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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공교육과 대안교육 그리고 민주주의(이한)

민들레
2002-06-21
조회수 7342
*아래 글은 <민들레> 16호 124∼139쪽에 실린 글입니다.


공교육과 대안교육 그리고 민주주의

;이 한(<학교를 넘어서>, <탈학교의 상상력> 지은이)


서론

대안학교든 학회든, 교육 현장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은 자신이 품고 있는 가치 있는 것을 교육과정에서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가치는 생태주의적 신념과 생활양식일 수도 있고, 직업적인 전문성의 추구일 수도 있고, 즐거운 배움의 경험 그 자체일 수도, 종교적인 경건성의 체화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국가가 획일적으로 규제하지 않는 교육과정이라고 해서 모든 가치의 실현이 다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사회적 규제가 교육과정에 필요한가?
이 문제는 사람들에게 감정적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가 교육에 대해 규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것이다. 한편, 종교교육을 시키는 학교에 공공재정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헌법 정신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문제도 제기되어왔다.
이 두 문제만 해도 수백 개의 판례와 팜플렛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사례 중 하나일 뿐이고, 그 뒤에는 더 일반적인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공 재정을 지원받는 학교에서 사회가 공통적으로 합의하지 않은 가치를 가르칠 수 있느냐?" 또는 "학교에서 실현하는 가치는 어떤 경우에라도 정당화되느냐, 아니면 국가와 사회의 규제를 모두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물론 대안교육의 이상은 국가와 사회의 전일적 규제를 거부하는 쪽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좀더 가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남녀차별적 신념이나, 외국인을 배척하는 신념, 국수주의적인 신념들이 모두 동등한 정당성을 가지고 학교교육 과정에서(비공식적으로라도) 체화된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적 신념이나, 경쟁력 지상주의나, 종교적 신념, 스파르타식 교육, 비주류적인 학문적 관점에 이르면 문제는 무척 힘들어진다. 어떤 가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누가 판별하는가?
가치 정당성과 규제의 문제 말고도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더 있다. 교육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교육이 사회의 진보와 화합에 기여하지 못하고, 체제를 반동적으로 퇴행시키거나 억압을 유지시키고 전쟁과 분열을 조장한다면? 또는 교육이 오직 개인의 직업을 위한 전문성과 도구로서의 지식만을 향상시킬 뿐 정치적인 지침과 활동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아를 실현하는 존재로서의 '배우는 사람'을 넘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배우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민주주의'와 교육의 관계를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사회를 움직이는 정당화된 통로이며, 여러 가치들이 서로의 정당성을 시험하기 위해 토론하는 장이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존재들의 활동장소이기 때문이다.


