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민들레> 14호 48∼61쪽에 실린 글입니다.
-민교육(民敎育), 바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공교육-
;김희동(배움의 숲 forest.edufuture.com 숲지기)
공교육도 아닌 사교육도 아닌…
96년 여름, 고려대에서 열린 '대안교육 한마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민교육이란 말을 썼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미안하기도 하고 뭐 대단히 잘 아는 것도 없으면서 공교육―사교육에 버금가는 말을 지어내는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 같아 무척 주저주저하면서 말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민교육이란 말을 생각하게 된 것은, 교육의 주체가 국가인 공교육에도 들지 않고 그렇다 해서 사적인 이익, 특히 경제적인 이익을 좇는 인상을 주는 사교육의 영역에도 넣기 껄끄러운 교육형태들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였다. 또 이 영역에 올바른 자리매김이 안 되면 공교육제도로부터는 그 체제를 흔드는 위험한 존재로 오해받고, 사교육시장에게는 재주부리는 곰이 나타난 꼴이 되어 긴 생명력을 갖기 힘들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민들레 학교를 만들려는 모임민들레 만들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비록 초등학교 교사이긴 했지만 국가의 조직체계 안에서 그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모임이 공교육의 체계 안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계절학교를 하면서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참가비를 받기는 했지만 우리의 주목적은 경제적인 수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안에서 자유롭고 따뜻한 자치상생의 교육'을 실천해보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교육활동을 사교육이라고 말하면 무척 섭섭한 일이다.
그런데도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국가가 주체가 아니면 분명히 사교육이야!" 한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나같이 불뚝성질의 얼렁덤벙이도 성질을 죽이고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거기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 해도 지금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현상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되려 갑갑해지고, 무릎을 꿇든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는 식의 아마득한 절망 같은 것만 남는다.
정말이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런 굳은 잣대로 교육제도를 보는 까닭에 공교육은 공교육대로 자기과신과 통제만능의 사고에 갇혀 결국 이 꼴이 되었고, 사교육은 사교육대로 국민들에게 위선적인 사고와 지나친 비용부담을 주어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 가고 있는 거예요."라고. 그들의 분명한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저 착한 마음 갖고 새로운 교육을 찾아나선 이들이 공교육을 배신하고 교육을 자본시장에 풀어 제쳐놓는 결과를 부추긴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마음이 편치 않다.
참 희한하게도 여태껏 국가가 제공해준 물을 먹으면서도 물이 제대로 들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지 지난 6, 7년 사이에 불쑥불쑥 나와서 국가주의 교육이 아닌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교육을 열정을 다해 시도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물론 때로는 쓰라린 아픔도 겪지만 대안교육, 가정학교, 탈학교 또는 뭐라 부르든 괜찮아 하면서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모습으로 조금씩 자리잡아가고 있다.
나는 바로 이런 이들이, 인간정신의 참다운 자유가 녹아있는 공공의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자기 삶에서 교육을 펼칠 때 그들이 적어도 국가주의라는 담벼락에 부딪혀서 좌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니 더욱 활발하게 진행하여 국가로서는 미처 감당하지 못하는 섬세하고 미묘한 영역들이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자유롭고 든든한 틀을 만들기를, 아니 이미 있다고 인정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민교육을 통해 말하려는 알맹이다.
공교육과 국가주의
공교육에 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 '국가에 의한 교육'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공짜로 제공하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수식어를 덧붙여라, '지방자치단체도 끼워라' '민간이 하는 것은 빼라' 같은 말이 있지만 어쨌건 공교육체제에서는 국가가 제일 힘이 세다는 바탕을 깔고 이야기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국가는 누구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에 관해서는 뛰어난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철학자들 거기에다가 요즘에는 주식투자자들까지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들어보면 '그 말 맞네'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국가를 '최고의 선이 실현된 형태'라 하는 루소의 말부터 '천만에! 인민의 적이야'라고까지 몰아붙이는 마르크스, '투자를 가로막는 한심한 정책을 쏟아내는 멍청이들의 집합'이라는 개미군단의 말까지 다 끌어안는 새로운 정의를 내릴 재간도 의무도 내겐 없다.
그래서 '민들레'란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주장하는 잡지의 이름이다' 식의 이상한 정의를 하더라도 자꾸 하다보면, 결국은 2010년판 한국 브리태니커에 실리게 된다는 내가 아는 어떤 원리에 따라서 나도 학문성은 떨어지지만 내딴에는 기특하고 비밀스러운 김희동식 정의를 말하는 수밖에 없겠다.
