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저자에게는 출판사, 격월간 교육지, 공간!
민들레라는 낱말이 권정생의 강아지똥이 키워낸 민들레를 생각나게 한다.
교직에서 느끼게 된 다양한 변화 중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향유하는 스마트한 일상과 세상살이에 비해서 인간관계에서는 결코 진화라든가 스마트한 진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스마트하다 보니 그 안의 사람들의 모습도 스마트한 느낌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사회성숙도, 언어 근육, 생활 나이는 정체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광효과로 인해서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를 착각하게 한다.
관계와 소통에서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서로에 대한 배려가 지나쳐 오히려 적당한 외면이나 적당한 배타성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거 같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연민이나 관심으로 발전하지 못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가볍게 가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현실은 교사로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음에도 순간 순간 갈등을 하거나, 언행에서 여러 가늠자를 맞춰보는 소심 혹은 체념의 유혹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현병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긋고 싶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대체로 보수적 혹은 전통적인 학교 교육의 틀 속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보니 진보의 꼬집기는 마음에 담아야 하는데 귀에 담는 것부터 거부감이 들 때가 있고, 보수의 경직성은 발 담그기 싫은 늦가을의 강물 같아서 또한 젖어들기 싫어진다. 그렇게 어느 쪽으로 편향되지 않은 저자의 말을 따라 가면서 엄격한 가운데 온기가 느껴진다. 교육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직설적이면서도 위트가 적절히 배어 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책 속의 구절처럼 저자의 '무심한 지혜와, 교육과 아이들에 대한 사심 가득한 애정'이 느껴졌다.
"교육은 만남, 소통, 사건이다."
만남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힘과 홀로 걸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자유 교육의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홀로 서서 함께 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하기에 홀로 서는 것을 배울 수도 있는 학교가 되고, 교실이 되어야 한다.
소통에서, 교육사회에서 회복해야 할 신뢰성을 말한다. '교사로서의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 교사는 적어도 인격에서 '교사집단이기에'를 설명하는 '당위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 당위를 설명하는 중심에 '학생'이 있어야 하고, 긍정에 바탕하는 전진을 지향해야 한다.
만남에서, 자신의 개성을 자각함으로써 한 사람이 되고, 보편성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이 된다. 그리고 개성을 넘어서 시민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을 아는 존재다. 교육환경으로서의 '나'는 초등교사로서 전통적이거나 전형적인 편이 아니기에, 반듯함에 입각한 교사 캐릭터를 보여주기보다 순간순간 분명한 표정으로 감정을 보여주곤 한다. 아이들 앞에서 솔직한 나를 짙은 농도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는 인간이 '함께' 어울리고 소통하는 세상살이에 하나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차분하고 집중하게 하는 저자의 말은 쏠림의 감정적 긴장이 없음에도, 여러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저자의 말을 다시 옮겨 적고, 내 생각을 풀어내 보고는 하고 있다. 저자의 지성이 두껍지 않은 책에 촘촘하게 담겨 있으나 현학적이지 않고, 그럼에도 자극하기도 하고 격려를 주기도 한다. 드물게 아끼고 싶어진, 곱씹어 보게 하는, 동질성을 갖고 싶게 하는 저자의 말과 생각이 나에게도 좀 더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시간이다.
http://booklog.kyobobook.co.kr/h33j37/2063142/#0
민들레.. 저자에게는 출판사, 격월간 교육지, 공간!
민들레라는 낱말이 권정생의 강아지똥이 키워낸 민들레를 생각나게 한다.
교직에서 느끼게 된 다양한 변화 중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향유하는 스마트한 일상과 세상살이에 비해서 인간관계에서는 결코 진화라든가 스마트한 진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스마트하다 보니 그 안의 사람들의 모습도 스마트한 느낌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사회성숙도, 언어 근육, 생활 나이는 정체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광효과로 인해서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를 착각하게 한다.
관계와 소통에서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서로에 대한 배려가 지나쳐 오히려 적당한 외면이나 적당한 배타성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거 같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연민이나 관심으로 발전하지 못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가볍게 가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현실은 교사로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음에도 순간 순간 갈등을 하거나, 언행에서 여러 가늠자를 맞춰보는 소심 혹은 체념의 유혹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현병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긋고 싶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대체로 보수적 혹은 전통적인 학교 교육의 틀 속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보니 진보의 꼬집기는 마음에 담아야 하는데 귀에 담는 것부터 거부감이 들 때가 있고, 보수의 경직성은 발 담그기 싫은 늦가을의 강물 같아서 또한 젖어들기 싫어진다. 그렇게 어느 쪽으로 편향되지 않은 저자의 말을 따라 가면서 엄격한 가운데 온기가 느껴진다. 교육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직설적이면서도 위트가 적절히 배어 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책 속의 구절처럼 저자의 '무심한 지혜와, 교육과 아이들에 대한 사심 가득한 애정'이 느껴졌다.
"교육은 만남, 소통, 사건이다."
만남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힘과 홀로 걸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자유 교육의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홀로 서서 함께 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하기에 홀로 서는 것을 배울 수도 있는 학교가 되고, 교실이 되어야 한다.
소통에서, 교육사회에서 회복해야 할 신뢰성을 말한다. '교사로서의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 교사는 적어도 인격에서 '교사집단이기에'를 설명하는 '당위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 당위를 설명하는 중심에 '학생'이 있어야 하고, 긍정에 바탕하는 전진을 지향해야 한다.
만남에서, 자신의 개성을 자각함으로써 한 사람이 되고, 보편성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이 된다. 그리고 개성을 넘어서 시민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을 아는 존재다. 교육환경으로서의 '나'는 초등교사로서 전통적이거나 전형적인 편이 아니기에, 반듯함에 입각한 교사 캐릭터를 보여주기보다 순간순간 분명한 표정으로 감정을 보여주곤 한다. 아이들 앞에서 솔직한 나를 짙은 농도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는 인간이 '함께' 어울리고 소통하는 세상살이에 하나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차분하고 집중하게 하는 저자의 말은 쏠림의 감정적 긴장이 없음에도, 여러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저자의 말을 다시 옮겨 적고, 내 생각을 풀어내 보고는 하고 있다. 저자의 지성이 두껍지 않은 책에 촘촘하게 담겨 있으나 현학적이지 않고, 그럼에도 자극하기도 하고 격려를 주기도 한다. 드물게 아끼고 싶어진, 곱씹어 보게 하는, 동질성을 갖고 싶게 하는 저자의 말과 생각이 나에게도 좀 더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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