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도서

살아 있는 학교 어떻게 만들까

살아 있는 학교 어떻게 만들까

  • 저자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 역자 조응주  
  • 발간일 2005년 1월  
  • ISBN 89-88613-13-9  
  • 책값 12,000원 


교사와 아이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삼십 년 넘게 아이들을 만나면서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긴
[프리스쿨]의 저자 크리스가
미국 곳곳에 있는 좋은 학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확인한
좋은 학교 만들기의 노하우를 기록한 생생한 현장 보고서입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부터 신생 학교까지
큰 학교, 작은 학교, 공립학교, 사립학교를 막론하고
아이들과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진정한 배움터를 만들겠다는 꿈을
살아 있는 현실로 일구어낸 개인과 집단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차례

펴낸이의 말: 천리길도 한 걸음 속에
한국의 독자에게: 함께 걷는 길

들어가며: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1부 살아 있는 학교 가꾸기

1장 어떤 학교가 살아 있는 학교인가?
2장 살아 있는 학교의 뿌리 알기
3장 밭 일구기
4장 씨 뿌리기
5장 싹 틔우기
6장 가꾸기
7장 수확하기

2부 살아 있는 학교들이 걸어온 길

1장 마을학교
2장 리버티 스쿨
3장 제퍼슨 카운티 열린학교
4장 메트로폴리탄 학습센터
5장 얼터너티브 커뮤니티 스쿨
6장 메트스쿨
7장 뉴올리언스 프리스쿨
8장 크로스로즈 스쿨
9장 아서 모건 스쿨
10장 플레이 마운틴 플레이스
11장 이스트힐 농장학교
12장 클롱라라 스쿨과 홈스쿨링 프로그램
13장 패스파인더 센터
14장 커뮤니티 스쿨

맺음말: 이야기는 계속된다


펴낸이의 말

천리길도 한 걸음 속에

[가르쳐야만 배운다.] 이 낡은 패러다임은 이제 깨어지고 있습니다. 학교가 그 패러다임을 고수한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야 할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낡은 방식으로 가르치려 드는 학교는 더 이상 존재 가치를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것을 배울 줄 아는 능력,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그 능력은 사실상 모든 아이들이 타고나는 것이지요. 그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으뜸가는 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학교를 만들기도 하고, 기존의 학교를 바꾸어가기도 하고, 학교 바깥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도 있지요.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작은 등불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미국 사회와 우리 사회의 문화가 다르고 생활 환경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먼저 앓아온 사회가 찾아낸 처방법을 참고하는 것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피부색이 어떻든 사람의 본성은 다르지 않기에 교육의 본질 또한 다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 모든 아이들이 가슴 깊이 품고 있는 소망 아닐까요? 자기를 발견하고 실현하고 싶은 욕구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나는 것이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 할 일 아닐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양하듯이 삶도 다양하고, 학교 또한 다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다름]과 [틀림], [통일]과 [획일]을 혼동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미국 사회에도 여전히 분리와 차별이 존재하고, 국민 통일을 위한 획일적인 교육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학교교육이 아이들보다는 국가를 위해 짜여졌고,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미국 사회나 우리 사회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교육 영역에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학교들은 그런 노력의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벤처 정신에 익숙한 이들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 또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문제를 먼저 겪은 사회에서 그들 사회의 미래를 걸고 시도하는 실험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적인 교육을 시도하는 많은 학교와 단체, 개인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적지 않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은이도 말했듯이 이 책이 매뉴얼이 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강물이 지도 없이도 바다에 이르듯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 길이 되어야겠지요. 갈 길이 아득한 것 같지만, 천리길도 한 걸음 ‘속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발 밑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길을 잃거나 지레 지쳐 주저앉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이들의 좋은 길동무가 되기를 빕니다.(펴낸이 현병호)



한국의 독자에게

함께 걷는 길

2003년 12월, 저는 민들레출판사와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의 초청으로 대안교육에 관한 강연을 하러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교보생명 건물 10층 대강당이 전국에서 모여든 교육운동가, 지역활동가, 교사, 학생들로 빈 좌석이 거의 없을 만큼 꽉 들어찼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의 의욕과 패기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사람들의 토론을 들으면서 한국에서도 어떤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아이들의 삶과 미래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날로 심해지는 경직성과 압박감 때문에 생겨난 균열 속으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빠져들고 있는 지금의 교육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사흘 동안 강연회에 참석했던 단체 중에서 세 곳을 둘러볼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서울 마포, 남원, 대전에서 만난 활동가들의 에너지와 헌신적인 자세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는 원기 충천해서 귀국했습니다. 한국에서 싹트고 있는 교육혁명의 소식을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몇 십 개의 대안학교와 계획 단계에 있는 새로운 학교들, 공교육 안에서 시도되는 참신한 실험들,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홈스쿨운동, [학습자 중심의 교육 방식], [열린 교육], [전인교육], [관계를 기반으로 한 배움] 같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표현들, 입시 지옥에 시달리지 않고도 당당히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 한국에 이 모든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한국의 이러한 모습은 이른바 주류 교육의 대안을 창조하려는 세계 곳곳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교육모델은 실제로 뇌가 학습하는 방법이나 아이들의 정서적, 영적 욕구보다는 경제라는 거대한 기계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췄었습니다.