본론

공교육과 민주주의
(여기서 '공교육'이라는 말은, '공공성이 있는 교육'이라는 가치 측면의 뜻이 아니라, 순수히 형식적으로 국가가 재정을 부담하고 교육과정을 규제하는 제도교육을 뜻한다.)
공교육의 기원은 민주주의와 모호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교육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프로이센의 보통교육 제도가 국가주의 통제를 위해 지배층으로부터 도입된 것이라면, 스웨덴의 보통교육은 사회민주주의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미국은 공교육의 도입에 대해 중산층과 자본가 계급이 결탁했고, 농민은 반대한 반면, 노동자는 때로는 간접적인 찬성을 때로는 직접적인 반대를 했던 모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해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공교육은 모두 식민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고 그 목적도 식민지인들의 통제수단이었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공교육을 도입했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공교육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공교육 제도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보통교육은 대중전반의 의식 수준을 향상시켜 민주주의와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이고 크나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다. 밀의 자서전이나 정치경제학원리를 읽어보면, 보통 사람들도 밀 자신과 같은 최고 수준의 지성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밀이 유령의 몸으로 21세기를 보게 된다면 상당히 실망하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예언이 부분적으로는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은 첫째로,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 관계는 국가에 따라서 다르지만-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학교교육의 보편화와 글쓰기 능력에 부정적인 상관관계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교육 자체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빈곤층이 게토화된 것이 진짜 원인인 듯이 보인다.-적어도 우리 나라에서는 공교육이 대중의 읽고 쓰는 능력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음이 틀림없다. 정치적인 능동성에 읽고 쓰는 능력은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공교육의 형식이 아니라도 같은 공공재정이 투입된다면, 대중들이 읽고 쓰는 능력을 대중들이 기르게 하는 방법은 많다. 그러므로 공교육만이 읽고 쓰는 능력을 길러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것은 계산을 불공정하게 한 것이다. 오히려 공교육은 거의 모든 경우에, 읽고 쓰는 능력의 정치적인 성격을 박탈하는 듯하다.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짜인 교과서로 공부하는 인도 어린이와, 파울로 프레이리로부터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글자를 배우는 브라질 농민의 인식 차이를 비교해 보라. 공교육의 읽고 쓰는 능력에 대한 기여는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나 많이 나아갔다.
둘째로, 공교육은 적어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대의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일단 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정당성을 갖추게 되면, 그 정당성은 민주적 과정으로 선출된 정부가 규제하는 교육을 통해서 아래 세대에게 전달된다. 연방주의냐 단방주의냐,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비례대표냐 아니냐 하는 치열한 논쟁이 있음에도, 민주적으로 대의원들을 선출한다는 그 형식 자체는 늘 도전받고 있지 않다는 점에는 학교교육이 기여했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교육이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친화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군사독재국가도 공교육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한 찬양은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국민학교에서 충분히 가르쳐졌다. 성장위주의 국토개발계획이나, 이승복 어린이 사건을 왜곡하고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로부터 거둬들인 광신적인 반공교육이 공교육 제도와 동거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그리스, 스페인, 남미, 동유럽과 같이 오랜 독재기간을 거친 나라들에도 공교육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획일적인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은 교육현장이 지금 학교의 수만큼 많았다면 독재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행정명령 말단에 있는 학교교사들은 국가의 폭력에 너무나 가까이 노출되어 있고,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투명하게 '국가에' 공개되어 있으며, 교사는 언제나 국가(또는 국가의 통제하에 있는 학교 이사진)에 의해 해고됨으로써 안정된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아리나 학회에서는 반정부적인 내용들이 충분히 토론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우리 나라는 더 이상 독재국가가 아니고, 정권교체도 이루어졌으며, IMF라는 위기상황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고 민간정부에 의해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군사 쿠데타는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바이마르 정부 이후의 나치정권이나, 그리스와 스페인의 군사독재정권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따라서 획일적인 국가 규제를 받는 공교육 제도는 언제나 독재권력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안겨줄 수 있는 위험부담을 그만큼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의해 운영될 경우에만 대의 민주주의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발전된 민주주의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에 의해 권력을 교체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는 제도'라는 뜻으로 제한적으로 쓰였다. 이러한 정의는 칼 포퍼와 요제프 슘페터가 내렸던 정의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민주주의는 권력의 폭압으로부터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종적인 방어선 외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의견을 주장하고, 사회정책을 실현시킬 것을 강조하는가? 분명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는 '최종적인 방어선'일 뿐 아니라, 권리를 확장시키고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최전선이기도 하다. 만약 대의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심화 발전되지 않는다면, 인민의 권리는-우리 나라가 지금 그런 것처럼-여전히 저열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제도인 이유는, 그것이 자유를 보장할 뿐 아니라 가장 나은 대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가장 낫다'라는 것은 철인 철학자가 판단할 수 없으며, 오직 합리적 근거에 바탕을 둔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존 스튜어트 밀의 기대는 교육과 민주주의의 심화된 양식을 고민하지 않고, 단순히 '모든 것이 잘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라는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낙관론은 실패했다. 