'국가란 인간이 제정신을 가지면 필요 없는 가장 큰 형태의 사회제도'다. '제정신을 가지게 되면 필요 없어지는'이라고 말하고도 싶다. 이런 걸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하늘에다가도 선을 긋고서 우리 땅 너네 땅 하는 것도 이상하고, 인민을 위한다는 국가가 국경선이라는 눈에 뵈지도 않는 이상한 선 너머에서 온 똑같은 영장류들(외국인 노동자와 같은)을 까닭 없이 아랫것 취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하는 구실을 하는 것도 나는 덜 진화된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본보기는 쎄고 쎘다. 그런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허위의식이 바로 국가주의, 국가 지상주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런 국가주의를 대신하는 '자치상생론'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는데, 간단히 말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축의 양쪽으로 삼고 개별 단위의 자치와 그 개별체들 사이의 상생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자기가 살거나 참여하는 지역(지리적이든 가상적이든)을 소중하게 안으면서 인류애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틀을 찾아낼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사실 교육에서 공공성 논의를 하자면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 국가주의를 강요받는다. 이것이 나는 정말 마땅치 않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데도 그 위에 강제로 법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하다니! 그래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니! 그러고서도 동물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할 줄 아는 말이 쓸데없이 많아서일까? 개인이 자신 스스로를 타일러 복종시켜야 할 가장 큰 법적 단체는 인류여야 하며, 인류가 그 진화와 문화를 함께 나누고 있는 지구생명체야말로 그 법적 단체의 가장 큰 울타리라 믿는 처지에서 인류애를 가로막고 패싸움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 지역주의, 종파주의, 국가주의, 물질주의를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학교교육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말이 자신의 생활영역 안에도 분명히 있는 교육의 책임을 국가라는 멀고도 거대한 제도에게 떠넘기면서 그걸 정당화하는 것처럼 들려서 속이 탄다.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켜도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보호받을 수 있는 또는 방어할 수 있는 체제와 정신머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 좋으라고 그런 말을 자꾸 하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강화시켜야 할 것은 국가권력, 구체적으로 교육관료의 '말빨'이 아니라 공교육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역량이다. 대개 학교 재정을 늘리는 것이 공교육 해결의 열쇠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게 진짜 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또 하나의 인간성 불신의 굴레를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학교운영위원회와 새교육공동체시민모임, 학부모단체 같은 기구들이 자신들의 목적과 회칙 안에서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하도록 제도로 지원하고 교육관료들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공교육을 공교육답게 만들어 줄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더 깊이 해보면 공교육을 살리는 데 시민들의 공공정의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들 공교육 관련 시민모임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일하는 동안 바로 자신을 건강한 시민으로 교육시키고 있으며 마침내 속좁은 분리주의를 넘어서서 인류애로 가득한 교육체계를 만들게 이끄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낳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국가에 대해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면 말이다. 현실적으로 국가가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막강한 권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건전한 시민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국가도 덜 비이성적이 된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국가주의의 벽을 넘어서서 공교육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공공의 교육이 되게 하자면 그 교육의 주권을 허위의식을 부추기는 제도에게 넘겨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살아있는 생각과 삶을 가져오고 나누는 '위원'들, '회원'들, 제정신을 차리려는 '보통사람'들이 가져야 한다. 이런 아름다운 이상을 가슴에 품고 생각과 실천으로 가꾸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물질현실을 다루는 내면의 힘을 잃은 채 곧잘 허깨비 같은 것에 자신을 내어주며, '내 머리카락의 힘으로 너의 촛불을 꺼버리겠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위협에도 쩔쩔 매게 된다.
그러나 마치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고상하게 구는 나도 결국 국가라는 권력실체를 현실상황으로서 인정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는 눈물나도록 그리운 고향이 있는 그곳에 돌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또 오랫동안 정을 쌓고 참된 일을 하자고 맹세하던 그리운 이들과 함께 일할 소중한 현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로 그들을 애먹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국가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누가 한국에 대한 싫은 소리를 하면 은근히 화가 나는 속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다지 철저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나를 '무늬만 아나키스트'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신념을 굽히느니 죽고 말겠다 해서 결국 화형당하고만(1600년) 죠다노 브루노와, 교회라는 현실세계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힌(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 중 누가 옳으냐고 묻는 그런 류의 질문을 내게 묻는다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 두 사람 각자의 삶에 깔린 현실과 그 짧은 34년이란 시간 간격 동안 일어난 급격한 사회의식의 변화, 그리고 갈릴레이가 목숨을 부지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눈이 멀 때까지 천체를 관측하고 토리첼리와 같은 천체과학자들을 길러내었던 속사정 같은 것을 모두 무시하는 편협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불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법권력이자 필요한 도구'라는 나의 국가관을 신념의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기를 바란다.
사교육과 이익추구
공교육을 정의하는 데 쓴말들을 빼고 나면 나머지는 다 사교육 차지가 된다. 원칙적으로 국가가 아닌 개인 또는 단체에 의한 모든 교육 형태가 다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입시학원에서부터 마을공부방까지 모두 사교육이다. 과외교습은 물론이고 무도교습소, 문화강좌, 스터디그룹, 대안교육 단체들의 교육행위, 동호회의 무료공개강좌, 가정에서 이뤄지는 교육, 시민단체들의 각종 교육강좌, 세일즈맨의 고객관리요령 전수, 바람이 부는 방향을 스스로 아는 것,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진리를 깨우치는 것, 소매치기들의 주머니 터는 법 전수 등등… 이것들 모두가 차별 없이 몽땅 다 사교육이다.
인간 행위의 최고형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해 국가에서 실시하지 않는 것은 모두 사교육이라는 이런 무지막지한 이분법을 들이민다는 건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분류법은, 인간은 안경을 쓴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는 안경점 주인이나 좋아할 그런 이분법과도 같은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사람 무시하는 그런 말처럼….
오해 없기를. 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인간 사회의 수많은 제도와 본성들은 인간정신의 성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기에. 그러므로 교육행위를 통해 경제적 이익, 또는 사회적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것은 나쁘고 그런 이익을 떠나 공공의 정의를 추구하는 교육행위는 좋다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가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속에 담아두는 소망일 수는 있지만 그걸 사회운영의 원리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말처럼 쉽게 이상적일 수는 없다. 우리의 속성 속에,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신분상승의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믿는 이상은 입시산업과 같은 매우 부정적인 말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입시교육의 당위성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입시교육에 목매다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러면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하는 다음 질문으로 가야 옳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단순히 과외를 죄악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위선만 높일 뿐이다.
국가가 주관하는 교육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사교육이라는 정의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이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분류를 가지고서 한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육 행위를 판정하고 우위를 차지하는 불공정행위를 당연하게 여기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근대시민국가의 형성과정을 빼앗긴 채 국가를 세운 이후로(정확히는 세움을 당한 이후로) 국가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마당에, 교육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판단기준을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에 시비를 걸지 않다 보니 세금납부자요 선거권자요 존엄한 인간정신을 가진 한 국민인데도 국가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은 늘 불온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본보기로, 국가에서 제시하는 교육을 사양하고 자신들의 신념과 방식에 따라 교육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세금은 세금대로 내면서 혜택은 없고, 되려 과태료를 물어야 하고 오라니 가라니 죄인 취급받고, 댁의 아이는 왜 학교 안 가요 하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는 등 몇 겹으로 고생하면서 괜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런 고정관념을 낳는 것이 바로 국가주의에 바탕한 공교육이다.