우리의 교육운동은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철학자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이 말했듯이, [아이들은 우리가 보지 못할 시대로 보내는 살아 있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교육 실험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데 부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너무나 분명한 메시지를 우리 함께 전파합시다.

2004년 12월 뉴욕 알바니에서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드림


머리글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오늘날 근대교육의 딱딱하게 얼어붙은 표면 위로 수천 개의 작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그 틈새로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여기저기서 싹트고 있다. 아이들의 흥미는 뒷전으로 밀쳐두는 획일적인 기관에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맡겨 놓아서는 아이의 능력이 충분히 개발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학부모, 교사, 멘토, 지역운동가로서 교육에 개입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색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하는 이러한 학교들은 1960∼1970년대의 저항문화운동 시기부터 명맥을 유지해왔거나 그보다 더 이른 20세기 초에 뿌리를 내린 비슷한 학교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들어서 교육운동가들이 수많은 작은 학교들을 설립했는데, 그 중에 사라진 학교들도 많지만,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학교들도 적지 않다. 단순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진실로 살아 있는 학교들이다. 그러나 살아 남은 학교들이나 사라져간 학교들이나 다 같이 근대교육을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는 공립학교 안에서도 깜짝 놀랄 만한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근래에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차터스쿨Charter School(협약charter에 따라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민간이 지역 특성에 맞게 교과과정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공립학교-옮긴이)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대규모 학교개혁 노력의 최신작인 차터스쿨은 현재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2003년 현재, 42개 주에서 차터스쿨 관련법을 제정했고, 워싱턴 주를 비롯한 37개 주에는 3천 개가 넘는 차터스쿨이 설립되어 총 70만 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차터스쿨 재학생 수는 40퍼센트나 증가했다.

