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을 위협하는 교육의 대안을 찾아
개토가 제기하는 교육문제의 본질은 인간성에 대한 위협이다. 아이들의 삶에 가혹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가하는 교육제도. 어떤 명분이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뒷받침해 주는가? 정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암기하고, 더 많은 문제를 풀고・・・ 계량적으로 비교되는 이런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이다.
근래에 꼬리를 물고 있는 비인간적인 범죄는 개토의 지적에 새삼 주목하게 한다. 소외된 자들의 분노는 단순한 충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기성 체제에 대한 조직적인 적대 행위로 치닫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정말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모든 타인은 경쟁의 대상이다. 그들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실패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규칙만 지켰으면 패자에게 미안해 할 필요 없다. 내 재산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보다 더 열심히 가르쳐 주는 곳이 있는가? 학교에서 이것들보다 더 열심히 가르치는 내용이 있는가?
의무교육을 권리교육으로 대체해야 한다
근대화를 위한 표준화의 시대는 갔다. 사회구성원들이 인간의 본성을 억눌린 채 저항 없이 복종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성이 높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체제는 오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억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제는 경쟁력을 위해서도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표준이 아닌 독특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토의 방안은 명쾌하다. ‘의무교육’을 ‘권리교육’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 내용이 교육기관과 피교육자 사이의 합의와 선택에 따라 정해지도록 하고 정부는 필요한 지원을 요구에 따라 제공하는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개토가 제시하는 교육 형태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자발성을 북돋우는 것이다. 그런 교육을 통해서 독립성과 책임감이 강한 시민이 양성될 것이다.
아이들의 타고난 천재성을 가로막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저자는 30여 년 동안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일하며, 교사로서 자신이 아이들의 능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싹을 잘라버리라고 고용된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다.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은 특정 교과목이 아니라 학교제도의 신화와 신분제도에 근거한 경제체제의 신화를 공고히 하는, ‘보이지 않는 교과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뉴욕에서 ‘올해의 교사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저자가 수상소감을 밝히는 자리를 위해 쓴 연설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지만 제도의 추상적 논리가 이들 개개인의 노력을 압도해버리는 제도의 불합리함을 고발한다. 수업종을 아이들에게 맞히는 ‘무관심의 예방접종’에 비유하는 등 저자의 남다른 통찰력이 돋보인다.
저자는 평생 교사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자랑하기보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가 고안해낸 ‘게릴라식 수업’ 이야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인류가 스스로를 가르치기 위해 활용해왔던 원료를 최대한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 원료는 바로 혼자만의 시간, 선택의 기회, 감시로부터의 자유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교사나 교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자신의 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개정판 안내
『바보 만들기』는 1992년에 초판이 나온 뒤 우리 나라에는 1994년에 처음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번역으로 푸른나무출판사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 책은 『탈학교 사회』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일찍 나왔는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2년 10주년 기념판을 내면서 저자의 흥미진진한 후기와 토마스 무어의 서문을 덧붙였는데, 한국어 초판본은 그 책을 옮긴 것이다. 개정판은 2005년 영문판 펴낸이의 새로운 글이 추가된 판본을 옮긴 것으로, 탁월한 동시통역사이자 번역가인 조응주 씨가 연설문의 생생함을 되살려 우리말로 다시 옮겼다.
