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특성화학교)가 풀어야 할 과제들
현병호
이 글은 <민들레> 16호에 실린 글입니다. 대안학교들 가운데 특성화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대안학교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학교 틀 만들기를 넘어서 그 안의 문화가 참으로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모습을 띠게 될 때 대안학교다운 학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입학 한 달만에 나오기도
대안학교 교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안학교가 '아이들에게는 천국, 교사에게는 지옥'이라고들 말한다. 아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그만큼 교사들은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대안학교의 교사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반학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봉급 수준을 감안하면 자유와 자율의 댓가가 만만찮은 셈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대안학교가 마냥 천국 같은 곳은 아니다. 대안학교로 알려져 있는 학교들 가운데는 학사 운영에서 일반 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곳도 있고, 군대식 학교 문화가 그대로 스며 있는 곳도 있다. 지난해 어떤 대안학교에 입학한 학생 중에는 '군기 잡는' 선배들을 견디지 못해 한 달만에 학교를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대안학교들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므로 군대식 위계질서 문화에 젖어 있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곳도 있다.
막연한 기대나 환상을 갖고 아무 학교나 선택할 경우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기 십상이다. 대안학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교를 잘못 선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달만에 그만둔 그 학생의 부모는 학교측에서 사전에 그런 사실들을 숨겼다며 실망감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안학교들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언론과 방송의 책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좋은 면만 비추고 겉모습만 훑고 지나가는 식의 취재가 범할 수밖에 없는 과오이리라.
일반학교에서 교사들은 흔히 군대식 문화를 묵인하는 경향이 있다. 교사들 중에는 스스로 군대의 장교처럼 행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군인들이 장교보다 고참을 더 어려워하듯이, 학생들 또한 교사 말은 듣지 않아도 선배 말은 듣기 때문에, 교사들은 아이들을 통제하는 방편으로 선배들의 폭력을 묵인하는 경향이 있다. 대안학교라는 곳에서도 이런 일들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문화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학교 운영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머리통이 굵은 아이들이 몸에 밴 습성이나 의식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새로운 문화 속에서 조금씩 의식과 행동이 바뀌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결국 학교의 문화를 바꿔나가지 않으면 대안교육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치유의 학교
교육의 본질이 '관계 맺음'에 있다고 볼 때, 대안학교의 대안성 또한 관계의 성격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친구 같고 친형 같은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벌써 이 학교도 그만뒀을 것"이라는 어느 대안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이 한번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아이가 어디 한둘일까? 대안학교는 그런 아이들의 내면에 감춰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학교라고 하는 학교들 가운데는 치유를 엉뚱한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울산의 공립 위탁 대안학교인 한 학교는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지 않는 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직전의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마지막 코스인 그 학교는 한 달 과정의 학교 적응 교육을 하는데, 학교가 몸에 맞지 않은 아이들을 학교에 두드려 맞추려는 발상이 아이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 교육청에서는 잘 되고 있다고 선전을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삼청교육대'로 여기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회정화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삼청교육대와 마찬가지로 학교정화 차원에서 추진되는 대안학교는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공립 대안학교들을 만드는 교육당국의 발상이 자칫 이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우려된다. 치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안교육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치유가 필요한 아이들이 자칫 교정 대상이 되어 결국 더 망가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도행정이 범했던 우를 교육행정이 따라가서는 안 된다.
모든 학교는 결국 '치유의 학교'여야 하지만 지금의 제도학교는 치유는커녕 상처를 덧내고 없던 상처까지 덧입히고 있다. 선생님의 인정을 한 몸에 받아온 모범생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 입혀진 상처는 적지 않을 것이다. 삶의 자율성이라곤 한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 눈에 들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 했던 아이들 또한 한둘일까. 대안학교는 이런 아이들을 위한 치유의 학교이기도 하다.
치유의 과정은 계획된 커리큘럼이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치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지 누가 누구를 치료하는 형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 그 자체야말로 가장 훌륭한 의사가 아닐까?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민감하게 깨어 있는 교사가 있을 때 치유가 성공할 확률은 더 높아지리라.
무릇 모든 학교에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배움의 과정이 있어야 하고 그들을 지켜봐 줄 수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환경을 만들고자 애쓰는 학교가 다름 아닌 대안학교일 것이다. 결국 교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 배운다지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 또한 진실이다. 제도교육 속에서 몸에 밴 습성을 털어내고 교사로서 거듭나기 위해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들이 더 늘어나야 할 것이다.
