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치다 타츠루의 커뮤니케이션론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문학, 정치, 문화 등 일본 사회 전방위에 걸쳐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을 백여 권 이상 펴낸 저자는 오늘날 일본의 가장 대중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교육 문제에도 남다른 식견을 가진 그는 다양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개풍관’이라는 공간을 열어 무도와 철학을 함께 배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기도 하다.
우치다 선생이 모든 책에서 던지는 이야기는 결국 커뮤니케이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과도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하는 이야기다. 40년이 넘도록 날마다 합기도를 수련하는 것도, 레비나스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거기에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신체’와 ‘윤리’라는, 얼핏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가 가히 장인의 솜씨다.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메시지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우치다 선생의 통찰은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을 짚고 있다. 남북 간의 핫라인이 연결되었을 때처럼 연결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난다. 수신, 발신의 한자어 ‘신信’은 신뢰를 뜻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결국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 것이다. 신뢰는 상호간에 발신과 수신이 더 활발히 일어나게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서로 연결되어 있음, 서로의 메시지가 수신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쁨이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서로 공을 주고받는 단조로운 놀이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도, 섹스처럼 내밀한 행위도 그 본질은 수신 확인이다.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을 수시로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수신 능력을 기르는 교육
수신 능력은 언어 감각을 통해 기를 수도 있지만 몸을 통해 기를 수도 있다. 무예나 무도의 목적 또한 궁극적으로는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이다. 우치다 선생이 레비나스 철학을 공부하면서 깨닫는 것이 합기도를 수련하며 몸으로 터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수신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기 마련이다. 특히 십대 시기는 신체와 언어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인 만큼 신체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을 해야 할 때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는 데 적합한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건 수신도 발신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근대학교 시스템은 교사들이 발신만 해도 웬만큼 굴러가게 세팅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훈육이지 교육이 아니다. 교육현장이라면 교사와 아이들, 또 아이들끼리 신호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성장이 일어나야 한다.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찾을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전방위적인 연결의 시대,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신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른도 아이도 몸을 점점 덜 움직이게 되면서 수신 능력도 퇴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신체성에 기반한 소통의 힘을 기르는 데 중요한 힌트를 던진다.
본문 가운데
수줍어 할 줄 안다는 것은
주저하거나 수줍어하는 것을 요즘은 거의 아무도 칭찬하지 않습니다. 수줍어하는 사람에게 “좀 더 적극적이 돼라”라고 요구하면서 도도한 사람에게는 “좀 수줍어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줍음이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 이제는 없습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머뭇머뭇하고 부끄러워하는,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그래서 결국 상대방의 의견에 동조하고 마는 그런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몰려 낮은 평가밖에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수줍음 타는 아이를 자기표현 잘하고 자기결정을 할 줄 아는, 자기 의견을 척척 말할 줄 아는 아이로 개조시키려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세요. 그것이 자유이고 그것이 인간의 권리인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이라든가 자유라든가 욕망이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뇌’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1장_신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중)
뒤좇는 모드일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감수성을 최대한 민감하게 만들어서 눈앞에서 변화해가는 것을 미미한 간격을 두고 뒤좇을 때 신체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제 관계에서 스승을 따라 하게 하는 것은 스승을 롤 모델로 삼아 흉내 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롤 모델을 좇는’ 몸짓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뒤좇아 오도록 하는’ 그 자체가 교육인 것입니다.(1장_신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중)
‘정형화’라는 퇴행 옵션으로 도망치는 아이들
중학교 교사에게 학교 현장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학생들이 확 바뀌는 시기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라는 겁니다. 방학 전까지는 쭈뼛쭈뼛하고 애매모호하던 아이들이 방학이 끝나자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고는 날라리 학생처럼 쭈그리고 앉아 교사를 째려보면서 “야, 너 짜증나거든” 하는 식으로 변해버린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9월 데뷔’를 한 불량 중학생들은 그전까지의 ‘말더듬이’ 상태에서 단번에 불량 청소년의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사춘기의 심리적 위기를 회피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아이들도 내면과 자신의 말이나 신체, 몸놀림 사이에 어긋남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어긋남’을 어떻게든 조정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릿느릿 구축해가는 그 힘든 과정을 참지 못해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으로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중학생 한 명 한 명이 느끼는 위화감이나 불만, 불안감을 그렇게 쉽게 기존의 틀에 딱 끼워 넣을 수 있을까요? 원하는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듯 자신에게 딱 맞는 표현 양식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불량 청소년 A군과 B군은 가정환경도 다르고 학교에서의 위치나 언어 능력, 신체 감수성, 취미나 취향도 다르니까요. 그 모두를 ‘없는 셈’치고 기존의 정형화된 불량 청소년 틀에 자신을 딱 끼워 맞출 수는 없죠.