한편 차터스쿨은 아니지만 어떤 대안학교 못지 않은 공립학교들도 있다. 메트스쿨Met school 같은 대안적인 공립학교들이 늘어가는 한편에는 리버티 스쿨Liberty school 같이 공적 지원을 받는 독립학교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순수 민간 영역의 대안학교들도 많이 있는데, 대부분 비영리 사립학교로서 지역사회로부터 물심 양면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미국 홈스쿨링연구소National Home Education Research Institute가 2003년 2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취학 아동의 3퍼센트에 가까운 150∼190만 명의 아이들이 가정이나 가정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또한 이러한 아이들이 해마다 7∼18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학부모들이 기술, 자원, 책임을 함께 나누고,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홈스쿨링 네트워크나 센터를 만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교육의 확산에 이바지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1,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좋은 학교의 주요 특성을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이러한 특성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역사를 되짚어본다. 그러고 나서 좋은 학교의 특성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 단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1부를 마무리한다.
2부는 독창적인 학교와 학습기관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서부터 신생 학교, 큰 학교, 작은 학교, 공립학교, 사립학교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다양성을 추구했고, 가능하면 학교 설립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이 이야기들에는 심오한 지혜가 담겨 있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학습환경을 만들겠다는 이상을 살아 있는 현실로 일구어낸 개인 또는 집단의 고유한 역사라고 하겠다. 이 이야기들에는 또한 무한한 감동이 담겨 있다. 거의 모든 설립자들이 관습을 뛰어넘어 오지를 탐험하듯 제대로 된 지도도 없이 위험천만한 여울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감으로 항해했고, 항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행운과 의미심장한 우연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들이 이른바 성공 사례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에서도 많은 교훈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이 책 곳곳에 ‘싹트다’, ‘가꾸다’ 같은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의 육체적, 지적, 정서적,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좋은 학습환경은 정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정원처럼 씨앗, 다시 말해 더 나은 방법에 대한 이상에서 출발한다. 그 씨앗은 곧 싹이 되고, 그 싹은 정성스럽게 가꿔줘야만 계속 생장하여 행복하고 유능하고 결단력 있고 자주적인 젊은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원예 용어로 학교를 묘사하는 또 다른 까닭은 도심 빈민가 프리스쿨에서 교사 겸 운영자로 삼십 년 넘게 활동하는 동안 줄곧 원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치고 정원을 가꾸면서, 식물과 아이들의 성장 요건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식물과 아이 둘 다 사랑과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따스함과 햇살과 탁 트인 공간을 원하고, 칭찬과 존중에 목말라 한다. 식물이든 아이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라게 놔둬야 하지만, 동시에 침입자나 유독성 자극에서 보호해줘야 한다. 그리고 식물과 아이 둘 다 합성 화학제품을 써서 발육을 조절해서는 안 된다.
정원을 가꾸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식물의 가능성을 꽃피우기 위해 24시간 보살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정원의 조건이 알맞고 모든 요소가 제대로 갖춰져 있으면, 원예가는 잡초를 뽑아주고 뿌리를 덮어주고 물을 주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다. 가만히 관찰하고 인내심을 가지면 된다.
식물이 튼튼하게 자라지 않을 때는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증상, 예를 들어 잎사귀의 색이 변한다거나, 벌레가 들끓는다거나, 꽃이 피지 않는다거나 하는 증상들이 있다. 이러한 증상은 각각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토양에 꼭 필요한 요소가 부족할지도 모르고, 토양이 지나치게 산성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물과 햇볕을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받았는지도 모른다. 원예가의 몫은 증상을 제대로 분석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저 식물을 바라보고 자라기를 기다려주면 된다. 물론 칭찬도 해줘야 한다. 식물이 가꾸는 사람의 애정을 감지하기 때문인데, 이는 철저한 실험을 통해 입증된 과학적 사실이다.
식물을 가꾸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재촉한다고 해서 더 빨리 성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은 자기만의 때에 따라 성장한다. 원예가에게는 조바심이 어울리지 않는다. 원예가가 조바심을 내면 식물도 덩달아 조바심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장이 오히려 늦춰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배움은 사과가 익어가거나 장미가 피어나는 것처럼 자연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최첨단 기술과 더 높은 기준에 대한 강박관념이 지배하는 오늘날, 이 진리는 잊혀지기 십상이다. 사실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배움을 시작한다. 엄마의 자궁이 첫 학교인 셈이다. 태아는 엄마가 느끼는 감정과 주변의 아득한 소리를 감지하여 아직 보지 못한 바깥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여러분이 기대하는 전형적인 입문서가 아니다. 사실 나는 그런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무슨무슨 방법을 가르치는 책들이 옷장에 걸린 옷걸이처럼 서점의 서가를 가득 메우는 현상은 갈수록 커져가는 우리 본능과의 괴리를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능력을 신뢰하는 대신 이른바 전문가의 충고에 조건반사적으로 기대게끔 교육받았다. 다루기 힘든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실수만큼 좋은 안내자가 없는데, 우리는 실수를 범하는 위험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해답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고질병은 이 책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의 이면에도 도사리고 있다. 이 고질병이 가장 극성을 부리는 분야가 바로 교육제도, 그리고 교육제도의 원천이자 산물인 학교인 것이다. 이반 일리히Ivan Illich가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 지적했듯이, 전통적 교육모델의 궁극적이고 가장 교묘한 결과는 우리의 지성 자체가 학습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신념,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사고 과정이 외부의 검증을 받아야만 유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는 이러한 문화를 거울처럼 단순하게 반영하기만 한다. 일종의 악순환이다.
나는 이런 식의 교육을 지속시키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력을 갖추고 행복해지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터득하도록 돕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또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공식公式으로 접근하거나 대량으로 복제하고 그 복제판을 재탕, 삼탕하는 것은 더 이상 쓸모없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 책은 청사진이나 비법을 전수하려고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가능성이라는 예술의 탐구, 참고서, 자신감 강화제, 고장 수리 설명서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도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학교라는 인위적인 구조의 신화를 해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다. 학교는 환상의 장막 뒤에 숨은 오즈의 마법사처럼 자신을 신비하고 위압적인 존재로 부풀려왔다. 나는 그 장막을 걷어내어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간단한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그래서 교육을 곳간 열쇠인양 움켜쥐고 있는 전문가와 관료와 학자들에게서 되찾아왔으면 좋겠다.

전제를 말했으니 이제부터 학교를 키우는 방법을 다루는 글에 숨겨져 있는 역설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시작해보겠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역설은 빌 아니Bill Arney가 『자유를 위한 교육Educating for Freedom』에서 말한 ‘교수법의 역설’이다. 아니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 역설을 설명한다. “자유를 가르치면서 어떻게 학생의 의지와 지능에 은근히 고삐를 당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새롭고 독창적인 학교 만들기를 논하면서 어떻게 내가 내린 처방을 따르라고 종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설은 본디 해결책을 거부한다. 대신 모순으로 점철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늘 그 역설을 마음에 새겨둘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