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는 과연 자살한 것일까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왕자>는 2017년 300번째 언어로 출간됨으로써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번역된 책이 되었다. 75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 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의 세상은 황폐하고 고립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저 유명한 문장은 인간이 되찾아야 할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정말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일까?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린 따뜻한 이야기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린왕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장미에 지쳐 자신의 별을 떠났는데, 종국에는 스스로 뱀에 물려 목숨을 끊음으로써 장미에게 돌아가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왕자가 사실상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무사히 자기 별로 돌아갔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어린왕자>는 동화가 아닌 복잡하고 까다로운, 그리고 조금은 공포스러운 심리소설에 가까워진다.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의 공통점
저자는 <어린왕자>에서 사랑의 가면을 쓴 폭력의 메커니즘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를 ‘모럴 해러스먼트moral harassment’라는 개념으로 소개한다. 모럴 해러스먼트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정신적, 정서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괴롭힘을 말한다. 어린왕자는 장미로부터 이러한 학대를 당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학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으며 대부분 비슷한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 친밀하고 오랜 연인 사이에서 주로 발생하는 데이트폭력이 대표적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괴롭히면서 ‘사랑해서 그런다’고 변명한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한계 이상으로 노력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도망쳤다가도 가해자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가정폭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심각한 사회 범죄임에도 많은 경우 ‘집안 문제’나 ‘사적인 일’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때 신체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정서적 폭력은 인지하기조차 어렵다.
아동학대도 전형적인 모럴 해러스먼트 양상을 보인다. 부모는 ‘다 널 위한 거야’라는 명분하에 아이에게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가한다. 아이는 그러한 폭력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죄책감을 의식 깊은 곳에 억압해 두는데, 이렇게 내재된 폭력은 훗날 자신의 아이나 사회를 대상으로 되풀이된다. 저자는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전쟁의 사회적 배경에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해 있던 억압적인 자녀양육 방식이 작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대, 모럴 해러스먼트에서 벗어나기
모럴 해러스먼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학대 사실이 드러나면 모럴 해러스먼트는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 어린왕자가 “장미는 나빠. 그 꽃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어. 장미의 가시 때문에 나는 정말 아파.”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장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폭력을 폭력이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저자는 사막여우와 같은 2차 가해자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여우는 ‘길들이다’라는 일방적인 관계를 상호평등한 관계로 왜곡함으로써 어린왕자가 당하는 폭력을 은폐시켰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와 장미는 ‘서로’ 길들였으므로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어린왕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런 가짜 상담가나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럴 해러스먼트는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연인이나 부부,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등 어떠한 인간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이 모럴 해러스먼트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러한 숨겨진 진실들을 밝히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 가운데
<어린왕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과의 소통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속에 숨어들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텍쥐페리는 이 악마에 홀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왕자>는 이 악에 대한 ‘목숨을 건 보고서’이다. _여는말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
학대자가 피해자를 지배할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피해자가 느끼는 ‘죄책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피해자가 되기 쉽다. 이렇게 표적이 된 피해자는 오해를 받거나 무언가 어색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 어려움에 직면한 경우에는 더욱 노력을 불태운다. 노력의 과잉으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면 죄책감을 느낀다. 마지막에는 ‘저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는 건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야’라며 자신을 추궁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과잉 감정은 자책감과 함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과 이어져 있다. _2장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
길들인다는 것은?
‘길들이다apprivoiser’란 동사는 명확하게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길들이는 자/길들여지는 자’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이다. 왕자는 여우에게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장미 한 송이가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 꽃은 나를 길들이고 있었어….”