그들은 결국 그렇게 기존의 틀에 들어감으로써, 아무도 추체험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저마다 고유한 ‘내면과 외면의 어긋남’을 조정하는 힘든 일에서 도망쳐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기존의 ‘불량 청소년 타입’에 쑥 들어가는 것으로 스스로 ‘나다움’을 달성했다는 행복한 환상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춘기의 개성을 ‘똥값’에 팔아먹음으로써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안정감을 사는 것입니다. (2장_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중)
감정과 몸짓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사춘기라는 것은 어쨌든 감정을 세밀하게 나누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실을 수 있는 ‘더 애매한 표현’은 없을까? 이런 욕구가 사춘기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니까요. 그래서 이 시기의 아이들은 열심히 고전 문학이나 외국 문학을 읽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 작품 속에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교사나 부모, 친구, 텔레비전 출연자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듣도 보도 못했던 말’이 숨어 있으니까요. 그런 말 중에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기도 하거든요. ( … ) 그 시기에 얼마나 진지하게 감정의 칼집, 표현의 치밀화에 도전했는지가 나중에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용할 수 있는 기호가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간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이나 억양에서 아주 섬세한 심리 상태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 메시지의 종류가 점점 늘어납니다. 정서의 풍부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나눌 수 있는 감정 표현의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정서’라는 건 아주 산문적으로 말하면 어휘나 표정, 발성, 몸짓으로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구별해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장_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중)
누구도 그렇게 쉽게 남의 입장에 설 수는 없다
‘인간은 모두 똑같아서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욕망하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계산하며, 비슷한 것을 가치로 삼고, 비슷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낀다’면서 ‘공감과 이해의 공동체’를 이상형으로 상정해버리는 것이 코먼웰스 이론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는 논리의 위험이 나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모두가 서로 “네 마음 잘 알아” “알았어, 알았어” 하며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자신과 다른 척도로 세상 일을 재고 있는 사람, 자신과 다른 단위로 세계를 보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4장_소통의 회로를 여는 소통 중)
소통하는 신체_우치다 타츠루의 커뮤니케이션론
책소개
우치다 타츠루의 커뮤니케이션론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문학, 정치, 문화 등 일본 사회 전방위에 걸쳐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을 백여 권 이상 펴낸 저자는 오늘날 일본의 가장 대중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교육 문제에도 남다른 식견을 가진 그는 다양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개풍관’이라는 공간을 열어 무도와 철학을 함께 배우는 배움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기도 하다.
우치다 선생이 모든 책에서 던지는 이야기는 결국 커뮤니케이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과도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하는 이야기다. 40년이 넘도록 날마다 합기도를 수련하는 것도, 레비나스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거기에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신체’와 ‘윤리’라는, 얼핏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가 가히 장인의 솜씨다.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메시지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우치다 선생의 통찰은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을 짚고 있다. 남북 간의 핫라인이 연결되었을 때처럼 연결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난다. 수신, 발신의 한자어 ‘신信’은 신뢰를 뜻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결국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 것이다. 신뢰는 상호간에 발신과 수신이 더 활발히 일어나게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서로 연결되어 있음, 서로의 메시지가 수신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쁨이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서로 공을 주고받는 단조로운 놀이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도, 섹스처럼 내밀한 행위도 그 본질은 수신 확인이다.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을 수시로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수신 능력을 기르는 교육
수신 능력은 언어 감각을 통해 기를 수도 있지만 몸을 통해 기를 수도 있다. 무예나 무도의 목적 또한 궁극적으로는 수신 감도를 높이는 것이다. 우치다 선생이 레비나스 철학을 공부하면서 깨닫는 것이 합기도를 수련하며 몸으로 터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수신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기 마련이다. 특히 십대 시기는 신체와 언어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인 만큼 신체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을 해야 할 때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는 데 적합한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건 수신도 발신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근대학교 시스템은 교사들이 발신만 해도 웬만큼 굴러가게 세팅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훈육이지 교육이 아니다. 교육현장이라면 교사와 아이들, 또 아이들끼리 신호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성장이 일어나야 한다.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찾을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전방위적인 연결의 시대,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신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른도 아이도 몸을 점점 덜 움직이게 되면서 수신 능력도 퇴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신체성에 기반한 소통의 힘을 기르는 데 중요한 힌트를 던진다.
