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의 안전성보다 자신의 직위 안전에 더 급급해하는 전문가들이 구사하는 기만적인 화법(저자는 이를 ‘도쿄대식 화법’이라 부른다)을 파헤친다. 저자는 학연과 지연으로 끈적끈적하게 엮인 엘리트 집단의 생태계를 ‘입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대중을 기만하는 그들의 행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엘리트들의 기만적인 화법에 속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한국과 일본사회에서 엘리트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저자의 분석대로,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학력에 의한 차별이 당연한, 그런 광기에 지배되는 ‘이상한 나라’이므로. 이들은 언어를 통해 사회를 기만하고 커다란 폐해를 끼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엘리트들이 보인 행태는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경주 지진 이후 크고 작은 원전 사고가 끊임없이 보도되는 가운데 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움직임 또한 번번이 드러나고 있다. 책임 회피에 여념이 없는 전문가들을 보면 일본의 그들과 판박이다.
이 책은 사회를 위기에 빠트리는 엘리트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러면 아이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본이나 한국처럼 경쟁적인 입시교육을 통해 엘리트를 길러내는 사회는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기만적인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도쿄대 교수인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도쿄대 입학생들이 어떤 학생들인지, 또 졸업 후에는 어떤 엘리트가 되는지를 살피며 학교교육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과 일본사회에는 ‘유대’를 강조하는 봉건사회 전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입장’을 버리기 이토록 어렵다면, 차라리 ‘입장’을 지닌 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묻는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의 심성에 뿌리깊이 깔려 있는 ‘불성’에 기초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새로운 입장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다.
본문 가운데
언어가 엘리트를 만든다
현대사회에서 엘리트를 엘리트로 만드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엘리트를 휘감고 있는 언어 체계는 대단히 견고하여 일반인이 진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말과 글로 이루어진 세계는 하나부터 열까지 엘리트들이 지배하고 있다. 흔히 민중을 대표한다는 논객들도 일류 대학 출신이며, 자신의 논리를 엘리트의 언어로 펼친다. 민중은 그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민중의 말과 견해를 ‘담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나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국사회가 어떤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고 그들이 어떤 담론 전략을 구사하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일 거라고 생각한다. _한국어판 서문
엘리트들의 기만적인 화법
원전 사고 후 곤도 슌스케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은 자신들의 입장을 ‘외부자’라고 단언했으며, 스즈키 다츠지로 위원장 대리인도 ‘원자력위원회는 안전성에 대해 책임이 없다’며 웃는 얼굴로 발언한 바 있습니다. 중책을 맡는 사람들조차 이 정도니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와 연구자들의 방관적인 태도는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치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고인 양 담담하게 “일단 진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위의 발언을 반복하더군요. (…) 저는 그들의 화법, 발언, 결론 도출 방식에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알아챘고 이외에도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화법을 사용하는 집단은 제 주변, 다시 말해 ‘도쿄대’ 울타리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_1장 도쿄대식 화법이란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쯤 들어보신 적 있지요? 정부 부처의 부정부패가 드러나 고급 관료들이 국회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추궁을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표정하게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하고 답합니다. “아니, 그러면 대답할 수 있는 입장인 사람을 출두시켜주세요!” 하고 추궁하면 증인은 말을 흐립니다. 마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도 말아주세요’라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이처럼 ‘입장’이란 건 책임자라고 판단되어 국회에 출두한 사람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무엇입니다. 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개념이 이번 원전 사고에서도 몇몇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했습니다. _2장 ‘입장’이 사람보다 존중받는 사회
