동체의 활성화를 제시하는데, 세계경제가 점점 긴밀하게 엮이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에 지역 공동체가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자연과 문화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을 약속하는 자유주의에서 자유교육을 구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 어쩌면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교육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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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독자층이 얇다 보니 주목할 만한 책이 초판으로 절판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 책은 2019년에 나온 번역본(책과함께 출간)을 조금 손본 것입니다.(초판에 실려 있던 저자 서문은 시의성을 고려해 ‘감사의 말’과 함께 후기로 돌렸음을 밝힙니다.) 영문판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2018년 트럼프 정부 1기 때였습니다. 《타임》지에 서평이 세 차례나 실릴 만큼 주목을 받았던 것도 이 책이 트럼프 시대에 시의적절한 통찰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7년이 지난 지금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서 더욱 폭주하고 있는 중이지요. 자유주의 위기의 원인이 자유주의에 내재해 있다는 저자의 통찰이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데 등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_현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