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국토일보
무임승차의 사회학
“빵셔틀만 학폭인가, 점수셔틀 학점셔틀도 학폭이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조별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원성이 높다. 대개는 얌체짓을 하는 무임승차자(프리라이더) 때문이다. 역할 분담을 하다 보면 카톡 연락도 ‘씹고’ 잠수를 타거나 대충 자료조사만 해서 던져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조원이 한두 명씩 있기 마련이다. ‘조별과제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대학생 설문조사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는지 짐작할 수 있다. 1/n이 몸에 밴 신세대는 공정함에 민감해서인지 무임승차자에 대한 반감이 증오 수준에 가깝다. 팀플레이를 훈련하는 교육적 의미가 무색하게도 조별과제 무용론이 대두할 만큼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무임승차자는 이득이고 독박 쓰는 사람이 손해인 것 같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인생열차에서 무임승차는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임승차를 일삼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가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따지고 보면 무임승차자는 살아가면서 요금의 몇천 배, 몇만 배를 과태료로 지불하는 셈이다. 누구는 선불로 내고 누구는 후불로 낼 따름이다. 비싼 이자까지 물면서. 한편 무임승차자 몫까지 떠맡아 열심히 한 사람은 대학에서도 친구들과 교수들에게 인정받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인정받기 마련이다. 일을 해본 사람이나 시켜본 사람은 신참의 능력과 됨됨이를 금방 알아본다. 회사에도 ‘월급도둑’이 있지만 그가 동료나 상사에게 인정받기란 힘들다.
그러므로 무임승차자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보다 그 존재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는 편이 현명하다. 오히려 그가 내게 성장할 기회를 주는구나 생각하는 편이 낫다. 사실 무작위로 짜인 조원들 중에는 성실하면서 평범한 친구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 친구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클지도 모른다. 역량이 두드러진 친구가 있으면 뭘 해도 쟤가 더 잘할 거라는 걸 알아서 주눅이 들고 알게 모르게 열등감에 시달린다. 뛰어난 친구는 성취감이라도 남지만 어중간한 친구들은 조별 점수가 잘 나와도 자기가 기여한 게 적으니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다. 중간에서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는 셈이다. 이들 평범한 구성원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별과제는 리더십 훈련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개미 집단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20%는 매우 열심히 일하고 60%는 보통으로 일하며 나머지 20%는 놀고먹는다고 한다. 놀고먹는 개미를 일개미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만 따로 분리해도 2:6:2 비율이 나타난다고 하니 일개미의 본성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습성이 바뀌는 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인간 사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소수의 리더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어간다. 평범한 아이들이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상위 20% 정도만 죽어라 노력하고 나머지는 설렁설렁 해도 제 밥벌이 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미래를 그리기란 어렵다.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우경화하는 이유다.
무임승차자에 대한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은 신세대만의 특징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배태된 집단무의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마을 단위의 협력이 필수다. 관개 시설을 만들고, 때를 놓치지 않고 모를 심고 제초작업을 해야 한다. 공동생산 방식의 벼농사 체제에서 무임승차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공동노동에서 빠지거나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을 마을에서 제제하는 문화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벼농사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마을사람들 앞에서 망신과 훈계를 주거나 심할 경우 덕석말이로 집단구타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사의 경우는 당장 생계 문제와 직결되는 만큼 강제 제재가 필요할 수 있지만 조별과제를 게을리 하는 사람을 집단구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학점도 생계와 무관하진 않지만 인과관계가 느슨하다.
무임승차자는 예비자원으로 데려간다 생각하고 개의치 않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그 또한 리더의 몫이다. 인생이란 여행길에서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줄 때도 있기 마련이다. 맹상군의 일화처럼, 살다 보면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복지제도가 무임승차자를 낳을 수도 있지만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진다. 위기에 처한 사람의 생존을 가족에게 떠넘길 수 없는 시대에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 부모 잘 만난 덕에 특실 표를 사서 편하게 여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이 나빠 입석 표밖에 구하지 못해 힘들게 서서 가야 하는 사람도 있고,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기차를 놓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여행이 더 낫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실 좌석에 앉아 졸면서 가는 것보다 서서 책을 읽으며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고, 다음 열차를 탄 덕분에 좋은 길동무를 만날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룰에 따라 돌아가면서 놀고먹는 경우는 엄밀히 말해 무임승차라 보기 어렵다. 룰을 어기고 그야말로 무임승차하는 얌체족이 있을 수 있지만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그들도 안고 가는 전략이 유효하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무임승차는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다. 열차 무임승차자의 경우 차장이 돌아다닐 때마다 가슴을 졸일 테니 심리적 비용을 치르는 셈이다. 그 스트레스도 만만찮을 테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암 같은 질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팀프로젝트의 경우 무임승차자는 모두의 미움을 받기 마련이고, 그 대가는 두고두고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다. 게다가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므로 알게 모르게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자세로는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기 힘들다. 무임승차가 결코 무임이 아닌 것이다.