의무교육이란 이름으로 온 국민을 삽시간에 잠재적 범법자로 보게 하는 이 사고방식은 문제가 많다. 의무교육이란 국민이 일정기간 국가교육기관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국가가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의무로 제공하는 무상교육을 뜻해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들어 이런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은 일을 망치자는 말이나 같다. 마음 같아서야 공교육을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이라고 정의하고 싶지만 그 순간 교육행정 기관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의 학교의 대부분은 문을 닫아야 하고 별의별 온갖 교육강좌며 사회단체며 심지어 명상센터까지 공교육 지원 등록신청을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심의를 거치지 않고서 국가 재정을 나눠줄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 많은 일을 한꺼번에 어떻게 겪어낼 수 있을까. 느닷없이 공교육을 확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충실한 세금납부자들을 골탕먹이는 일이다.
인간의 본성이자 권리란 측면에서 사교육은 인정되어야 한다. 어떤 목적을 내세우든 얼마만큼 돈을 벌어들이든 양심과 법을 지키는 범위에서는 사교육시장이든 입시산업이든 귀족학교든 기부금입학이든 인정되는 것이 옳다. 유독, 교육의 영역에만 지나친 도덕기준을 들이대는 까닭에 정상적이지 않은 문제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다만 공교육과 범위를 같이 하는 교육의 경우 그 운영에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앞에서 한 말이니까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 게 좋겠다.
민교육이란-우리 스스로 하는 공교육
이제까지 한 말들을 잘 살펴보면 그 속에서 민교육의 정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찾아낸 것이 다음과 같지 않으면 내 설명 어딘가에 실수가 있거나 읽는 이가 새로운 상상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민교육이란 교육의 주체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면서도 그 내용에서 공공(公共)의 정의(正義)를 추구하는 교육을 말한다.' 민간이 주관하는 공의(公義) 교육? 그렇게 말해도 되겠다. 이걸 부디 "그럼 어쨌거나 사교육이네." 하지 말기를. 민교육 논의의 핵심은 우리 사회와 우리들을 건강하게 성장시킬 공의의 개념들을 교육의 중심주제로 삼도록 하자는 데 있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그렇다면 공의, 공공의 정의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순간 국가에 떠넘겨버렸던 공교육을 바로 우리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오는 민교육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셈이다. '공의'에 대한 고민이 바로 내 삶의 상황 속에서 시작되는 것. 이것은 우리 의식의 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본다.
'공공의 정의'를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교육주체들의 가치관에 깊이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유, 평등, 정의, 공동체성, 생명, 진리추구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관들에서부터 성평등, 통일교육, 우리말 살리기, 환경운동, 가정의 회복, 청소년문화, 인문예술의 창조, 자연유기농법 복원과 같은 구체적인 것까지 얼마든지 열려 있다. 다만 민교육을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가는 것과 그래서 자신의 현실을 뛰어넘는 실천을 자신에게나 남에게 요구하는 것, 솔직하게 말하기 힘들어지는 분위기 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치이고 당연히 함께 해야 할 영역이라 해도 내 삶을 움직이는 내면의 힘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는 민교육 논의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민교육'을 인정하게 되면, 그래서 민교육운동에 자극받아 깨우쳐진 이들이 활발히 일어나면 지금의 정부가 그토록 바라는 아래로부터 교육개혁에 물꼬가 트이고, 양심적인 교육전문가와 열의를 가진 자원봉사자들을 한번에 공짜로 공교육 개혁 현장으로 모시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정부가 여러 경로를 통해 시민단체의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교육부문의 지원이 활성화된다면 바로 그것이 민교육과 공교육이 함께 발전하는 좋은 본이 된다.
사교육도 자신들의 분명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여지껏 공교육은 정상적인 것이고 사교육은 비정상적인 것이라던 어둡고 우울한 이분법의 구름이 걷혀지고 각자 맡은 영역이 다르다는 것, 교육에서도 이익추구는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인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되 민교육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비록 이익을 추구하지만 공익의 테두리 안에서, 나아가 공익을 지향하는 마음 자세와 내규들을 만들어 실천하게 될 것이다. 하기야 학습지회사도 회사 강령은 신뢰, 최선, 조화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멋진 말들이 경영자의 사적인 좌우명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그 직원 모두의 진심을 이끌어내려면 공의를 추구하는 자세를 보여야 가능한 것이다.
민교육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들이 있나 살펴보자. 민간이 자발적으로 현 제도교육의 대안을 시도하는 대안교육운동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교육을 바르게 세워보겠다는 뜨거운 마음에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설령 공교육의 울타리 속에 들어 있다 해도 교사나 학부모, 개인 또는 모임의 신념과 실천이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면 그들 또한 대안교육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동육아운동은 보다 인간다운 교육을 추구하는 학부모들의 자발성에서 비롯하는 까닭에 교육내용 구석구석에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공의를 그 깊은 바닥으로 흘려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을 공교육에서 따돌리려 하는 것도 그들의 성과를 공교육이 가로채어 가려는 것도 모두 옳지 않다. 그들을 제도 속에서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민교육인 것이다. 가정학교 운동은 또 어떤가! 그들의 놀라운 결단력과 실천은 해직을 각오하고 전교조를 지키던 교사들만큼이나 빛나며 우리 시대의 인식수준을 재는 새로운 척도가 되고 있다. 물론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학교 안 보내고 집에서 교육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어때서라고 자신에게 되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한 수준임을 받아들이고 적어도 나는 어째야겠다는 자기 다짐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은 성장하기 힘들다.
탈학교 논의를 우리 시대에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공교육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탈학교란 이름에서 받게 되는 선입견은 이해의 부족인데 더 좋은 말을 찾을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여러 형태의 교육운동들과 특히 지역공부방, 청소년문화단체, 학부모단체, 환경단체, 자발적인 교사들의 단체, 예술문화단체… 이들 모두가 민간의 차원에서 공공의 정의를 실천하며 이를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그 과정에 적용하려 할 때 그들이 하는 교육행위는 바로 민교육이 된다.