민주제도가 고도로 발전된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극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전략적 지역분할과 비합리적 반공주의로 말미암아 의회가 합리적인 토론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있다. 대의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결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미국과 스위스의 일반투표(referandum)로 대표되는 단순 직접 민주주의도 역시 그 결함들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국민들은 대의자를 숙고해서 선출하지 못하며,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책임성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직접적으로 정치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다. 참여한다 하더라도 숙고된 참여는 드물고, 선전(propaganda)에 들인 돈에 좌지우지되는 선호를 통해 결정하는 경향이 많다. 정치참여는 그것이 직접투표의 형식을 따를수록, 투표의 과정이 복잡할수록, 계층에 따라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 가장 민주주의의 혜택을 받아야 할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을 조직할 능력과 동기를 교육을 통해 얻지 못하고 있다.
발전된 민주주의는 숙고되고 심의된 인민의 의사가 효과적으로 실현되는 의사결정제도이다. 그것은 대표성과 책임성이 잘 작동하는 정당정치를 바탕으로, 때때로 직접투표를 통해 대의제를 보완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그것을 운영할 인민의 능력이 있을 때에만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교육은 민주주의 발전을 예비하고 이끌고 추동해야만 한다. 만약에 이것을 부인하고 일부의 당파적인 신념만을 다루거나, 개인적인 자아실현을 위한 직업적 전문과정에만 몰두하는 교육의 장은 온전한 것이 못된다. 사회는 전쟁상태나 정치적 무관심 상태로 퇴행하고, 대의제가 발전하기는커녕 저열한 상태로 머무르거나, 심지어 더 퇴행하여 독재의 위협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공교육은 발전된 민주주의에 적합한가?
지금의 공교육은 발전된 민주주의에 적합한 교육을 제공하지 못한다. 너무 단정적인가? 그러나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줘도,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공교육을 모두 검토해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첫째로, 공교육은 비민주적인 생활양식을 체화한다. 공교육은 행정부로부터 학교로까지, 교장으로부터 학생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명령하달 체계에 사로잡혀 있다. 계층화와 통제라는 두 주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학교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할 여유가 없다. 민주적으로 '시험'을 없앨 수도 없으며, 민주적으로 교육과정을 바꿀 수도 없으며, 민주적으로 체벌을 없앨 수도 없다. 권력은 절대적으로 서열이 있으며, 이 틀 안에서 가장 최선의 민주주의도 단지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이다. 만약에 공공재정을 부여받으면서도 모든 것을 교육현장의 주체들이 결정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공교육이라 부를 수 없다.(이를 구분하기 위해 최근에는 민교육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둘째로, 공교육은 지식을 다루는 방식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다. 학교에서 지식은 암기되고, 표시되고, 테스트 받으며, 성적과 졸업증 딱지로 증명받는 것이다. 학교에서 지식은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지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지식소유는 서열로 측정되고, 높은 서열을 차지한 자는 그에 따른 특권을 누린다. 이 모든 것은 양반과 상놈, 성직자와 농민을 가르는 중세적인 관념이다. 이 중세적인 관념은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두 가지 태도를 낳는다.
하나는 엘리트주의적 태도이다. 지식은 전문가만이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경제정책은 경제학자만이, 과학정책은 과학자만이, 법정책은 법률가들만이, 외교정책은 외교전문가만이, 안보정책은 안보전문가만이 다룬다. 이것은 지식의 민주적 활용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사람도 합리적인 논거를 댄다면 사회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이것이 민주적인 태도이다.
베트남 전쟁을 지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과연 안보전문가들만이 알 수 있는가? 핵무기를 폐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과연 복잡한 핵 억제게임 이론에 통달한 전략가들만이 결정할 수 있는가? 이들이 알고 있는 지식도 결국 지식에 불과한 것이며, 그들의 결론도 철인의 결론이 아니라 한 인간의 결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 고정적으로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 요지와 근거들은 명료하고 대중적인 형식으로 공개되고 설명될 수 있으며, 그에 반대되는 주장과 근거들도 같은 형식으로 공개되고 주장될 수 있다. 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일반인들도(시간이나 정력이 딸려서 한 사람이 모든 문제에 대해 결정하지는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문제들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주장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면, '당신은 자격증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 근거가 이러저러한 점에서 틀렸다'고 지적함으로써 반박당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주의적 태도는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무시한다. 그들은 성직자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신비화한 것처럼, 사회정책도 전문가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신비화한다. 이런 태도는 의사결정과정에서 권력의 극심한 불평등과, 일반인들의 (표 찍기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구체적 의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고 부추긴다. 학력제도와 시험제도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최대의 공모자들이다. 공교육 제도가 이 두 제도를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들은 숙고하고 심의하는 토론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도 거부하는 셈이다.