빚짐으로써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1990년대 말, 구제금융 사태가 한창이던 때 출판사를 차렸다. 전세금을 빼서 반지하 작은 집으로 옮기고 나머지 돈을 밑천 삼아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사업’이 아니라 ‘운동’이라 생각했기에 겁 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들 학교에 진절머리를 내며 아이들이 스스로 학교를 뛰쳐나오던 시기에 『학교를 넘어서』라는 책을 펴내고,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기치로 교육 잡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는 동안 사업가와 운동가 사이에서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태생적으로 사업가 자질도, 운동가 자질도 부족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25년이 넘도록 출판사를 운영하며 빚을 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소심한 성격 탓도 있지만 사업 감각이 없어서였다. 은행 대출 같은 건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월세살이를 하면서도 대출받아 사옥 마련하고 이자 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은행빚은 안 졌지만, 사람들에게 물심양면의 빚을 졌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다 보면 스스로 서게 되는’ 것이 삶의 이치임을 깨닫게 되었다. 삶은 곧 빚을 지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빚을 진 채 태어난다. 부모와 사회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으며, 수천 년에 걸쳐 선조들이 일군 유형무형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선조로부터 자산과 함께 부채도 물려받지만 부채가 아무리 많다 해도 상속 포기 선언을 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빚진 자로 이 세계에 등장하여 제 몫을 함으로써 빚을 탕감받으며 겨우 생존하는 건지도 모른다. 워낙 큰 빚을 지고 있으므로 제 힘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뭔가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약간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빚을 진다는 것은 곧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자신이 부모와 사회에 빚을 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과 긴밀하게 엮이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할 일을 찾게 된다. 어려서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노력한다. 먼저 가족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후 울타리가 확대되면서 사회에서도 제 역할을 찾게 된다. 자신이 빚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만큼 할 일이 생겨난다. 청소년기 진로교육과 경제교육의 기본은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빚진 존재임을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시대마다 물려받는 부채의 종류가 다르다. 오늘날 젊은 세대가 물려받은 부채가 이전 세대가 감당했던 부채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니다. 선조로부터 가난을 물려받았던 기성세대는 밤낮을 모르고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기근과 전쟁을 물려받았던 선조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기후위기라는 부채를 물려받았다. 이전의 부채와 달리 이는 개인이나 국가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하는 문제다. 지난 2백 년 동안 이룬 과학기술과 인터넷이라는 획기적인 소통 수단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 인류의 삶이 지속된다면 그 자산과 함께 또 다른 부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삶은 세대를 이어 연결된다.
* 이철승, 『쌀, 재난, 국가』, 문학과지성사, 2021. 122쪽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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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국토일보
무임승차의 사회학
“빵셔틀만 학폭인가, 점수셔틀 학점셔틀도 학폭이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조별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원성이 높다. 대개는 얌체짓을 하는 무임승차자(프리라이더) 때문이다. 역할 분담을 하다 보면 카톡 연락도 ‘씹고’ 잠수를 타거나 대충 자료조사만 해서 던져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조원이 한두 명씩 있기 마련이다. ‘조별과제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대학생 설문조사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는지 짐작할 수 있다. 1/n이 몸에 밴 신세대는 공정함에 민감해서인지 무임승차자에 대한 반감이 증오 수준에 가깝다. 팀플레이를 훈련하는 교육적 의미가 무색하게도 조별과제 무용론이 대두할 만큼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무임승차자는 이득이고 독박 쓰는 사람이 손해인 것 같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인생열차에서 무임승차는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임승차를 일삼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가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따지고 보면 무임승차자는 살아가면서 요금의 몇천 배, 몇만 배를 과태료로 지불하는 셈이다. 누구는 선불로 내고 누구는 후불로 낼 따름이다. 비싼 이자까지 물면서. 한편 무임승차자 몫까지 떠맡아 열심히 한 사람은 대학에서도 친구들과 교수들에게 인정받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인정받기 마련이다. 일을 해본 사람이나 시켜본 사람은 신참의 능력과 됨됨이를 금방 알아본다. 회사에도 ‘월급도둑’이 있지만 그가 동료나 상사에게 인정받기란 힘들다.
그러므로 무임승차자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보다 그 존재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는 편이 현명하다. 오히려 그가 내게 성장할 기회를 주는구나 생각하는 편이 낫다. 사실 무작위로 짜인 조원들 중에는 성실하면서 평범한 친구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 친구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클지도 모른다. 역량이 두드러진 친구가 있으면 뭘 해도 쟤가 더 잘할 거라는 걸 알아서 주눅이 들고 알게 모르게 열등감에 시달린다. 뛰어난 친구는 성취감이라도 남지만 어중간한 친구들은 조별 점수가 잘 나와도 자기가 기여한 게 적으니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다. 중간에서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는 셈이다. 이들 평범한 구성원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별과제는 리더십 훈련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개미 집단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20%는 매우 열심히 일하고 60%는 보통으로 일하며 나머지 20%는 놀고먹는다고 한다. 놀고먹는 개미를 일개미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만 따로 분리해도 2:6:2 비율이 나타난다고 하니 일개미의 본성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습성이 바뀌는 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인간 사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소수의 리더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만들어간다. 평범한 아이들이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상위 20% 정도만 죽어라 노력하고 나머지는 설렁설렁 해도 제 밥벌이 하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미래를 그리기란 어렵다.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우경화하는 이유다.
