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민들레> 19호 22∼37쪽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는 미국 알바니의 프리스쿨에서 30여 년간 일한 교사로서, 교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체득한 지혜를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들려줍니다.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모두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새로운 배움의 마당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 30년에 걸쳐 함께 이루어온 삶의 향기가 크리스가 쓴 [프리스쿨, 원제:Making It Up as We Go Along]이란 책에 담겨 있습니다. [프리스쿨]은 본 홈페이지 메뉴의 '민들레가 펴낸 책'에서 직접 구입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옮긴이 공양희 님은 산청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홈스쿨링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알바니 프리스쿨 교사) 씀 / 공양희 옮김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 바로 그 자체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두려움이란 무서운 놈이다. 게다가 더욱 가공할 만한 것은 그것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심각하게 두려움에 끌려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부인하기 어려운 슬픈 현실이다. 전쟁과 테러에의 두려움, 핵무기와 경제공황에 대한 두려움, 빈곤, 노화, 죽음의 두려움, 하나 하나 예를 들자면 몇 페이지에 이를 정도다. 보험에서부터 방범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국가 경제를 이루는 기초분야는 그에 대한 방어책과 예방책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재료들과 온갖 상상력이 동원된 별별 발명품들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이러한 두려움을 먹이로 삼고 있다. 두려움은 이제 성장산업이 되었다.
강제에 기초한 교육을 작동시키는 수단 역시 줄어들지 않는 연료인 두려움으로부터 원동력을 얻는다. 무지와 부정적인 사고가 충분히 준비된 데다가 시간이라는 요소까지 더하면 두려움은 개인이나 전체를 막론하고 마음의 숨겨진 한 구석에서 소리 없이 증식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국가 차원에서 시작되어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까지 이른 두려움을 전제로 한 정책과 결정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프리스쿨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이기 때문에 이런 경향성에 그다지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역시 아주 미묘하고 간접적인 영향력과 싸우고 있다. 두려움을 최고의 동기부여 조건으로 삼는 전통적인 상벌 체계의 학습법에서 오래 전에 벗어나 있었고, 또 아이들을 속이거나 강요해서 학습으로 유도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새 식구들을 솔직하게 대해오고 있음에도 두려움의 냄새임에 분명한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나라 전체는 학구적 성취라는 목표에 목을 매달고 있다. 우리는 한때 러시아인들보다 뒤쳐졌는데 지금은 일본인들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식으로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겁쟁이들이 출몰해서 경고를 해댄다. '뭔가 해야 한다.' '시험성적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물론 표준화된 그 시험이란 진정한 지성의 측정이 아니다. 그러는 가운데 '만약 어떤 일이 여의치 않으면 더 노력한다'는 참으로 미국적인 전략에 이끌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린 나이의, 아무런 방어능력도 없는 취학 이전의 아이들에게까지 학습훈련을 억지로 떠먹이고 있는가 하면, 학기 기간을 늘이자는 소리도 계속 높아가고 있다.
그리고는 책망게임이 뒤따른다. 충분히 가르치고 충분히 요구하지 않은 교사의 잘못이다, 충분히 공부하지 않은 학생의 잘못이다, 충분히 보살피지 않은 부모의 잘못이다, 충분히 높은 표준을 정하지 않은 국가의 잘못이다.
이쯤에서 두려움이 속삭여댄다. 그 두려움이 지닌 논법은 언제나 돌고 돈다. 그것은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뱀이라는 고대의 이미지와 꼭 같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악한 고리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이들은 언제나 너무도 쉽게 두려움에 감염되고 자연스럽게 타고난 배움에 대한 욕망과 의지는 그 과정 속에서 질식해버린다. 부모들의 감정체(emotional bodies)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지닌 두려움을 말 그대로 냄새맡게 되는데, 이것이 두려움이 아이들에게 건너가는 통로다.
내가 여기서 후각이라는 감각을 들고 나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두려움(공포)은 특징적인 냄새를 갖기 때문이다. 개나 꿀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둘째 후각신경과 두뇌 사이의 연결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진화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냄새가 강력한 이미지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 구조는 몸 마음 접촉면(mind body interface)이 존재한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완전히 무의식적 반응이기에 훨씬 강력하다.
부모가 지닌 두려움을 전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다. 한 번의 근심 어린 표정,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했냐 또는 안 했냐고 묻는 한 번의 무심한 질문, 또는 말하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것조차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심어놓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부모들은 알아채지도 못할 경우가 많다. 부모가 지닌 공포나 의심 불안 그리고 더욱 미묘한 메시지들-가청영역을 넘어선 진동들-은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물론 그런 뒤에는 성적통지표 배포 시기가 되면 등장하는 고전적 홈코메디 장면이 연출된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아버지가 실패한 아들을 호되게 꾸짖으며, 커서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살 거냐고 묻는 그런 장면 말이다. 부모가 터뜨리는 이런 식의 분노는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명백하지만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이들이 감당해내기에 쉽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체 교육 체제와 방법론이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도대체 왜 모든 '학습과업(learning task)'을 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조각내고 있는가? 왜 그토록 미친 듯이 적성과 학습성취도를 측정하는 것일까? 대다수 아이들과 부모들의 요구를 절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는 왜 해마다 그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것일까?
두려움은 강력한 힘을 지닌 잠재된 정서다. 두려움은 두뇌가 더 높은 차원의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들며 자동적 생존반응이라는 옆길로 가게 한다. 이 자동적 생존반응에 대해 잠시 상세히 설명해 보겠다.
두려움은 부모가 자식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학교가 제멋대로의 표준에 근거해서 학습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해도 의문을 던질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두려움에 질린 부모들은 다시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두려움에 빠진 교사들이 좌지우지하는 교실로 돌려보낸다. 그 교사들 또한 두려움의 노예가 된 교장의 감독 밑에서 애태우며 견뎌내고 있는 처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일은 계속 또 계속 이어진다. 거대한 공포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이를 때까지. 그 피라미드 안에 우리 아이들이 갇혀 있다. 빠져 나올 길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생리적 상태가 아니다. 빠져 나오기는커녕 각자가 지닌 성격구조에 따라 끝없이 이어진 방어전략을 수행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수동적인 타입의 아이들이 망각과 바보놀음과 주의력 산만이라는 저항의 닻을 내리고 있고, 다른 쪽 끝에는 호전적 타입의 아이들이 적극적 모반을 꾀하고 있다. 두 유형은 결국에 가서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불리하게끔 사전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눈치채고는 그 게임에서 다같이 손을 떼게 된다.