둘째로, 공교육은 지식에 대한 '지표적 태도'를 만연시킨다. '지표적 지식'이라는 말은 디에고 감베타(Diego Gambetta)라는 학자가 남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마초적인 토론 태도를 분석하면서 쓴 용어이다('"Claro!";An Essay on Discursive Maschismo', Diego Gambetta, in 『Deliberative Democracy』, edited by Jon Elst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지표적 지식'(Indexical Knowledge)에 대비되는 용어는 '분석적 지식' (Analytical Knowledge)이다. 감베타에 따르면, 분석적 지식은 합당한 이론적 추론과 실증적인 조사 그리고 엄격한 사고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분석적 지식들은 더 나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주장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며, 최선의 결론을 얻기 위한 토론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반드시 '전문적인 증서'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올바른 검증과정을 거쳐서 숙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에 지표적 지식은 '강한 의견'(strong opinion)과 '모든 것에 대하여'(on Everything)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즉, 어떤 주장은 그것이 단정적으로 말해질수록,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할수록, 목소리가 클수록, 그리고 그 문제와 상관없는 권력이더라도 권력이 있으면 정당성을 갖는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자신이 힘든 사고과정을 거쳐서 결론을 낸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 견해를 가질 것을 요구받는다. 만약에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권력을 잃고 마는 것이며, 진실로 옳은 근거를 갖고 있는 견해도 힘을 잃어버린다. 유명 야구선수가 의료보험제도 문제에서부터 남녀동거에 대한 찬반의견까지 답해야 하며, 재계 유명인사의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언급들은 언론에 의해 크게 다루어진다.
엘리트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는 지표적 지식만 소유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지적으로 불성실하다. 지적인 불성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것이다. 정의감 하나로 주택임대료 최고가 제도를 주장하는 것은 지적으로 불성실한 것이다. 경쟁을 제한하는 법을 중소기업 보호라는 이유에서 주장하는 것도 지적으로 불성실한 것이다. 비교우위의 개념도 모르면서 '국가경쟁력' 운운하며 모든 산업부문이 세계 1등이 아니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채찍질하는 얼치기들도 지적으로 불성실한 것이다.
그런데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토론이라도 벌어지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자기 의견을 강하게 표현한다. 물론 이성적인 추론의 과정이 중요시되지 않기 때문에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한다. "명백하군!" 그러나 명백한 것은 그들이 바보 같은 사고와 토론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응답하기를 요구하는 문제들이 '명백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잡한 문제들이 무엇이든지 명백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마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교양 있는 신사들이 모든 문제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지표' 또는 위상을 드러내려고 했듯이, 지식에 대한 지표적 태도가 확고한 사회에서는 합리적인 토론과 추론의 과정이 힘을 잃는다.
우리 사회는 불행히도, 지식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지표적인 태도가 결합된 최악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경제정책에 대해서 노동자들이 발언하려고 하면, 재계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경제학자들이 나서서 '자격 없는 사람의 헛소리'라고 말한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문인들은 영어공용화를 주장하거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훈계를 늘어놓는다. 사람들은 토론에 들어가면, 최선의 결론을 내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을 중요시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더 얻고 사고를 예리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크게 말할 기회만을 가지려고 한다. 목소리를 높이면 이긴 것이고, 눌렸으면 기분 잡친 것이다.
대중들은 택시 안에서, 소주를 부으며, 이 나라의 교육정책과 교통정책, 국방, 정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해박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의견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의견들은 아무런 추론적 일관성을 지니지 않고 있으며, 다른 의견과 만났을 때를 대비한 합리적인 근거들을 준비
해 놓고 있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그렇게 온갖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별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공간은 참여할 대상이 아니라, 노가리와 함께 씹어야 할 대상이 된다.
감베타는 지표적 지식이 만연해 있는 사회는, 일종의 균형이 생겨나서 분석적 지식이 일반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 합리적인 토론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근거를 대며 조목조목 논리를 따지는 것이 먹혀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 괴상한 균형상태를 유지시키는 데 크나큰 기여자로 학교교육을 빼놓는다면, 학교는 틀림없이 서러워 할 것이다.
최근에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교육'을 하자는 소리가 드높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근거가 있는 의견을 필요할 때에 제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합리적인 추론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굳이 교육하지 않아도 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민주적인 통제와 억압을 받고, 기계처럼 짜여진 시간표에 저항하지 못한 채 매일 매일을 살아가며, 지식의 소유정도를 측정해서 발언권과 특권을 부여하며, 합리적 추론보다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박한 '파편적 지식'을 요구하는 시험제도를 십 몇 년 동안 거친 사람들에게 심의하고 숙고하는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인민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공교육은 발전된 민주주의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안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할 점은
국가로부터 민간으로 단순히 교육운영의 권리가 이양된다고 해서, 민주적인 인간이 길러질 리는 만무하다. 미국의 사립학교들은 더 엄격한 규율과 성적 기준으로 유명하다. 종교적 신념으로 뭉친 설립자가 세운 대안학교가 만약 그들의 교리를 교육과정에 집어넣었을 경우, 그 학교의 졸업생들은 동성애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만약 그 대안학교에 동성애자 학생이 들어간다면 어쩔 것인가? '민족사관'이라는 이상한 이념으로 설립되어 불편한 모자를 쓰게 하고 엘리트주의적 신념을 퍼부어 대는 학교의 커리큘럼도 아무 문제가 없는가? 현재 학교교육이 직업적인 전문훈련과정을 마련해 주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자신도 대안교육을 한다면서 '경쟁력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매진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서로 다른 선호의 존재는 잘 인정하지만 그 선호가 공공적 문제에 관한 것일 때에는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단순히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라는 말은 정당한가?