본문 가운데
수줍어 할 줄 안다는 것은
주저하거나 수줍어하는 것을 요즘은 거의 아무도 칭찬하지 않습니다. 수줍어하는 사람에게 “좀 더 적극적이 돼라”라고 요구하면서 도도한 사람에게는 “좀 수줍어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줍음이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 이제는 없습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머뭇머뭇하고 부끄러워하는,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그래서 결국 상대방의 의견에 동조하고 마는 그런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몰려 낮은 평가밖에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수줍음 타는 아이를 자기표현 잘하고 자기결정을 할 줄 아는, 자기 의견을 척척 말할 줄 아는 아이로 개조시키려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세요. 그것이 자유이고 그것이 인간의 권리인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이라든가 자유라든가 욕망이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뇌’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1장_신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중)
뒤좇는 모드일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감수성을 최대한 민감하게 만들어서 눈앞에서 변화해가는 것을 미미한 간격을 두고 뒤좇을 때 신체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제 관계에서 스승을 따라 하게 하는 것은 스승을 롤 모델로 삼아 흉내 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롤 모델을 좇는’ 몸짓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뒤좇아 오도록 하는’ 그 자체가 교육인 것입니다.(1장_신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중)
‘정형화’라는 퇴행 옵션으로 도망치는 아이들
중학교 교사에게 학교 현장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학생들이 확 바뀌는 시기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라는 겁니다. 방학 전까지는 쭈뼛쭈뼛하고 애매모호하던 아이들이 방학이 끝나자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고는 날라리 학생처럼 쭈그리고 앉아 교사를 째려보면서 “야, 너 짜증나거든” 하는 식으로 변해버린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9월 데뷔’를 한 불량 중학생들은 그전까지의 ‘말더듬이’ 상태에서 단번에 불량 청소년의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사춘기의 심리적 위기를 회피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아이들도 내면과 자신의 말이나 신체, 몸놀림 사이에 어긋남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어긋남’을 어떻게든 조정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릿느릿 구축해가는 그 힘든 과정을 참지 못해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으로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고 한 거죠.
그런데 중학생 한 명 한 명이 느끼는 위화감이나 불만, 불안감을 그렇게 쉽게 기존의 틀에 딱 끼워 넣을 수 있을까요? 원하는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듯 자신에게 딱 맞는 표현 양식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불량 청소년 A군과 B군은 가정환경도 다르고 학교에서의 위치나 언어 능력, 신체 감수성, 취미나 취향도 다르니까요. 그 모두를 ‘없는 셈’치고 기존의 정형화된 불량 청소년 틀에 자신을 딱 끼워 맞출 수는 없죠.
그들은 결국 그렇게 기존의 틀에 들어감으로써, 아무도 추체험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저마다 고유한 ‘내면과 외면의 어긋남’을 조정하는 힘든 일에서 도망쳐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기존의 ‘불량 청소년 타입’에 쑥 들어가는 것으로 스스로 ‘나다움’을 달성했다는 행복한 환상 속에 안주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춘기의 개성을 ‘똥값’에 팔아먹음으로써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안정감을 사는 것입니다. (2장_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중)
감정과 몸짓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사춘기라는 것은 어쨌든 감정을 세밀하게 나누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실을 수 있는 ‘더 애매한 표현’은 없을까? 이런 욕구가 사춘기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니까요. 그래서 이 시기의 아이들은 열심히 고전 문학이나 외국 문학을 읽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 작품 속에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교사나 부모, 친구, 텔레비전 출연자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듣도 보도 못했던 말’이 숨어 있으니까요. 그런 말 중에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기도 하거든요. ( … ) 그 시기에 얼마나 진지하게 감정의 칼집, 표현의 치밀화에 도전했는지가 나중에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용할 수 있는 기호가 그렇게 하나하나 늘어간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이나 억양에서 아주 섬세한 심리 상태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 메시지의 종류가 점점 늘어납니다. 정서의 풍부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나눌 수 있는 감정 표현의 종류가 많다는 것이죠. ‘정서’라는 건 아주 산문적으로 말하면 어휘나 표정, 발성, 몸짓으로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구별해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장_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 중)
누구도 그렇게 쉽게 남의 입장에 설 수는 없다
‘인간은 모두 똑같아서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욕망하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계산하며, 비슷한 것을 가치로 삼고, 비슷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낀다’면서 ‘공감과 이해의 공동체’를 이상형으로 상정해버리는 것이 코먼웰스 이론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는 논리의 위험이 나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모두가 서로 “네 마음 잘 알아” “알았어, 알았어” 하며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자신과 다른 척도로 세상 일을 재고 있는 사람, 자신과 다른 단위로 세계를 보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4장_소통의 회로를 여는 소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