민교육 운동의 원리와 앞날
미리부터 말하지만 이런 거창한 제목이 주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원리는 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제상황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마음에 부담만 주는 못된 것이 되므로 내다 버려야 하고, 특성이란 것도 관찰한 결과 발견된 것이어야 하지 미리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며, 앞날이란 말도 그냥 해보는 상상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망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역시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설령 내팽개치더라도 이런 것을 짚어두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가짜였으면 다음에는 진짜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진짜였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민교육의 원리는 자발성, 현장성, 공의성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아닌 개인, 또는 단체가 교육의 주체가 된다는 말은 제도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떠맡기던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참여자 개개인의 자발성이 교육운동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장성은 나올 수 없고 공의성은 당위만 남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과 흥미에 따라 진지하게 또는 신나게 참가하는 것. 이것은 모든 인간 영역에서 인류를 발전시켜온 알맹이 힘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빠질 수 없다.
현장성이란 말은 자신에게 펼쳐진 삶 한 가운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어 눈을 뗄 수도 없고, 그 영향을 부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삶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그 공허한 외침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많은 민간차원의 교육모임들이 교육내용을 꾸릴 때 그토록 실제적인 주제들을 끌어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임의 정체성을 잃거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아와도 현장성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친목회 성격에 머문다. 친목회가 나쁘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의성을 빠뜨리다가는 애써 구분해놓은 사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면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교육강좌나 캠프에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참가자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을 때 그 행사 주최자들의 마음에, 꼭 돈벌려고 이 일을 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 모임은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말을 생각해낼 때마다 신나는 상상이 함께 펼쳐진다. 민들레학교, 계절학교(여름동네·겨울동네), 상생체, 대안교육운동의 안·곁·밖 분류, 배움의 숲, 민교육… 그 중에 민교육에 관한 상상이 가장 덩어리가 큰 것 같다. 덩어리가 큰 만큼 조심하는 마음과 부푼 마음이 함께 든다. 영국을 떠나기 바로 전에 대구교대에서 가진 강좌에서 나는 미래의 교육과 관련해서 민교육에 대해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그것이 마침 정재걸 교수님의 글에 실렸기에 그 부분만 여기에 조금 옮긴다.
미래에는 오늘날의 학교가 인간으로서의 기본자질을 담당할 공교육 기관을 김희동 선생은 "보건소 학교"라고 불렀다. 즉 대형 병원들이 즐비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국민의료, 특히 하층민 보건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곳이 보건소이듯이, 미래의 학교에서는 현재 학교가 갖는 대부분의 교육기능이 학원과 같은 사교육으로 이관되고 읽고, 쓰고, 셈하는 등의 가장 기본적인 교육과 공동체 교육, 환경교육, 세계시민교육 등 말 그대로의 공교육, 즉 공공의 정의(正義)를 위한 것만이 보건소 학교의 교육내용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교육기관 사이에 공교육과 사교육의 중간형태인 "민교육(民敎育)"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민교육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하는 교육공동체이다. 환경운동단체에서 운영하는 "환경교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요가강좌" 등이 바로 민교육이다. 민교육은 상설 강좌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즉각적으로 조직된다. 지리산 댐 건설이 문제가 되면 바로 "지리산의 자연"을 주제로 하는 민교육 모임이 결성될 수 있다. 이러한 강좌나 조직은 벌써 우리 주위에 많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민교육은 참가자들의 회비로 운영되지만 미래의 민교육은 그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한다. 왜냐하면 민교육의 내용은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시민들의 "공적" 필요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교육은 국가의 간섭이 최대한 배제되고 철저히 시민의 요구와 운영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사교육이기도 한 것이다.
민교육의 재정을 국가가 부담하는 그 방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서는 괜한 오해를 살 것 같다. 민교육 단체가 하는 모든 교육활동을 국가부담으로 한다는 것은 그 단체의 자립성과 정체성을 빼앗는 일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마땅히 할 일을 자발적으로 찾아나서서 하는 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그 모임이 사회적으로 공적인 가치를 가지고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검토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검토의 주체는 정부와 민간의 합의로 구성된 민교육심의위원회 같은 것이면 된다고 보고 그 심의위원으로는 정부의 해당부서 담당자와 관련 전문가, 시민단체 또는 관심있는 이들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심의기준은 위에서 제시한 자발성, 현장성, 공의성 원칙이 신청한 단체의 교육활동에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가, 회원 또는 교육참가자의 실질상황이 어떠한가 등을 보며 민교육 활동에 따른 재정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재정지원은 한 사람 또는 많아야 두 사람 정도의 상근자 급여와 신청해온 교육활동 지원금을 검토한 뒤 결정한 액수의 돈이면 충분할 것 같다. 법적 지원은 의무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관련법규에 반영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그에 따른 제도의 정비가 있어야 한다. 세제 지원도 필요한데 국가 공교육기관에게 주어지는 세제 혜택의 일정 정도를 정해서 운영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민교육심의위원회 같은 것이 무슨 권위를 가진 상부기관이 된다면 아주 망할 징조다. 그리고 이 위원회에 신고를 해야 민교육 단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민교육이란 말을 쓸 무슨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앞에서 말한 그런 뜻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면 되고 이를 돕는 기관으로서 민교육심의위원회든 민교육협의회든 필요할 경우에 만들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이 논의가 실제 상황에 접어들면 차차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물질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 허망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물과 현상의 배경에 드리워진 실체를 이해하고 다시 자신의 삶을 이끄는 원리로 작용하게끔 해야 하며, 그러자면 꾸준히 정말로 꾸준히 우리 시대의 현장을 관찰하고 탐구해야 한다. 교육의 영역에서 이런 작업은 단순히 교육을 바로잡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힘을 건강하게 기르고 우리 시대의 정신을 인류애로 가득 채우는 데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걸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나가기 좋게 만드는 것이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그 동안 드문드문 생각해오던 것을 갑작스레 정리하려다보니 설득력 있게 쓰기가 쉽지 않다. 부디 편가르기로 오해하지 말고, 엉성하기 짝이 없더라도 말하고자 하는 그 알맹이와 진심을 잘 읽어서, 꼬이는 쪽으로만 가는 교육이 풀리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민교육(民敎育), 바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공교육-
;김희동(배움의 숲 forest.edufuture.com 숲지기)
공교육도 아닌 사교육도 아닌…
96년 여름, 고려대에서 열린 '대안교육 한마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민교육이란 말을 썼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미안하기도 하고 뭐 대단히 잘 아는 것도 없으면서 공교육―사교육에 버금가는 말을 지어내는 주제넘은 짓을 하는 것 같아 무척 주저주저하면서 말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민교육이란 말을 생각하게 된 것은, 교육의 주체가 국가인 공교육에도 들지 않고 그렇다 해서 사적인 이익, 특히 경제적인 이익을 좇는 인상을 주는 사교육의 영역에도 넣기 껄끄러운 교육형태들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였다. 또 이 영역에 올바른 자리매김이 안 되면 공교육제도로부터는 그 체제를 흔드는 위험한 존재로 오해받고, 사교육시장에게는 재주부리는 곰이 나타난 꼴이 되어 긴 생명력을 갖기 힘들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민들레 학교를 만들려는 모임민들레 만들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비록 초등학교 교사이긴 했지만 국가의 조직체계 안에서 그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모임이 공교육의 체계 안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계절학교를 하면서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참가비를 받기는 했지만 우리의 주목적은 경제적인 수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안에서 자유롭고 따뜻한 자치상생의 교육'을 실천해보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교육활동을 사교육이라고 말하면 무척 섭섭한 일이다.
