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광경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표현 ‘banality of evil'을 ’악의 평범함’으로 번역한 것을 두고 역사학자 김기협은 ‘악의 비속함’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경멸의 뜻이 담겨 있는 아렌트의 표현을 ‘평범함’이란 낱말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국어판 역자는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굳이 ‘평범함’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banality’가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다 담은 우리말이 없는 것이 아쉽다.
끔찍한 악이 어떤 천재적인 발상이나 거대한 구상 속에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습관 같은 것들이 얽혀서 일어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거대한 악이 비속한 욕망에 의해 기획되고, 평범한 소시민들이 거기에 어떻게 연루되는지를 밝힌 점에서 아렌트의 저 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나름의 통찰을 담고 있다. 재판정에서 아이히만을 지켜본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무능력함은 생각하는 것의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렌트는 정말 아이히만을 제대로 본 것일까? 악은 과연 평범할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습관이 악을 낳을까? 누구나 그런 악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자칫 악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든 악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과 악에 대한 관용을 부추긴다. 설령 누구나 악에 가담할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주범과 종범이 있기 마련이고, 그 잔인성에서 차이가 있다.
엘리트의 범죄와 대중의 범죄는 다르게 봐야 한다. 부화뇌동하여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부화뇌동시키는 사람은 다르다. 악의 본질이 생각 없음에 있다는 말은 악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아닐까? 인간은 권력을 쥐면 언제든 잔인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칼을 들면 뭐라도 베어보고 싶어지듯이 손에 권력을 쥐면 그 힘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어지는 게 인간이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가 번갈아가면서 서로를 학살한 것처럼.
한국전쟁 와중에 이승만과 그 일당이 저지른 일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군경에 의해 학살된 수십만 명의 보도연맹원, 보급물자를 빼돌린 탓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수십만 명의 국민방위군 참사는 비속한 악을 넘어선다. 이승만과 그 일당에게 국민은 타자(他者)였을 뿐이다. 전두환에게 광주시민이 그러했듯, 박근혜에게 세월호 아이들과 부모들이 그러했듯. 적극적인 작위에 의한 악이든, 부작위에 의한 악이든 평범함이나 비속함으로 규정하기에 악의 세계는 너무 깊고 넓다.
국민을 ‘개돼지’처럼 여긴 인간을 국부로 추앙하는 이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 같은 파렴치한 정치인이 십여 년이나마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그와 이해관계가 맞는 이들의 비속함이 한몫했다. 비열함과 비속함의 연대였던 셈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친일 행위로 일신의 안녕을 도모했던 이들, 난리통에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던 이들, 또 그들 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주구 노릇을 일삼은 수많은 평범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에 동원되었던 사람들, 이후에도 수구의 대열에 서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옹호해온 이들에 대해 고 채현국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시절에 순전히 잘못된 통치자들에 의해서 잘못된 것만 하나 가득 배워가지고 저렇게 된 건데…. 그 사람들 6.25 때 살인이 정의라고 해서 열심히 살인한 사람들이야. …사람 꼴, 사람값 할 만한 사람들 다 때려죽여놓고, 멍청해가지고 사람값 원래 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살인을 시키면서 정의라고 해놨으니 지금 우리가 그 비싼 값을 치르는 거야.”(풍운아 채현국, 167쪽)
선생의 말씀은 지금 젊은이들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다 보면 저 꼴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어 있는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민주교육의 본래 역할이다. 하지만 그처럼 권력에 이용당하지 않는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이용하는 권력에 이용당하기는 너무도 쉽다. 이명박의 비속함 역시 소시민들의 비속함이 조장한 결과였다. 아파트값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소시민들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권력에 이용당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지난 선거에서도 익히 경험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이 “멍청해서 사람값 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같을까?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결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며,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자신의 신념대로 용의주도하게 행동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교활하게 처신해 아렌트가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순진해서 ‘신념형 나치’를 ‘순진한 명령집행자’로 그린 것이라는 말이다. 미공개 사료와 자료에 기초한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예루살렘 재판 이전의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지지하는 신념에 찬 나치였다고 이동기 교수는 말한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뿐만 아니라 출세 이기주의와 조직 보신주의, 충성 경쟁과 과시욕 및 경제적 이익 등 다양한 동기와 요인이 그와 같은 자율성을 발휘하도록 자극했다. 능동적 가해자로서의 자기 형성은 대부분 직위를 맡은 뒤 갖게 된 동료들과의 상호작용과 경쟁 및 집단적 학습 과정을 통한 결과였다. (…) 끊임없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가해자들로 형성되고 재형성되며 집단적인 정치적 사회화를 통해 파괴력을 증대한다.”(‘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이동기, 《한겨레21》 2015.2.3.)
물리 세계에 양의 되먹임과 음의 되먹임 현상이 있듯이 선과 악 역시 상호작용 속에서 그 힘이 더해가거나 줄어든다. 출세욕과 과시욕에 사로잡히면 누구나 쉽게 악의 굴레로 빠져들 수 있다. 개인의 신념이 상호작용을 통한 과격화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역사가 말해준다. 노는 물이 중요한 까닭이다. 나치당에 소속된 독일 청년들 중에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많았지만, 나치의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교육은 자신이 노는 물을 선택할 수 있게 돕는 일이다. 나쁜 물을 선택하게 만들면 나쁜 교육을 한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광경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표현 ‘banality of evil'을 ’악의 평범함’으로 번역한 것을 두고 역사학자 김기협은 ‘악의 비속함’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경멸의 뜻이 담겨 있는 아렌트의 표현을 ‘평범함’이란 낱말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국어판 역자는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굳이 ‘평범함’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banality’가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다 담은 우리말이 없는 것이 아쉽다.