이것이 두려움이 뇌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는 두뇌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 부분은 다른 부분의 내부에 겹쳐져 있다. 모든 생물체의 진화 과정은 원래 있던 구조를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지해서 덧붙이고 개선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의 두뇌도 마찬가지다. 인간 두뇌의 가장 핵심되는 부분은 파충류뇌(외부환경의 변화에 대한 반응을 관장하는 사상하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라고 불리는데, 원초적인 두뇌 구조물로 두개골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진화학상 오래된 조절 중심부로 중추신경계를 관장하고 생존본능과 행동의 넓은 영역을 통괄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때면 파충류뇌는 더 발달한 두 두뇌구조의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 원시적인 파충류뇌를 감싸고 있는 것은 더 발달한 형태의 포유류 두뇌인 대뇌변연계다. 대뇌변연계는 우리 인간의 인식, 감정, 직관의 근원이다. 즉 이곳에서 조악한 파충류적 본능은 진정한 지성으로 바뀌고 복잡한 삶의 상황에 적절하게 변화한다. 또 대뇌변연계는 면역체계를 만들고 신체의 자기치유력을 관장한다.
마지막으로 먼저 생성된 두 개의 두뇌 구조물을 다 합친 것보다 다섯 배나 큰 가장 최근에 진화된 두뇌 형태인 신피질은 그 하급 파트너들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는 곳이다. 신피질은 우리의 발명 능력, 창조적 사고, 문제해결 능력 그리고 정신력의 본향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하위 두뇌로부터 상위 두뇌로 에너지와 정보가 대체로 순조롭게 흐르고 하위 구조는 그 새로운 주인인 신피질을 받드는 데 전념하고 새 주인은 세 부분을 통합한다.
자, 그러면 두려움이라는 놈을 이 그림 속으로 가져와 보자. 과도한 스트레스와 위협이 가해지면 두뇌는 갑자기 무조건적 후퇴에 돌입한다. {인간두뇌와 인간학습 Human Brain and Human Learning}의 저자이자 자신이 용어화한 '두뇌친화성 교육 brain-compatible education'의 주창자인 레슬리 하트(Leslie Hart)는 이 자기방어적 반응을 '저속기어전환 downshifting'이라 부른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관차를 갑자기 역행시켰다고 상상해 보자. 실제로 방향전환이 일어나려면 바퀴가 몇 마일을 굴러가는 동안 전 모멘트가 바퀴에 실려야만 한다. 순식간에 상위 두 개 두뇌가 지닌 모든 발전적 힘은 그 파충류적 핵심에 봉사하는 것으로 바뀌고 이기적 영역 구축이나 또 다른 원시적 본능과 방어에 연료를 공급하는데 바쳐진다. 아무 저녁 시간대라도 좋다. 세계 뉴스나 지방뉴스를 십 분 정도만 보고 있으면 이 기초적인 생물학적 생존체계의 실제성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학교 교실에서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학습부진아나 문제아의 괴상한 행동을 하루 동안 관찰해보면 된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보여주는 괴상한 행동은 매혹적이기조차 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현대적인 두뇌를 교실에서 행해지는 학교교육 게임(Schooling game)에 저항하는 쪽으로 적용시켜 풍부한 계략을 짜낼 때는 정말 그렇다.
토미는 내 교사 경험 초기의 피해자라고 할 만하다. 그 시절의 나로 말하면 원하지도 않는 아이라도 책읽기나 구구단을 시기 맞춰 가르쳐야 한다고 아직 고집하고 있는 편이었다. 토미는 수동적인 반항아로 그날그날 하는 수업을 드러내놓고 거절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직도 애기 같은 오동통한 모습이 남아있는 이 땅딸막한 여덟 살짜리 꼬마아이는 겉으로는 고분고분한 자세로 너무도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바보가 되어 갔다. 어떤 날에는 내가 플래쉬 카드를 인내심에 가득 차서 들고 있는 동안 6 곱하기 3의 답이 8에서 108까지 아무 숫자나 되어서 튀어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바른 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토미의 보조개진 개구쟁이 미소가 더 환해진다는 사실을. 그 미소에 감사하며 나도 미소로 응대해 주고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플래쉬 카드를 조용히 치워버렸다.
플래쉬 카드 이전에도 온갖 종류의 창조적 방법을 동원해서 토미에게 구구셈의 개념을 심어주려고 애써 보았다. 나뭇가지나 돈 같은 물건도 써보고 온갖 노래와 게임도 동원했다. 하지만 토미는 구구셈을 배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거나 도통 흥미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나한테 배우는 데는 정말 그랬다. 토미가 저항하는 대상이 산수인지 나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였을까. 그 학기가 끝나갈 무렵 불안해진 토미 아버지가 끼어 들었고(비판적 성향의 그는 이 년 전 아내와 이혼했었다)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실하고 보수적인 노동계급 출신의 아일랜드 혈통이었는데 첫아들의 학습부진에 대해 터놓고 걱정을 해댔다.
뒤돌아보면 토미는 가벼운 실독증(dyslexic)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독증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때로 발생하는 특수한 사태를 적절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 꼬리표를 붙이려는 의도는 없다. 내 책상 선반 위에 놓여 있는 1963년 판 웹스터사전에는 이 용어가 실려 있지 않지만 이 말의 의미는 단지 '독서 능력 부족'이라는 뜻이다. 필수과목에 대한 토미의 반응은 대체로 수학학습에 한정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토미가 프리스쿨을 떠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첫째 여러 면에서 토미는 재능 있는 아이였다. 미술에는 보통 이상의 재능이 있었고 운동에서는 벌써 잠재력을 밖으로 발휘하고 있었다. 애교 있고 사랑받는 성격이어서 결국 우리를 떠나게 되었을 때는 오랫동안 모두들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염려가 되었던 것은 모든 시간이 강제라는 기초 위에 자리잡은 학습환경에 제대로 대응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가장 최상의 경우라 해도 자신의 힘을 발휘해보려는 기회가 제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토미 문제에 비참하리만큼 실패했다고 느꼈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 원할 때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언제든지 공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한 경험이 없었던 때였다. 토미는 전혀 멍청이가 아니었다. 발전이 없었던 것은 단지 그 아이가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싫어요, 크리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구구단을 외우고 싶진 않아요. 그림 그리고 달리고 레슬링하고 싶다구요. 다음에는 또 모르지만요. 괜찮죠?"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었으리라. 토미는 작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신피질의 부분에 힘을 보태는 걸 멈추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현했다. 게다가 나는 형편없는 교사는 아니었다. 내가 쓴 방법들은 괜찮았고 나는 토미를 좋아했다. 화를 낸 적도 없었고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아들이 모종의 정신불능상태를 갖고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부모를 겁준 적도 없었다.
이것저것 따져보면 토미가 공립학교로 옮긴 것은 아마도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만족했고 안심도 했다. 토미가 더 이상 아버지의 근심과 불만이라는 짐을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공립학교의 풍조는 두려움에 좌우되는 아버지의 신념체계와 훨씬 더 맞았다. 아버지의 신념체계 속에서는 학교는 일이었고 일이란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무엇이며 따라서 사람이라면 확실하게 해내야 한다. 결국 구구셈은 익혔지만 토미에게 학교공부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여전한 투쟁이었다. 학습능력은 뒤떨어졌지만 다행히 토미의 예술적 재능은 계속 펼쳐져 나갔고 게다가 챔피언급 레슬러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다른 많은 부모들처럼 스포츠에 참여하는 일을 채찍 끝의 당근으로 사용했다. 학기마다 한두 개 과목에서 낙제를 하게 되자 학교에서 성공적이었던 축구와 레슬링 경력은 아버지로 인해 때 아니게 끝나버렸다.
