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question)가 문제(problem)다
옛날에 한 나쁜 사또가 한겨울에 이방에게 산딸기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이방은 걱정을 하다 병이 났습니다. 이방의 아들이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렸다고 사또에게 고한 것입니다. 사또가 한겨울에 독사가 어디 있냐면서 화를 내자 아들이 말했답니다. “겨울에 독사가 없는 것처럼 산딸기도 없습니다.”
[문제] 위의 전래동화를 읽고 다음 괄호 안에 적당한 말을 넣으시오.
이방은 병이 났습니다. ( ) 겨울에는 산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출제자가 기대한 정답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왜냐하면’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썼다. ‘(이 추운) 겨울에는 산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학생의 언어감각이 교사보다 뛰어나다. 접속사를 쓰지 않고도 뜻을 전할 수 있는 문장이 더 좋은 문장이다. 저 문제의 정답은 두 개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왜냐면, 그 까닭은, 추운…. 좀 더 상상력이 있는 아이라면 ‘얼음이 어는’이라 써넣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 문제를 보자마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써넣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모범생을 추켜세우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 주소이다.
다행히도 이 시험지를 채점한 교사는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이 아닌 ‘또 하나의 정답’도 맞는 답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교사들이 이처럼 융통성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식빵 한 면에 버터를 바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쓰시오”라는 질문에 한 학생이 “두 면에 바르면 너무 느끼해서”라고 답하자 교사는 틀린 답으로 채점했다. 정답은 ‘속 재료의 수분이 빵 속에 배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교사가 ‘버터’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학생은 ‘한 면’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 학생의 독법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른 쪽 면에는 잼을 발라야 해서”라고 답할 수도 있는 일이다.
초등 아이들의 기발한 답안지가 인터넷에 떠돈다. “불행한 일이 거듭 겹침을 뜻하는 사자성어는?” “설(사)가(또)”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빠)(인)가” 이 문제를 출제한 교사는 ‘설(상)가(상)’, ‘(고)(성)(방)가’가 정답이라 말하겠지만, 문제의 ‘사자성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답은 맞거나 틀릴 수 있다. 전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정답은 달라진다. 물과 쇠 중에 더 단단한 것은? 워터커터에서 고속 분사되는 물은 쇠를 자른다. 속도라는 전제 조건에 따라 물의 성질이 달라진다. 사실상 물질의 고유한 성질은 없으며 어떤 맥락 속에서 성질이 결정된다.
한 아이가 국어시험 문제에 이렇게 답을 썼다.
다음 글에서 틀린 낱말을 바르게 고쳐 쓰시오.
“헤헤, 맏있겠다. 나 혼자 먹어야지.” (답: 나 혼자 -> 같이)
이렇게 답한 아이는 ‘틀린’의 의미를 출제자와 다르게 읽은 셈이다. 논리적 사고가 앞서는 사람에게는 ‘맏있겠다’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이 아이에게는 맛있는 걸 혼자 먹으려는 그 심보가 먼저 읽힌 것이다. 문제의 질문이 ‘다음 글에서 맞춤법이 틀린 낱말을 바르게 고쳐 쓰시오’라고 되어 있었더라면 ‘맏있겠다 -> 맛있겠다’가 정답이므로 저 답은 틀린 답이 된다. 맞춤법을 묻는 문제임을 분명히 했더라면 아이도 아마 교사가 기대하는 정답을 제대로 썼을 것이다. 사실상 문제(question)가 문제(problem)인 셈이다. 정답을 둘러싼 논란은 문제의 전제가 감추어져 있거나 문제가 애매해서일 수도 있고, 또는 ‘문제’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은 문제라기보다 ‘물음’이다. 그런 물음(ask)은 답(answer)이 아니라 ‘대답(reply)’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답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아이처럼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응답’할 수도 있다. 질문이 물음인지 문제인지에 따라 정답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문제라고 해도 수학 문제와 사회 문제가 다르다.* ‘사회 문제’라는 말의 경우, 사회과 시험 문제는 question이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뜻에서의 문제는 problem 또는 issue다. 사회 문제(social problem)는 답을 요구하는 문제라기보다 해법(solution)을 찾아야 하는 과제(task)에 가깝다. 여러 가지 해법이 있을 수 있지만, 사회과학은 가설과 검증을 거쳐 사회 문제에 대해 정답에 가까운 최선의 해법을 찾아간다. 인문학적 질문인지 사회과학 또는 자연과학적 문제인지에 따라 답의 성격이 달라진다.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 ‘문제’라는 낱말을 제대로 정의한다면 정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은 괜한 논란이 될 것이다.
