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속에 본질이 있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아이들 역시 가족과 친구 같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란다. 다시 말해 사건의 흐름 속에 있다. 아이와 주변 환경 사이에 쉴 새 없이 정보들이 오고간다. 교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글을 볼 때 문맥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경기라는 사건의 흐름 속에서 선수들 한 명 한 명은 사건의 연결고리다. 감독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맥락의 관점에서 살필 줄 안다. 뛰어난 선수 역시 경기의 흐름을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한다. 공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공이 올 위치로 먼저 가서 기다린다. 바둑 고수들도 그렇게 한다. 판을 읽고 선수를 친다. 그처럼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와 ‘맥락’이 보인다. 핵심 정보가 그 속에 있다.
사건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에너지 흐름이 그렇듯이.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는 ‘일수불퇴’의 원칙이 가차 없이 적용된다. 한 수 한 수가 사건의 맥락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마지막 수를 두기 전까지는 아직 그 돌의 의미는 결정되지 않는다. 시간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선생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너그러운 선생이기도 하다. 언뜻 잘못 둔 것처럼 보이는 돌이 이어지는 돌로 인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서예도 그렇다. 한 획을 조금 잘못 그어도 다음 획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모든 획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긴밀하게 맞물려 작품을 완성시킨다. 마지막 획을 긋기 전까지는 아직 작품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이, 흩어진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 점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아이들 역시 그렇다. 맥락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교사와 친구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 상호작용하는 법, 곧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맥락을 읽는 훈련이다. 프로젝트 학습, 회의, 구기운동 모두 그 속에 깔린 교육 원리는 같다. 사건의 흐름, 곧 전체의 맥락을 읽고 팀플레이 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을 바꿀 수 없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맥락을 무시하고 물길을 억지로 틀면 일시적으로 물길이 바뀌는 것 같아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가고 만다. 물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주변 지형과 물길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환경을 알고 아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며 타이밍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교사의 내공이 필요한 지점이다.
교사가 바꿔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다. 교사는 어떤 학생을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정작 실패한 사람은 그 학생이 아니라 학생을 그렇게 바라보는 교사일 가능성이 더 많다. 교사의 관점이 바뀌면 아이를 둘러싼 맥락이 바뀔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고, 맥락이 바뀌면 아이도 변하기 마련이다. 맥락을 살피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자 삶의 본질이다.
선수를 친다는 것
바둑은 맥락을 읽고,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을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둑돌 하나하나는 의미가 없는 그냥 돌일 뿐이다. 흰돌과 검은돌의 관계에 의해 맥락과 의미가 만들어져간다. 돌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바둑판 전체의 맥락은 계속 변한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가로 세로 19줄의 바둑판에서 흰돌(0)과 검은돌(1)이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가 무려 2×10170나 된다.
바둑처럼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는 선(先)을 잡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바둑은 선수(先手)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한 수 한 수가 더해질 때마다 달라지는 맥락을 읽으면서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선수를 쳐야 한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변화된 상황을 읽고 또 선수를 친다. 맞수들끼리는 그렇게 팽팽하게 접전이 이어지다가 대개는 흑돌을 쥔 사람이 이긴다. 시작할 때 흑이 먼저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둑 대국에서는 백에게 6집 반을 덤으로 계산해주는 것이 룰로 정해져 있다.
교육 역시 아이들이라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교사는 아이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아이들이 뻔히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휘둘리기 마련이다. 교사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미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공을 뒤좇는 게임을 하면 진다. 공이 가는 방향을 읽고 선제 대응을 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식의 대응은 후수를 두는 것이다. 아이들이 예측할 수 없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휘어잡는 교사는 단순히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니라 선수를 칠 줄 알기 때문이다.
바둑, 운동, 춤, 연애, 교육 등등 상대가 있는 게임은 모두 원리가 비슷하다. 사건의 흐름, 곧 맥락을 읽고 선수를 치는 것. 사건의 흐름은 대칭과 비대칭 상태를 오가면서 이어진다. 팽팽한 대칭 상태에서 어떤 의사결정이 일어나면 비대칭 상태로 바뀐다. 씨름은 팽팽한 대칭 상태에서 비대칭 상태로 넘어가는 사건의 흐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선제적으로 대칭의 축을 이동시킴으로써 에너지 우위를 달성하는 경기다.