대안학교의 교무실과 교장실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 교사들끼리의 관계를 가장 쉽게 엿볼 수 있는 공간은 다름 아닌 '교무실'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무실 풍경은 비슷하다. 교감 책상 앞에 주임교사 책상 그리고 평교사들 책상이 나란히 정렬해 있는 풍경. 위계질서 정연한 모습이다.
대안학교의 교무실은 어떤 모습일까? 대안학교들 중에는 교무실이 없는 학교도 있다. 있다 해도 일반학교의 교무실들처럼 아이들이 쭈볏거리며 들어가 벌이나 쓰는 그런 곳이 아니라 선생님과 아이들이 같이 만화책도 보면서 낄낄거릴 수 있는 곳이다. 양업고에는 교무실 대신 교육지원실이 있는데 이곳은 교사나 학생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쉴 수 있는 휴게실 같은 곳이다. 선생님들은 과목별로 나뉘어 있는 담당 교실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업무를 본다. 간디학교에는 교무실이 있지만 역시 휴게실에 가깝다. 영산성지고, 두레자연고, 원경고, 화랑고도 교무실에서 만화책 보고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 신문을 보고 있는 아이들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업무에 바쁜 선생님한테 스타크래프트 한판 하자고 조르는 아이들도 있다.
교장실 풍경 또한 그 학교의 성격을 짐작케 하는 중요한 한 단면일 수 있다. 초중고를 불문하고 우리 나라 거의 모든 교장실이 비슷비슷한 것은 그만큼 우리 학교들이 획일적임을 드러낸다. 대안학교들 중에는 격식을 갖춘 교장실을 따로 두고 있는 학교도 있고 교무실 한 켠에 책상 하나만 놓고 있는 곳도 있다. 교장실 풍경만으로 학교 분위기를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일반학교 교장실과 너무나 흡사해서 적이 실망스러운 학교들도 있다. 책상 옆에 커다란 학교 깃발과 태극기가 세워져 있고 트로피와 상장들이 전시되어 있는 풍경. 아이들이 그곳에 들어와 어떤 자세로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떠오르는 그런 교장실. 대안학교의 교장실로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시설이 좋기로 이름난 양업고의 교장실은 대기업 중역실 못지 않게 위용을 갖추고 있는데 지난해 교육부 장관 방문을 계기로 그렇게 꾸민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관료집단의 격식차리기 탓도 있겠지만 대안학교까지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학생들이 만족스러워 하는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교장실 풍경은 옥에 티다. 교육부장관 앞일수록 더 대안적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을까?
대안학교의 교장은 어떤 모습
대안학교의 교장은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정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교사들, 또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할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스승의 날 간디학교의 풍경 하나는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스승의 날이라고 아이들이 선생님들 가슴에 꽃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자 거기에 답하는 노래로 양희창 교장선생이 랩송을 불렀다고 한다. 교장의 '품위' 따위엔 아랑곳없이 손발을 흔들면서 부른 랩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간디의 친구들아, 스승의 날에 쑥스럽고 찡하고 부끄럽고 고맙고 미안하여 숨고 싶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렴. 우리를 본받지마! 고리타분 뺀질뺀질, 수업시간 졸리게 하고 입만 떼면 쓸데없는 잔소리 우리 따라 살지마.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줘. 포기하지마! 꿈꾸는 나를, 포기하지마.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백발이 되도 꿈꾸는 사람이기를 포기하지마…."