지금까지 공교육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가졌다. 사회에서 합의된 지식을 국가가 검정하여 가르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합의하는가? 교과서 만드는 학자들이? 일본 역사 교과서를 보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광복 이후 현대사에 대해 공정하지 못한 우리 나라 역사 교과서와 윤리 교과서는 어떤가? 그 학자들을 누가 뽑았는가? 그 합의는 고정된 것인가? 기독교인이 다수인 사회에서는 창조론이 합의된 것이고, 무신론자가 다수인 사회에서는 진화론이 합의된 것인가? 합의는 단순히 애를 많이 낳으면 되는 것인가?
어떤 이론도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할 수 없었다. 이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교육이론들이 똥을 닦다가 만 것처럼 어정쩡하게 처리한 상태에서, 공교육에서는 현재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 교육과정과 교육내용에 포함되어 버렸던 것이다. 국가가 결정한다는 틀 자체가 이미 '토론의 과정'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내용의 국가규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실현시키는 답이 될 수 없다.
교육의 민주성은 오직 다음 기준에 따라 확보될 수 있다.
첫째, 그 교육이 얼마나 자유와 평등의 맥락에 놓여 있는가? 교육공간은, 학력제도와 의무교육 때문에 마지못해 갇혀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며, 시험성적이 좋고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만 한다. 학력은 폐지되고, '교육을 위한 시험'이라는 기만적인 제도도 사라져야만 한다. 교육재정은 경제적 사정에 따라 지급되어 누구나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하며, 직업의 전문직은 일생에 걸쳐 개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교육의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육현장을 알차게 꾸려갈 뿐 아니라, 이러한 큰 틀의 제도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항상 내어야만 한다.
둘째, 그 교육공간의 내용과 방법이 공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표현되든 암묵적인 방식으로 체화되든, 모든 교육의 내용들은 공공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학생들도 그러한 토론에 대해 알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적이지 못한 독단들은 토론의 과정을 통해 걸러질 것이며, 이러한 장치는 국가규제보다 훨씬 잘 작동할 것이다. 물론 토론의 장은 체계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토론은 일종의 공공재이기 때문에, 잘 정비된 토론의 장이 없으면 각 교육공간들은 자신의 교육을 비판에 노출시키기를 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안교육 연대체는, 대안교육의 확산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도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공간의 교육내용들을 주제로 올려놓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실시하거나, 회지를 발행하며, 사이버 토론의 게시판을 운영해야 할 것이다. 학교의 의사결정 방법이나, 시간표, 생활방법뿐 아니라, 각종 교과목의 교육방법론, 역사나 사회학과 같은 관점의 차이가 많이 나는 교과목들에 대한 토론이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작업은 단지 서로를 비판하거나 자기 교육 방법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교사, 학생, 학부모, 회원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육공간의 정당성과 위치를 확인하고 더 나은 것을 발견하기 위한 협동작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작업은 곧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이며, 대안교육 연대체가 이를 해낸다면, 내용도 담보할 수 있고 대안교육 공간들의 공적인 대표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모든 대안교육 공간에서는 민주적인 생활양식과 더불어, 윤리학과 정치경제학, 논리적으로 지식을 연구하고 검증하는 방식(논리학의 기초, 과학철학과 방법론)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한 당파적 내용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민주적인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준이다. 이 규준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곳이 있다면, 그러한 거부 사실은 다른 곳과의 비교, 토론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물론, 모든 교육공간에서 명시적으로 이러한 교과목을 설치하는 것은 있을 법하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이 언제든지 참고할 수 있는 사항이 될 수 있도록, 이러한 지식들을 커리큘럼의 형태로 마련해 놓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대안교육 진영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이러한 지식에 대해 커리큘럼을 함께 만드는 작업 또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넷째,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사회단체들은, 교육공간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이미 있는 교육공간과 연계를 강화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정치적 행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혼자 환경단체에 찾아가는 것보다는 학교활동의 차원에서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학생들 중 원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업에 참여하거나 일정기간 자원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각 단체의 활동들은 모두 교육공간에서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학교와 연계된 단체는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인 정치성을 위한 경험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그런 관행이 표준화된다면, 정치적 수동성과 정치활동으로부터의 소외가 당연시되는 문화들은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다.


결론

대안교육은 지금의 교육이 인간을 파괴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교육제도는 사회에 맞물려 있다. 대안적 교육은 대안적 사회를 만드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만 한다. 물론 대안적 사회에 대한 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과 나는 다르군. 그리고 당신은 틀렸고 내가 옳은 것이 명백하군!' 식의 분열과 단언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그리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최선의 대안을 도출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능동적인 정치활동으로 이어지려면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기획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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