대칭 상태에서 선수를 친다는 것은 걷기 전에 먼저 몸을 기울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걷기 전에 직립자세라는 지구와의 대칭 상태에서 몸을 먼저 앞으로 살짝 기울임으로써 일부러 비대칭 상태를 야기한다. 다음에 이어질 사건을 알고 선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지구는 어쩔 수 없이 기울어지는 우리 몸을 받는데, 그 순간 다른 쪽 다리가 앞으로 나가는 대응을 함으로써 다시 대칭 상태를 회복한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움직이지만 사실상 걸을 때마다 지구에 선수를 치는 셈이다.
이러한 원리는 춤에도 적용된다. 춤은 음악에 맞춰 걷는 행위다. 홀로 춤추는 사람은 사실은 지구와 함께 춤추는 것이다. 남녀가 함께 춤출 때는 그 사이에 지구가 시소의 축 역할을 한다. 탱고를 출 때 남자가 리드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녀는 바둑에서 흑돌과 백돌처럼 팽팽하게 서로 선수를 치면서 맥락을 이어간다. 여성이 몸을 기울여 공간의 대칭이 무너지는 순간 남성이 호응함으로써 대칭을 회복한다. 이때 남성의 호응은 시간에서의 대칭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도움을 빌어 공간의 밸런스를 회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대칭과 비대칭 상태를 넘나들면서 춤이 이어진다.
눈치 보기와 눈치 채기
십여 년 전 ‘쌈지’ 기업을 정리하고 파주에서 논밭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천호균 선생과 인터뷰를 할 때 눈치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옛날에는 여러 형제들 속에서 자라다 보니 저절로 눈치가 늘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형제 없이 자라 그런지 눈치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선생은 태생적으로 눈치 없이 착한 사람들은 복 받은 거고 대개는 눈치를 보면서 착해진다고 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말씀이었다. ‘눈치’는 좋게 보면 공동체성이라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중심이 없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눈치교육이 아이들을 기회주의자를 만들지 않고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눈치를 보면서 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눈치 보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대리는 과장 눈치를 보고, 과장은 부장 눈치를 본다. 물론 상사도 부하직원 눈치를 본다. 좋은 상사일수록 그럴 것이다. 가족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가정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 사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사회의식이 있고, 역사의 눈치를 보면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눈치를 보는 것과 눈치를 채는 것은 사뭇 다르다. 가족의 눈치를 보는 사람보다 가족의 상황을 눈치 채고 적절히 행동하는 사람이 더 어른스럽다. 사회의 눈치를 보는 것을 넘어서 사회변화의 흐름을 읽고 역사의 방향을 눈치 챈 사람은 그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선도한다. 그만큼 위험하다.
선도자는 눈치를 보지 않는다. ‘눈치를 본다’고 하면 언뜻 ‘보는’ 행위자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동적인 행위다. 상대의 행동 여하에 맞춰 자기 행동을 정하려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 반면에 눈치 채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다. 스스로 일을 주도해서 풀어가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 눈치를 빨리 채는 법이다.
관료화되지 않은 건강한 조직은 구성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보다 눈치를 채고 알아서 움직인다. 관료화의 정도는 눈치 보는 사람들의 증가에 비례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교나 회사, 가정에는 명확하게 누구의 일도 아닌 일들이 숱하게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눈에 띌 때 (눈치를 채고) 스스럼없이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 조직은 건강하다. 그런 사람은 자기 역할에 고착되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일 줄 안다. 축구선수가 자기 포지션에 고착되면 패하기 마련이다. 포지션이 없어도 안 되지만 거기에 고착되어도 곤란하다. 유연함이 선수와 팀의 기량을 결정한다.