* 우리말 한자어 ‘문제(問題)’가 개념이 분화되지 않은 낱말이어서 혼란을 초래한다. question인지 problem인지를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사회 문제’라고 할 때 사회과 시험 문제(examination question)인지 사회 문제(social problem)인지 잘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정답과 상대주의
몇 해 전 수능시험 언어영역의 한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복수 정답이 인정되자 온 나라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정답이 여러 개인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숨어 있는 전제를 드러내면 정답은 분명해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이 질문에는 전제가 빠져 있다. 직선거리를 묻는지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가는 경우의 거리인지 기차로 가는 거리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기차도 KTX 선로 거리와 새마을호 선로 거리가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상대주의가 득세하면서 하나의 정답을 부정하는 경향이 생겨났지만, 전제가 주어진 닫힌계에서는 절대성이 작동하면서 정답이 드러나게 된다.
문제와 답은 쌍으로 존재한다. 수학이나 과학의 문제라면 정답은 있기 마련이다. 아직 풀지 못한 수학의 난제들도 언젠가는 풀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학과 과학은 모든 문제에는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문제가 제대로 설정되었는지, 전제가 잘못되거나 빠져 있지 않은지 분석하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어야 한다. 수학과 과학 공부는 연역적 사고, 과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리에 입각해 추론하는 사고력을 기르고, 가설과 검증을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 훈련을 한다. 그런 훈련을 거친 아이들이 자라서 새로운 과학기술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갈등을 푸는 해법을 찾아낼 것이다.
대안적 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은 흔히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을 비판한다. ‘정답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주의를 부정하고 상대적 세계에서 사설 권력을 추구하려는 욕구의 발로일 수 있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그러니 우리 각자 왕 노릇 하자는 심리다. 또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감추는 수사일 수 있다. 수학은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말한다. 우주는 수학적으로 작동한다. 달리 말해 비례 관계로 작동한다. 이게 이러면 저건 저렇다는 것이 비례다. 원주율(π)은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 길이의 비다. 원이 크든 작든 지름이 정해지면 둘레는 거기에 연동되어 자동으로 정해진다. 지름 1cm 원의 둘레 길이는 3.141592…cm이다. 원의 지름과 둘레 비의 끝자리 수는 신도 모르겠지만 그 비례는 정해져 있다.
원주율은 무한소수다. 첨단 컴퓨터로 지금까지 알아낸 π의 소수점 자리는 62조 8천억 자리까지다. NASA에서 달 착륙 계산에 쓴 원주율 값은 소수점 5자리였으며, 오늘날 가장 정밀을 요하는 산업에서도 15자리까지만 사용한다고 한다. 무한소수의 끝자리는 끝내 알 수 없지만, 수학은 ‘수렴’이라는 개념으로 정답을 제시한다. 양자역학을 접하고 당황한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주사위를 무한히 되풀이해서 던지면 6이 나올 확률은 정확히 1/6에 수렴한다. 확률의 세계는 우연의 세계 같지만 큰 수의 법칙이 작용하는 상황에서는 필연의 세계로 바뀐다.