'교장답지 않은 교장'의 전형이었던 서머힐의 교장 니일은 아이들에게 친구이자 아빠,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돈을 빌리기 위해 교장실을 찾고, 어린아이들이 거리낌없이 "바보!" 하고 놀리기도 하는 교장 선생님. 전체회의에서도 아이들과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며,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위엄을 부리지 않는 교장 선생님은 그만큼 내면의 힘이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네 학교에서 그렇게 목에 힘주지 않는 교장을 만나기란 참 쉽지 않다. 교장의 목이 굳어 있는 만큼 학교 분위기도 굳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 일반학교에서 나이든 교사들은 교감, 교장이 되기 위한 근무 평점을 따느라 아이들은 뒷전이기 일쑤다. 교육보다는 출세에 관심이 있어 그런 이들도 있지만, 교장과 교사의 관계가 상하 관계이다 보니 나이 들어 젊은 교장을 '모시기'가 껄끄러워 그런 경향이 더 많다고 한다. 교장이 상급자가 아니라 학교 운영상 필요한 잡무를 맡은 사람으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위계적인 학교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교장, 교감, 주임, 평교사, 학생으로 내려오는 이러한 위계질서 문화를 넘어서지 않고는 대안학교의 문화 역시 근본에서는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런데 학교에 꼭 교장이 있어야만 할까? 외국의 프리스쿨 가운데는 교장(principal) 대신 행정실장(administrator)이나 공동 책임자(co-director)가 그 역할을 맡기도 한다. 교장이란 직함은 아무래도 일반 교사보다 상급자 느낌을 주기 때문에 평등한 관계를 이루고자 할 때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대외적인 관계 때문에 또는 학교 운영상의 효율을 위해 교장이란 직책이 필요하다면, 교사의 상급자가 아니라 역할이 좀 다른 동료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교육슈퍼에는 대안학교가 없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광고 문구처럼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교육 또한 그렇다. 순간순간 부딪히는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며 관계를 잘 풀어가는 것이 삶의 과제이듯 대안교육, 대안학교의 과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안교육이란 '대안을 만들어가는 교육'이라고 말하는 간디학교 양희창 교장의 말은 대안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도록 일깨워준다. 당연한 사실이건만 잊기 쉬운 것이 대안교육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대안학교란 진열대에서 골라잡으면 되는 기성품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학교이다. 교사와 학생들,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학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안학교들이 사립 기숙학교인 만큼 학부모들이나 지역주민들이 학교 운영에 영향력을 미치기는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다.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적기 때문에 선택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좌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교과과정 같은 것은 요람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아이들의 자율성이 얼마나 보장되는지,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 아이들끼리, 교사들끼리의 관계는 어떤지, 학교 요람에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속사정들을 잘 알아봐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이 일은 본질상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천리길도 한 걸음 속에 들어 있듯이. 한 순간 한 순간 삶 속에서 대안을 구현하는 일. '이미'와 '아직'의 줄 위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자세야말로 대안교육, 대안학교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현병호
이 글은 <민들레> 16호에 실린 글입니다. 대안학교들 가운데 특성화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대안학교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학교 틀 만들기를 넘어서 그 안의 문화가 참으로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모습을 띠게 될 때 대안학교다운 학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입학 한 달만에 나오기도
대안학교 교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안학교가 '아이들에게는 천국, 교사에게는 지옥'이라고들 말한다. 아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그만큼 교사들은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대안학교의 교사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반학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봉급 수준을 감안하면 자유와 자율의 댓가가 만만찮은 셈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대안학교가 마냥 천국 같은 곳은 아니다. 대안학교로 알려져 있는 학교들 가운데는 학사 운영에서 일반 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곳도 있고, 군대식 학교 문화가 그대로 스며 있는 곳도 있다. 지난해 어떤 대안학교에 입학한 학생 중에는 '군기 잡는' 선배들을 견디지 못해 한 달만에 학교를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대안학교들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므로 군대식 위계질서 문화에 젖어 있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곳도 있다.
막연한 기대나 환상을 갖고 아무 학교나 선택할 경우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기 십상이다. 대안학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교를 잘못 선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달만에 그만둔 그 학생의 부모는 학교측에서 사전에 그런 사실들을 숨겼다며 실망감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안학교들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언론과 방송의 책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좋은 면만 비추고 겉모습만 훑고 지나가는 식의 취재가 범할 수밖에 없는 과오이리라.