눈치 채지 못하면 눈치 보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눈치를 보는 것은 후수를 두는 것이고, 눈치 채는 것은 선수를 치는 것이다. 눈치를 보는 것은 들쥐가 주변을 살피듯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눈치를 채는 것은 매가 들쥐를 채듯 눈 깜짝할 새 일어난다. 들쥐가 매를 이길 수 없듯이 눈치 보는 선수는 눈치 채는 선수에게 패하기 마련이다. 선수(先手)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뛰어난 선수는 경기가 돌아가는 흐름을 읽고 공이 올 자리에 미리 가서 기다린다. 공을 뒤쫓지 않고 공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는 선수는 경기를 리드할 수 있다. 이처럼 선수를 친다는 것은 자신이 의사결정권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선수를 친다는 것이 반드시 먼저 움직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면서 기다릴 수도 있다. 사건의 관점에서 선수를 친다는 것은 곧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결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이 상황을 장악하기 마련이다.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관성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고 방향 전환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쉽지 않다. 대개는 하던 대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의사결정 하기 쉬운 쪽으로(또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하는데, 이는 사실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이 힘든 것은 모든 의사결정에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양단간에 결정을 하려면 많든 적든 스트레스가 따르고 기회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 비용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정당하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역량을 기르는 것은 곧 의사결정 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선수를 치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으려면 의사결정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배움과 성장의 본질은 그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성에 지배당하지 않는 힘,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힘, 맥락을 읽고 맥점을 짚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에너지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히 방향전환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일의 맥락을 알고 맥점을 짚을 줄 안다. 맥락과 맥점의 관계는 인체의 에너지 통로인 경락과 경혈의 관계와 같다. 경혈이나 맥점은 에너지가 꺾이는 지점이다.(인체에서는 주로 뼈가 이어지는 관절 부위, 근육과 근육 사이에 주요 경혈 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대체로 급소이기도 하다. 정확한 급소 지점을 타격하면 맥을 못 추게 만들 수 있다. 이처럼 맥락과 맥점을 알면 사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사건은 피치 못할 인과관계와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다음 단계가 전개된다. 원인 없이 결과가 있을 수 없고, 작용 없이 반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과거가 미래를 제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은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로 작동한다. 그렇게 사건이 통제됨으로써 맥락이 만들어지고 사건이 성립한다. 이는 뛰어난 문학작품에서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의해 맥락이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이야기는 개연성을 갖게 된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처럼 보이는 물질세계도 미시 차원에서는 사건의 연속이다. 의사결정의 연속체라는 말이다.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완성된 서예 작품은 공간상의 사물이지만 글씨를 쓰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획과 획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흐른다. 글씨에서 시간이 만들어 낸 변화가 읽히면 그 작품은 살아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모든 의사결정은 갈림길 또는 변곡점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말하는 의사결정은 인간의 의도가 작용하는 결정만이 아니라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방향전환을 말한다. 한 번의 붓놀림, 공을 던지는 한 번의 피칭, 방망이를 휘두르는 한 번의 스윙에서도 여러 단계의 의사결정이 일어날 수 있다. 일류 선수는 그 한 번의 동작을 세분할 줄 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동작을 통제할 수 있다.
한 번의 피칭 동작을 세분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신체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일류 투수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비결은 ‘힘 빼고 던져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 간단한 비결을 몸으로 터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몸이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근력과 유연성이 필요하다. 힘이 빠지려면 발끝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이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이 막히지 않아야 한다.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고 관절의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힘을 뺄 수도 없다.
와인드업 동작에서 이미 마무리 동작이 결정된다. 기승전결에서 기가 나머지 과정을 제어하는 것이다. 바꾸고 싶으면 기 단계에서 바꿔야 한다. 하지만 과거가 미래를 제약하는 것이 결정론이나 운명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의 피칭을 세분해서 자신의 동작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번 기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말이다. 유전자론이든 금수저론이든 모든 결정론이 간과하는 것은 기의 단계가 한 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과거가 미래를 제어하지만, 또한 미래가 과거를 결정하는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을 간과하면 사건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은 사건의 전반부만 보고 논하는 것이다. 아이의 미래가 과거에 제약 당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이는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시간은 우리 편임을 믿어야 한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 민들레 123호 (2019년 5,6월호)
맥락 속에 본질이 있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아이들 역시 가족과 친구 같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란다. 다시 말해 사건의 흐름 속에 있다. 아이와 주변 환경 사이에 쉴 새 없이 정보들이 오고간다. 교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글을 볼 때 문맥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경기라는 사건의 흐름 속에서 선수들 한 명 한 명은 사건의 연결고리다. 감독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맥락의 관점에서 살필 줄 안다. 뛰어난 선수 역시 경기의 흐름을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한다. 공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공이 올 위치로 먼저 가서 기다린다. 바둑 고수들도 그렇게 한다. 판을 읽고 선수를 친다. 그처럼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와 ‘맥락’이 보인다. 핵심 정보가 그 속에 있다.
