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창의는 반복에서 나온다

민들레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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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경험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다채로운 메뉴판을 주면서 마음대로 골라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의 장에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들은 이것저것 조금 해보다 흥미가 떨어지면 쉽게 그만두곤 한다. 아동중심, 흥미중심 교육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넓고 얕은 맛보기 체험만 하고서 해봤다는 기억만으로 그 일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영영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분야든 뭔가를 배우는 과정에서는 여러 차례 고비를 만나기 마련이고, 그 난관을 넘어설 때 한 단계씩 성장할 수 있다. 교사의 역할은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난관을 넘어본 아이는 다른 일에서도 고비를 넘을 수 있게 된다. 경험교육이 주는 가장 중요한 배움은 이것이다. 난관을 넘어서려면 단순히 인내심만으로는 안 된다. 자신이 어디에 걸려 넘어졌는지를 알 때 좀더 나은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실패한 경험을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쉽게 좌절하게 된다. 경험을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경험은 그저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다. 희미한 추억만 남기고.

설령 어떤 체험을 한다 해도 그것이 학습으로 이어지려면 소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거기에는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주관적인 체험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 잡을 때 객관적인 경험이 된다. 때로는 우연한 체험이 삶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우연성’을 기대하고 교육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픈 사람에게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이것저것 먹여보는 주먹구구식 치료법은 곤란하다. 교육은 약 처방처럼 주의 깊게 이루어져야 한다. 의도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효과적인 처방을 하는 것이 의사나 교사의 역할이다.

제대로 배우려면 맛보기를 넘어서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난관을 뚫고 전진해야 한다. 그 힘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이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깊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 시리즈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경향은 ‘넓고 얇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와도 통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건드려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경험이 곧 배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개별 경험 속에서 패턴과 맥락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적 사유나 과학적 지식은 단편적인 경험의 맥락을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준다. 경험 위주 교육이 지식교육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원리와 법칙을 꿰는 연역식 지식은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경험에서 얻은 단편적인 지식을 기초로 가설을 세우고 그로부터 연역하여 일반 원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학문이다.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은 인간 보편의 능력이지만, 교육과 배움을 통해 이 능력을 더 가다듬으면 하나를 배우고 열을 아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귀납식 학습에서 연역식 학습으로 넘어갈 때 도약이 일어난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들이 연결되면서 맥락이 보이고, 일이관지(一以貫之)할 수 있게 된다.

연역식 학습이 가능하려면 기초지식이 필요하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적지 않지만, 기초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주입식 학습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조건 외우는 주입식이 아니라, 강의식 수업으로 효과적인 지식 전달이 이루어질 수 있다. 원리를 먼저 깨우친 사람이 그것을 알려주면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학문이 진보하는 원리다. 원리와 법칙을 제대로 이해할 때 창의적인 응용도 가능하다. 연주법에 통달한 사람만이 즉흥연주가 가능하듯이, 원리와 법칙을 알고 거기서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창의성이 피어난다.

 

반복과 창의

 

창의는 꼭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짜 배움은 반복되는 일 속에서 일어난다. 한두 시간 흙을 만져본다고 해서 도자기를 빚는 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도공은 그릇을 빚기 전에 흙 속의 공기를 빼고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기 위해 흙을 치대는 작업을 하고 또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흙의 성질을 알게 되고 기술을 손에 익힌다. 흙을 주무르고 또 주무르다 보면 흙과 물, 공기의 관계가 읽히고, 손바닥의 온도에 따라 흙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릇을 빚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반복 작업 과정에서 보통 사람은 자각하기 힘든 미세한 손끝의 압력 차이로 그릇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원하는 형태의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예술성은 그 기술에 가미되는 양념 같은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봉준호 감독이 대학 진학 때 연극영화과가 아닌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은 영화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멀리 내다보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기술은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예술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예술이라는 큰 그릇 속에는 기술도 들어 있고 사상도 담겨 있다. 뛰어난 예술가는 기술을 마스터하고 그 기술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눈을 감고도 그릇을 빚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작품이 빚어진다. 목수 수업의 팔 할은 연장을 벼리는 일이다. 날이 닳을 정도로 갈고 또 갈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이를 손가락 끝으로 느낄 정도가 되어야 대목수가 된다. 끝없는 반복 작업 없이는 이를 수 없는 경지다. 거기에 예술적인 안목이 더해질 때 비로소 작품이 탄생한다.

요리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일류 요리사의 음식 솜씨는 같은 요리를 만들고 또 만드는 과정에서 터득되는 미세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재료들이 갖고 있는 미묘한 맛의 조합은 끝없는 반복과 실험 과정에서 터득되는 것들이다. 창의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손발이 닳도록 하고 또 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무엇이다. “요리사는 고된 작업을 반복하는 직업인일 뿐 예술가가 아니다. 요리를 예술이라 착각하고 끼를 펼치겠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어느 유명 셰프가 말했다. 직업적인 요리사의 세계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작고한 임지호 셰프는 다큐멘터리 <밥정>에서 요리가 사랑임을 보여준다. 음식에는 마음이 담겨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기술을 넘어 예술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실제로 요리는 콩밭 매는 일만큼이나 단순반복적인 일이다. 방송에서는 잘 손질되어 조리대에 놓인 재료들로 순식간에 조리하는 과정만 보여주거나 과장된 동작으로 소금을 뿌리는 쇼맨십으로 환상을 갖게 만들지만, 요리의 팔 할은 재료 장만과 손질 등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궂은 일들이다. 한두 시간의 체험학습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 교육의 일환으로 체험학습을 강조하지만, 반복 없이 한두 시간 맛보기 체험으로 창의성이 길러질 리 만무하다. 같은 요리를 하고 또 하는 동안 재료를 익히는 시간의 미세한 차이, 양념의 오묘한 배합 비율 등 요리의 미묘한 맥락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이 담기고 혼이 담길 때 요리는 예술이 된다.

어떤 분야에서나 고수는 일의 원리를 안다. 장인을 넘어선 예술가는 원리를 숙달하고 거기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단순반복 작업을 그야말로 ‘단순히’ ‘반복’하기만 한다면 흔한 기술자가 되는 데 그치겠지만, 반복 속에서 미묘한 차이와 맥락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창의가 일어나고, 거기에 마음이 담기면 기술을 넘어 예술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반복 없이는 창의도 없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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