바둑에는 정석(定石)이란 것이 있다(<수학의 정석>에서 말하는 바로 그 ‘정석’이다). 빈자리 어디든 돌을 놓을 수 있지만 그 타이밍에 최적의 자리는 정해져 있다. 알파고는 일반적인 정석을 깨는 바둑을 두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인간이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숨은 정석이었다. 경우의 수를 읽는 능력이 뛰어날수록 정답은 하나로 수렴된다.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수는 정해져 있다. 바둑의 정석은 이길 확률을 조금씩 높이는 수를 두는 것이다. 고수들끼리 두는 바둑은 그렇게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다가 대개 반집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바둑도 수학도 정답이 있는 세계다.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일에는 정답 또는 정답에 근접하는 최선의 해답이 있다. 시험에서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이 획일적인 사고를 조장할 위험이 있지만, 정답을 부정하는 교육은 문명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문명적 성격을 경계할 일이다. ‘정답은 없다’는 주의는 예전의 고립된 부족사회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없다. 문명은 서로 긴밀히 엮이는 것이다. 부족민의 문화를 인정하자는 문화상대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 하다. “남이야 개고기를 먹든 말든” 식으로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트리는 것이다. 식인종을 문명인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인류가 오래전에 합의한 바다. 미국의 한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개고기 먹는 족속’으로 놀림 받는 것을 방관해서는 문명인이 될 수 없다. 문명사회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구태여 꾸역꾸역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하기 마련이다. 세계인들이 한국을 주목하게 되면서 한국인들은 꼬투리를 잡히기 한층 쉬운 처지가 되었다. 지구촌에서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면 인류 보편의 정서에 화답해야 한다.
고백컨대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전래동화 이야기는 오래전 《민들레》 잡지에 ‘정답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의 일부다. ‘정답이 하나뿐인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기성 권위를 부정하고 싶은 욕구의 발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생각이 얕고 공부가 부족한 때문이었다. 이십여 년 뒤 ‘정답은 있다’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까지 혼란의 시기를 거쳐오면서 상대성과 절대성, 개별성과 보편성, 개인과 사회에 대한 공부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둘만 알던 시절 하나만 아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기에 바빴다. 셋을 알게 되자 둘만 알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배움은 끝이 없다. 무한소수처럼.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 이 글은 '교육을바꾸는사람들'에서 펴내는 저널 《교육, 제4의 길》에 실린 칼럼입니다.
문제(question)가 문제(problem)다
옛날에 한 나쁜 사또가 한겨울에 이방에게 산딸기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이방은 걱정을 하다 병이 났습니다. 이방의 아들이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렸다고 사또에게 고한 것입니다. 사또가 한겨울에 독사가 어디 있냐면서 화를 내자 아들이 말했답니다. “겨울에 독사가 없는 것처럼 산딸기도 없습니다.”
[문제] 위의 전래동화를 읽고 다음 괄호 안에 적당한 말을 넣으시오.
이방은 병이 났습니다. ( ) 겨울에는 산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출제자가 기대한 정답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왜냐하면’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썼다. ‘(이 추운) 겨울에는 산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학생의 언어감각이 교사보다 뛰어나다. 접속사를 쓰지 않고도 뜻을 전할 수 있는 문장이 더 좋은 문장이다. 저 문제의 정답은 두 개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왜냐면, 그 까닭은, 추운…. 좀 더 상상력이 있는 아이라면 ‘얼음이 어는’이라 써넣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 문제를 보자마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써넣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모범생을 추켜세우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 주소이다.
다행히도 이 시험지를 채점한 교사는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이 아닌 ‘또 하나의 정답’도 맞는 답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교사들이 이처럼 융통성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식빵 한 면에 버터를 바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쓰시오”라는 질문에 한 학생이 “두 면에 바르면 너무 느끼해서”라고 답하자 교사는 틀린 답으로 채점했다. 정답은 ‘속 재료의 수분이 빵 속에 배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교사가 ‘버터’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학생은 ‘한 면’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 학생의 독법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른 쪽 면에는 잼을 발라야 해서”라고 답할 수도 있는 일이다.