이 경우 길들인 쪽은 장미이며, 길들여진 쪽은 왕자이다. 양자의 관계는 명백히 비대칭적이다. 그런데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라 설명했다. ‘길들인다=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본래 비대칭적인 것을 대칭적으로 보여주는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비대칭성의 은폐는 모럴 해러스먼트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학대자/피해자’라는 비대칭성을 은폐하고 ‘우리가 서로’처럼 보이는 것이 학대자가 가진 음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럴 해러스먼트 과정에서 학대자는 피해자의 자유를 빼앗는 동시에 피해자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확신하게 만든다. 실제로는 압도적인 상하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양자가 평등하거나 대등한 관계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_3장 사막여우의 2차 학대
아동학대의 메커니즘
폭력을 당한 아이는 그 폭력을 아주 이른 시기에 내재화하고는 부모가 사랑했기 때문에 때린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엔 부모를 모방하여 폭력을 찬미하면서 그 방식을 답습하고 활용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폭력을 당한 이유가 단지 그들의 부모가 유년 시절에 이유도 모른 채 폭력을 당하고 이를 내재화한 데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한때 학대당하는 아이였던 어른은 자신의 아이에게 폭력을 가할 때, 어리고 무력했던 시절에 자신을 유린했던 부모에게 종종 감사의 마음을 느끼곤 한다. _5장 보아의 정체 (앨리스 밀러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www.alice-miller.com)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대물림 현상은 자신이 받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여우의 궤변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본질적인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빠지면 그 사람은 강박관념에 휘둘리는 비겁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학대의 대물림 현상을 멈추기 위해서는 본질을 꿰뚫어보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린왕자>의 주제는 ‘아이들이 가진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이다. 사실 모럴 해러스먼트는 이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장미와 왕자, 여우의 관계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지옥 같은 모럴 해러스먼트는 아이들이 가진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이 발휘될 때 비로소 타파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_5장 보아의 정체
차례
서문 _사랑의 가면을 쓴 학대의 심리학
여는 말 _커뮤니케이션 속에 숨어 있는 악에 관한 보고서
1. <어린왕자> 다시 읽기
2.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Moral Harassment
3. 사막여우의 2차 학대Second Harassment
4. 길들인다는 것은
5. 보아뱀의 정체
6. X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7. 어른인 사람, 바오밥나무 그리고 양
맺는 말
참고문헌
해설 _누가 어린왕자를 구할 수 있을까
지은이 | 야스토미 아유미(아유무) 安富 涉
1963년 출생.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교토대 경제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고야대 정보문화학부 조교수,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소 정보학 교환교수를 거쳤다. 지은 책으로 『단단한 삶』, 『위험한 논어』, 『사는 힘을 길러 주는 경제학』, 『화폐의 복잡성』, 『복잡성을 살다』 등이 있다. 자신의 성정체성이 여성에 가깝다고 여겨 최근에 이름을 ‘아유미’로 바꾸었다.
옮긴이 | 박솔바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일본문화학과 졸업. 일본 히토츠바시대에서 수학하던 시절 개풍관에서 우치다 선생과 만난 뒤 선생의 저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앞으로 동아시아 시민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곤란한 결혼』을 우리말로 옮겼다.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
어린왕자는 과연 자살한 것일까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왕자>는 2017년 300번째 언어로 출간됨으로써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번역된 책이 되었다. 75년 전에 쓰인 이 책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 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의 세상은 황폐하고 고립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저 유명한 문장은 인간이 되찾아야 할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정말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일까?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린 따뜻한 이야기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린왕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장미에 지쳐 자신의 별을 떠났는데, 종국에는 스스로 뱀에 물려 목숨을 끊음으로써 장미에게 돌아가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왕자가 사실상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무사히 자기 별로 돌아갔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어린왕자>는 동화가 아닌 복잡하고 까다로운, 그리고 조금은 공포스러운 심리소설에 가까워진다.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의 공통점
저자는 <어린왕자>에서 사랑의 가면을 쓴 폭력의 메커니즘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를 ‘모럴 해러스먼트moral harassment’라는 개념으로 소개한다. 모럴 해러스먼트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정신적, 정서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괴롭힘을 말한다. 어린왕자는 장미로부터 이러한 학대를 당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학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으며 대부분 비슷한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 친밀하고 오랜 연인 사이에서 주로 발생하는 데이트폭력이 대표적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괴롭히면서 ‘사랑해서 그런다’고 변명한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한계 이상으로 노력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도망쳤다가도 가해자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가정폭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심각한 사회 범죄임에도 많은 경우 ‘집안 문제’나 ‘사적인 일’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때 신체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정서적 폭력은 인지하기조차 어렵다.