무임승차자에 대한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은 신세대만의 특징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배태된 집단무의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마을 단위의 협력이 필수다. 관개 시설을 만들고, 때를 놓치지 않고 모를 심고 제초작업을 해야 한다. 공동생산 방식의 벼농사 체제에서 무임승차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공동노동에서 빠지거나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을 마을에서 제제하는 문화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벼농사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마을사람들 앞에서 망신과 훈계를 주거나 심할 경우 덕석말이로 집단구타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사의 경우는 당장 생계 문제와 직결되는 만큼 강제 제재가 필요할 수 있지만 조별과제를 게을리 하는 사람을 집단구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학점도 생계와 무관하진 않지만 인과관계가 느슨하다.
무임승차자는 예비자원으로 데려간다 생각하고 개의치 않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그 또한 리더의 몫이다. 인생이란 여행길에서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줄 때도 있기 마련이다. 맹상군의 일화처럼, 살다 보면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복지제도가 무임승차자를 낳을 수도 있지만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진다. 위기에 처한 사람의 생존을 가족에게 떠넘길 수 없는 시대에 국가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 부모 잘 만난 덕에 특실 표를 사서 편하게 여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이 나빠 입석 표밖에 구하지 못해 힘들게 서서 가야 하는 사람도 있고,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기차를 놓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여행이 더 낫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실 좌석에 앉아 졸면서 가는 것보다 서서 책을 읽으며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고, 다음 열차를 탄 덕분에 좋은 길동무를 만날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룰에 따라 돌아가면서 놀고먹는 경우는 엄밀히 말해 무임승차라 보기 어렵다. 룰을 어기고 그야말로 무임승차하는 얌체족이 있을 수 있지만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그들도 안고 가는 전략이 유효하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무임승차는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다. 열차 무임승차자의 경우 차장이 돌아다닐 때마다 가슴을 졸일 테니 심리적 비용을 치르는 셈이다. 그 스트레스도 만만찮을 테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암 같은 질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팀프로젝트의 경우 무임승차자는 모두의 미움을 받기 마련이고, 그 대가는 두고두고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다. 게다가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므로 알게 모르게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자세로는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기 힘들다. 무임승차가 결코 무임이 아닌 것이다.
빚짐으로써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1990년대 말, 구제금융 사태가 한창이던 때 출판사를 차렸다. 전세금을 빼서 반지하 작은 집으로 옮기고 나머지 돈을 밑천 삼아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사업’이 아니라 ‘운동’이라 생각했기에 겁 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들 학교에 진절머리를 내며 아이들이 스스로 학교를 뛰쳐나오던 시기에 『학교를 넘어서』라는 책을 펴내고,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기치로 교육 잡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는 동안 사업가와 운동가 사이에서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태생적으로 사업가 자질도, 운동가 자질도 부족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25년이 넘도록 출판사를 운영하며 빚을 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소심한 성격 탓도 있지만 사업 감각이 없어서였다. 은행 대출 같은 건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월세살이를 하면서도 대출받아 사옥 마련하고 이자 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은행빚은 안 졌지만, 사람들에게 물심양면의 빚을 졌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다 보면 스스로 서게 되는’ 것이 삶의 이치임을 깨닫게 되었다. 삶은 곧 빚을 지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빚을 진 채 태어난다. 부모와 사회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으며, 수천 년에 걸쳐 선조들이 일군 유형무형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선조로부터 자산과 함께 부채도 물려받지만 부채가 아무리 많다 해도 상속 포기 선언을 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빚진 자로 이 세계에 등장하여 제 몫을 함으로써 빚을 탕감받으며 겨우 생존하는 건지도 모른다. 워낙 큰 빚을 지고 있으므로 제 힘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뭔가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약간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빚을 진다는 것은 곧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자신이 부모와 사회에 빚을 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과 긴밀하게 엮이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할 일을 찾게 된다. 어려서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노력한다. 먼저 가족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후 울타리가 확대되면서 사회에서도 제 역할을 찾게 된다. 자신이 빚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만큼 할 일이 생겨난다. 청소년기 진로교육과 경제교육의 기본은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빚진 존재임을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시대마다 물려받는 부채의 종류가 다르다. 오늘날 젊은 세대가 물려받은 부채가 이전 세대가 감당했던 부채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니다. 선조로부터 가난을 물려받았던 기성세대는 밤낮을 모르고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기근과 전쟁을 물려받았던 선조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기후위기라는 부채를 물려받았다. 이전의 부채와 달리 이는 개인이나 국가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하는 문제다. 지난 2백 년 동안 이룬 과학기술과 인터넷이라는 획기적인 소통 수단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 인류의 삶이 지속된다면 그 자산과 함께 또 다른 부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삶은 세대를 이어 연결된다.
* 이철승, 『쌀, 재난, 국가』, 문학과지성사, 2021. 122쪽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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