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성숙을 가로막는 것


일찍이 ‘니그로’라는 표현을 금지한 미국에서는 오늘날 ‘흑인(Black)’이란 표현도 금기시되면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지만, 배우 우피 골드버그와 모건 프리먼은 자신들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아니라 ‘아메리칸’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언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인종과 성별, 성적 지향성 등 정체성을 대변하는 언어 정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회를 끝없이 분열시킨다.(오늘날 미국에는 성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한  31가지의 성정체성 목록이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상 그 언어와 연관된 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있어도 ‘유럽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없는 이유다.

자크 라캉이 갈파했듯이 하나의 기표를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것은 언제나 제3의 기표를 낳는다. 얼룩을 가리기 위해 뭔가를 덧대면 거기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뭔가를 추가하게 된다. 부적절한 것을 지우거나 가리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것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두에게 괜찮은’ 말은 없다. 정치적 올바름에 충실하다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차별적이고 편견을 조장하는 언행을 삼가자는 PC운동이 선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나다움’과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문화는 보편성보다 개별성, 공공성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가 횡행하는 배경이다. 사적인 예민함을 우선 가치로 설정하면 공론장이 무너진다.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언어 검열이 공론을 무력화하는 것처럼. 문형준은 ‘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라는 글에서 ‘정의롭고 깨끗하고 올바른 상황만을 지향하는’ 문화적 경향을 “살균된 문화”라 명명하면서 이는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라고 비판한다(《비교문학》 73권). 다 큰 어른들을 마치 면역력이 없는 환자처럼, 여차하면 깨어질 유리그릇처럼 취급하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을 미숙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공중보건 명목으로 흡연을 금지하는 정책 또한 신자유주의 정체성 정치와 맥이 닿아 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비흡연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공공성에 반하지만, 비흡연자들의 건강과 심기를 배려해 흡연자들의 권리와 심기를 고려하지 않는 것 또한 공공성을 해치는 것이다. 전면적인 금지보다 흡연 구역을 지정해 두 집단의 상반된 이익을 조절하는 것이 맞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흡연 구역을 통과해야 하는 비흡연자의 고충도 있지만, 잠시 숨을 참거나 해서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 잠시의 불쾌함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예민함은 개인적인 사정이다. 성인이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공공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사적 예민함이 공공 정책의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상처받았거나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이는 언제나 옳다’는 진정성 원칙이 오늘날 교육 현장에도 파고들면서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한 고등학생은 교사의 훈계를 듣고 “인격적 모멸감을 받았다”는 이유로 담임을 아동학대로 고소했다. 여차하면 학생인권침해로 교육청에 민원을 넣겠다며 협박하는 학생들도 있다. 수업 시간에 떠드는 학생을 나무랐다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교사가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촉발할 우려가 있는 자료를 수업에 활용할 경우 이를 미리 고지하거나 수업에 빠질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촉발경고’는 성인인 대학생들을 미숙하고 상처 입기 쉬운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징징거리는 민원인으로 만든다.*

개인의 감수성을 우선하는 것은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로베르트 팔머가 말했듯이, “무수한 ‘나’들을 어르고 달래는” 정체성 정치는 정작 중요한 공동체의 의제를 간과하게 만들고 구성원들의 성숙을 가로막는다. 사회를 향해 어리광을 부리는 지적 유아 상태에 머물게 하고 피해자 의식을 부추긴다. 모든 경험으로부터 안전한 교육공간에서는 지성이 깨어나지 못한다. 지성은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객관화하고, 자신의 관점과 신념이 다층적인 현실 속에서 어느 지점에 어떤 각도로 위치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빌어먹을 ‘나’는 잠시 넣어두고 불편함이나 예민함을 감수하면서” 공론장을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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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인에게 들은 일화에 따르면, 그가 한 대학의 교양 글쓰기 수업의 텍스트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소개했더니 한 여학생이 수업 후 찾아와 ‘저는 페미니스트이고, 여성혐오 텍스트를 배우고 싶지 않기에 수업을 듣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수년 전까지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여성혐오를 용납할 수 없다는 여학생의 결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나는 이 일화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가진 단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이 여학생의 결심에는 여성혐오에 대한 거부라는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거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오직 ‘자기 자신’만 남게 되는 편협함이 있다." _문형준, '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 《비교문학》 73권(2017. 05), 109p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 기고문 일부를 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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