기만적인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
유년 시절부터 제대로 ‘훈육’받은 아이들은 특정 상황에서 ‘입장’을 분별해내는 독특한 감각을 일찍이 체득합니다. 이런 아이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는지를 압니다. 친구들과 사귀는 과정에서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누구를 적으로 돌리면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는지도 압니다. ‘처세술’이랄까요. 상대가 원하는 ‘답변’을 즉석에서 내놓는 능력이 점점 갖춰집니다. 이러한 능력을 갈고닦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일본의 수험제도입니다. 문제 출제자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조건반사의 속도로 이해하고 이에 어울리는 정답을 즉시 써내는 겁니다. 날마다 이런 훈련을 반복하여 기술을 숙달한 학생이 ‘도쿄대’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결코 머리가 좋은 학생이 도쿄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_5장 입장주의자의 행복 위장술
기만적인 삶의 결과, 황혼이혼
애당초 ‘입장’에서 출발해 한집에서 생활한 것이니 그 ‘입장’이 사라지면 이 생활을 지속할 이유도 없습니다. 얼른 퇴직금을 나눠 갖고 서로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황혼이혼’을 결심한 아내가 자주 하는, 바로 이런 말입니다. “좋은 아내를 연기하는 데 지쳤습니다.” 이 말은 바로 ‘입장상 부부’의 본질을 찌르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아내라는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것, 이제 정년퇴직으로 ‘입장’이 사라졌으니 그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온다는 것, 그보다도 지금까지 연기해온 자신이 한심했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겠지요. _5장 입장주의자의 행복 위장술
지은이 | 야스토미 아유미 安富涉
1963년 출생. 교토대 경제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고야대 정보문화학부 조교수,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소 정보학 교환교수를 거쳐 현재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민들레), 《단단한 삶》(유유), 《위험한 논어》(현암사), 《사는 힘을 길러 주는 경제학》, 《화폐의 복잡성》, 《복잡성을 살다》 등 20여 권이 있다. 자기 안의 여성성을 자각하면서 최근에 이름을 ‘아유무’에서 ‘아유미’로 바꾸었다.
옮긴이 | 박솔바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일본문화학과 졸업. 일본 히토츠바시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개풍관에서 우치다 타츠루 선생과 만난 뒤 선생의 저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앞으로 동아시아 시민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곤란한 결혼》,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를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서문 | 한국의 엘리트는 어떤 기만 언어를 구사하는가 5
여는 말 | 이어주는 끈, 동여매는 끈 15
1장 도쿄대식 화법이란 25
원전이 폭발해도 태평한 | 수소폭발을 필사적으로 얼버무리기 | 기만적이고 방관적인 화법 | 국가적 재난 때마다 등장하는 도쿄대식 화법 | 원전은 일본식 기만의 집합체 | 정명正名의 중요성 | 미디어를 폭주케 한 죄 | ‘우리나라’ 뒤에 숨기 |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럴싸하게 | 도쿄대식 화법의 공통 법칙 | 도쿄대식 화법의 모범 문서 | 논의를 유리하게 조작하는 화법 | 연막탄을 던지고 빠져나오기 | 비전문가와 희생양을 모욕하기 | 도쿄대 관계자들만 그러한가 | 3대 도쿄대 문화 | 권위에 의해 확산되는 것 | 관료어야말로 도쿄대식 화법
2장 ‘입장’이 사람보다 존중받는 사회 61
그들이 도쿄대식 화법을 구사하는 이유 | 책임을 분산시켜 회피하기 | 입장을 이유로 거짓말하는 어용학자 |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 ‘입장’이 사람보다 존중받다 | 입장을 철저히 주입하는 도쿄대 | 입장을 명확히 하면 유리해진다 | ‘날치기’라는 상투적 수단 | 기만적인 ‘입장 3대 원칙’ | ‘검은 조직’ 같은 도쿄대
3장 입장주의자의 탄생 83