일반학교에서 교사들은 흔히 군대식 문화를 묵인하는 경향이 있다. 교사들 중에는 스스로 군대의 장교처럼 행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군인들이 장교보다 고참을 더 어려워하듯이, 학생들 또한 교사 말은 듣지 않아도 선배 말은 듣기 때문에, 교사들은 아이들을 통제하는 방편으로 선배들의 폭력을 묵인하는 경향이 있다. 대안학교라는 곳에서도 이런 일들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문화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학교 운영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머리통이 굵은 아이들이 몸에 밴 습성이나 의식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새로운 문화 속에서 조금씩 의식과 행동이 바뀌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결국 학교의 문화를 바꿔나가지 않으면 대안교육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치유의 학교
교육의 본질이 '관계 맺음'에 있다고 볼 때, 대안학교의 대안성 또한 관계의 성격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친구 같고 친형 같은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벌써 이 학교도 그만뒀을 것"이라는 어느 대안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이 한번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아이가 어디 한둘일까? 대안학교는 그런 아이들의 내면에 감춰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학교라고 하는 학교들 가운데는 치유를 엉뚱한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울산의 공립 위탁 대안학교인 한 학교는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지 않는 학교로 소문이 나 있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직전의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마지막 코스인 그 학교는 한 달 과정의 학교 적응 교육을 하는데, 학교가 몸에 맞지 않은 아이들을 학교에 두드려 맞추려는 발상이 아이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 교육청에서는 잘 되고 있다고 선전을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삼청교육대'로 여기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회정화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삼청교육대와 마찬가지로 학교정화 차원에서 추진되는 대안학교는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공립 대안학교들을 만드는 교육당국의 발상이 자칫 이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우려된다. 치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안교육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치유가 필요한 아이들이 자칫 교정 대상이 되어 결국 더 망가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도행정이 범했던 우를 교육행정이 따라가서는 안 된다.
모든 학교는 결국 '치유의 학교'여야 하지만 지금의 제도학교는 치유는커녕 상처를 덧내고 없던 상처까지 덧입히고 있다. 선생님의 인정을 한 몸에 받아온 모범생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 입혀진 상처는 적지 않을 것이다. 삶의 자율성이라곤 한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 눈에 들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 했던 아이들 또한 한둘일까. 대안학교는 이런 아이들을 위한 치유의 학교이기도 하다.
치유의 과정은 계획된 커리큘럼이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치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지 누가 누구를 치료하는 형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 그 자체야말로 가장 훌륭한 의사가 아닐까?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민감하게 깨어 있는 교사가 있을 때 치유가 성공할 확률은 더 높아지리라.
무릇 모든 학교에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배움의 과정이 있어야 하고 그들을 지켜봐 줄 수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환경을 만들고자 애쓰는 학교가 다름 아닌 대안학교일 것이다. 결국 교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 배운다지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 또한 진실이다. 제도교육 속에서 몸에 밴 습성을 털어내고 교사로서 거듭나기 위해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들이 더 늘어나야 할 것이다.
대안학교의 교무실과 교장실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 교사들끼리의 관계를 가장 쉽게 엿볼 수 있는 공간은 다름 아닌 '교무실'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무실 풍경은 비슷하다. 교감 책상 앞에 주임교사 책상 그리고 평교사들 책상이 나란히 정렬해 있는 풍경. 위계질서 정연한 모습이다.
대안학교의 교무실은 어떤 모습일까? 대안학교들 중에는 교무실이 없는 학교도 있다. 있다 해도 일반학교의 교무실들처럼 아이들이 쭈볏거리며 들어가 벌이나 쓰는 그런 곳이 아니라 선생님과 아이들이 같이 만화책도 보면서 낄낄거릴 수 있는 곳이다. 양업고에는 교무실 대신 교육지원실이 있는데 이곳은 교사나 학생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쉴 수 있는 휴게실 같은 곳이다. 선생님들은 과목별로 나뉘어 있는 담당 교실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업무를 본다. 간디학교에는 교무실이 있지만 역시 휴게실에 가깝다. 영산성지고, 두레자연고, 원경고, 화랑고도 교무실에서 만화책 보고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 신문을 보고 있는 아이들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업무에 바쁜 선생님한테 스타크래프트 한판 하자고 조르는 아이들도 있다.
교장실 풍경 또한 그 학교의 성격을 짐작케 하는 중요한 한 단면일 수 있다. 초중고를 불문하고 우리 나라 거의 모든 교장실이 비슷비슷한 것은 그만큼 우리 학교들이 획일적임을 드러낸다. 대안학교들 중에는 격식을 갖춘 교장실을 따로 두고 있는 학교도 있고 교무실 한 켠에 책상 하나만 놓고 있는 곳도 있다. 교장실 풍경만으로 학교 분위기를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일반학교 교장실과 너무나 흡사해서 적이 실망스러운 학교들도 있다. 책상 옆에 커다란 학교 깃발과 태극기가 세워져 있고 트로피와 상장들이 전시되어 있는 풍경. 아이들이 그곳에 들어와 어떤 자세로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떠오르는 그런 교장실. 대안학교의 교장실로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시설이 좋기로 이름난 양업고의 교장실은 대기업 중역실 못지 않게 위용을 갖추고 있는데 지난해 교육부 장관 방문을 계기로 그렇게 꾸민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관료집단의 격식차리기 탓도 있겠지만 대안학교까지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학생들이 만족스러워 하는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교장실 풍경은 옥에 티다. 교육부장관 앞일수록 더 대안적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을까?
