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미션 스쿨의 ‘대안적’ 교육?

민들레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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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설을 과학적 이론이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많은 기독교인들도 창조설과 진화론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고대의 설화나 신화를 현대의 과학 이론과 나란히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지성적인 태도가 아니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계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계는 진화론이 창조론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0년 전에 결성된 한국창조과학회는 창조‘론’의 관점에서 자연 현상과 인간의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 애쓰는 단체다. 성경에 근거해 지구의 역사가 6천 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화론을 인정하는 일부 개신교의 경우 빅뱅 이론 등 과학적 우주론과 진화론 모두 창조의 일환으로 보는 ‘진화론적 창조설’을 채택하고 있지만, 주류 개신교 교단은 이를 이단시한다. 꽤 많은 미션스쿨에서 지구가 6,000~12,000년 전에 창조됐다는 ‘젊은 지구’ 가설에 입각한 창조과학을 가르친다. 하지만 가톨릭은 일찍이 성경의 창세기에 대해 “내용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사랑을 주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공표한 바 있다.

양식사학은 성경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연애편지와 논문을 헷갈리면 안 된다는 얘기다. 수메르 신화를 비롯해 고대 문화의 수많은 창조 신화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다. 불가사의하고 위험하게 보이는 이 세계가 아버지 같은 신의 손길로 창조되었고 따라서 인간에게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는 믿음의 표현이라는 얘기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는 2012년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의 증거로 든 시조새 관련 부분 등을 삭제하라는 청원을 냈다. 논란이 커지자 과학기술 분야 석학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화론은 가설 수준의 이론이 아니라 과학적 반증을 통해 정립된 현대 과학의 매우 중요한 핵심 이론의 하나로 모든 학생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밝히면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우리말 ‘믿음’은 맥락 속에서 사뭇 다른 의미로 쓰인다. 믿음은 때로 신념으로, 때로는 신뢰로 나타난다. 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믿는 것은 신념일까, 신뢰일까? 신이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할 만큼 인간을 사랑한다는 믿음, 신의 아들이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릴 만큼 인간을 사랑한다는 믿음이 신뢰라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관계처럼 말 그대로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 믿는 것은 신념이다. 신념과 신뢰는 전혀 다르다.

‘순종하는 3살, 복종하는 7살, 효도하는 10대-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2012년 1월 한국기독교홈스쿨협회에서 연 세미나의 주제다. 기독교계 학교나 홈스쿨링 부모들이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순종’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선생님에게 순종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일까? 혹 이데올로기를 신앙이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데올로기란 어떤 계급의 이익을 깔고 있는 신념체계를 말한다. 지난날 학교에서 주입시켰던 충효 이데올로기와 여러 모로 닮지 않았는가. 신앙은 그런 신념이 아니라 ‘신뢰’다. “믿습니다!” 하는 믿음이 아니라 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권력화한 교단과 목회자 중에는 종교적 의미의 순종을 정치적 의미의 복종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절대자에게 복종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이들 위에 군림함으로써 절대권력의 부스러기를 누린다. 길 잃은 양들을 침묵시키며 자신의 신념을 주입하는 목회자들을 경계할 일이다. 종교권력이 세속권력까지 넘본 역사는 오래지만, 오늘날 문명사회는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문명사회의 공교육기관이 종교교육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보다 헌법이 우선하는 한국 공교육 시스템 속에서 신앙에 기초한 교육관을 관철하기 어렵게 된 기독교계는 원하는 종교교육을 하고자 공교육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새로운 사립학교를 만들기도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기독교 대안학교라는 이름으로 2백 개 가까운 학교들이 생겨났다. 이 학교들은 대부분 예배를 필수 교육과정으로 편성해놓고 있다.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해 ‘대안학교’ 간판을 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또한 하나의 ‘대안’이므로.

하지만 그 대안이 교육자들을 위한 대안이 아닌 학생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으려면 아이들이 정말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학교일수록 스스로 진리를 찾는 교육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진리란 우리를 어떤 신념체계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진리탐구’라는 말이 빛바랜 것만큼이나 오늘날 교육은 진리와 거리가 한참 먼 것이 되고 말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영혼은 진리를 갈구하고 있다. 그들의 목마름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순종과 복종은 혼동하기 쉬운 말이다. 참된 순종은 자신을 에고에서 해방시키지만, 복종은 자기로부터 소외시킨다. 해방과 소외의 거리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멀다. 기독교 교육자들은 자칫 자기로부터 소외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두려움을 부추기면서 안전을 미끼로 던져 아이들을 틀 속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또 아이들의 타고난 에너지를 스스로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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