입장의 원점 | ‘이에’로부터 분리되어 ‘입장’으로 | 감정을 버리고 사명감에 매진하기 |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일본사회 | 종신고용이 탄생한 배경 | 은행원 시절 느낀 의문 | 모든 비즈니스는 세관으로부터 | 관혼상제를 챙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입장사회 | 증식하는 책임과 역할 | 기술혁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입장사회 | 기술이 발전해도 사라지지 않는 절차 | 신입사원이 회사를 금방 그만두는 이유 | 오로지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 원자력위원회의 궤변과 조작 | 파견직, 비정규직은 입장 없는 신분 | 개인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잘못된 인연
4장 희생번트 정신 113
도쿄대식 화법으로 입장을 주입하기 | ‘민폐’를 끼친다는 것 | 비언어적 수법으로 살그머니 주입하기 | 입장이라는 의자에 앉아 마냥 무난한 삶으로 | 사축은 입장사회의 본질 | 회사원은 편하니까 | 죽일 수밖에 없는 감수성 | 사축을 권하는 도쿄대식 화법 | 야구는 입장의 스포츠 | 사축이라도 보람이 있다 | 직장인에게 체면은 없다 | 진퇴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장 | 총리도 역할일 뿐 | 무의미한 회의를 오래 끄는 이유 | 입장 조율을 위한 회의
5장 입장주의자의 행복 위장술 143
입장에 구속된 남자의 입버릇 | ‘아내가…’에서 ‘우리나라가…’로 | 입장부부와 황혼이혼 | 좋은 아내를 연기하기 | 도쿄대식 화법이 왜곡하는 입장 결혼 | ‘다 그런 거야’라는 속임수 | 현실 직시를 회피하기 | 탈선하는 상류층 자녀들 | 애정에 겁먹는 아이들 | ‘결혼은 행복’이라는 위험한 확신 | 디즈니랜드의 피곤한 행복 | 미국인의 행복 위장 공작과 가족사진 | 입장주의자를 기르는 일본의 수험제도 | 도쿄대생의 전성기 | 나의 장래성을 알아차린 여성 | 입장사회에서 여성이 성공하려면 | 입장주의자를 식별하는 방법
6장 도쿄대식 화법에 반격하기 173
가정부 미타와 도쿄대식 화법 | ‘알겠습니다’의 저력 | 엉터리를 충실히 실행함으로써 왜곡을 폭로하기 | 알리바이용 회의에 대처하는 법 | ‘그 정도까지’란 대체 어느 정도까지인가 | 기필코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 감쪽같이 바꿔치기 된 목적 | 기능 부전에 빠진 입장주의 | 불성에 뿌리 내린 새로운 입장주의의 가능성 | 도쿄대식 화법에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펴낸이의 말 |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까닭 199
이상한 나라의 엘리트
책 소개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의 안전성보다 자신의 직위 안전에 더 급급해하는 전문가들이 구사하는 기만적인 화법(저자는 이를 ‘도쿄대식 화법’이라 부른다)을 파헤친다. 저자는 학연과 지연으로 끈적끈적하게 엮인 엘리트 집단의 생태계를 ‘입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대중을 기만하는 그들의 행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엘리트들의 기만적인 화법에 속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한국과 일본사회에서 엘리트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저자의 분석대로,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학력에 의한 차별이 당연한, 그런 광기에 지배되는 ‘이상한 나라’이므로. 이들은 언어를 통해 사회를 기만하고 커다란 폐해를 끼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엘리트들이 보인 행태는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경주 지진 이후 크고 작은 원전 사고가 끊임없이 보도되는 가운데 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움직임 또한 번번이 드러나고 있다. 책임 회피에 여념이 없는 전문가들을 보면 일본의 그들과 판박이다.
이 책은 사회를 위기에 빠트리는 엘리트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러면 아이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본이나 한국처럼 경쟁적인 입시교육을 통해 엘리트를 길러내는 사회는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기만적인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도쿄대 교수인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도쿄대 입학생들이 어떤 학생들인지, 또 졸업 후에는 어떤 엘리트가 되는지를 살피며 학교교육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과 일본사회에는 ‘유대’를 강조하는 봉건사회 전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입장’을 버리기 이토록 어렵다면, 차라리 ‘입장’을 지닌 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묻는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의 심성에 뿌리깊이 깔려 있는 ‘불성’에 기초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새로운 입장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다.