아동학대도 전형적인 모럴 해러스먼트 양상을 보인다. 부모는 ‘다 널 위한 거야’라는 명분하에 아이에게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가한다. 아이는 그러한 폭력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죄책감을 의식 깊은 곳에 억압해 두는데, 이렇게 내재된 폭력은 훗날 자신의 아이나 사회를 대상으로 되풀이된다. 저자는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전쟁의 사회적 배경에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해 있던 억압적인 자녀양육 방식이 작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대, 모럴 해러스먼트에서 벗어나기
모럴 해러스먼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학대 사실이 드러나면 모럴 해러스먼트는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 어린왕자가 “장미는 나빠. 그 꽃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어. 장미의 가시 때문에 나는 정말 아파.”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장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폭력을 폭력이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저자는 사막여우와 같은 2차 가해자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여우는 ‘길들이다’라는 일방적인 관계를 상호평등한 관계로 왜곡함으로써 어린왕자가 당하는 폭력을 은폐시켰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와 장미는 ‘서로’ 길들였으므로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어린왕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런 가짜 상담가나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럴 해러스먼트는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연인이나 부부,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등 어떠한 인간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이 모럴 해러스먼트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러한 숨겨진 진실들을 밝히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 가운데
<어린왕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과의 소통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속에 숨어들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텍쥐페리는 이 악마에 홀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왕자>는 이 악에 대한 ‘목숨을 건 보고서’이다. _여는말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
학대자가 피해자를 지배할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피해자가 느끼는 ‘죄책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피해자가 되기 쉽다. 이렇게 표적이 된 피해자는 오해를 받거나 무언가 어색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 어려움에 직면한 경우에는 더욱 노력을 불태운다. 노력의 과잉으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면 죄책감을 느낀다. 마지막에는 ‘저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는 건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야’라며 자신을 추궁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과잉 감정은 자책감과 함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과 이어져 있다. _2장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
길들인다는 것은?
‘길들이다apprivoiser’란 동사는 명확하게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길들이는 자/길들여지는 자’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이다. 왕자는 여우에게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장미 한 송이가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 꽃은 나를 길들이고 있었어….”
이 경우 길들인 쪽은 장미이며, 길들여진 쪽은 왕자이다. 양자의 관계는 명백히 비대칭적이다. 그런데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라 설명했다. ‘길들인다=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본래 비대칭적인 것을 대칭적으로 보여주는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비대칭성의 은폐는 모럴 해러스먼트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학대자/피해자’라는 비대칭성을 은폐하고 ‘우리가 서로’처럼 보이는 것이 학대자가 가진 음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럴 해러스먼트 과정에서 학대자는 피해자의 자유를 빼앗는 동시에 피해자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확신하게 만든다. 실제로는 압도적인 상하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양자가 평등하거나 대등한 관계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_3장 사막여우의 2차 학대
아동학대의 메커니즘
폭력을 당한 아이는 그 폭력을 아주 이른 시기에 내재화하고는 부모가 사랑했기 때문에 때린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엔 부모를 모방하여 폭력을 찬미하면서 그 방식을 답습하고 활용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폭력을 당한 이유가 단지 그들의 부모가 유년 시절에 이유도 모른 채 폭력을 당하고 이를 내재화한 데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한때 학대당하는 아이였던 어른은 자신의 아이에게 폭력을 가할 때, 어리고 무력했던 시절에 자신을 유린했던 부모에게 종종 감사의 마음을 느끼곤 한다. _5장 보아의 정체 (앨리스 밀러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www.alice-miller.com)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대물림 현상은 자신이 받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여우의 궤변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본질적인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빠지면 그 사람은 강박관념에 휘둘리는 비겁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학대의 대물림 현상을 멈추기 위해서는 본질을 꿰뚫어보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린왕자>의 주제는 ‘아이들이 가진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이다. 사실 모럴 해러스먼트는 이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장미와 왕자, 여우의 관계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지옥 같은 모럴 해러스먼트는 아이들이 가진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이 발휘될 때 비로소 타파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_5장 보아의 정체
차례
서문 _사랑의 가면을 쓴 학대의 심리학
여는 말 _커뮤니케이션 속에 숨어 있는 악에 관한 보고서
1. <어린왕자> 다시 읽기
2.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Moral Harassment
3. 사막여우의 2차 학대Second Harassment
4. 길들인다는 것은
5. 보아뱀의 정체
6. X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7. 어른인 사람, 바오밥나무 그리고 양
맺는 말
참고문헌
해설 _누가 어린왕자를 구할 수 있을까
지은이 | 야스토미 아유미(아유무) 安富 涉
1963년 출생.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교토대 경제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고야대 정보문화학부 조교수,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소 정보학 교환교수를 거쳤다. 지은 책으로 『단단한 삶』, 『위험한 논어』, 『사는 힘을 길러 주는 경제학』, 『화폐의 복잡성』, 『복잡성을 살다』 등이 있다. 자신의 성정체성이 여성에 가깝다고 여겨 최근에 이름을 ‘아유미’로 바꾸었다.
옮긴이 | 박솔바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일본문화학과 졸업. 일본 히토츠바시대에서 수학하던 시절 개풍관에서 우치다 선생과 만난 뒤 선생의 저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앞으로 동아시아 시민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곤란한 결혼』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