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교사를 위한 문장론(2) _ 언어는 맥락이다

민들레
20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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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는 패턴이 있다

 

세상은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들의 세계에도 패턴이 있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도 패턴이 있다. 과학은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패턴 읽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학습의 과정은 패턴을 이해하고 그것을 여러 맥락에서 적용해보는 것이다. 수학의 경우 10진법, 사칙연산, 도형, 방정식, 그래프 모두가 패턴이다. 수학을 ‘패턴의 언어’라고 부르는 이유다.

수학적 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언어는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어 문장의 5형식은 전형적인 문장 패턴이다. 세부적인 패턴은 다르지만 거의 모든 언어가 ‘주어-동사’로 구성되는 패턴을 띤다. 패턴을 잘 읽는 사람이 언어 감각도 뛰어나다. 9살 때 마야 유적을 발굴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심심풀이로 마야의 상형문자를 해독해낸 데이비드 스튜어트처럼. 스튜어트는 열두 살 때 마야 문자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고, 열여섯 살에 8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언어에 남다른 재능을 나타냈다.

패턴을 읽고 그것을 복제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학습능력이다. 모든 아이들이 서너 살이면 모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도 언어의 패턴을 읽고 그것을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사의 과거형이 ‘–ㄴ’이나 ‘–ed’로 변하고, 형용사가 ‘-ㄴ’이나 ‘-able’로 끝나는 것도 패턴이다. 문법, 문체는 패턴의 다른 이름이다. 문장력은 패턴을 잘 구사하는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제대로 된 글은 일정한 패턴을 띤다. 어떤 작가가 즐겨 쓰는 문장 구조나 문체에 익숙해지면 다음 문장이 어떻게 이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음악에서 음계와 화음의 패턴을 알면 다음에 이어질 음을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뮤지션들이 함께 즉흥연주를 하듯이 문장가들은 음풍농월로 싯구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수열의 패턴을 알면 다음에 이어질 숫자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패턴 인식의 힘이다.

학습은 패턴을 읽고 그것을 복제하는 것이다. 배움(學)이 패턴을 읽어내는 것이라면 익힘(習)은 그것을 복제하는 것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以時習之不亦說乎)”라는 말은 학습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구체적 사실과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이를 토대로 개념적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이 학습이다. 개념을 통한 추상적 이해력이 생기면 하나를 통해 열을 깨우칠 수 있게 된다.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뇌기반 교육학자 주디 윌리스(Judy Willis)는 학습에서 패턴을 탐색하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 차원의 이해 활동과 추상적 수준으로 확장된 이해 활동 그리고 비유적 차원으로 확장된 이해 활동이다. 모국어 습득을 예로 들면, 아이는 엄마의 말을 듣고 옹알이를 해보면서 배우는 귀납적 이해에서 개념을 통한 연역적 이해로 넘어가면서 폭발적인 언어 구사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유적 차원에서는 그 개념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된다.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 언어를 웬만큼 숙달한 것이다.

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쓴다는 보장은 없다. 말과 글은 전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말은 화자와 청자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을 전제하는 반면 글은 그렇지 않다. 공유하는 토대 없이 그야말로 다짜고짜 소통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글은 도입부에서 공유 토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소식지용 글은 필자와 독자가 어떤 토대를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상정한 글과 다르다.)

말의 경우는 내용을 보완해주는 다른 요소들(표정이나 몸짓, 말투 등)이 있지만, 글은 오로지 글로만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더 힘들다. 말의 패턴과 글의 패턴이 다르다. 말투가 있듯이 글투(문체)가 있다. 말하듯이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글의 고유한 형식이 있다. 문체는 내용으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말의 내용보다 말투 같은 형식이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때가 많듯이, 문체는 글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언어 속에 리듬(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리듬(운율)은 산문보다 시 같은 운문에서 더욱 중요하다. 운율(韻律)에서 운(韻)은 소리의 반복을, 율(律)은 리듬의 반복을 뜻한다. 운이 공간적 패턴이라면 율은 시간적 패턴이다. 우리말은 중국어의 사성처럼 소리의 장단과 고저가 뚜렷하지 않아, 음의 수를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음수율(音數律)이나 호흡에 따른 박자 개념의 음보율(音步律)을 주로 쓴다.(‘나 보기가 /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 고이 보내 / 드리오리다’ 이 싯구는 7.5조 음수률에 3음보 음보율을 갖고 있다.) 운문이든 산문이든 우리말의 리듬적 특징인 3음절 또는 4음절을 살리는 것이 좋다.(우리말 어휘는 대부분 2음절 또는 3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3음절이 우리말 고유의 음절로 서민층의 언어라면, 2음절 또는 4음절은 한자어 영향을 받아 사대부들이 즐겨 쓴 언어다.) 소리 내어 읽기에 좋은 글이 잘 쓴 글이다.

 

 의미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를 묻지 말고 그 쓰임을 물어라”고 말했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적당히’ 같은 낱말은 맥락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 표현은 모든 언어에 있다. 독일어 aufheben에는 보존하다와 폐기하다란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인간은 언어를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쓰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해 우치다 타츠루는 그 편이 오히려 수신 감도를 높여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석한다.(『소통하는 신체』, ‘인간은 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까’)  미묘한 차이를 식별할 줄 아는 민감한 감수성이 인간의 생존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말은 주어와 술어,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의 관계 속에 핵심 정보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주어나 목적어가 곧잘 생략되기도 하는 우리말은 주어와 (타동사의) 목적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영어에 비해 고맥락어에 속한다. 청자나 독자가 앞뒤 맥락 속에서 주어와 목적어를 그때그때 가늠해야 할 때가 많다. 대명사가 발달하지 않은 것도 그만큼 맥락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맥락이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부분들의 수보다 부분들을 조합하는 경우의 수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0개의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기계를 조립할 때 올바른 조합은 한 가지뿐이지만 조합 가능한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부분들 간의 관계, 맥락이 핵심 정보인 셈이다. 부품 하나하나를 아무리 잘 알아도 그들 사이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단어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영어가 서툰 이유이기도 하다.