초등 아이들의 기발한 답안지가 인터넷에 떠돈다. “불행한 일이 거듭 겹침을 뜻하는 사자성어는?” “설(사)가(또)”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아)(빠)(인)가” 이 문제를 출제한 교사는 ‘설(상)가(상)’, ‘(고)(성)(방)가’가 정답이라 말하겠지만, 문제의 ‘사자성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답은 맞거나 틀릴 수 있다. 전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정답은 달라진다. 물과 쇠 중에 더 단단한 것은? 워터커터에서 고속 분사되는 물은 쇠를 자른다. 속도라는 전제 조건에 따라 물의 성질이 달라진다. 사실상 물질의 고유한 성질은 없으며 어떤 맥락 속에서 성질이 결정된다.
한 아이가 국어시험 문제에 이렇게 답을 썼다.
다음 글에서 틀린 낱말을 바르게 고쳐 쓰시오.
“헤헤, 맏있겠다. 나 혼자 먹어야지.” (답: 나 혼자 -> 같이)
이렇게 답한 아이는 ‘틀린’의 의미를 출제자와 다르게 읽은 셈이다. 논리적 사고가 앞서는 사람에게는 ‘맏있겠다’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이 아이에게는 맛있는 걸 혼자 먹으려는 그 심보가 먼저 읽힌 것이다. 문제의 질문이 ‘다음 글에서 맞춤법이 틀린 낱말을 바르게 고쳐 쓰시오’라고 되어 있었더라면 ‘맏있겠다 -> 맛있겠다’가 정답이므로 저 답은 틀린 답이 된다. 맞춤법을 묻는 문제임을 분명히 했더라면 아이도 아마 교사가 기대하는 정답을 제대로 썼을 것이다. 사실상 문제(question)가 문제(problem)인 셈이다. 정답을 둘러싼 논란은 문제의 전제가 감추어져 있거나 문제가 애매해서일 수도 있고, 또는 ‘문제’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은 문제라기보다 ‘물음’이다. 그런 물음(ask)은 답(answer)이 아니라 ‘대답(reply)’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답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아이처럼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응답’할 수도 있다. 질문이 물음인지 문제인지에 따라 정답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문제라고 해도 수학 문제와 사회 문제가 다르다.* ‘사회 문제’라는 말의 경우, 사회과 시험 문제는 question이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뜻에서의 문제는 problem 또는 issue다. 사회 문제(social problem)는 답을 요구하는 문제라기보다 해법(solution)을 찾아야 하는 과제(task)에 가깝다. 여러 가지 해법이 있을 수 있지만, 사회과학은 가설과 검증을 거쳐 사회 문제에 대해 정답에 가까운 최선의 해법을 찾아간다. 인문학적 질문인지 사회과학 또는 자연과학적 문제인지에 따라 답의 성격이 달라진다.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 ‘문제’라는 낱말을 제대로 정의한다면 정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은 괜한 논란이 될 것이다.
* 우리말 한자어 ‘문제(問題)’가 개념이 분화되지 않은 낱말이어서 혼란을 초래한다. question인지 problem인지를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사회 문제’라고 할 때 사회과 시험 문제(examination question)인지 사회 문제(social problem)인지 잘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정답과 상대주의
몇 해 전 수능시험 언어영역의 한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복수 정답이 인정되자 온 나라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정답이 여러 개인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숨어 있는 전제를 드러내면 정답은 분명해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이 질문에는 전제가 빠져 있다. 직선거리를 묻는지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가는 경우의 거리인지 기차로 가는 거리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기차도 KTX 선로 거리와 새마을호 선로 거리가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상대주의가 득세하면서 하나의 정답을 부정하는 경향이 생겨났지만, 전제가 주어진 닫힌계에서는 절대성이 작동하면서 정답이 드러나게 된다.
문제와 답은 쌍으로 존재한다. 수학이나 과학의 문제라면 정답은 있기 마련이다. 아직 풀지 못한 수학의 난제들도 언젠가는 풀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학과 과학은 모든 문제에는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문제가 제대로 설정되었는지, 전제가 잘못되거나 빠져 있지 않은지 분석하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어야 한다. 수학과 과학 공부는 연역적 사고, 과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리에 입각해 추론하는 사고력을 기르고, 가설과 검증을 통해 해답을 찾아가는 훈련을 한다. 그런 훈련을 거친 아이들이 자라서 새로운 과학기술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갈등을 푸는 해법을 찾아낼 것이다.