배움을 즐겁고 자연스런 과정으로 여기는 우리 학교와 같은 작은 학교에서 두려움은 어떤 역할을 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또 하나의 중대한 모순을 드러내 준다.
프리스쿨의 비형식적이고 유기적으로 조직된 가족같은 환경은 공립학교에서 막 피난 온 아이들이 지닌 축적된 두려움을 쉽사리 녹여내긴 하지만 부모들에게 그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흔하다. 말로 표현하든 안 하든 부모들이 던지는 이런저런 의문은 그들이 지닌 불안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교과서는 어디 있어요? 숙제는? 얘가 하루종일 놀려고만 하면 어떡해요? 학년도 없고 통지표도 없는데 무슨 수로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죠? 정식학교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의문들은 사실 모두 정당하며 아이의 안녕을 염려하는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정직하고 배려심 깊게 대답하려 애쓴다. 때로는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도 하고 때로는 훨씬 우회적인 방향에서 답하기도 하고 내가 감지하는 두려움의 정도에 따라 적절히 대한다. 그 거대한 용과 24년 동안 씨름한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이렇게 뭐든지 잠식해 들어가는 부식성 강한 두려움이라는 놈은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다. 가장 큰 공통분모는 부모들 자신의 과거 학습의 역사다. 불안에 가득 찬 부모들이 자기들의 학교 경험을 얘기할 때면 그들이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었음을 발견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학습발달을 두고 걱정을 해댔던 부모들 아래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세대에도 싹을 틔울 두려움의 씨앗을 기르기에 딱 좋은 비옥한 토양인 것이다.
걱정에 가득 찬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몇 년 전 이 곳 알바니에서 열린 교사 워크샵에서 조셉 칠톤 피어스로부터 배운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어스는 모든 아이들은 배움에 원래부터 '하드와이어드 hardwired'(컴퓨터에서 프로그램(소프트웨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본 배선(하드웨어)에 의해 존재한다는 뜻) 되어 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이들이 타고 태어난 프로그래밍은 아이들이 배워 나가도록 자동조정되어 있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그 학습과정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시작해 진정 놀라운 수준으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배워나가는가가 의문이 아니라 무슨 수로 이들을 배움에서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가 첫째 의문이 될 판이다. 피어스의 믿음은 마음(mind)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생물학(psychobiology)의 광범위한 새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아이들 각자는 이미 신이 부여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배움'이라 부르는 것은 그 잠재능력의 자연스런 전개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당연하게 교육(education)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데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에듀케이션은 '이끌어낸다'는 뜻인 라틴어의 에듀케어(educare)에서 나왔다.
피어스는 하드와이어드 학습이라는 자신의 개념에 하나의 중요한 수식어 키를 덧붙였다. 만약 아이들의 개성적인 특질과 고유한 발달 시간표에 맞추어 환경이 적절하게 따라준다면 어떤 아이나 지성이 충분히 피어난다는 것이다. 이 '만약'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띄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출생 때를 예로 들어보자. 모체로부터의 신호-심장박동, 목소리, 감정상태-뿐 아니라 아버지나 형제 자매가 보내는 신호에 반응하는 태아로서 자궁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학습은 흔히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출산과정으로 인해 심각하게 방해받는다. 신생아의 초기 성장은 어머니와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연대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데 병원의 일상체계는 그 자체가 아이와 어머니의 연대를 끊어 놓는다. 의료체계 역시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료행위의 처치자들은 수혜자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조차 없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이 완전한 자아를 발달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진정하고 지속적인 양육에 가해지는 일련의 장애의 시작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이어 탁아소, 텔레비전 그리고 소비문화가 제공하는 온갖 유혹물과 인공적인 대체물들이 우리 아이들을 인간의 피가 흐르지 않는 그 품 안으로 데려간다. 그리하여 현 세대의 모든 아이들을 그런 문화에 저항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돌려준다. 이것은 토미 아버지와 같은 입장의 부모들에게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며 공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학기초가 되어 또 한 명의 갓 피어난 어린 예술가가 나를 찾았고 수학수업을 받고 싶다고 요청해 왔다. 다음해 9월에 공립고등학교로 옮겨갈 준비를 위해서였다. 네살 때부터 우리와 함께 지내온 애비는 큰 키에 쾌활하고 낙천적인 아이로 재치 있는 유머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재능이 있었다. 토미처럼 애비 역시 자신만의 강렬한 내면적 삶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작품 속에 이것을 형상화해 내기를 좋아했다. 처음으로 '1층짜리 아이', 다시 말해 유아과정 교실에서 초등학교급 교실로 옮겨 앉게 되었을 때(알바니 프리스쿨은 2층의 넓은 공간이 유아들 공간이다) 애비는 읽기나 쓰기 산수 따위에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아이들과 더불어 공상적인 연극을 하거나 혼자 할 일 없이 자거나 백일몽에 빠져든 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해는 로잘리가 담임을 맡았는데 이 점은 애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때로 로잘리는 교과학습 속으로 애비를 유인해 보려고도 했지만 애비는 잘해야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따름이었다. 여섯 살은 여전히 마법의 세계가 계속되는 나이고 로잘리는 멀찍이 물러앉아 몇 안 되는 아이들의 어미닭 노릇을 하는데 그야말로 만족했다. 게다가 그 아이들 모두는 정말이지 마법의 아이들이었다.
나는 가끔 애비를 데리고 산수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일곱 살 때 애비는 숫자를 깨쳤는데 100까지 셀 줄 알았고 그다지 어려움 없이 덧셈과 뺄셈을 익혔다. 그렇긴 했지만 애비는 뭔가 억압받고 흥미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계속 보였는데 개념이 점점 복잡해져가자 그 모습은 점점 더 하나의 증상으로 굳어져 갔다. 마침내 애비는 산수과목에 손을 들어 버렸다.
읽기에서도 아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애비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가정의 아이였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러 해 동안 '암호해독'에 진전을 보지 못했다. 문자나 숫자를 읽는 법, 반대말 알아 맞추기조차 실독증상을 보일 뿐 아니라 한번 획득한 능력도 단계를 높여나가며 조금이라도 바뀌면 전혀 불능상태에 빠지곤 했다.
이런 모습은 당연히 부모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고 교사들도 어느 정도 염려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과 학교간에 있었던 긴밀한 교류와 신뢰 덕분에-여기에 아이의 지성과 배우고 성장하려는 의지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더하여-우리의 집단적 불안감이 발동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애비의 할머니는 당시에는 이미 은퇴했지만 치료용 독서지도 전문가였었는데 손녀가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제대로 책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몹시 걱정스러워 했다. 할머니의 불안은 애비 부모들에게 재빨리 퍼져갔다.
