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노벨상은 금화인가
노벨문학상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들썩인다. 기자들은 한강 작가에 대한 가십거리를 발굴하느라 바쁘다. 주변 식당에서 뭘 먹었고, 날치알은 빼달라고 했다는 식이다. 작가의 문학 세계를 파헤치기보다 상금과 경제 효과를 이야기하기 바쁜 게 오늘날 우리 언론의 수준이다. 수학의 난제를 두 개나 풀어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한국인으로서 처음 받은 허준이 박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노벨상에 비해 필즈상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문학에 비해 수학은 더 어려운 분야여서 한국 기자들 수준으로는 제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수준의 기자들을 길러낸 것이 한국 교육인 셈이다.
한강의 문학에 우리 교육이 기여한 바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불과 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은 한강 작품을 유해도서로 분류해 각급 학교 도서관이 소장한 책 수천 권을 폐기처분하도록 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 소설책 보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슬픈 현실이다. 허준이 학생이 수학자가 되는 데 우리 교육이 기여한 바도 없다. 굳이 찾자면,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를 고등학생 때 자퇴하게 만든 것일 게다.(수학의 세계는 시의 세계와 통하는 지점이 많다.) 한국의 교육과 한국 사회가 허준이와 한강에게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게 만든 정도일 것이다.
노벨상 소동에 교육부가 ‘제2의 한강’을 배출해보자며 독서교육을 강화하느니 독서교육 우수학교를 선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웃픈 현실이다. 작가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쓰게 만든 <5.18 희생자 사진집>은 그가 열세 살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책이었다. 교육부가 유해도서로 분류하고도 남을 책이다. 독서교육을 아무리 강화한들 권장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잘 쓴 학생이 뛰어난 작가가 될 가능성은 없을 게다. 의대나 법대를 갈 아이들이 국문학과를 지망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학과 법학 같은 것은 잘해야 사회의 현상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아이들이 의대와 법대로 몰리는 사회는 미래가 어둡다.
어렸을 때 5.18 사진집을 본 한강은 죽음을 무릅쓰며 거리로 나온 광주시민들과 그들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같은 인간, 같은 동족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그 물음을 품고 글을 써왔다고 한다. 6.25, 4.19, 5.18, 4.16… 이 숫자들 사이사이 크고 작은 숱한 사건들이 이어져온 이 땅의 아픈 현대사가 낳은 작품인 셈이다. 노벨문학상과 평화상은 인간과 비인간의 싸움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애쓴 이들에게 헌정하는 꽃다발이다. 한 인간에게 주는 상이라기보다 그가 구현한 인간성에 헌정하는 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류가 인간의 양면성 중 굳이 선한 쪽을 가리켜 ‘인간다움’이라 부르기로 은연중에 약속한 것은 그럼으로써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5.18 ‘희생자’들과 관련해서 한강 작가가 4년 전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희생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어떤 패배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패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죽임을 당한 거잖아요.”
인간과 비인간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인류사회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물음은 각자가 품어야 할 물음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 물음 앞에 세우는 것이 제대로 된 교육일 것이다. 그 물음을 회피하는 이들, 태연히 또는 당당히 비인간의 편에 서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다운 교육은 어떤 것일까. 노벨상은 우리를 그 물음 앞에 세우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발행인
한국에서 노벨상은 금화인가
노벨문학상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들썩인다. 기자들은 한강 작가에 대한 가십거리를 발굴하느라 바쁘다. 주변 식당에서 뭘 먹었고, 날치알은 빼달라고 했다는 식이다. 작가의 문학 세계를 파헤치기보다 상금과 경제 효과를 이야기하기 바쁜 게 오늘날 우리 언론의 수준이다. 수학의 난제를 두 개나 풀어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한국인으로서 처음 받은 허준이 박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노벨상에 비해 필즈상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문학에 비해 수학은 더 어려운 분야여서 한국 기자들 수준으로는 제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수준의 기자들을 길러낸 것이 한국 교육인 셈이다.
한강의 문학에 우리 교육이 기여한 바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불과 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은 한강 작품을 유해도서로 분류해 각급 학교 도서관이 소장한 책 수천 권을 폐기처분하도록 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 소설책 보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슬픈 현실이다. 허준이 학생이 수학자가 되는 데 우리 교육이 기여한 바도 없다. 굳이 찾자면,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를 고등학생 때 자퇴하게 만든 것일 게다.(수학의 세계는 시의 세계와 통하는 지점이 많다.) 한국의 교육과 한국 사회가 허준이와 한강에게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줌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게 만든 정도일 것이다.
노벨상 소동에 교육부가 ‘제2의 한강’을 배출해보자며 독서교육을 강화하느니 독서교육 우수학교를 선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웃픈 현실이다. 작가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쓰게 만든 <5.18 희생자 사진집>은 그가 열세 살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책이었다. 교육부가 유해도서로 분류하고도 남을 책이다. 독서교육을 아무리 강화한들 권장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잘 쓴 학생이 뛰어난 작가가 될 가능성은 없을 게다. 의대나 법대를 갈 아이들이 국문학과를 지망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학과 법학 같은 것은 잘해야 사회의 현상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아이들이 의대와 법대로 몰리는 사회는 미래가 어둡다.
어렸을 때 5.18 사진집을 본 한강은 죽음을 무릅쓰며 거리로 나온 광주시민들과 그들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같은 인간, 같은 동족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그 물음을 품고 글을 써왔다고 한다. 6.25, 4.19, 5.18, 4.16… 이 숫자들 사이사이 크고 작은 숱한 사건들이 이어져온 이 땅의 아픈 현대사가 낳은 작품인 셈이다. 노벨문학상과 평화상은 인간과 비인간의 싸움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애쓴 이들에게 헌정하는 꽃다발이다. 한 인간에게 주는 상이라기보다 그가 구현한 인간성에 헌정하는 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류가 인간의 양면성 중 굳이 선한 쪽을 가리켜 ‘인간다움’이라 부르기로 은연중에 약속한 것은 그럼으로써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5.18 ‘희생자’들과 관련해서 한강 작가가 4년 전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희생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어떤 패배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패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죽임을 당한 거잖아요.”
인간과 비인간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인류사회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물음은 각자가 품어야 할 물음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 물음 앞에 세우는 것이 제대로 된 교육일 것이다. 그 물음을 회피하는 이들, 태연히 또는 당당히 비인간의 편에 서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다운 교육은 어떤 것일까. 노벨상은 우리를 그 물음 앞에 세우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