그런데도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국가가 주체가 아니면 분명히 사교육이야!" 한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나같이 불뚝성질의 얼렁덤벙이도 성질을 죽이고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거기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 해도 지금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현상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되려 갑갑해지고, 무릎을 꿇든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는 식의 아마득한 절망 같은 것만 남는다.
정말이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런 굳은 잣대로 교육제도를 보는 까닭에 공교육은 공교육대로 자기과신과 통제만능의 사고에 갇혀 결국 이 꼴이 되었고, 사교육은 사교육대로 국민들에게 위선적인 사고와 지나친 비용부담을 주어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 가고 있는 거예요."라고. 그들의 분명한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저 착한 마음 갖고 새로운 교육을 찾아나선 이들이 공교육을 배신하고 교육을 자본시장에 풀어 제쳐놓는 결과를 부추긴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마음이 편치 않다.
참 희한하게도 여태껏 국가가 제공해준 물을 먹으면서도 물이 제대로 들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지 지난 6, 7년 사이에 불쑥불쑥 나와서 국가주의 교육이 아닌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교육을 열정을 다해 시도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물론 때로는 쓰라린 아픔도 겪지만 대안교육, 가정학교, 탈학교 또는 뭐라 부르든 괜찮아 하면서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모습으로 조금씩 자리잡아가고 있다.
나는 바로 이런 이들이, 인간정신의 참다운 자유가 녹아있는 공공의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자기 삶에서 교육을 펼칠 때 그들이 적어도 국가주의라는 담벼락에 부딪혀서 좌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니 더욱 활발하게 진행하여 국가로서는 미처 감당하지 못하는 섬세하고 미묘한 영역들이 공동체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자유롭고 든든한 틀을 만들기를, 아니 이미 있다고 인정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민교육을 통해 말하려는 알맹이다.
공교육과 국가주의
공교육에 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 '국가에 의한 교육'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공짜로 제공하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수식어를 덧붙여라, '지방자치단체도 끼워라' '민간이 하는 것은 빼라' 같은 말이 있지만 어쨌건 공교육체제에서는 국가가 제일 힘이 세다는 바탕을 깔고 이야기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국가는 누구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에 관해서는 뛰어난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철학자들 거기에다가 요즘에는 주식투자자들까지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들어보면 '그 말 맞네'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국가를 '최고의 선이 실현된 형태'라 하는 루소의 말부터 '천만에! 인민의 적이야'라고까지 몰아붙이는 마르크스, '투자를 가로막는 한심한 정책을 쏟아내는 멍청이들의 집합'이라는 개미군단의 말까지 다 끌어안는 새로운 정의를 내릴 재간도 의무도 내겐 없다.
그래서 '민들레'란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주장하는 잡지의 이름이다' 식의 이상한 정의를 하더라도 자꾸 하다보면, 결국은 2010년판 한국 브리태니커에 실리게 된다는 내가 아는 어떤 원리에 따라서 나도 학문성은 떨어지지만 내딴에는 기특하고 비밀스러운 김희동식 정의를 말하는 수밖에 없겠다.