이제는 은퇴해서 나날의 수업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우리가 자주 조언을 구하고 있는 메리는 야생마 한 무리가 와서 설친다 해도 애비가 책읽기를 배우는 일을 방해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모두에게 냉정을 지키라고 조언했고 '자연'에게 길을 내주라고 말했다. 그런 한편 할머니의 불안은 희생자를 구하기 시작했다. 애비의 부모들은 읽기 지도 개인교사를 고용하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엄마가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점점 걱정의 도를 높이고 있는 친정어머니한테서 치료용 훈련교재를 얻어왔다. 애비에게 이렇다할 진전이 보이지 않자 실제로 '읽기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내릴 상황으로 기울어 갔다. 바로 이 무렵 애비의 할머니는 치료용 독서 워크샵을 알바니에서 열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우리에게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메리는 현명하게도 그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충고했다. 그이가 주는 정보를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걸 보자 그의 걱정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아이에게로 전달되는 불안과 두려움도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애비는 열 살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읽기를 깨쳤다. 어떻게 읽기를 익혔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개인교수법이 결국 적중했을까? 할머니의 전문가적 식견 때문이었을까? 또는 샤를렌느가 애비가 지은 멋진 시를 대신 써 주기도 하고 애비의 절묘한 언어와 그림으로 책과 잡지를 꾸며보기도 했던 시 쓰기 특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도록 해 준 결과일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이었으리라.
흔히 말하는 늦깍이 독서가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 애비에게도 나타났다.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애비와 좋은 책은 갑자기 뗄래야 뗄 수 없는 단짝이 되었다. 애비는 자기 나이보다 수준 높은 장편소설을 물릴 줄 모르고 계속 읽어 댔다. 어떤 일도 애비의 완전한 만족과 자발적인 참여 없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읽기지도 교사를 좋아했고 둘이서 그 시간을 완벽하게 즐겼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읽기를 배우는 과정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된 적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여기서 특히 강조해 두고 싶다. 또한 애비가 뭔가 결함이 있다는 판단을 남에게서 직접 받아 본 적이 없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학교에서 읽기 학습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강요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통해 영감과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독서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애비가 내게 가르침을 청해 왔다는 그 수학 수업으로 돌아가자. 특별수업 첫 시간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 애비는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책상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낡고 떨어진 학습장 위에는 눈물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학습장은 그 아이가 수학을 포기해 버리기 전에 사용했던 옛 시절의 기념물이었다. 나는 애비 앞에 앉아 재빨리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애비는 수학을 못해낼까 두렵다, 자기에게는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런다고 했다. 나는 애비가 읽기를 처음 익힐 때 겪었던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같이 이야기했고 하지만 한번 준비가 되자 얼마나 재빨리 읽기를 익혔던가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제 수학과 한번 맞붙어 보려고 계획을 잡은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이 시기가 되면 똑같이 시도하는 아이들을 보아왔다). 두뇌 속의 수학 학습회로가 좀 더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린 것도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애비와 나는 사실상 문제는 두려움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애비는 수학을 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학이 실로 재미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발견해 나갔다. 일 주일도 못되어 구구단을 외우게 되자 그때부터 만사형통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였던 기억 '기능장애'의 흔적은 없었다. 수학이 식은 죽 먹기인 아이들처럼 새로운 개념을 그렇게 쉽사리 습득해내지는 못했지만 학습태도는 긍정적이었고 꾸준히 발전해 나갔다. 애비의 목표는 학년말까지 자기 학년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6월이 되자 애비는 대수방정식을 비교적 쉽게 풀게 되었다.
애비는 공립학교라는 멋진 신세계(?)로 진입하는 일에 흥분해 있는 만큼이나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학습에서 다른 아이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지가 여전히 큰 걱정거리였는데 그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고등학교에서 첫 학기가 끝나고 결과를 알리는 게시판 명예의 명단에 애비의 이름이 실렸고 다음 학기에도 그 이름은 훌륭히 그 자리를 지켰다. 애비는 창조적인 면에서 계속 탁월성을 보였는데 한번은 젊은 예술가들을 위해 열리는 이름 있는 여름 캠프에 참석할 수 있는 장학금을 따내기도 했다.
두려움과 배움은 최악의 댄서 파트너이다. 애비는 스스로의 두려움을 극복한 교사들과 함께 자라면서 자신이 지닌 내적 스케줄에 따라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행운아들 가운데 한 명으로 꼽아야 한다. 애비의 배움은 애비 자신의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애비가 배우고 익힐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지닌 이유들 때문이었다. 전환점이 올 때마다 동기는 그로부터 나왔고 그렇지 않은 동기는 없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상으로 주는 벌 Punished by Rewards] [스티커의 문제점 Trouble with Gold Star] [보상 계획 Incentive Plans] [A학점 "A's"] [칭찬 그리고 비슷한 매수물들 Praise and Bribs] 같은 글에서 앨피 콘(Alfie Kohn)은 거듭된 연구를 예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상과 벌에 기초해서 일하는 사람들은-학교의 아이들과 회사의 어른들을 막론하고-자발성을 지닌 사람들이나 활동 그 자체에 만족을 얻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능률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벌과 같은 부정적인 수단으로 학습 능률을 올리려는 방법이 낳는 부정적 효과가 얼마나 큰가 하는 문제는, 일반 학교교육에서조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스키너(B. F. Skinner)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제기한 주장이라는 사실을 콘은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칭찬과 같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긍정적 수단을 사용한 방법도 학습과 목표달성에 심각한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두려움은 배움이라는 과정과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양립할 수 없다. 대부분의 현대 학교가 가지고 있는 통제와 감시, 측정이라는 학습환경은 온갖 통제의 덫 없이는 어떤 건설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과 불안을 말없이 전해준다. 이와 같은 통제체제는 홉스적(Hobbesian) 개념-삶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보는 견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그 개념에 따르면 아이들을 그들 특유의 욕망과 의지에 맡겨둘 때, 저 저명한 17세기 이성주의 철학자가 단언한 천박하고 야만적이고 단명한 일생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익히리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리는 해독제는 신뢰다. 이 약은 불행히도 오늘날 세상에 나와 있는 많은 약품들과는 달리 캡슐에 담겨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신뢰에 이르는 쉽고도 빠른 10단계 같은 자가치료용 매뉴얼도 본 적이 없다. 돈을 들여 구할 수 있다는 보증은 물론 없다. 신뢰는 얼마만큼은 미지의 뭔가와 연관되어 있고 미지의 것은 당연히 위험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신념을 갖고 전폭적인 믿음을 보여 줄 때 훨씬 빨리 또 훨씬 쉽게 배우고, 그 배움은 평생을 두고 유지되며 특정한 기간 안에 끝나지 않는다. 애비를 포함하여 프리스쿨을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 주고 있다.