본문 가운데
언어가 엘리트를 만든다
현대사회에서 엘리트를 엘리트로 만드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엘리트를 휘감고 있는 언어 체계는 대단히 견고하여 일반인이 진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말과 글로 이루어진 세계는 하나부터 열까지 엘리트들이 지배하고 있다. 흔히 민중을 대표한다는 논객들도 일류 대학 출신이며, 자신의 논리를 엘리트의 언어로 펼친다. 민중은 그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민중의 말과 견해를 ‘담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나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국사회가 어떤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고 그들이 어떤 담론 전략을 구사하는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일 거라고 생각한다. _한국어판 서문
엘리트들의 기만적인 화법
원전 사고 후 곤도 슌스케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은 자신들의 입장을 ‘외부자’라고 단언했으며, 스즈키 다츠지로 위원장 대리인도 ‘원자력위원회는 안전성에 대해 책임이 없다’며 웃는 얼굴로 발언한 바 있습니다. 중책을 맡는 사람들조차 이 정도니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와 연구자들의 방관적인 태도는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치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고인 양 담담하게 “일단 진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위의 발언을 반복하더군요. (…) 저는 그들의 화법, 발언, 결론 도출 방식에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알아챘고 이외에도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화법을 사용하는 집단은 제 주변, 다시 말해 ‘도쿄대’ 울타리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_1장 도쿄대식 화법이란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쯤 들어보신 적 있지요? 정부 부처의 부정부패가 드러나 고급 관료들이 국회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추궁을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표정하게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하고 답합니다. “아니, 그러면 대답할 수 있는 입장인 사람을 출두시켜주세요!” 하고 추궁하면 증인은 말을 흐립니다. 마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도 말아주세요’라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이처럼 ‘입장’이란 건 책임자라고 판단되어 국회에 출두한 사람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무엇입니다. 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개념이 이번 원전 사고에서도 몇몇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했습니다. _2장 ‘입장’이 사람보다 존중받는 사회
기만적인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
유년 시절부터 제대로 ‘훈육’받은 아이들은 특정 상황에서 ‘입장’을 분별해내는 독특한 감각을 일찍이 체득합니다. 이런 아이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는지를 압니다. 친구들과 사귀는 과정에서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누구를 적으로 돌리면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는지도 압니다. ‘처세술’이랄까요. 상대가 원하는 ‘답변’을 즉석에서 내놓는 능력이 점점 갖춰집니다. 이러한 능력을 갈고닦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일본의 수험제도입니다. 문제 출제자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조건반사의 속도로 이해하고 이에 어울리는 정답을 즉시 써내는 겁니다. 날마다 이런 훈련을 반복하여 기술을 숙달한 학생이 ‘도쿄대’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결코 머리가 좋은 학생이 도쿄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_5장 입장주의자의 행복 위장술
기만적인 삶의 결과, 황혼이혼
애당초 ‘입장’에서 출발해 한집에서 생활한 것이니 그 ‘입장’이 사라지면 이 생활을 지속할 이유도 없습니다. 얼른 퇴직금을 나눠 갖고 서로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황혼이혼’을 결심한 아내가 자주 하는, 바로 이런 말입니다. “좋은 아내를 연기하는 데 지쳤습니다.” 이 말은 바로 ‘입장상 부부’의 본질을 찌르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아내라는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것, 이제 정년퇴직으로 ‘입장’이 사라졌으니 그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온다는 것, 그보다도 지금까지 연기해온 자신이 한심했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겠지요. _5장 입장주의자의 행복 위장술
지은이 | 야스토미 아유미 安富涉
1963년 출생. 교토대 경제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동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고야대 정보문화학부 조교수,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소 정보학 교환교수를 거쳐 현재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민들레), 《단단한 삶》(유유), 《위험한 논어》(현암사), 《사는 힘을 길러 주는 경제학》, 《화폐의 복잡성》, 《복잡성을 살다》 등 20여 권이 있다. 자기 안의 여성성을 자각하면서 최근에 이름을 ‘아유무’에서 ‘아유미’로 바꾸었다.