본문 가운데
수업종은 그 어떤 일도 매듭지을 만한 가치가 없으니 너무 깊은 관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십수 년 수업종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웬만큼 기가 센 아이가 아닌 이상 세상에 정말 중요한 일이란 없다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_1장. 학교의 일곱 가지 가르침 중
학교교육을 잘 받은 아이는 비판적 사고를 못하고 제대로 논쟁할 줄 모릅니다. _2장. 학교의 악몽 중
지금의 비극을 막으려면, 우리 모두 학교에 대해 깨달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학교는 아이들을 길들인다는 의미의 ‘스쿨링’은 아주 잘하지만 ‘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학교라는 제도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요. 수준 낮은 교사 탓도, 부족한 예산 탓도 아닙니다. _3장. 학교라는 사이코패스 중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가르치는 법을 배운 곳, 어린 나이에도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요구받음으로써 노동의 소중함을 배운 곳, 강과 그 강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만든 일상 속에서 스스로 모험을 찾아내는 법을 배운 곳, 제 고향 모농가헬라는 제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_4장. 그리운 고향 모농가헬라 중
우리가 지금의 학교와 공동체의 위기를 직시하여 더 나은 길을 찾길 바란다면, 우선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이 상당 부분 조직으로서의 학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학교교육을 늘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줄여야 합니다. _ 5장. 학교는 축소되어야 한다 중
우리는 너무 작은 화분에 심어진 식물처럼 성장하지도 성숙해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생활에 중독되었습니다. 우리의 미성숙이 낳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마치 선생님이 나타나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_6장.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 중
효율적 관리는 관리 대상이 불완전한 인간이어야만 가능합니다. 온전한 인간, 또는 온전함을 지향하는 인간은 타인의 과도한 개입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람은 성장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 완전한 통제의 취지가 삶의 질 개선이든 뭐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_후기. 십 년 뒤에 덧붙이는 이야기 중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근대교육의 조종(弔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종이 울리기 시작한 지는 이미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만큼 잠이 깊은 때문이리라.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정신차리게 해서 학교에 묶어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아이들은 모름지기 어른 말 잘 듣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낫다고 우기는 이들, 그러면서 또한 우등상이 곧 우수함을 증명한다고 믿는 이들, 일류대 졸업장이 인생의 보증수표라도 되는 듯이 여기는 이들 모두 아직도 잠이 덜 깬 것이다.
예민한 이들은 벌써 백 년도 더 이전부터 근대교육의 틀을 깨뜨리고자 애를 써왔다. 톨스토이가 그러했고 페레, 니일, 슈타이너, 프레네가 그러했다. 이제는 웬만큼 둔한 이들도 그 굳은 틀의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숨통을 찾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근대교육의 낡은 틀을 보수하고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이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지를. 근대교육의 조종 소리를 아직도 듣지 못했거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이들은 아마도 그 소리가 자신의 밥그릇 깨어지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 아닐까.
“… …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므로.” 존던의 싯귀는 사실상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의 패러다임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음을, 모두는 하나임을 우리는 이제 깨달아가고 있다. 그러나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이나 자연만이 아니다. 모든 사상, 모든 제도 또한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이며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죽으면서 또한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사실상 모든 조종은 탄생을 알리는 종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하는 것은 생명만이 아니며, 모든 사상과 제도 또한 그렇다. 근대교육의 조종은 이미 이백 년 전부터 울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귀가 어두운 사람들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른 것이리라. 역사의 흐름에서 근대교육은 그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생명이 다한 것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가도록 두자. 그 종소리는 우리들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이자 또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우리들을 위하여 종은 울리는 것이니! 바로 우리의 죽음과 탄생을 위하여….
1970년 즈음부터 일리치의 『탈학교 사회』를 비롯해 근대교육의 조종을 울리는 쟁쟁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 책 『바보 만들기』는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을 쓴 존 개토는 삼십 년 가까이 미국의 심장부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심지어 뉴욕 주 ‘올해의 교사’ 상을 연거푸 받았다. 학교제도에 대한 직격탄에 가까운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상을 받는 자리에서 연설하기 위해 밤을 새워 쓴 것들이다. 개토는 그 연설문을 쓰게 된 계기가 자신이 가르쳤던 한 제자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듯이 ‘학교제도의 톱니바퀴에 모래를 끼얹으며’ 게릴라 학습을 해 온 결과일 것이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의 학교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받아온 학교교육의 원본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다. 국민 통합을 위해 미국이 프러시아에서 빌려온 학교제도를 일본이 모방하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식되면서 근대교육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 문제의 진짜 뿌리는 거기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학교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가능성을 매장당한 채 그저 밥벌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이 되는 현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국가들이라면 똑같이 겪는 비극이다.