사건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에너지 흐름이 그렇듯이.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는 ‘일수불퇴’의 원칙이 가차 없이 적용된다. 한 수 한 수가 사건의 맥락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마지막 수를 두기 전까지는 아직 그 돌의 의미는 결정되지 않는다. 시간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선생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너그러운 선생이기도 하다. 언뜻 잘못 둔 것처럼 보이는 돌이 이어지는 돌로 인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서예도 그렇다. 한 획을 조금 잘못 그어도 다음 획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모든 획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긴밀하게 맞물려 작품을 완성시킨다. 마지막 획을 긋기 전까지는 아직 작품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이, 흩어진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 점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아이들 역시 그렇다. 맥락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교사와 친구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 상호작용하는 법, 곧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맥락을 읽는 훈련이다. 프로젝트 학습, 회의, 구기운동 모두 그 속에 깔린 교육 원리는 같다. 사건의 흐름, 곧 전체의 맥락을 읽고 팀플레이 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을 바꿀 수 없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맥락을 무시하고 물길을 억지로 틀면 일시적으로 물길이 바뀌는 것 같아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가고 만다. 물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주변 지형과 물길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환경을 알고 아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며 타이밍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교사의 내공이 필요한 지점이다.
교사가 바꿔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다. 교사는 어떤 학생을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정작 실패한 사람은 그 학생이 아니라 학생을 그렇게 바라보는 교사일 가능성이 더 많다. 교사의 관점이 바뀌면 아이를 둘러싼 맥락이 바뀔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고, 맥락이 바뀌면 아이도 변하기 마련이다. 맥락을 살피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자 삶의 본질이다.
선수를 친다는 것
바둑은 맥락을 읽고,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을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둑돌 하나하나는 의미가 없는 그냥 돌일 뿐이다. 흰돌과 검은돌의 관계에 의해 맥락과 의미가 만들어져간다. 돌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바둑판 전체의 맥락은 계속 변한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가로 세로 19줄의 바둑판에서 흰돌(0)과 검은돌(1)이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가 무려 2×10170나 된다.
바둑처럼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는 선(先)을 잡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바둑은 선수(先手)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한 수 한 수가 더해질 때마다 달라지는 맥락을 읽으면서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선수를 쳐야 한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변화된 상황을 읽고 또 선수를 친다. 맞수들끼리는 그렇게 팽팽하게 접전이 이어지다가 대개는 흑돌을 쥔 사람이 이긴다. 시작할 때 흑이 먼저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둑 대국에서는 백에게 6집 반을 덤으로 계산해주는 것이 룰로 정해져 있다.
교육 역시 아이들이라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교사는 아이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아이들이 뻔히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휘둘리기 마련이다. 교사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미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공을 뒤좇는 게임을 하면 진다. 공이 가는 방향을 읽고 선제 대응을 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식의 대응은 후수를 두는 것이다. 아이들이 예측할 수 없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휘어잡는 교사는 단순히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니라 선수를 칠 줄 알기 때문이다.
바둑, 운동, 춤, 연애, 교육 등등 상대가 있는 게임은 모두 원리가 비슷하다. 사건의 흐름, 곧 맥락을 읽고 선수를 치는 것. 사건의 흐름은 대칭과 비대칭 상태를 오가면서 이어진다. 팽팽한 대칭 상태에서 어떤 의사결정이 일어나면 비대칭 상태로 바뀐다. 씨름은 팽팽한 대칭 상태에서 비대칭 상태로 넘어가는 사건의 흐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선제적으로 대칭의 축을 이동시킴으로써 에너지 우위를 달성하는 경기다.