맥락이 중요하다는 말은 순서가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어의 경우 어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조사가 방향성을 정하기 때문이다. 어순을 바꾸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으므로 한국인들은 어순에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영어는 어순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말은 조사나 서술어미가 의미를 결정하는데 비해 영어는 문장 구조 자체가 의미를 결정한다. 어순은 동사의 동작이 진행되는 방향을 나타내고, 전치사는 동사의 방향성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뒤에 이어지는 나머지 요소들은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장 훈련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훈련이다.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잃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는 것이다. 이는 사물이 아닌 사건의 관점으로 현상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사건의 흐름을 읽으면서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을 꿰뚫는 일이다. 행간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아는 것은 걸음과 걸음 사이에서 작용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문법을 몰라도 누구나 모국어를 술술 구사하는 것처럼 뉴턴역학을 몰라도 잘 걸을 수 있지만, 에너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면 더 잘 걸을 수 있다.

언어의 구조는 세상의 구조를 복제한 것이므로 언어의 구조를 안다는 것은 세상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각각의 언어 속에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이 들어 있다. 문법은 곧 언어의 형식이다. 우리의 사고 구조는 문법의 형식에 영향을 받는다.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눈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계가 넓어진다. 한국어 속에 한국인들의 독특한 세계관이 들어 있다. 그 가능성과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자신의 관점을 아는 것이자, 그 관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길이므로.

 

 숨어 있는 전제 꿰뚫어보기

 

우리말은 동사 중심의 언어다. 주어나 명사는 곧잘 생략되기도 한다. 일단 움직이고 보는 한국인들의 역동성이 언어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동사는 관측된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동사 중심의 사고는 현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원인을 보지 않고 현상만을 놓고 왈가왈부하기 쉽다. 현상에 치우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주어 뒤에 바로 동사가 이어져 주술 관계가 명확한 영어에 비해 주술 관계가 약한 동사 중심의 언어는 논리적 사고에 취약한 구조다. 명사 중심으로 사고하면 주어나 전제가 드러나고,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분명해짐으로써 문장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전제와 진술의 관계가 분명할 때 문제의 원인과 결과가 밝혀진다. 숨어 있는 주어나 전제를 드러내야 한다.

모든 진술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제가 바뀌면 진술도 달라져야 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540km다? 이는 경부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릴 때를 전제로 한 거리다. 선로 위로 기차가 달리는 거리로 계산하면 500km, KTX 선로로 계산하면 450km다. 사기꾼들은 대체로 전제를 숨기거나 왜곡하는 수법으로 사람을 속인다. MB 정부의 ‘4대강 살리기’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언어를 왜곡한 대표적인 예다. 4대강이 죽어 있다는 그릇된 전제를 깔고 언어를 쓰니 오히려 멀쩡하던 강이 죽어버렸다. 물론 그 일을 추진한 꼼수왕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성사시켰지만. 선동가들, 사기꾼들의 말에는 대부분 허명과 그럴 듯한 진술로 포장한 왜곡된 전제가 깔려 있다.

공자의 정명론은 언어를 바로 쓰자는 것이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명’(이름, 명사, 명분, 주어, 전제)이 바로잡힐 때 언어의 순서가 잡히고, 그럴 때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모든 선전과 선동은 언어의 왜곡을 동반한다. 언어의 기본 순서는 주어(명사)-동사다. 우리말은 주어나 명사를 생략한 채 동사만을 쓸 때가 많아 소통에 문제가 생기곤 한다. 의도적으로 주어와 전제를 숨기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정명은 곧 주어와 술어, 전제와 진술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전제와 진술의 관계는 ‘A면 B다’ 같은 비례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모든 현상과 사건 속에는 이런 비례 관계가 숨어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 법칙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는 대칭을 이루고 시간적으로는 인과 관계를 이룬다. 언어가 전제와 진술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언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세상 일을 분석하는 학문 역시 전제와 진술의 관계를 밝히고 정립하는 작업이다. 일본의 생태경제학자 야스토미 아유무는 학문이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기 쉬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학문의 방법론은 어떤 ‘전제’를 설정해놓고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제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채 그것을 마치 기정사실처럼 간주하고서 논의를 전개하면 거기에 ‘맹점’이 생겨난다. 학문 분야라는 것은 대부분 이런 맹점에 의해 성립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성립한다. 학문을 넘나드는 융복합 연구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다. 이를테면 경제학과 생태학이 공동연구를 한다면 지적인 통찰의 시너지 효과보다 오히려 쌍방의 맹점이 활성화되어 단독으로 연구할 때보다 더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야스토미 아유무, 『살아가기 위한 경제학-‘선택의 자유’로부터의 탈피 生きるための経済学, ‘選択の自由’からの脱却』 맺음말 중)

 

글쓰기의 원리, 학문의 원리, 일의 원리가 다르지 않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 전제와 진술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엔트로피 법칙은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승전결의 단계마다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지만, 근본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사건의 흐름을 읽으면서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관건이다. 글쓰기 공부는 단순히 글을 잘 쓰는 훈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과 삶의 이치, 일의 원리에 대한 공부로 이어진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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