*아래 글은 <민들레> 19호 22∼37쪽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는 미국 알바니의 프리스쿨에서 30여 년간 일한 교사로서, 교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체득한 지혜를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들려줍니다.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모두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새로운 배움의 마당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 30년에 걸쳐 함께 이루어온 삶의 향기가 크리스가 쓴 [프리스쿨, 원제:Making It Up as We Go Along]이란 책에 담겨 있습니다. [프리스쿨]은 본 홈페이지 메뉴의 '민들레가 펴낸 책'에서 직접 구입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옮긴이 공양희 님은 산청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홈스쿨링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알바니 프리스쿨 교사) 씀 / 공양희 옮김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 바로 그 자체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두려움이란 무서운 놈이다. 게다가 더욱 가공할 만한 것은 그것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심각하게 두려움에 끌려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부인하기 어려운 슬픈 현실이다. 전쟁과 테러에의 두려움, 핵무기와 경제공황에 대한 두려움, 빈곤, 노화, 죽음의 두려움, 하나 하나 예를 들자면 몇 페이지에 이를 정도다. 보험에서부터 방범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국가 경제를 이루는 기초분야는 그에 대한 방어책과 예방책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재료들과 온갖 상상력이 동원된 별별 발명품들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이러한 두려움을 먹이로 삼고 있다. 두려움은 이제 성장산업이 되었다.
강제에 기초한 교육을 작동시키는 수단 역시 줄어들지 않는 연료인 두려움으로부터 원동력을 얻는다. 무지와 부정적인 사고가 충분히 준비된 데다가 시간이라는 요소까지 더하면 두려움은 개인이나 전체를 막론하고 마음의 숨겨진 한 구석에서 소리 없이 증식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국가 차원에서 시작되어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까지 이른 두려움을 전제로 한 정책과 결정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프리스쿨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이기 때문에 이런 경향성에 그다지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역시 아주 미묘하고 간접적인 영향력과 싸우고 있다. 두려움을 최고의 동기부여 조건으로 삼는 전통적인 상벌 체계의 학습법에서 오래 전에 벗어나 있었고, 또 아이들을 속이거나 강요해서 학습으로 유도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새 식구들을 솔직하게 대해오고 있음에도 두려움의 냄새임에 분명한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나라 전체는 학구적 성취라는 목표에 목을 매달고 있다. 우리는 한때 러시아인들보다 뒤쳐졌는데 지금은 일본인들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식으로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겁쟁이들이 출몰해서 경고를 해댄다. '뭔가 해야 한다.' '시험성적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물론 표준화된 그 시험이란 진정한 지성의 측정이 아니다. 그러는 가운데 '만약 어떤 일이 여의치 않으면 더 노력한다'는 참으로 미국적인 전략에 이끌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린 나이의, 아무런 방어능력도 없는 취학 이전의 아이들에게까지 학습훈련을 억지로 떠먹이고 있는가 하면, 학기 기간을 늘이자는 소리도 계속 높아가고 있다.
그리고는 책망게임이 뒤따른다. 충분히 가르치고 충분히 요구하지 않은 교사의 잘못이다, 충분히 공부하지 않은 학생의 잘못이다, 충분히 보살피지 않은 부모의 잘못이다, 충분히 높은 표준을 정하지 않은 국가의 잘못이다.
이쯤에서 두려움이 속삭여댄다. 그 두려움이 지닌 논법은 언제나 돌고 돈다. 그것은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뱀이라는 고대의 이미지와 꼭 같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악한 고리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이들은 언제나 너무도 쉽게 두려움에 감염되고 자연스럽게 타고난 배움에 대한 욕망과 의지는 그 과정 속에서 질식해버린다. 부모들의 감정체(emotional bodies)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지닌 두려움을 말 그대로 냄새맡게 되는데, 이것이 두려움이 아이들에게 건너가는 통로다.
내가 여기서 후각이라는 감각을 들고 나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두려움(공포)은 특징적인 냄새를 갖기 때문이다. 개나 꿀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둘째 후각신경과 두뇌 사이의 연결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진화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냄새가 강력한 이미지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 구조는 몸 마음 접촉면(mind body interface)이 존재한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완전히 무의식적 반응이기에 훨씬 강력하다.
부모가 지닌 두려움을 전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다. 한 번의 근심 어린 표정,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했냐 또는 안 했냐고 묻는 한 번의 무심한 질문, 또는 말하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는 어떤 것조차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심어놓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부모들은 알아채지도 못할 경우가 많다. 부모가 지닌 공포나 의심 불안 그리고 더욱 미묘한 메시지들-가청영역을 넘어선 진동들-은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물론 그런 뒤에는 성적통지표 배포 시기가 되면 등장하는 고전적 홈코메디 장면이 연출된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아버지가 실패한 아들을 호되게 꾸짖으며, 커서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살 거냐고 묻는 그런 장면 말이다. 부모가 터뜨리는 이런 식의 분노는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명백하지만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이들이 감당해내기에 쉽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체 교육 체제와 방법론이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도대체 왜 모든 '학습과업(learning task)'을 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조각내고 있는가? 왜 그토록 미친 듯이 적성과 학습성취도를 측정하는 것일까? 대다수 아이들과 부모들의 요구를 절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는 왜 해마다 그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것일까?
두려움은 강력한 힘을 지닌 잠재된 정서다. 두려움은 두뇌가 더 높은 차원의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들며 자동적 생존반응이라는 옆길로 가게 한다. 이 자동적 생존반응에 대해 잠시 상세히 설명해 보겠다.
두려움은 부모가 자식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학교가 제멋대로의 표준에 근거해서 학습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해도 의문을 던질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두려움에 질린 부모들은 다시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두려움에 빠진 교사들이 좌지우지하는 교실로 돌려보낸다. 그 교사들 또한 두려움의 노예가 된 교장의 감독 밑에서 애태우며 견뎌내고 있는 처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일은 계속 또 계속 이어진다. 거대한 공포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이를 때까지. 그 피라미드 안에 우리 아이들이 갇혀 있다. 빠져 나올 길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생리적 상태가 아니다. 빠져 나오기는커녕 각자가 지닌 성격구조에 따라 끝없이 이어진 방어전략을 수행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수동적인 타입의 아이들이 망각과 바보놀음과 주의력 산만이라는 저항의 닻을 내리고 있고, 다른 쪽 끝에는 호전적 타입의 아이들이 적극적 모반을 꾀하고 있다. 두 유형은 결국에 가서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불리하게끔 사전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눈치채고는 그 게임에서 다같이 손을 떼게 된다.
