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심리학의 시대에 사회과학을 생각하다


사회과학의 시대에서 심리학의 시대로


1970-80년대 대학가에 휘몰아쳤던 사회과학 공부 열기는 90년대 이후 심리학으로 옮겨갔다. 심리학은 사회적 갈등조차 개인의 심리로 설명하고자 했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반발심으로 권력자를 혐오하게 되었고, 사회변혁을 위한 시위조차 억눌린 성의식의 표출이라는 식이다. 한때 모든 것을 사회구조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어두운 성장과정을 방치한 결과 민주화운동 진영 역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측면이 있다. “우리는 적을 만났다, 그 적은 바로 우리였다.” 월트 켈리의 말처럼 자기 자신과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 흐름에 박차를 가했다. 이전에 옳았던 것이 앞으로도 옳은 것은 아니며, 이곳의 정의가 저곳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다는 문화상대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때 식자들이 자주 들먹인 용어 중에 ‘상황윤리’가 있었는데, 사회학과 심리학에 애매하게 걸쳐진 용어로 상황에 따라 윤리 기준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이 논리는 선악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지식인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사회모순마저 상황으로 해석하게 되면서 결국은 절대선을 부정하고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결과에 이르렀다.

개별성, 상대성을 강조하는 흐름은 심리학 전성시대를 열었다. 심리학의 시대는 신자유주의와도 궁합이 잘 맞았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심리문제로 환원시키면서 이제는 국가가 개입하지 말고 개인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펼쳐졌다. 생산성과 효율을 앞세워 개인들을 경쟁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심리학 책을 들이밀며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병 주고 약 주는 시대다.

하지만 이 약은 사실상 위약에 가깝다. 아니, 위약은 운 좋으면 정말 병을 낫게도 하지만, 심리요법은 일시적인 진통 효과만 가져다줄 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말기암 환자라면 진통제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병이 낫기를 바라는 환자에게 진통제만 처방하는 것은 병을 악화시키기 십상이다. 가정폭력으로 시들어가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심리요법이 아니라 남편과의 격리와 생활환경의 변화다. 위로와 공감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도움이 되어도 환경을 바꾸지는 못한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남편의 학대로 시들어가던 루스를 그 집에서 구해낸 것은 잇지의 우정과 과감한 행동이었다.(잇지는 무턱대고 쳐들어가지 않고 덩치 큰 흑인 친구 빅 조와 함께 갔다. 힘이 필요한 때임을 안 것이다.) 100여 년 전의 미국 남부 마을을 배경으로 한 두 여인의 우정과 연대는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준다. 그들의 우정은 스스로를 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흑인들과 부랑자에게까지 미쳤다. 약자들의 연대는 KKK단의 폭력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가족처럼 밀접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심리적 요인과 물리적 요인이 뒤섞여 문제를 풀기가 더 어렵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힘들어하는 경우, 원인을 찾는 데는 심리분석이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리적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정신적인 학대의 경우는 대처하기가 더 힘들다. 자신이 학대를 당하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피해자들은 자신을 탓하기 십상이다. 장미의 모럴 해러스먼트에 속절없이 당한 어린왕자처럼. 그럴 때 여우의 친절한 심리상담은 오히려 독이 된다.(야스토미 아유미,『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

가정이든 학교든 국가든, 다양한 인간들이 부딪히는 사회에서 심리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는 심리요법으로 풀리지 않는다. 개인의 수양이나 구성원들의 공동체성을 북돋는 것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사실상 문제를 유예하는 것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는 종교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사회문제는 종교나 심리상담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물리적 문제를 심리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환경문제, 심리가 아닌 물리로 풀어야

 

19세기 중엽 멸종위기에 처했던 고래를 구한 것은 고래기름을 대신할 수 있는 석유가 발견되면서였다. 이전까지 조명용으로 사용되던 최고 품질의 기름은 고래기름으로, 양초보다 더 고운 빛을 냈다. 코끼리들이 멸종을 피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상아를 대신할 수 있는 플라스틱이 발명된 덕분이다.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피아노 건반과 당구공이 상아로 만든 것보다 품질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생태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다.

1989년에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 거래에 관한 국제 협약’이 발효되었지만 상아는 여전히 주 밀거래 품목이었고 밀렵도 계속되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군벌들이 지배하는 부족연합체에 가까워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 코끼리 사냥과 상아 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한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는 코끼리 개체 수가 더 줄어든 반면, 상아 거래는 금지했지만 코끼리 사냥은 허용한 짐바브웨와 남아공에서는 오히려 코끼리 수가 급증했다. 소유지 내에서 일정 기간에 정해진 개체 수만 사냥을 허용한다는 단서를 달자 각 지역 군벌들이 스스로 소유지 내의 코끼리를 관리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공공자원이 개인들의 자율에 맡겨질 경우 일어나는 '공유지의 비극'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공익과 사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게 하면서 그 사안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 주체들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드는 것이다.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정책 입안자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민간 주체들을 상대로 게임을 설계할 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 이론은 2007년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코끼리를 보호하는 일은 동물에 대한 사랑이나 생태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과학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이 요구되는 일이다. 가치지향적인 시민단체 마인드로는 한계가 있다. 인간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사회적 역학 관계에 대한 지식,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형제들 사이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문제라면 형제애로 풀 수도 있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문제는 개인의 선한 마음이나 공동체성에 기대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문제는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진정성이나 정신력으로 어찌해보려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도 있지만, 그만한 물리적 시간이 요구된다(1만 시간이 아니라 수만 년이 걸릴 것이다). 축구도 정신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체력이 받쳐줘야 된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대표팀을 맡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단을 바꾸는 것이었다. 물리적 해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한국 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 역시 환경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체력과 스피드를 기르고, 위계적인 선후배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바꾸자 패스가 더 원활해졌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극적으로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물리적 요소가 작용했다. 홈그라운드라는 잇점도 한몫했다. 전 국민적 응원 열기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축구 경기는 변수가 많아 기세의 흐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이 점에서는 심리적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물리적 환경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비사 같은 것이지만, 히딩크 감독이 경기 전 잔디구장에 평소보다 물을 더 많이 뿌리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우연성을 높인 것이다.

물리가 심리를 이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긴 하지만, 물리력만으로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는 없다. 방향이 잘못 잡힌 물리력을 오히려 세상을 망친다. 이념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게 해주고, 정의감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정과 연대의 힘으로 우리가 꿈꾸는 물리적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피스밀 전략일 것이다. 루스와 잇지의 우정이 만들어낸 ‘휘슬스탑 카페’ 같은 해방구를. (P.S. 루스가 죽고 카페가 문을 닫고 역이 사라지면서 마을도 황폐해졌지만, 그들의 우정과 사랑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에블린을 변화시키고 또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구할 것이다.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오래 전 영화이지만 다시 봐도 좋은 영화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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