대안학교의 교장은 어떤 모습
대안학교의 교장은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정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교사들, 또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할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스승의 날 간디학교의 풍경 하나는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스승의 날이라고 아이들이 선생님들 가슴에 꽃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자 거기에 답하는 노래로 양희창 교장선생이 랩송을 불렀다고 한다. 교장의 '품위' 따위엔 아랑곳없이 손발을 흔들면서 부른 랩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간디의 친구들아, 스승의 날에 쑥스럽고 찡하고 부끄럽고 고맙고 미안하여 숨고 싶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렴. 우리를 본받지마! 고리타분 뺀질뺀질, 수업시간 졸리게 하고 입만 떼면 쓸데없는 잔소리 우리 따라 살지마.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줘. 포기하지마! 꿈꾸는 나를, 포기하지마.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백발이 되도 꿈꾸는 사람이기를 포기하지마…."
'교장답지 않은 교장'의 전형이었던 서머힐의 교장 니일은 아이들에게 친구이자 아빠,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돈을 빌리기 위해 교장실을 찾고, 어린아이들이 거리낌없이 "바보!" 하고 놀리기도 하는 교장 선생님. 전체회의에서도 아이들과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며,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위엄을 부리지 않는 교장 선생님은 그만큼 내면의 힘이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네 학교에서 그렇게 목에 힘주지 않는 교장을 만나기란 참 쉽지 않다. 교장의 목이 굳어 있는 만큼 학교 분위기도 굳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 일반학교에서 나이든 교사들은 교감, 교장이 되기 위한 근무 평점을 따느라 아이들은 뒷전이기 일쑤다. 교육보다는 출세에 관심이 있어 그런 이들도 있지만, 교장과 교사의 관계가 상하 관계이다 보니 나이 들어 젊은 교장을 '모시기'가 껄끄러워 그런 경향이 더 많다고 한다. 교장이 상급자가 아니라 학교 운영상 필요한 잡무를 맡은 사람으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위계적인 학교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교장, 교감, 주임, 평교사, 학생으로 내려오는 이러한 위계질서 문화를 넘어서지 않고는 대안학교의 문화 역시 근본에서는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런데 학교에 꼭 교장이 있어야만 할까? 외국의 프리스쿨 가운데는 교장(principal) 대신 행정실장(administrator)이나 공동 책임자(co-director)가 그 역할을 맡기도 한다. 교장이란 직함은 아무래도 일반 교사보다 상급자 느낌을 주기 때문에 평등한 관계를 이루고자 할 때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대외적인 관계 때문에 또는 학교 운영상의 효율을 위해 교장이란 직책이 필요하다면, 교사의 상급자가 아니라 역할이 좀 다른 동료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교육슈퍼에는 대안학교가 없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광고 문구처럼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교육 또한 그렇다. 순간순간 부딪히는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며 관계를 잘 풀어가는 것이 삶의 과제이듯 대안교육, 대안학교의 과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안교육이란 '대안을 만들어가는 교육'이라고 말하는 간디학교 양희창 교장의 말은 대안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도록 일깨워준다. 당연한 사실이건만 잊기 쉬운 것이 대안교육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대안학교란 진열대에서 골라잡으면 되는 기성품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학교이다. 교사와 학생들,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학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안학교들이 사립 기숙학교인 만큼 학부모들이나 지역주민들이 학교 운영에 영향력을 미치기는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다.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적기 때문에 선택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좌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교과과정 같은 것은 요람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아이들의 자율성이 얼마나 보장되는지,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 아이들끼리, 교사들끼리의 관계는 어떤지, 학교 요람에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속사정들을 잘 알아봐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이 일은 본질상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천리길도 한 걸음 속에 들어 있듯이. 한 순간 한 순간 삶 속에서 대안을 구현하는 일. '이미'와 '아직'의 줄 위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자세야말로 대안교육, 대안학교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