끔찍한 악이 어떤 천재적인 발상이나 거대한 구상 속에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습관 같은 것들이 얽혀서 일어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거대한 악이 비속한 욕망에 의해 기획되고, 평범한 소시민들이 거기에 어떻게 연루되는지를 밝힌 점에서 아렌트의 저 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나름의 통찰을 담고 있다. 재판정에서 아이히만을 지켜본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무능력함은 생각하는 것의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렌트는 정말 아이히만을 제대로 본 것일까? 악은 과연 평범할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습관이 악을 낳을까? 누구나 그런 악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자칫 악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든 악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과 악에 대한 관용을 부추긴다. 설령 누구나 악에 가담할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주범과 종범이 있기 마련이고, 그 잔인성에서 차이가 있다.
엘리트의 범죄와 대중의 범죄는 다르게 봐야 한다. 부화뇌동하여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부화뇌동시키는 사람은 다르다. 악의 본질이 생각 없음에 있다는 말은 악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아닐까? 인간은 권력을 쥐면 언제든 잔인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칼을 들면 뭐라도 베어보고 싶어지듯이 손에 권력을 쥐면 그 힘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어지는 게 인간이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가 번갈아가면서 서로를 학살한 것처럼.
한국전쟁 와중에 이승만과 그 일당이 저지른 일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군경에 의해 학살된 수십만 명의 보도연맹원, 보급물자를 빼돌린 탓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수십만 명의 국민방위군 참사는 비속한 악을 넘어선다. 이승만과 그 일당에게 국민은 타자(他者)였을 뿐이다. 전두환에게 광주시민이 그러했듯, 박근혜에게 세월호 아이들과 부모들이 그러했듯. 적극적인 작위에 의한 악이든, 부작위에 의한 악이든 평범함이나 비속함으로 규정하기에 악의 세계는 너무 깊고 넓다.
국민을 ‘개돼지’처럼 여긴 인간을 국부로 추앙하는 이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 같은 파렴치한 정치인이 십여 년이나마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그와 이해관계가 맞는 이들의 비속함이 한몫했다. 비열함과 비속함의 연대였던 셈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친일 행위로 일신의 안녕을 도모했던 이들, 난리통에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던 이들, 또 그들 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주구 노릇을 일삼은 수많은 평범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에 동원되었던 사람들, 이후에도 수구의 대열에 서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옹호해온 이들에 대해 고 채현국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시절에 순전히 잘못된 통치자들에 의해서 잘못된 것만 하나 가득 배워가지고 저렇게 된 건데…. 그 사람들 6.25 때 살인이 정의라고 해서 열심히 살인한 사람들이야. …사람 꼴, 사람값 할 만한 사람들 다 때려죽여놓고, 멍청해가지고 사람값 원래 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살인을 시키면서 정의라고 해놨으니 지금 우리가 그 비싼 값을 치르는 거야.”(풍운아 채현국, 167쪽)
선생의 말씀은 지금 젊은이들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다 보면 저 꼴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어 있는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민주교육의 본래 역할이다. 하지만 그처럼 권력에 이용당하지 않는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이용하는 권력에 이용당하기는 너무도 쉽다. 이명박의 비속함 역시 소시민들의 비속함이 조장한 결과였다. 아파트값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소시민들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권력에 이용당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지난 선거에서도 익히 경험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이 “멍청해서 사람값 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같을까?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결코 멍청한 사람이 아니며,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자신의 신념대로 용의주도하게 행동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교활하게 처신해 아렌트가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순진해서 ‘신념형 나치’를 ‘순진한 명령집행자’로 그린 것이라는 말이다. 미공개 사료와 자료에 기초한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예루살렘 재판 이전의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지지하는 신념에 찬 나치였다고 이동기 교수는 말한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뿐만 아니라 출세 이기주의와 조직 보신주의, 충성 경쟁과 과시욕 및 경제적 이익 등 다양한 동기와 요인이 그와 같은 자율성을 발휘하도록 자극했다. 능동적 가해자로서의 자기 형성은 대부분 직위를 맡은 뒤 갖게 된 동료들과의 상호작용과 경쟁 및 집단적 학습 과정을 통한 결과였다. (…) 끊임없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가해자들로 형성되고 재형성되며 집단적인 정치적 사회화를 통해 파괴력을 증대한다.”(‘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이동기, 《한겨레21》 2015.2.3.)
물리 세계에 양의 되먹임과 음의 되먹임 현상이 있듯이 선과 악 역시 상호작용 속에서 그 힘이 더해가거나 줄어든다. 출세욕과 과시욕에 사로잡히면 누구나 쉽게 악의 굴레로 빠져들 수 있다. 개인의 신념이 상호작용을 통한 과격화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역사가 말해준다. 노는 물이 중요한 까닭이다. 나치당에 소속된 독일 청년들 중에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많았지만, 나치의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교육은 자신이 노는 물을 선택할 수 있게 돕는 일이다. 나쁜 물을 선택하게 만들면 나쁜 교육을 한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