이것이 두려움이 뇌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는 두뇌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 부분은 다른 부분의 내부에 겹쳐져 있다. 모든 생물체의 진화 과정은 원래 있던 구조를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지해서 덧붙이고 개선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의 두뇌도 마찬가지다. 인간 두뇌의 가장 핵심되는 부분은 파충류뇌(외부환경의 변화에 대한 반응을 관장하는 사상하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라고 불리는데, 원초적인 두뇌 구조물로 두개골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진화학상 오래된 조절 중심부로 중추신경계를 관장하고 생존본능과 행동의 넓은 영역을 통괄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때면 파충류뇌는 더 발달한 두 두뇌구조의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 원시적인 파충류뇌를 감싸고 있는 것은 더 발달한 형태의 포유류 두뇌인 대뇌변연계다. 대뇌변연계는 우리 인간의 인식, 감정, 직관의 근원이다. 즉 이곳에서 조악한 파충류적 본능은 진정한 지성으로 바뀌고 복잡한 삶의 상황에 적절하게 변화한다. 또 대뇌변연계는 면역체계를 만들고 신체의 자기치유력을 관장한다.
마지막으로 먼저 생성된 두 개의 두뇌 구조물을 다 합친 것보다 다섯 배나 큰 가장 최근에 진화된 두뇌 형태인 신피질은 그 하급 파트너들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는 곳이다. 신피질은 우리의 발명 능력, 창조적 사고, 문제해결 능력 그리고 정신력의 본향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하위 두뇌로부터 상위 두뇌로 에너지와 정보가 대체로 순조롭게 흐르고 하위 구조는 그 새로운 주인인 신피질을 받드는 데 전념하고 새 주인은 세 부분을 통합한다.
자, 그러면 두려움이라는 놈을 이 그림 속으로 가져와 보자. 과도한 스트레스와 위협이 가해지면 두뇌는 갑자기 무조건적 후퇴에 돌입한다. {인간두뇌와 인간학습 Human Brain and Human Learning}의 저자이자 자신이 용어화한 '두뇌친화성 교육 brain-compatible education'의 주창자인 레슬리 하트(Leslie Hart)는 이 자기방어적 반응을 '저속기어전환 downshifting'이라 부른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관차를 갑자기 역행시켰다고 상상해 보자. 실제로 방향전환이 일어나려면 바퀴가 몇 마일을 굴러가는 동안 전 모멘트가 바퀴에 실려야만 한다. 순식간에 상위 두 개 두뇌가 지닌 모든 발전적 힘은 그 파충류적 핵심에 봉사하는 것으로 바뀌고 이기적 영역 구축이나 또 다른 원시적 본능과 방어에 연료를 공급하는데 바쳐진다. 아무 저녁 시간대라도 좋다. 세계 뉴스나 지방뉴스를 십 분 정도만 보고 있으면 이 기초적인 생물학적 생존체계의 실제성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학교 교실에서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학습부진아나 문제아의 괴상한 행동을 하루 동안 관찰해보면 된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보여주는 괴상한 행동은 매혹적이기조차 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현대적인 두뇌를 교실에서 행해지는 학교교육 게임(Schooling game)에 저항하는 쪽으로 적용시켜 풍부한 계략을 짜낼 때는 정말 그렇다.
토미는 내 교사 경험 초기의 피해자라고 할 만하다. 그 시절의 나로 말하면 원하지도 않는 아이라도 책읽기나 구구단을 시기 맞춰 가르쳐야 한다고 아직 고집하고 있는 편이었다. 토미는 수동적인 반항아로 그날그날 하는 수업을 드러내놓고 거절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직도 애기 같은 오동통한 모습이 남아있는 이 땅딸막한 여덟 살짜리 꼬마아이는 겉으로는 고분고분한 자세로 너무도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바보가 되어 갔다. 어떤 날에는 내가 플래쉬 카드를 인내심에 가득 차서 들고 있는 동안 6 곱하기 3의 답이 8에서 108까지 아무 숫자나 되어서 튀어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바른 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토미의 보조개진 개구쟁이 미소가 더 환해진다는 사실을. 그 미소에 감사하며 나도 미소로 응대해 주고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플래쉬 카드를 조용히 치워버렸다.
플래쉬 카드 이전에도 온갖 종류의 창조적 방법을 동원해서 토미에게 구구셈의 개념을 심어주려고 애써 보았다. 나뭇가지나 돈 같은 물건도 써보고 온갖 노래와 게임도 동원했다. 하지만 토미는 구구셈을 배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거나 도통 흥미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나한테 배우는 데는 정말 그랬다. 토미가 저항하는 대상이 산수인지 나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였을까. 그 학기가 끝나갈 무렵 불안해진 토미 아버지가 끼어 들었고(비판적 성향의 그는 이 년 전 아내와 이혼했었다)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실하고 보수적인 노동계급 출신의 아일랜드 혈통이었는데 첫아들의 학습부진에 대해 터놓고 걱정을 해댔다.
뒤돌아보면 토미는 가벼운 실독증(dyslexic)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독증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때로 발생하는 특수한 사태를 적절히 설명해 주기 때문이지 꼬리표를 붙이려는 의도는 없다. 내 책상 선반 위에 놓여 있는 1963년 판 웹스터사전에는 이 용어가 실려 있지 않지만 이 말의 의미는 단지 '독서 능력 부족'이라는 뜻이다. 필수과목에 대한 토미의 반응은 대체로 수학학습에 한정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토미가 프리스쿨을 떠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첫째 여러 면에서 토미는 재능 있는 아이였다. 미술에는 보통 이상의 재능이 있었고 운동에서는 벌써 잠재력을 밖으로 발휘하고 있었다. 애교 있고 사랑받는 성격이어서 결국 우리를 떠나게 되었을 때는 오랫동안 모두들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염려가 되었던 것은 모든 시간이 강제라는 기초 위에 자리잡은 학습환경에 제대로 대응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가장 최상의 경우라 해도 자신의 힘을 발휘해보려는 기회가 제한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토미 문제에 비참하리만큼 실패했다고 느꼈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 원할 때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언제든지 공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한 경험이 없었던 때였다. 토미는 전혀 멍청이가 아니었다. 발전이 없었던 것은 단지 그 아이가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싫어요, 크리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구구단을 외우고 싶진 않아요. 그림 그리고 달리고 레슬링하고 싶다구요. 다음에는 또 모르지만요. 괜찮죠?"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었으리라. 토미는 작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검색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신피질의 부분에 힘을 보태는 걸 멈추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현했다. 게다가 나는 형편없는 교사는 아니었다. 내가 쓴 방법들은 괜찮았고 나는 토미를 좋아했다. 화를 낸 적도 없었고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아들이 모종의 정신불능상태를 갖고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부모를 겁준 적도 없었다.
이것저것 따져보면 토미가 공립학교로 옮긴 것은 아마도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만족했고 안심도 했다. 토미가 더 이상 아버지의 근심과 불만이라는 짐을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공립학교의 풍조는 두려움에 좌우되는 아버지의 신념체계와 훨씬 더 맞았다. 아버지의 신념체계 속에서는 학교는 일이었고 일이란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무엇이며 따라서 사람이라면 확실하게 해내야 한다. 결국 구구셈은 익혔지만 토미에게 학교공부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여전한 투쟁이었다. 학습능력은 뒤떨어졌지만 다행히 토미의 예술적 재능은 계속 펼쳐져 나갔고 게다가 챔피언급 레슬러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다른 많은 부모들처럼 스포츠에 참여하는 일을 채찍 끝의 당근으로 사용했다. 학기마다 한두 개 과목에서 낙제를 하게 되자 학교에서 성공적이었던 축구와 레슬링 경력은 아버지로 인해 때 아니게 끝나버렸다.