'국가란 인간이 제정신을 가지면 필요 없는 가장 큰 형태의 사회제도'다. '제정신을 가지게 되면 필요 없어지는'이라고 말하고도 싶다. 이런 걸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하늘에다가도 선을 긋고서 우리 땅 너네 땅 하는 것도 이상하고, 인민을 위한다는 국가가 국경선이라는 눈에 뵈지도 않는 이상한 선 너머에서 온 똑같은 영장류들(외국인 노동자와 같은)을 까닭 없이 아랫것 취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하는 구실을 하는 것도 나는 덜 진화된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본보기는 쎄고 쎘다. 그런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허위의식이 바로 국가주의, 국가 지상주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런 국가주의를 대신하는 '자치상생론'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는데, 간단히 말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축의 양쪽으로 삼고 개별 단위의 자치와 그 개별체들 사이의 상생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자기가 살거나 참여하는 지역(지리적이든 가상적이든)을 소중하게 안으면서 인류애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틀을 찾아낼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사실 교육에서 공공성 논의를 하자면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 국가주의를 강요받는다. 이것이 나는 정말 마땅치 않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데도 그 위에 강제로 법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하다니! 그래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니! 그러고서도 동물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할 줄 아는 말이 쓸데없이 많아서일까? 개인이 자신 스스로를 타일러 복종시켜야 할 가장 큰 법적 단체는 인류여야 하며, 인류가 그 진화와 문화를 함께 나누고 있는 지구생명체야말로 그 법적 단체의 가장 큰 울타리라 믿는 처지에서 인류애를 가로막고 패싸움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 지역주의, 종파주의, 국가주의, 물질주의를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학교교육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말이 자신의 생활영역 안에도 분명히 있는 교육의 책임을 국가라는 멀고도 거대한 제도에게 떠넘기면서 그걸 정당화하는 것처럼 들려서 속이 탄다.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켜도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정의를 보호받을 수 있는 또는 방어할 수 있는 체제와 정신머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 좋으라고 그런 말을 자꾸 하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강화시켜야 할 것은 국가권력, 구체적으로 교육관료의 '말빨'이 아니라 공교육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역량이다. 대개 학교 재정을 늘리는 것이 공교육 해결의 열쇠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게 진짜 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또 하나의 인간성 불신의 굴레를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학교운영위원회와 새교육공동체시민모임, 학부모단체 같은 기구들이 자신들의 목적과 회칙 안에서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하도록 제도로 지원하고 교육관료들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공교육을 공교육답게 만들어 줄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더 깊이 해보면 공교육을 살리는 데 시민들의 공공정의에 대한 의식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들 공교육 관련 시민모임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일하는 동안 바로 자신을 건강한 시민으로 교육시키고 있으며 마침내 속좁은 분리주의를 넘어서서 인류애로 가득한 교육체계를 만들게 이끄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낳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국가에 대해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면 말이다. 현실적으로 국가가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막강한 권력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건전한 시민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국가도 덜 비이성적이 된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국가주의의 벽을 넘어서서 공교육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공공의 교육이 되게 하자면 그 교육의 주권을 허위의식을 부추기는 제도에게 넘겨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살아있는 생각과 삶을 가져오고 나누는 '위원'들, '회원'들, 제정신을 차리려는 '보통사람'들이 가져야 한다. 이런 아름다운 이상을 가슴에 품고 생각과 실천으로 가꾸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물질현실을 다루는 내면의 힘을 잃은 채 곧잘 허깨비 같은 것에 자신을 내어주며, '내 머리카락의 힘으로 너의 촛불을 꺼버리겠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위협에도 쩔쩔 매게 된다.
그러나 마치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고상하게 구는 나도 결국 국가라는 권력실체를 현실상황으로서 인정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는 눈물나도록 그리운 고향이 있는 그곳에 돌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또 오랫동안 정을 쌓고 참된 일을 하자고 맹세하던 그리운 이들과 함께 일할 소중한 현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로 그들을 애먹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국가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누가 한국에 대한 싫은 소리를 하면 은근히 화가 나는 속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다지 철저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나를 '무늬만 아나키스트'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신념을 굽히느니 죽고 말겠다 해서 결국 화형당하고만(1600년) 죠다노 브루노와, 교회라는 현실세계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힌(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 중 누가 옳으냐고 묻는 그런 류의 질문을 내게 묻는다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 두 사람 각자의 삶에 깔린 현실과 그 짧은 34년이란 시간 간격 동안 일어난 급격한 사회의식의 변화, 그리고 갈릴레이가 목숨을 부지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눈이 멀 때까지 천체를 관측하고 토리첼리와 같은 천체과학자들을 길러내었던 속사정 같은 것을 모두 무시하는 편협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불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법권력이자 필요한 도구'라는 나의 국가관을 신념의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기를 바란다.
사교육과 이익추구
공교육을 정의하는 데 쓴말들을 빼고 나면 나머지는 다 사교육 차지가 된다. 원칙적으로 국가가 아닌 개인 또는 단체에 의한 모든 교육 형태가 다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입시학원에서부터 마을공부방까지 모두 사교육이다. 과외교습은 물론이고 무도교습소, 문화강좌, 스터디그룹, 대안교육 단체들의 교육행위, 동호회의 무료공개강좌, 가정에서 이뤄지는 교육, 시민단체들의 각종 교육강좌, 세일즈맨의 고객관리요령 전수, 바람이 부는 방향을 스스로 아는 것,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진리를 깨우치는 것, 소매치기들의 주머니 터는 법 전수 등등… 이것들 모두가 차별 없이 몽땅 다 사교육이다.
인간 행위의 최고형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해 국가에서 실시하지 않는 것은 모두 사교육이라는 이런 무지막지한 이분법을 들이민다는 건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분류법은, 인간은 안경을 쓴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는 안경점 주인이나 좋아할 그런 이분법과도 같은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사람 무시하는 그런 말처럼….
오해 없기를. 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인간 사회의 수많은 제도와 본성들은 인간정신의 성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기에. 그러므로 교육행위를 통해 경제적 이익, 또는 사회적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것은 나쁘고 그런 이익을 떠나 공공의 정의를 추구하는 교육행위는 좋다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가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속에 담아두는 소망일 수는 있지만 그걸 사회운영의 원리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말처럼 쉽게 이상적일 수는 없다. 우리의 속성 속에,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신분상승의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믿는 이상은 입시산업과 같은 매우 부정적인 말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입시교육의 당위성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입시교육에 목매다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러면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하는 다음 질문으로 가야 옳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단순히 과외를 죄악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위선만 높일 뿐이다.
국가가 주관하는 교육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사교육이라는 정의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이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분류를 가지고서 한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육 행위를 판정하고 우위를 차지하는 불공정행위를 당연하게 여기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근대시민국가의 형성과정을 빼앗긴 채 국가를 세운 이후로(정확히는 세움을 당한 이후로) 국가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마당에, 교육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판단기준을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에 시비를 걸지 않다 보니 세금납부자요 선거권자요 존엄한 인간정신을 가진 한 국민인데도 국가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은 늘 불온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본보기로, 국가에서 제시하는 교육을 사양하고 자신들의 신념과 방식에 따라 교육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세금은 세금대로 내면서 혜택은 없고, 되려 과태료를 물어야 하고 오라니 가라니 죄인 취급받고, 댁의 아이는 왜 학교 안 가요 하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는 등 몇 겹으로 고생하면서 괜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런 고정관념을 낳는 것이 바로 국가주의에 바탕한 공교육이다.