대칭 상태에서 선수를 친다는 것은 걷기 전에 먼저 몸을 기울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걷기 전에 직립자세라는 지구와의 대칭 상태에서 몸을 먼저 앞으로 살짝 기울임으로써 일부러 비대칭 상태를 야기한다. 다음에 이어질 사건을 알고 선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지구는 어쩔 수 없이 기울어지는 우리 몸을 받는데, 그 순간 다른 쪽 다리가 앞으로 나가는 대응을 함으로써 다시 대칭 상태를 회복한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움직이지만 사실상 걸을 때마다 지구에 선수를 치는 셈이다.
이러한 원리는 춤에도 적용된다. 춤은 음악에 맞춰 걷는 행위다. 홀로 춤추는 사람은 사실은 지구와 함께 춤추는 것이다. 남녀가 함께 춤출 때는 그 사이에 지구가 시소의 축 역할을 한다. 탱고를 출 때 남자가 리드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녀는 바둑에서 흑돌과 백돌처럼 팽팽하게 서로 선수를 치면서 맥락을 이어간다. 여성이 몸을 기울여 공간의 대칭이 무너지는 순간 남성이 호응함으로써 대칭을 회복한다. 이때 남성의 호응은 시간에서의 대칭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도움을 빌어 공간의 밸런스를 회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대칭과 비대칭 상태를 넘나들면서 춤이 이어진다.
눈치 보기와 눈치 채기
십여 년 전 ‘쌈지’ 기업을 정리하고 파주에서 논밭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천호균 선생과 인터뷰를 할 때 눈치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옛날에는 여러 형제들 속에서 자라다 보니 저절로 눈치가 늘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형제 없이 자라 그런지 눈치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선생은 태생적으로 눈치 없이 착한 사람들은 복 받은 거고 대개는 눈치를 보면서 착해진다고 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말씀이었다. ‘눈치’는 좋게 보면 공동체성이라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중심이 없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눈치교육이 아이들을 기회주의자를 만들지 않고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눈치를 보면서 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눈치 보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대리는 과장 눈치를 보고, 과장은 부장 눈치를 본다. 물론 상사도 부하직원 눈치를 본다. 좋은 상사일수록 그럴 것이다. 가족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가정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 사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사회의식이 있고, 역사의 눈치를 보면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눈치를 보는 것과 눈치를 채는 것은 사뭇 다르다. 가족의 눈치를 보는 사람보다 가족의 상황을 눈치 채고 적절히 행동하는 사람이 더 어른스럽다. 사회의 눈치를 보는 것을 넘어서 사회변화의 흐름을 읽고 역사의 방향을 눈치 챈 사람은 그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선도한다. 그만큼 위험하다.
선도자는 눈치를 보지 않는다. ‘눈치를 본다’고 하면 언뜻 ‘보는’ 행위자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동적인 행위다. 상대의 행동 여하에 맞춰 자기 행동을 정하려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 반면에 눈치 채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다. 스스로 일을 주도해서 풀어가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 눈치를 빨리 채는 법이다.
관료화되지 않은 건강한 조직은 구성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보다 눈치를 채고 알아서 움직인다. 관료화의 정도는 눈치 보는 사람들의 증가에 비례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학교나 회사, 가정에는 명확하게 누구의 일도 아닌 일들이 숱하게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눈에 띌 때 (눈치를 채고) 스스럼없이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 조직은 건강하다. 그런 사람은 자기 역할에 고착되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일 줄 안다. 축구선수가 자기 포지션에 고착되면 패하기 마련이다. 포지션이 없어도 안 되지만 거기에 고착되어도 곤란하다. 유연함이 선수와 팀의 기량을 결정한다.