배움을 즐겁고 자연스런 과정으로 여기는 우리 학교와 같은 작은 학교에서 두려움은 어떤 역할을 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또 하나의 중대한 모순을 드러내 준다.
프리스쿨의 비형식적이고 유기적으로 조직된 가족같은 환경은 공립학교에서 막 피난 온 아이들이 지닌 축적된 두려움을 쉽사리 녹여내긴 하지만 부모들에게 그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흔하다. 말로 표현하든 안 하든 부모들이 던지는 이런저런 의문은 그들이 지닌 불안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교과서는 어디 있어요? 숙제는? 얘가 하루종일 놀려고만 하면 어떡해요? 학년도 없고 통지표도 없는데 무슨 수로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죠? 정식학교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의문들은 사실 모두 정당하며 아이의 안녕을 염려하는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정직하고 배려심 깊게 대답하려 애쓴다. 때로는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도 하고 때로는 훨씬 우회적인 방향에서 답하기도 하고 내가 감지하는 두려움의 정도에 따라 적절히 대한다. 그 거대한 용과 24년 동안 씨름한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이렇게 뭐든지 잠식해 들어가는 부식성 강한 두려움이라는 놈은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다. 가장 큰 공통분모는 부모들 자신의 과거 학습의 역사다. 불안에 가득 찬 부모들이 자기들의 학교 경험을 얘기할 때면 그들이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었음을 발견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학습발달을 두고 걱정을 해댔던 부모들 아래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세대에도 싹을 틔울 두려움의 씨앗을 기르기에 딱 좋은 비옥한 토양인 것이다.
걱정에 가득 찬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몇 년 전 이 곳 알바니에서 열린 교사 워크샵에서 조셉 칠톤 피어스로부터 배운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어스는 모든 아이들은 배움에 원래부터 '하드와이어드 hardwired'(컴퓨터에서 프로그램(소프트웨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본 배선(하드웨어)에 의해 존재한다는 뜻) 되어 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이들이 타고 태어난 프로그래밍은 아이들이 배워 나가도록 자동조정되어 있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그 학습과정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시작해 진정 놀라운 수준으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배워나가는가가 의문이 아니라 무슨 수로 이들을 배움에서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가 첫째 의문이 될 판이다. 피어스의 믿음은 마음(mind)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생물학(psychobiology)의 광범위한 새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아이들 각자는 이미 신이 부여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배움'이라 부르는 것은 그 잠재능력의 자연스런 전개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당연하게 교육(education)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데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에듀케이션은 '이끌어낸다'는 뜻인 라틴어의 에듀케어(educare)에서 나왔다.
피어스는 하드와이어드 학습이라는 자신의 개념에 하나의 중요한 수식어 키를 덧붙였다. 만약 아이들의 개성적인 특질과 고유한 발달 시간표에 맞추어 환경이 적절하게 따라준다면 어떤 아이나 지성이 충분히 피어난다는 것이다. 이 '만약'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띄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출생 때를 예로 들어보자. 모체로부터의 신호-심장박동, 목소리, 감정상태-뿐 아니라 아버지나 형제 자매가 보내는 신호에 반응하는 태아로서 자궁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학습은 흔히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출산과정으로 인해 심각하게 방해받는다. 신생아의 초기 성장은 어머니와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연대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데 병원의 일상체계는 그 자체가 아이와 어머니의 연대를 끊어 놓는다. 의료체계 역시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료행위의 처치자들은 수혜자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조차 없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이 완전한 자아를 발달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진정하고 지속적인 양육에 가해지는 일련의 장애의 시작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이어 탁아소, 텔레비전 그리고 소비문화가 제공하는 온갖 유혹물과 인공적인 대체물들이 우리 아이들을 인간의 피가 흐르지 않는 그 품 안으로 데려간다. 그리하여 현 세대의 모든 아이들을 그런 문화에 저항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돌려준다. 이것은 토미 아버지와 같은 입장의 부모들에게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며 공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학기초가 되어 또 한 명의 갓 피어난 어린 예술가가 나를 찾았고 수학수업을 받고 싶다고 요청해 왔다. 다음해 9월에 공립고등학교로 옮겨갈 준비를 위해서였다. 네살 때부터 우리와 함께 지내온 애비는 큰 키에 쾌활하고 낙천적인 아이로 재치 있는 유머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재능이 있었다. 토미처럼 애비 역시 자신만의 강렬한 내면적 삶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작품 속에 이것을 형상화해 내기를 좋아했다. 처음으로 '1층짜리 아이', 다시 말해 유아과정 교실에서 초등학교급 교실로 옮겨 앉게 되었을 때(알바니 프리스쿨은 2층의 넓은 공간이 유아들 공간이다) 애비는 읽기나 쓰기 산수 따위에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아이들과 더불어 공상적인 연극을 하거나 혼자 할 일 없이 자거나 백일몽에 빠져든 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해는 로잘리가 담임을 맡았는데 이 점은 애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때로 로잘리는 교과학습 속으로 애비를 유인해 보려고도 했지만 애비는 잘해야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따름이었다. 여섯 살은 여전히 마법의 세계가 계속되는 나이고 로잘리는 멀찍이 물러앉아 몇 안 되는 아이들의 어미닭 노릇을 하는데 그야말로 만족했다. 게다가 그 아이들 모두는 정말이지 마법의 아이들이었다.
나는 가끔 애비를 데리고 산수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일곱 살 때 애비는 숫자를 깨쳤는데 100까지 셀 줄 알았고 그다지 어려움 없이 덧셈과 뺄셈을 익혔다. 그렇긴 했지만 애비는 뭔가 억압받고 흥미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계속 보였는데 개념이 점점 복잡해져가자 그 모습은 점점 더 하나의 증상으로 굳어져 갔다. 마침내 애비는 산수과목에 손을 들어 버렸다.
읽기에서도 아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애비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가정의 아이였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러 해 동안 '암호해독'에 진전을 보지 못했다. 문자나 숫자를 읽는 법, 반대말 알아 맞추기조차 실독증상을 보일 뿐 아니라 한번 획득한 능력도 단계를 높여나가며 조금이라도 바뀌면 전혀 불능상태에 빠지곤 했다.
이런 모습은 당연히 부모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고 교사들도 어느 정도 염려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과 학교간에 있었던 긴밀한 교류와 신뢰 덕분에-여기에 아이의 지성과 배우고 성장하려는 의지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더하여-우리의 집단적 불안감이 발동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애비의 할머니는 당시에는 이미 은퇴했지만 치료용 독서지도 전문가였었는데 손녀가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제대로 책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몹시 걱정스러워 했다. 할머니의 불안은 애비 부모들에게 재빨리 퍼져갔다.