개토는 이 책에서 학교의 숨겨진 교육과정이 사실은 ‘바보 만들기 과정’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학교교육을 더 많이, 더 잘 받은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하고 살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봉사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물신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개토가 가리키는 그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니다. 돈이 더 필요한 길도 아니다. 교육 예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맞닥뜨린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답을 찾는 지름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다. 이 책에서 개토가 짤막하게 소개하는 게릴라식 학습법에 대해서는 『학교의 배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거대한 학교 시스템 속 하나의 톱니바퀴 같은 처지에 있는 교사라 할지라도 스스로 숨통을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002년 10주년 기념판을 내면서 저자의 흥미진진한 후기와 토마스 무어의 서문이 추가되었고, 영문판 펴낸이의 새로운 글이 덧붙여졌다. 이 판본을 탁월한 동시통역가이자 번역가인 조응주 씨가 현장에서 개토의 연설을 듣는 듯 실감 나게 우리말로 다시 옮겼다. 아무쪼록 이 책이 이 땅의 교육이 거듭나는 데 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7년 8월
현병호
차례
머리말 | 바닥에서 다시 출발하기·006
영문판 펴낸이의 말 | 함께 걸어갈 길·012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028
들어가는 이야기 | 걸어온 길·033
1장. 학교의 일곱 가지 가르침·043
2장. 학교의 악몽·071
3장. 학교라는 사이코패스·089
4장. 그리운 고향 모농가헬라·111
5장. 학교는 축소되어야 한다·129
6장.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167
후기 | 십 년 뒤에 덧붙이는 이야기·201
옮긴이의 말 |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힘·216
바보 만들기
인간성을 위협하는 교육의 대안을 찾아
개토가 제기하는 교육문제의 본질은 인간성에 대한 위협이다. 아이들의 삶에 가혹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가하는 교육제도. 어떤 명분이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뒷받침해 주는가? 정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암기하고, 더 많은 문제를 풀고・・・ 계량적으로 비교되는 이런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이다.
근래에 꼬리를 물고 있는 비인간적인 범죄는 개토의 지적에 새삼 주목하게 한다. 소외된 자들의 분노는 단순한 충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기성 체제에 대한 조직적인 적대 행위로 치닫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정말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모든 타인은 경쟁의 대상이다. 그들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실패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규칙만 지켰으면 패자에게 미안해 할 필요 없다. 내 재산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보다 더 열심히 가르쳐 주는 곳이 있는가? 학교에서 이것들보다 더 열심히 가르치는 내용이 있는가?
의무교육을 권리교육으로 대체해야 한다
근대화를 위한 표준화의 시대는 갔다. 사회구성원들이 인간의 본성을 억눌린 채 저항 없이 복종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성이 높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체제는 오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억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제는 경쟁력을 위해서도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표준이 아닌 독특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토의 방안은 명쾌하다. ‘의무교육’을 ‘권리교육’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 내용이 교육기관과 피교육자 사이의 합의와 선택에 따라 정해지도록 하고 정부는 필요한 지원을 요구에 따라 제공하는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개토가 제시하는 교육 형태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자발성을 북돋우는 것이다. 그런 교육을 통해서 독립성과 책임감이 강한 시민이 양성될 것이다.
아이들의 타고난 천재성을 가로막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저자는 30여 년 동안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일하며, 교사로서 자신이 아이들의 능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싹을 잘라버리라고 고용된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다.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은 특정 교과목이 아니라 학교제도의 신화와 신분제도에 근거한 경제체제의 신화를 공고히 하는, ‘보이지 않는 교과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뉴욕에서 ‘올해의 교사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저자가 수상소감을 밝히는 자리를 위해 쓴 연설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지만 제도의 추상적 논리가 이들 개개인의 노력을 압도해버리는 제도의 불합리함을 고발한다. 수업종을 아이들에게 맞히는 ‘무관심의 예방접종’에 비유하는 등 저자의 남다른 통찰력이 돋보인다.
