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잘못하면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혈기가 넘쳐서, 나이 들어서는 나이 생각지 않고 무리하게 운동하다 관절이나 근육을 다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자칫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진보적 교육운동의 부작용
20여 년 전 《민들레》가 탈학교운동을 벌이며 범한 실수는 개인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사회적 대안으로 주장한 것이다. 학교를 거부하거나 홈스쿨링을 선택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최선의 대안일 수 있지만, 사회적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데 그것을 ‘운동’으로 전개했던 것은 시야가 좁았기 때문이다. 국가교육의 폭력성에 과민했던 반면 친권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관대하거나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홈스쿨링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홈스쿨링으로 교육받고 있는 아동이 2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교육을 한다. 하버드대 아동심리연구소 바틀렛 교수가 2020년 발표한 논문에서 근본주의 신앙과 부모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홈스쿨링 가정에서 아이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진화론을 부정하며,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가족 공동체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존 홀트가 홈스쿨링을 교육운동으로 전개했을 때 복음주의 기독교와 접목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간과하거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 또한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홈스쿨링운동이 가장 활발하고 관련 법이 가장 느슨한 텍사스 주가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주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구 밀집도가 낮고 공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이 많은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적 공공성보다 개인의 인권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개척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미국 특유의 문화적 토양에 기반한다. 하루가 멀게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지만 총기 규제가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홈스쿨링운동은 우파와 좌파가 함께하는 보기 드문 운동이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서처럼 예수 대신 촘스키의 생일을 축하하는 좌파 홈스쿨러들도 있지만 그들은 무소의 뿔처럼 존재한다. 반면 우파는 기독교 단체의 결집력 덕분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국가의 폭력성과 개인의 폭력성 중 어떤 것이 더 위험할지는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공공성과 자율성은 서로의 폭주를 막는 균형추 역할을 한다. 멸사봉공을 외치며 국가를 절대화할 때 전체주의가 대두되듯이 개인 인권이 절대화되면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다. 좋은 약도 과하면 부작용의 위험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코로나 백신을 거부하는 운동 또한 우파와 좌파가 함께하고 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이들에게 백신을 맞히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은 대체로 사회의 강자들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도 출퇴근할 수 있고, 영양이 균형 잡힌 음식을 먹고 건강 상태가 양호한 사람들은 백신을 맞지 않고도 감염 위험에서 비교적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면역이 달성되지 않으면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이 더 쉽게 위험에 노출되고, 이는 전 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인의 인권이 절대 가치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민들레》 초창기에는 예방접종을 반대하고 탈문명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 글을 싣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그렇게 살 수도 있고 그런 삶도 가치 있는 삶이긴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부추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은근히 부추기는 우를 범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좋은 삶이어도 사회적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즘’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 부작용의 위험성을 알고 미리 고지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다. 의사나 약사의 역할이 그렇듯이. 근본주의나 전체주의는 부작용이 더 많은 독 같은 것이다. 아주 드물게 약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약을 찾아보는 것이 낫다.
녹색운동의 폭력성
동물의 성장과 도축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마트 진열대에는 잘 손질된 식재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따름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어떤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모른다. 동물복지운동을 하는 이들의 노력 덕분에 그 실상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관련 시설과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하지만 동물복지를 위해 행동하는 단체가 햄버거 가게에 들이닥쳐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를 외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할까? 동물학대라는 폭력을 바로잡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어떤 아이는 거기서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가게주인은 장사가 망하면 빚더미에 앉게 될지도 모른다. 동물을 학대하는 문명의 말단에 있는 가게주인은 망해도 괜찮은 걸까? 그 시위의 극단에는 유나바머*의 폭탄 테러가 있을 것이다. 녹색운동가들 중에는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테러의 희생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과도한 육식문화와 동물학대에 가까운 축산업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오버를 할 수 있지만, 비거니즘 또한 폭력성을 띨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본주의 경향을 띠는 비거니즘의 확산은 육식 못지않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개인적인 삶의 양식을 넘어 비건을 사회운동으로 펼칠 때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다. 비거니즘은 자칫 순수주의 경쟁이 되기 쉽다. 태국의 카렌족 여성들이 경쟁적으로 목에 끼우는 링 수를 늘이는 것처럼, 나는 달걀도 안 먹어-링 하나, 나는 우유도-링 둘, 나는 벌꿀도-링 셋… 이런 식이 되기 십상이다. 링이 많을수록 그 부족 안에서 인정받고 발언력이 커진다. 그러다 보면 링이 없거나 적은 여자들을 차별하게 되고, 사건은 그렇게 전개되어간다. 에티오피아의 한 부족은 입술에 접시를 끼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더 넓은 접시를 끼울수록 여성의 매력이 커진다고 믿는다. 결혼할 때 혼수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어 경쟁적으로 입술을 늘인다.
개인적인 이유나 사회적 이유로 채식을 할 수 있고 가죽 제품을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선호의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면 폭력성을 띠기 마련이다. 채식이 동물복지와 관련될 경우 선악의 문제가 되기 쉽다. 모든 살림이 죽임을 전제로 한다는 생명의 대전제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인류가 육식을 그만두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줄이는 것은 가능하며, 동물들이 좀더 평화롭게 살다 죽을 수 있게 동물복지를 제도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만큼 육류값이 오르고 엥겔지수가 높아지겠지만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실현 가능한 길을 제시하면서 조금씩 식문화를 바꾸어가는 피스밀 전략을 취하는 것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길일 것이다.