대안적 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은 흔히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을 비판한다. ‘정답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주의를 부정하고 상대적 세계에서 사설 권력을 추구하려는 욕구의 발로일 수 있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그러니 우리 각자 왕 노릇 하자는 심리다. 또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감추는 수사일 수 있다. 수학은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말한다. 우주는 수학적으로 작동한다. 달리 말해 비례 관계로 작동한다. 이게 이러면 저건 저렇다는 것이 비례다. 원주율(π)은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 길이의 비다. 원이 크든 작든 지름이 정해지면 둘레는 거기에 연동되어 자동으로 정해진다. 지름 1cm 원의 둘레 길이는 3.141592…cm이다. 원의 지름과 둘레 비의 끝자리 수는 신도 모르겠지만 그 비례는 정해져 있다.
원주율은 무한소수다. 첨단 컴퓨터로 지금까지 알아낸 π의 소수점 자리는 62조 8천억 자리까지다. NASA에서 달 착륙 계산에 쓴 원주율 값은 소수점 5자리였으며, 오늘날 가장 정밀을 요하는 산업에서도 15자리까지만 사용한다고 한다. 무한소수의 끝자리는 끝내 알 수 없지만, 수학은 ‘수렴’이라는 개념으로 정답을 제시한다. 양자역학을 접하고 당황한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주사위를 무한히 되풀이해서 던지면 6이 나올 확률은 정확히 1/6에 수렴한다. 확률의 세계는 우연의 세계 같지만 큰 수의 법칙이 작용하는 상황에서는 필연의 세계로 바뀐다.
바둑에는 정석(定石)이란 것이 있다(<수학의 정석>에서 말하는 바로 그 ‘정석’이다). 빈자리 어디든 돌을 놓을 수 있지만 그 타이밍에 최적의 자리는 정해져 있다. 알파고는 일반적인 정석을 깨는 바둑을 두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인간이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숨은 정석이었다. 경우의 수를 읽는 능력이 뛰어날수록 정답은 하나로 수렴된다.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수는 정해져 있다. 바둑의 정석은 이길 확률을 조금씩 높이는 수를 두는 것이다. 고수들끼리 두는 바둑은 그렇게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다가 대개 반집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바둑도 수학도 정답이 있는 세계다.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일에는 정답 또는 정답에 근접하는 최선의 해답이 있다. 시험에서 정답을 요구하는 교육이 획일적인 사고를 조장할 위험이 있지만, 정답을 부정하는 교육은 문명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문명적 성격을 경계할 일이다. ‘정답은 없다’는 주의는 예전의 고립된 부족사회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없다. 문명은 서로 긴밀히 엮이는 것이다. 부족민의 문화를 인정하자는 문화상대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 하다. “남이야 개고기를 먹든 말든” 식으로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격을 떨어트리는 것이다. 식인종을 문명인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인류가 오래전에 합의한 바다. 미국의 한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개고기 먹는 족속’으로 놀림 받는 것을 방관해서는 문명인이 될 수 없다. 문명사회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구태여 꾸역꾸역 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하기 마련이다. 세계인들이 한국을 주목하게 되면서 한국인들은 꼬투리를 잡히기 한층 쉬운 처지가 되었다. 지구촌에서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면 인류 보편의 정서에 화답해야 한다.
고백컨대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전래동화 이야기는 오래전 《민들레》 잡지에 ‘정답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의 일부다. ‘정답이 하나뿐인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기성 권위를 부정하고 싶은 욕구의 발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생각이 얕고 공부가 부족한 때문이었다. 이십여 년 뒤 ‘정답은 있다’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까지 혼란의 시기를 거쳐오면서 상대성과 절대성, 개별성과 보편성, 개인과 사회에 대한 공부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둘만 알던 시절 하나만 아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기에 바빴다. 셋을 알게 되자 둘만 알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배움은 끝이 없다. 무한소수처럼.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 이 글은 '교육을바꾸는사람들'에서 펴내는 저널 《교육, 제4의 길》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