저자는 평생 교사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자랑하기보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가 고안해낸 ‘게릴라식 수업’ 이야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인류가 스스로를 가르치기 위해 활용해왔던 원료를 최대한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 원료는 바로 혼자만의 시간, 선택의 기회, 감시로부터의 자유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교사나 교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자신의 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개정판 안내
『바보 만들기』는 1992년에 초판이 나온 뒤 우리 나라에는 1994년에 처음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번역으로 푸른나무출판사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 책은 『탈학교 사회』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일찍 나왔는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2년 10주년 기념판을 내면서 저자의 흥미진진한 후기와 토마스 무어의 서문을 덧붙였는데, 한국어 초판본은 그 책을 옮긴 것이다. 개정판은 2005년 영문판 펴낸이의 새로운 글이 추가된 판본을 옮긴 것으로, 탁월한 동시통역사이자 번역가인 조응주 씨가 연설문의 생생함을 되살려 우리말로 다시 옮겼다.
본문 가운데
수업종은 그 어떤 일도 매듭지을 만한 가치가 없으니 너무 깊은 관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십수 년 수업종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웬만큼 기가 센 아이가 아닌 이상 세상에 정말 중요한 일이란 없다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_1장. 학교의 일곱 가지 가르침 중
학교교육을 잘 받은 아이는 비판적 사고를 못하고 제대로 논쟁할 줄 모릅니다. _2장. 학교의 악몽 중
지금의 비극을 막으려면, 우리 모두 학교에 대해 깨달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학교는 아이들을 길들인다는 의미의 ‘스쿨링’은 아주 잘하지만 ‘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학교라는 제도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요. 수준 낮은 교사 탓도, 부족한 예산 탓도 아닙니다. _3장. 학교라는 사이코패스 중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가르치는 법을 배운 곳, 어린 나이에도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요구받음으로써 노동의 소중함을 배운 곳, 강과 그 강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만든 일상 속에서 스스로 모험을 찾아내는 법을 배운 곳, 제 고향 모농가헬라는 제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_4장. 그리운 고향 모농가헬라 중
우리가 지금의 학교와 공동체의 위기를 직시하여 더 나은 길을 찾길 바란다면, 우선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이 상당 부분 조직으로서의 학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학교교육을 늘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줄여야 합니다. _ 5장. 학교는 축소되어야 한다 중
우리는 너무 작은 화분에 심어진 식물처럼 성장하지도 성숙해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생활에 중독되었습니다. 우리의 미성숙이 낳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마치 선생님이 나타나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_6장.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 중
효율적 관리는 관리 대상이 불완전한 인간이어야만 가능합니다. 온전한 인간, 또는 온전함을 지향하는 인간은 타인의 과도한 개입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통제를 받는 사람은 성장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 완전한 통제의 취지가 삶의 질 개선이든 뭐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_후기. 십 년 뒤에 덧붙이는 이야기 중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근대교육의 조종(弔鐘)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종이 울리기 시작한 지는 이미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만큼 잠이 깊은 때문이리라.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정신차리게 해서 학교에 묶어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아이들은 모름지기 어른 말 잘 듣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낫다고 우기는 이들, 그러면서 또한 우등상이 곧 우수함을 증명한다고 믿는 이들, 일류대 졸업장이 인생의 보증수표라도 되는 듯이 여기는 이들 모두 아직도 잠이 덜 깬 것이다.