* 폭력적인 현대 기술문명을 비판하며 17년 동안 16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한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추적하며 FBI가 붙인 별명. 주로 대학 연구소, 항공사나 공항으로 우편물 폭탄을 보내 ‘Una-bomber’라는 별명이 붙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잘못하면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혈기가 넘쳐서, 나이 들어서는 나이 생각지 않고 무리하게 운동하다 관절이나 근육을 다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자칫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진보적 교육운동의 부작용
20여 년 전 《민들레》가 탈학교운동을 벌이며 범한 실수는 개인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사회적 대안으로 주장한 것이다. 학교를 거부하거나 홈스쿨링을 선택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최선의 대안일 수 있지만, 사회적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데 그것을 ‘운동’으로 전개했던 것은 시야가 좁았기 때문이다. 국가교육의 폭력성에 과민했던 반면 친권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관대하거나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홈스쿨링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홈스쿨링으로 교육받고 있는 아동이 2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교육을 한다. 하버드대 아동심리연구소 바틀렛 교수가 2020년 발표한 논문에서 근본주의 신앙과 부모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홈스쿨링 가정에서 아이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진화론을 부정하며,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가족 공동체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존 홀트가 홈스쿨링을 교육운동으로 전개했을 때 복음주의 기독교와 접목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간과하거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 또한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홈스쿨링운동이 가장 활발하고 관련 법이 가장 느슨한 텍사스 주가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주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구 밀집도가 낮고 공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이 많은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적 공공성보다 개인의 인권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개척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미국 특유의 문화적 토양에 기반한다. 하루가 멀게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지만 총기 규제가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홈스쿨링운동은 우파와 좌파가 함께하는 보기 드문 운동이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서처럼 예수 대신 촘스키의 생일을 축하하는 좌파 홈스쿨러들도 있지만 그들은 무소의 뿔처럼 존재한다. 반면 우파는 기독교 단체의 결집력 덕분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국가의 폭력성과 개인의 폭력성 중 어떤 것이 더 위험할지는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공공성과 자율성은 서로의 폭주를 막는 균형추 역할을 한다. 멸사봉공을 외치며 국가를 절대화할 때 전체주의가 대두되듯이 개인 인권이 절대화되면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다. 좋은 약도 과하면 부작용의 위험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코로나 백신을 거부하는 운동 또한 우파와 좌파가 함께하고 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이들에게 백신을 맞히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은 대체로 사회의 강자들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도 출퇴근할 수 있고, 영양이 균형 잡힌 음식을 먹고 건강 상태가 양호한 사람들은 백신을 맞지 않고도 감염 위험에서 비교적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면역이 달성되지 않으면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이 더 쉽게 위험에 노출되고, 이는 전 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인의 인권이 절대 가치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민들레》 초창기에는 예방접종을 반대하고 탈문명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 글을 싣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그렇게 살 수도 있고 그런 삶도 가치 있는 삶이긴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부추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은근히 부추기는 우를 범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좋은 삶이어도 사회적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즘’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 부작용의 위험성을 알고 미리 고지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다. 의사나 약사의 역할이 그렇듯이. 근본주의나 전체주의는 부작용이 더 많은 독 같은 것이다. 아주 드물게 약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약을 찾아보는 것이 낫다.
녹색운동의 폭력성
동물의 성장과 도축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마트 진열대에는 잘 손질된 식재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따름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어떤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모른다. 동물복지운동을 하는 이들의 노력 덕분에 그 실상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관련 시설과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하지만 동물복지를 위해 행동하는 단체가 햄버거 가게에 들이닥쳐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를 외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할까? 동물학대라는 폭력을 바로잡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어떤 아이는 거기서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가게주인은 장사가 망하면 빚더미에 앉게 될지도 모른다. 동물을 학대하는 문명의 말단에 있는 가게주인은 망해도 괜찮은 걸까? 그 시위의 극단에는 유나바머*의 폭탄 테러가 있을 것이다. 녹색운동가들 중에는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테러의 희생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과도한 육식문화와 동물학대에 가까운 축산업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오버를 할 수 있지만, 비거니즘 또한 폭력성을 띨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본주의 경향을 띠는 비거니즘의 확산은 육식 못지않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개인적인 삶의 양식을 넘어 비건을 사회운동으로 펼칠 때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다. 비거니즘은 자칫 순수주의 경쟁이 되기 쉽다. 태국의 카렌족 여성들이 경쟁적으로 목에 끼우는 링 수를 늘이는 것처럼, 나는 달걀도 안 먹어-링 하나, 나는 우유도-링 둘, 나는 벌꿀도-링 셋… 이런 식이 되기 십상이다. 링이 많을수록 그 부족 안에서 인정받고 발언력이 커진다. 그러다 보면 링이 없거나 적은 여자들을 차별하게 되고, 사건은 그렇게 전개되어간다. 에티오피아의 한 부족은 입술에 접시를 끼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더 넓은 접시를 끼울수록 여성의 매력이 커진다고 믿는다. 결혼할 때 혼수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어 경쟁적으로 입술을 늘인다.
개인적인 이유나 사회적 이유로 채식을 할 수 있고 가죽 제품을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선호의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면 폭력성을 띠기 마련이다. 채식이 동물복지와 관련될 경우 선악의 문제가 되기 쉽다. 모든 살림이 죽임을 전제로 한다는 생명의 대전제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인류가 육식을 그만두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줄이는 것은 가능하며, 동물들이 좀더 평화롭게 살다 죽을 수 있게 동물복지를 제도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만큼 육류값이 오르고 엥겔지수가 높아지겠지만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실현 가능한 길을 제시하면서 조금씩 식문화를 바꾸어가는 피스밀 전략을 취하는 것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길일 것이다.
* 폭력적인 현대 기술문명을 비판하며 17년 동안 16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한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추적하며 FBI가 붙인 별명. 주로 대학 연구소, 항공사나 공항으로 우편물 폭탄을 보내 ‘Una-bomber’라는 별명이 붙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