의무교육이란 이름으로 온 국민을 삽시간에 잠재적 범법자로 보게 하는 이 사고방식은 문제가 많다. 의무교육이란 국민이 일정기간 국가교육기관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국가가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의무로 제공하는 무상교육을 뜻해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들어 이런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은 일을 망치자는 말이나 같다. 마음 같아서야 공교육을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이라고 정의하고 싶지만 그 순간 교육행정 기관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의 학교의 대부분은 문을 닫아야 하고 별의별 온갖 교육강좌며 사회단체며 심지어 명상센터까지 공교육 지원 등록신청을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심의를 거치지 않고서 국가 재정을 나눠줄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 많은 일을 한꺼번에 어떻게 겪어낼 수 있을까. 느닷없이 공교육을 확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충실한 세금납부자들을 골탕먹이는 일이다.
인간의 본성이자 권리란 측면에서 사교육은 인정되어야 한다. 어떤 목적을 내세우든 얼마만큼 돈을 벌어들이든 양심과 법을 지키는 범위에서는 사교육시장이든 입시산업이든 귀족학교든 기부금입학이든 인정되는 것이 옳다. 유독, 교육의 영역에만 지나친 도덕기준을 들이대는 까닭에 정상적이지 않은 문제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다만 공교육과 범위를 같이 하는 교육의 경우 그 운영에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앞에서 한 말이니까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 게 좋겠다.
민교육이란-우리 스스로 하는 공교육
이제까지 한 말들을 잘 살펴보면 그 속에서 민교육의 정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찾아낸 것이 다음과 같지 않으면 내 설명 어딘가에 실수가 있거나 읽는 이가 새로운 상상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민교육이란 교육의 주체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면서도 그 내용에서 공공(公共)의 정의(正義)를 추구하는 교육을 말한다.' 민간이 주관하는 공의(公義) 교육? 그렇게 말해도 되겠다. 이걸 부디 "그럼 어쨌거나 사교육이네." 하지 말기를. 민교육 논의의 핵심은 우리 사회와 우리들을 건강하게 성장시킬 공의의 개념들을 교육의 중심주제로 삼도록 하자는 데 있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자기가 속한 작은 모임에서 '그렇다면 공의, 공공의 정의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순간 국가에 떠넘겨버렸던 공교육을 바로 우리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오는 민교육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셈이다. '공의'에 대한 고민이 바로 내 삶의 상황 속에서 시작되는 것. 이것은 우리 의식의 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본다.
'공공의 정의'를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교육주체들의 가치관에 깊이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유, 평등, 정의, 공동체성, 생명, 진리추구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관들에서부터 성평등, 통일교육, 우리말 살리기, 환경운동, 가정의 회복, 청소년문화, 인문예술의 창조, 자연유기농법 복원과 같은 구체적인 것까지 얼마든지 열려 있다. 다만 민교육을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가는 것과 그래서 자신의 현실을 뛰어넘는 실천을 자신에게나 남에게 요구하는 것, 솔직하게 말하기 힘들어지는 분위기 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치이고 당연히 함께 해야 할 영역이라 해도 내 삶을 움직이는 내면의 힘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는 민교육 논의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민교육'을 인정하게 되면, 그래서 민교육운동에 자극받아 깨우쳐진 이들이 활발히 일어나면 지금의 정부가 그토록 바라는 아래로부터 교육개혁에 물꼬가 트이고, 양심적인 교육전문가와 열의를 가진 자원봉사자들을 한번에 공짜로 공교육 개혁 현장으로 모시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정부가 여러 경로를 통해 시민단체의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교육부문의 지원이 활성화된다면 바로 그것이 민교육과 공교육이 함께 발전하는 좋은 본이 된다.
사교육도 자신들의 분명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여지껏 공교육은 정상적인 것이고 사교육은 비정상적인 것이라던 어둡고 우울한 이분법의 구름이 걷혀지고 각자 맡은 영역이 다르다는 것, 교육에서도 이익추구는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인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되 민교육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비록 이익을 추구하지만 공익의 테두리 안에서, 나아가 공익을 지향하는 마음 자세와 내규들을 만들어 실천하게 될 것이다. 하기야 학습지회사도 회사 강령은 신뢰, 최선, 조화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멋진 말들이 경영자의 사적인 좌우명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그 직원 모두의 진심을 이끌어내려면 공의를 추구하는 자세를 보여야 가능한 것이다.
민교육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들이 있나 살펴보자. 민간이 자발적으로 현 제도교육의 대안을 시도하는 대안교육운동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교육을 바르게 세워보겠다는 뜨거운 마음에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설령 공교육의 울타리 속에 들어 있다 해도 교사나 학부모, 개인 또는 모임의 신념과 실천이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면 그들 또한 대안교육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동육아운동은 보다 인간다운 교육을 추구하는 학부모들의 자발성에서 비롯하는 까닭에 교육내용 구석구석에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공의를 그 깊은 바닥으로 흘려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을 공교육에서 따돌리려 하는 것도 그들의 성과를 공교육이 가로채어 가려는 것도 모두 옳지 않다. 그들을 제도 속에서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민교육인 것이다. 가정학교 운동은 또 어떤가! 그들의 놀라운 결단력과 실천은 해직을 각오하고 전교조를 지키던 교사들만큼이나 빛나며 우리 시대의 인식수준을 재는 새로운 척도가 되고 있다. 물론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학교 안 보내고 집에서 교육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어때서라고 자신에게 되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한 수준임을 받아들이고 적어도 나는 어째야겠다는 자기 다짐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은 성장하기 힘들다.
탈학교 논의를 우리 시대에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공교육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탈학교란 이름에서 받게 되는 선입견은 이해의 부족인데 더 좋은 말을 찾을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여러 형태의 교육운동들과 특히 지역공부방, 청소년문화단체, 학부모단체, 환경단체, 자발적인 교사들의 단체, 예술문화단체… 이들 모두가 민간의 차원에서 공공의 정의를 실천하며 이를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그 과정에 적용하려 할 때 그들이 하는 교육행위는 바로 민교육이 된다.