이제는 은퇴해서 나날의 수업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우리가 자주 조언을 구하고 있는 메리는 야생마 한 무리가 와서 설친다 해도 애비가 책읽기를 배우는 일을 방해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모두에게 냉정을 지키라고 조언했고 '자연'에게 길을 내주라고 말했다. 그런 한편 할머니의 불안은 희생자를 구하기 시작했다. 애비의 부모들은 읽기 지도 개인교사를 고용하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엄마가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점점 걱정의 도를 높이고 있는 친정어머니한테서 치료용 훈련교재를 얻어왔다. 애비에게 이렇다할 진전이 보이지 않자 실제로 '읽기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내릴 상황으로 기울어 갔다. 바로 이 무렵 애비의 할머니는 치료용 독서 워크샵을 알바니에서 열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우리에게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메리는 현명하게도 그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충고했다. 그이가 주는 정보를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걸 보자 그의 걱정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아이에게로 전달되는 불안과 두려움도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애비는 열 살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읽기를 깨쳤다. 어떻게 읽기를 익혔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개인교수법이 결국 적중했을까? 할머니의 전문가적 식견 때문이었을까? 또는 샤를렌느가 애비가 지은 멋진 시를 대신 써 주기도 하고 애비의 절묘한 언어와 그림으로 책과 잡지를 꾸며보기도 했던 시 쓰기 특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도록 해 준 결과일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이었으리라.
흔히 말하는 늦깍이 독서가에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 애비에게도 나타났다.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애비와 좋은 책은 갑자기 뗄래야 뗄 수 없는 단짝이 되었다. 애비는 자기 나이보다 수준 높은 장편소설을 물릴 줄 모르고 계속 읽어 댔다. 어떤 일도 애비의 완전한 만족과 자발적인 참여 없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읽기지도 교사를 좋아했고 둘이서 그 시간을 완벽하게 즐겼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읽기를 배우는 과정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된 적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여기서 특히 강조해 두고 싶다. 또한 애비가 뭔가 결함이 있다는 판단을 남에게서 직접 받아 본 적이 없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학교에서 읽기 학습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강요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통해 영감과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독서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애비가 내게 가르침을 청해 왔다는 그 수학 수업으로 돌아가자. 특별수업 첫 시간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 애비는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책상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낡고 떨어진 학습장 위에는 눈물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학습장은 그 아이가 수학을 포기해 버리기 전에 사용했던 옛 시절의 기념물이었다. 나는 애비 앞에 앉아 재빨리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애비는 수학을 못해낼까 두렵다, 자기에게는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런다고 했다. 나는 애비가 읽기를 처음 익힐 때 겪었던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같이 이야기했고 하지만 한번 준비가 되자 얼마나 재빨리 읽기를 익혔던가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제 수학과 한번 맞붙어 보려고 계획을 잡은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이 시기가 되면 똑같이 시도하는 아이들을 보아왔다). 두뇌 속의 수학 학습회로가 좀 더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린 것도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애비와 나는 사실상 문제는 두려움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애비는 수학을 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학이 실로 재미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발견해 나갔다. 일 주일도 못되어 구구단을 외우게 되자 그때부터 만사형통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였던 기억 '기능장애'의 흔적은 없었다. 수학이 식은 죽 먹기인 아이들처럼 새로운 개념을 그렇게 쉽사리 습득해내지는 못했지만 학습태도는 긍정적이었고 꾸준히 발전해 나갔다. 애비의 목표는 학년말까지 자기 학년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6월이 되자 애비는 대수방정식을 비교적 쉽게 풀게 되었다.
애비는 공립학교라는 멋진 신세계(?)로 진입하는 일에 흥분해 있는 만큼이나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학습에서 다른 아이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지가 여전히 큰 걱정거리였는데 그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고등학교에서 첫 학기가 끝나고 결과를 알리는 게시판 명예의 명단에 애비의 이름이 실렸고 다음 학기에도 그 이름은 훌륭히 그 자리를 지켰다. 애비는 창조적인 면에서 계속 탁월성을 보였는데 한번은 젊은 예술가들을 위해 열리는 이름 있는 여름 캠프에 참석할 수 있는 장학금을 따내기도 했다.
두려움과 배움은 최악의 댄서 파트너이다. 애비는 스스로의 두려움을 극복한 교사들과 함께 자라면서 자신이 지닌 내적 스케줄에 따라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행운아들 가운데 한 명으로 꼽아야 한다. 애비의 배움은 애비 자신의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애비가 배우고 익힐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지닌 이유들 때문이었다. 전환점이 올 때마다 동기는 그로부터 나왔고 그렇지 않은 동기는 없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상으로 주는 벌 Punished by Rewards] [스티커의 문제점 Trouble with Gold Star] [보상 계획 Incentive Plans] [A학점 "A's"] [칭찬 그리고 비슷한 매수물들 Praise and Bribs] 같은 글에서 앨피 콘(Alfie Kohn)은 거듭된 연구를 예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상과 벌에 기초해서 일하는 사람들은-학교의 아이들과 회사의 어른들을 막론하고-자발성을 지닌 사람들이나 활동 그 자체에 만족을 얻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능률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벌과 같은 부정적인 수단으로 학습 능률을 올리려는 방법이 낳는 부정적 효과가 얼마나 큰가 하는 문제는, 일반 학교교육에서조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스키너(B. F. Skinner)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제기한 주장이라는 사실을 콘은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칭찬과 같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긍정적 수단을 사용한 방법도 학습과 목표달성에 심각한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두려움은 배움이라는 과정과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양립할 수 없다. 대부분의 현대 학교가 가지고 있는 통제와 감시, 측정이라는 학습환경은 온갖 통제의 덫 없이는 어떤 건설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과 불안을 말없이 전해준다. 이와 같은 통제체제는 홉스적(Hobbesian) 개념-삶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보는 견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그 개념에 따르면 아이들을 그들 특유의 욕망과 의지에 맡겨둘 때, 저 저명한 17세기 이성주의 철학자가 단언한 천박하고 야만적이고 단명한 일생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익히리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리는 해독제는 신뢰다. 이 약은 불행히도 오늘날 세상에 나와 있는 많은 약품들과는 달리 캡슐에 담겨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신뢰에 이르는 쉽고도 빠른 10단계 같은 자가치료용 매뉴얼도 본 적이 없다. 돈을 들여 구할 수 있다는 보증은 물론 없다. 신뢰는 얼마만큼은 미지의 뭔가와 연관되어 있고 미지의 것은 당연히 위험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신념을 갖고 전폭적인 믿음을 보여 줄 때 훨씬 빨리 또 훨씬 쉽게 배우고, 그 배움은 평생을 두고 유지되며 특정한 기간 안에 끝나지 않는다. 애비를 포함하여 프리스쿨을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