옮긴이 | 박솔바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일본문화학과 졸업. 일본 히토츠바시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개풍관에서 우치다 타츠루 선생과 만난 뒤 선생의 저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앞으로 동아시아 시민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곤란한 결혼》,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를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서문 | 한국의 엘리트는 어떤 기만 언어를 구사하는가 5
여는 말 | 이어주는 끈, 동여매는 끈 15
1장 도쿄대식 화법이란 25
원전이 폭발해도 태평한 | 수소폭발을 필사적으로 얼버무리기 | 기만적이고 방관적인 화법 | 국가적 재난 때마다 등장하는 도쿄대식 화법 | 원전은 일본식 기만의 집합체 | 정명正名의 중요성 | 미디어를 폭주케 한 죄 | ‘우리나라’ 뒤에 숨기 |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럴싸하게 | 도쿄대식 화법의 공통 법칙 | 도쿄대식 화법의 모범 문서 | 논의를 유리하게 조작하는 화법 | 연막탄을 던지고 빠져나오기 | 비전문가와 희생양을 모욕하기 | 도쿄대 관계자들만 그러한가 | 3대 도쿄대 문화 | 권위에 의해 확산되는 것 | 관료어야말로 도쿄대식 화법
2장 ‘입장’이 사람보다 존중받는 사회 61
그들이 도쿄대식 화법을 구사하는 이유 | 책임을 분산시켜 회피하기 | 입장을 이유로 거짓말하는 어용학자 | 대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 ‘입장’이 사람보다 존중받다 | 입장을 철저히 주입하는 도쿄대 | 입장을 명확히 하면 유리해진다 | ‘날치기’라는 상투적 수단 | 기만적인 ‘입장 3대 원칙’ | ‘검은 조직’ 같은 도쿄대
3장 입장주의자의 탄생 83
입장의 원점 | ‘이에’로부터 분리되어 ‘입장’으로 | 감정을 버리고 사명감에 매진하기 |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일본사회 | 종신고용이 탄생한 배경 | 은행원 시절 느낀 의문 | 모든 비즈니스는 세관으로부터 | 관혼상제를 챙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입장사회 | 증식하는 책임과 역할 | 기술혁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입장사회 | 기술이 발전해도 사라지지 않는 절차 | 신입사원이 회사를 금방 그만두는 이유 | 오로지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 원자력위원회의 궤변과 조작 | 파견직, 비정규직은 입장 없는 신분 | 개인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잘못된 인연
4장 희생번트 정신 113
도쿄대식 화법으로 입장을 주입하기 | ‘민폐’를 끼친다는 것 | 비언어적 수법으로 살그머니 주입하기 | 입장이라는 의자에 앉아 마냥 무난한 삶으로 | 사축은 입장사회의 본질 | 회사원은 편하니까 | 죽일 수밖에 없는 감수성 | 사축을 권하는 도쿄대식 화법 | 야구는 입장의 스포츠 | 사축이라도 보람이 있다 | 직장인에게 체면은 없다 | 진퇴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장 | 총리도 역할일 뿐 | 무의미한 회의를 오래 끄는 이유 | 입장 조율을 위한 회의
5장 입장주의자의 행복 위장술 143
입장에 구속된 남자의 입버릇 | ‘아내가…’에서 ‘우리나라가…’로 | 입장부부와 황혼이혼 | 좋은 아내를 연기하기 | 도쿄대식 화법이 왜곡하는 입장 결혼 | ‘다 그런 거야’라는 속임수 | 현실 직시를 회피하기 | 탈선하는 상류층 자녀들 | 애정에 겁먹는 아이들 | ‘결혼은 행복’이라는 위험한 확신 | 디즈니랜드의 피곤한 행복 | 미국인의 행복 위장 공작과 가족사진 | 입장주의자를 기르는 일본의 수험제도 | 도쿄대생의 전성기 | 나의 장래성을 알아차린 여성 | 입장사회에서 여성이 성공하려면 | 입장주의자를 식별하는 방법
6장 도쿄대식 화법에 반격하기 173
가정부 미타와 도쿄대식 화법 | ‘알겠습니다’의 저력 | 엉터리를 충실히 실행함으로써 왜곡을 폭로하기 | 알리바이용 회의에 대처하는 법 | ‘그 정도까지’란 대체 어느 정도까지인가 | 기필코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 감쪽같이 바꿔치기 된 목적 | 기능 부전에 빠진 입장주의 | 불성에 뿌리 내린 새로운 입장주의의 가능성 | 도쿄대식 화법에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펴낸이의 말 |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까닭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