민교육 운동의 원리와 앞날
미리부터 말하지만 이런 거창한 제목이 주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원리는 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제상황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마음에 부담만 주는 못된 것이 되므로 내다 버려야 하고, 특성이란 것도 관찰한 결과 발견된 것이어야 하지 미리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며, 앞날이란 말도 그냥 해보는 상상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망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역시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설령 내팽개치더라도 이런 것을 짚어두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 가짜였으면 다음에는 진짜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진짜였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민교육의 원리는 자발성, 현장성, 공의성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아닌 개인, 또는 단체가 교육의 주체가 된다는 말은 제도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떠맡기던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참여자 개개인의 자발성이 교육운동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장성은 나올 수 없고 공의성은 당위만 남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과 흥미에 따라 진지하게 또는 신나게 참가하는 것. 이것은 모든 인간 영역에서 인류를 발전시켜온 알맹이 힘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빠질 수 없다.
현장성이란 말은 자신에게 펼쳐진 삶 한 가운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어 눈을 뗄 수도 없고, 그 영향을 부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삶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그 공허한 외침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많은 민간차원의 교육모임들이 교육내용을 꾸릴 때 그토록 실제적인 주제들을 끌어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임의 정체성을 잃거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아와도 현장성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친목회 성격에 머문다. 친목회가 나쁘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의성을 빠뜨리다가는 애써 구분해놓은 사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면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교육강좌나 캠프에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참가자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을 때 그 행사 주최자들의 마음에, 꼭 돈벌려고 이 일을 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 모임은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말을 생각해낼 때마다 신나는 상상이 함께 펼쳐진다. 민들레학교, 계절학교(여름동네·겨울동네), 상생체, 대안교육운동의 안·곁·밖 분류, 배움의 숲, 민교육… 그 중에 민교육에 관한 상상이 가장 덩어리가 큰 것 같다. 덩어리가 큰 만큼 조심하는 마음과 부푼 마음이 함께 든다. 영국을 떠나기 바로 전에 대구교대에서 가진 강좌에서 나는 미래의 교육과 관련해서 민교육에 대해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그것이 마침 정재걸 교수님의 글에 실렸기에 그 부분만 여기에 조금 옮긴다.
미래에는 오늘날의 학교가 인간으로서의 기본자질을 담당할 공교육 기관을 김희동 선생은 "보건소 학교"라고 불렀다. 즉 대형 병원들이 즐비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국민의료, 특히 하층민 보건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곳이 보건소이듯이, 미래의 학교에서는 현재 학교가 갖는 대부분의 교육기능이 학원과 같은 사교육으로 이관되고 읽고, 쓰고, 셈하는 등의 가장 기본적인 교육과 공동체 교육, 환경교육, 세계시민교육 등 말 그대로의 공교육, 즉 공공의 정의(正義)를 위한 것만이 보건소 학교의 교육내용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교육기관 사이에 공교육과 사교육의 중간형태인 "민교육(民敎育)"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민교육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하는 교육공동체이다. 환경운동단체에서 운영하는 "환경교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요가강좌" 등이 바로 민교육이다. 민교육은 상설 강좌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즉각적으로 조직된다. 지리산 댐 건설이 문제가 되면 바로 "지리산의 자연"을 주제로 하는 민교육 모임이 결성될 수 있다. 이러한 강좌나 조직은 벌써 우리 주위에 많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민교육은 참가자들의 회비로 운영되지만 미래의 민교육은 그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한다. 왜냐하면 민교육의 내용은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시민들의 "공적" 필요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교육은 국가의 간섭이 최대한 배제되고 철저히 시민의 요구와 운영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사교육이기도 한 것이다.
민교육의 재정을 국가가 부담하는 그 방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서는 괜한 오해를 살 것 같다. 민교육 단체가 하는 모든 교육활동을 국가부담으로 한다는 것은 그 단체의 자립성과 정체성을 빼앗는 일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마땅히 할 일을 자발적으로 찾아나서서 하는 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먼저 그 모임이 사회적으로 공적인 가치를 가지고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검토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검토의 주체는 정부와 민간의 합의로 구성된 민교육심의위원회 같은 것이면 된다고 보고 그 심의위원으로는 정부의 해당부서 담당자와 관련 전문가, 시민단체 또는 관심있는 이들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심의기준은 위에서 제시한 자발성, 현장성, 공의성 원칙이 신청한 단체의 교육활동에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가, 회원 또는 교육참가자의 실질상황이 어떠한가 등을 보며 민교육 활동에 따른 재정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재정지원은 한 사람 또는 많아야 두 사람 정도의 상근자 급여와 신청해온 교육활동 지원금을 검토한 뒤 결정한 액수의 돈이면 충분할 것 같다. 법적 지원은 의무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관련법규에 반영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그에 따른 제도의 정비가 있어야 한다. 세제 지원도 필요한데 국가 공교육기관에게 주어지는 세제 혜택의 일정 정도를 정해서 운영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민교육심의위원회 같은 것이 무슨 권위를 가진 상부기관이 된다면 아주 망할 징조다. 그리고 이 위원회에 신고를 해야 민교육 단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민교육이란 말을 쓸 무슨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앞에서 말한 그런 뜻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면 되고 이를 돕는 기관으로서 민교육심의위원회든 민교육협의회든 필요할 경우에 만들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이 논의가 실제 상황에 접어들면 차차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물질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 허망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물과 현상의 배경에 드리워진 실체를 이해하고 다시 자신의 삶을 이끄는 원리로 작용하게끔 해야 하며, 그러자면 꾸준히 정말로 꾸준히 우리 시대의 현장을 관찰하고 탐구해야 한다. 교육의 영역에서 이런 작업은 단순히 교육을 바로잡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힘을 건강하게 기르고 우리 시대의 정신을 인류애로 가득 채우는 데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걸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나가기 좋게 만드는 것이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그 동안 드문드문 생각해오던 것을 갑작스레 정리하려다보니 설득력 있게 쓰기가 쉽지 않다. 부디 편가르기로 오해하지 말고, 엉성하기 짝이 없더라도 말하고자 하는 그 알맹이와 진심을 잘 읽어서, 꼬이는 쪽으로만 가는 교육이 풀리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