눈치 채지 못하면 눈치 보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눈치를 보는 것은 후수를 두는 것이고, 눈치 채는 것은 선수를 치는 것이다. 눈치를 보는 것은 들쥐가 주변을 살피듯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눈치를 채는 것은 매가 들쥐를 채듯 눈 깜짝할 새 일어난다. 들쥐가 매를 이길 수 없듯이 눈치 보는 선수는 눈치 채는 선수에게 패하기 마련이다. 선수(先手)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뛰어난 선수는 경기가 돌아가는 흐름을 읽고 공이 올 자리에 미리 가서 기다린다. 공을 뒤쫓지 않고 공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는 선수는 경기를 리드할 수 있다. 이처럼 선수를 친다는 것은 자신이 의사결정권을 갖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선수를 친다는 것이 반드시 먼저 움직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면서 기다릴 수도 있다. 사건의 관점에서 선수를 친다는 것은 곧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결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이 상황을 장악하기 마련이다.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관성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고 방향 전환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쉽지 않다. 대개는 하던 대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의사결정 하기 쉬운 쪽으로(또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하는데, 이는 사실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이 힘든 것은 모든 의사결정에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양단간에 결정을 하려면 많든 적든 스트레스가 따르고 기회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 비용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정당하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역량을 기르는 것은 곧 의사결정 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선수를 치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으려면 의사결정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배움과 성장의 본질은 그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성에 지배당하지 않는 힘,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힘, 맥락을 읽고 맥점을 짚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에너지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히 방향전환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일의 맥락을 알고 맥점을 짚을 줄 안다. 맥락과 맥점의 관계는 인체의 에너지 통로인 경락과 경혈의 관계와 같다. 경혈이나 맥점은 에너지가 꺾이는 지점이다.(인체에서는 주로 뼈가 이어지는 관절 부위, 근육과 근육 사이에 주요 경혈 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대체로 급소이기도 하다. 정확한 급소 지점을 타격하면 맥을 못 추게 만들 수 있다. 이처럼 맥락과 맥점을 알면 사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사건은 피치 못할 인과관계와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다음 단계가 전개된다. 원인 없이 결과가 있을 수 없고, 작용 없이 반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과거가 미래를 제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은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로 작동한다. 그렇게 사건이 통제됨으로써 맥락이 만들어지고 사건이 성립한다. 이는 뛰어난 문학작품에서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의해 맥락이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이야기는 개연성을 갖게 된다.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처럼 보이는 물질세계도 미시 차원에서는 사건의 연속이다. 의사결정의 연속체라는 말이다.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완성된 서예 작품은 공간상의 사물이지만 글씨를 쓰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획과 획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흐른다. 글씨에서 시간이 만들어 낸 변화가 읽히면 그 작품은 살아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모든 의사결정은 갈림길 또는 변곡점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말하는 의사결정은 인간의 의도가 작용하는 결정만이 아니라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방향전환을 말한다. 한 번의 붓놀림, 공을 던지는 한 번의 피칭, 방망이를 휘두르는 한 번의 스윙에서도 여러 단계의 의사결정이 일어날 수 있다. 일류 선수는 그 한 번의 동작을 세분할 줄 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동작을 통제할 수 있다.
한 번의 피칭 동작을 세분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신체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일류 투수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비결은 ‘힘 빼고 던져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 간단한 비결을 몸으로 터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몸이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근력과 유연성이 필요하다. 힘이 빠지려면 발끝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이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이 막히지 않아야 한다.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고 관절의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힘을 뺄 수도 없다.
와인드업 동작에서 이미 마무리 동작이 결정된다. 기승전결에서 기가 나머지 과정을 제어하는 것이다. 바꾸고 싶으면 기 단계에서 바꿔야 한다. 하지만 과거가 미래를 제약하는 것이 결정론이나 운명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의 피칭을 세분해서 자신의 동작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번 기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말이다. 유전자론이든 금수저론이든 모든 결정론이 간과하는 것은 기의 단계가 한 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과거가 미래를 제어하지만, 또한 미래가 과거를 결정하는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을 간과하면 사건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은 사건의 전반부만 보고 논하는 것이다. 아이의 미래가 과거에 제약 당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이는 미래가 과거를 결정한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시간은 우리 편임을 믿어야 한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 민들레 123호 (2019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