예민한 이들은 벌써 백 년도 더 이전부터 근대교육의 틀을 깨뜨리고자 애를 써왔다. 톨스토이가 그러했고 페레, 니일, 슈타이너, 프레네가 그러했다. 이제는 웬만큼 둔한 이들도 그 굳은 틀의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숨통을 찾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근대교육의 낡은 틀을 보수하고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이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지를. 근대교육의 조종 소리를 아직도 듣지 못했거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이들은 아마도 그 소리가 자신의 밥그릇 깨어지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 아닐까.
“… …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므로.” 존던의 싯귀는 사실상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의 패러다임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음을, 모두는 하나임을 우리는 이제 깨달아가고 있다. 그러나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이나 자연만이 아니다. 모든 사상, 모든 제도 또한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이며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죽으면서 또한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사실상 모든 조종은 탄생을 알리는 종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하는 것은 생명만이 아니며, 모든 사상과 제도 또한 그렇다. 근대교육의 조종은 이미 이백 년 전부터 울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귀가 어두운 사람들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른 것이리라. 역사의 흐름에서 근대교육은 그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생명이 다한 것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가도록 두자. 그 종소리는 우리들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이자 또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우리들을 위하여 종은 울리는 것이니! 바로 우리의 죽음과 탄생을 위하여….
1970년 즈음부터 일리치의 『탈학교 사회』를 비롯해 근대교육의 조종을 울리는 쟁쟁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 책 『바보 만들기』는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을 쓴 존 개토는 삼십 년 가까이 미국의 심장부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심지어 뉴욕 주 ‘올해의 교사’ 상을 연거푸 받았다. 학교제도에 대한 직격탄에 가까운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상을 받는 자리에서 연설하기 위해 밤을 새워 쓴 것들이다. 개토는 그 연설문을 쓰게 된 계기가 자신이 가르쳤던 한 제자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듯이 ‘학교제도의 톱니바퀴에 모래를 끼얹으며’ 게릴라 학습을 해 온 결과일 것이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의 학교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받아온 학교교육의 원본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다. 국민 통합을 위해 미국이 프러시아에서 빌려온 학교제도를 일본이 모방하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식되면서 근대교육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 문제의 진짜 뿌리는 거기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학교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가능성을 매장당한 채 그저 밥벌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이 되는 현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국가들이라면 똑같이 겪는 비극이다.
개토는 이 책에서 학교의 숨겨진 교육과정이 사실은 ‘바보 만들기 과정’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학교교육을 더 많이, 더 잘 받은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하고 살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봉사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물신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개토가 가리키는 그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니다. 돈이 더 필요한 길도 아니다. 교육 예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맞닥뜨린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답을 찾는 지름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다. 이 책에서 개토가 짤막하게 소개하는 게릴라식 학습법에 대해서는 『학교의 배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거대한 학교 시스템 속 하나의 톱니바퀴 같은 처지에 있는 교사라 할지라도 스스로 숨통을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002년 10주년 기념판을 내면서 저자의 흥미진진한 후기와 토마스 무어의 서문이 추가되었고, 영문판 펴낸이의 새로운 글이 덧붙여졌다. 이 판본을 탁월한 동시통역가이자 번역가인 조응주 씨가 현장에서 개토의 연설을 듣는 듯 실감 나게 우리말로 다시 옮겼다. 아무쪼록 이 책이 이 땅의 교육이 거듭나는 데 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7년 8월
현병호
차례
머리말 | 바닥에서 다시 출발하기·006
영문판 펴낸이의 말 | 함께 걸어갈 길·012
한국어판 펴낸이의 말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028
들어가는 이야기 | 걸어온 길·033
1장. 학교의 일곱 가지 가르침·043
2장. 학교의 악몽·071
3장. 학교라는 사이코패스·089
4장. 그리운 고향 모농가헬라·111
5장. 학교는 축소되어야 한다·129
6장.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167
후기 | 십 년 뒤에 덧붙이는 이야기·201
옮긴이의 말 |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힘·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