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교육적 관점


엄벌주의로 가는 교육계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 그리고 드라마 <더 글로리>의 흥행으로 학교폭력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학폭’이라는 줄임말이 더 익숙할 정도로 널리 쓰이는 용어이지만 ‘학교폭력’이란 표현이 과연 적절한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 사이의 갈등도 장소를 불문하고 일어난다. 그러나 놀이터폭력, 학원폭력이라는 말은 없으니, ‘학교폭력’이 학교 안팎에서 일어난 학생들 사이의 모든 폭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아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과 갈등을 ‘폭력’이라 통칭하게 된 것도 문제를 키우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폭력’이라 규정하는 순간 그 행위를 죄악시함과 동시에 ‘가해자-피해자’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화해보다는 잘잘못을 따지는 쪽으로 가게 된다.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 학교폭력은 폭행, 금품 갈취 등 선악이 분명한 사례보다 언어폭력, 정서적 괴롭힘, 온라인 채팅방에서의 왕따 등 복잡하고 은근한 것들이 많다. 우발적이기보다 오랜 시간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갈등이 쌓인 경우도 흔하다. 경기도교육청이 도내 초중고생 110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폭력의 이유로 ‘상대가 먼저 괴롭혔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30% 정도로 가장 많은 것을 보면, 명백히 시비를 가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만한 해결을 위해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이 필수라는 말이다. 그러나 발생 즉시 어른이 개입해 법적 절차를 밟는 추세는 그런 기회를 영영 멀어지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려는 교사의 개입조차 공정한 판결을 방해하는 행위가 되고, 민원의 대상이 되기 쉽다.

교육부는 지난 4월 12일 학교폭력 대응책을 발표했다. 학교폭력 조치사항을 대입에 반영하도록 제도를 손보고, 학교폭력 기록을 졸업 후 최대 4년까지 보존하겠다는 것이다. 피해 학생의 동의가 있어야 기록을 삭제할 수 있다는 조항도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정순신 아들의 학교폭력에 대한 여론을 반영한 조치로 보인다. 사람들은 ‘고위 공직자 후보의 자녀가 학폭 가해자’라는 사실보다 ‘ 그런데도 버젓이 서울대에 진학했다’는 결과에 더욱 분노한 듯하다. 그러나 교육부의 이런 방침은 학교 폭력마저 ‘대학입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불과하다.

징벌을 강화하고 낙인찍는 방식으로 학교폭력을 없앨 수 있을까?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은 그 중심이 가해자에 있다. 그러나 문제해결의 최우선은 피해 학생의 회복에 두어야 한다. 피해자가 가장 원하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다.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상대방이 정말로 잘못을 뉘우치고 미안해하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책임을 묻는 처벌은 그다음이다. 가해 학생을 위해서도 처벌의 목적은 잘못을 깨닫고 그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폭력 대처법은 결과적으로 해를 입힌 학생과 해를 입은 학생,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법적 대응이 최선일까

가해자 응징을 강화하는 방식은 오히려 갈등 해결을 가로막기 쉽다. 방어기제가 작동해 그만큼 가해자의 저항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잘못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또 다른 빌미를 찾아내어 쌍방 폭력 신고로 가는 상황도 벌어진다. 근래엔 학교폭력 전문 변호사도 등장했다. 변호사는 가해 학생에게 “진술 하나하나가 소송에 영향을 미치므로 함부로 입을 떼지 말고 처음부터 변호사와 의논해 진술 내용을 정하라”고 조언한다. 이런 상황에서 뉘우치거나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일은 어림도 없다. 사과하고 반성하는 순간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법적 처벌에 대학입시까지 망가지니까. 예전 같으면 가볍게 사과하고 끝날 일도 학교폭력법에 따라 소송으로 얽히면서 돌이킬 수 없게 꼬여버린다.

아동학대법을 중심으로 불거지는 교사-학부모 갈등에서도 드러나듯 최근 교육계에선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아이들의 다툼을 말리기 위해 책상을 넘어뜨린 교사에게 정서적 학대라며 소송을 건 학부모는 “선생님이 사과하면 소송을 취하할 생각” 이라고 했다. 소송이 시작되었는데 쉽사리 사과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게 사법 처리되는 거보다 낫지 않나요?”라고 반문한다. 이 학부모가 원하는 건 교사의 사과라기보다 굴복이다. 애초에 잘못이 없다는 주장을 견지 하고 있는 교사 입장에선 사과할 리 만무하며, 억지로 사과를 받아낸들 과연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로 부모와 교사의 소송을 지켜보는 아이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간성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일

 학교폭력을 처벌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경험컨대 1:1 관계에서 벌어진 갈등일지라도 사적으로 예민한 사안이 아니라면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것이 좋다. 갈등을 오픈했을 때의 장점은 다른 아이들이 폭력의 감시자나 중재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건을 공개함으로써 우리 반에서 폭력은 ‘공적인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다른 친구의 일에 관심 갖게 하는 일은 학교폭력 예방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타협과 중재를 배워나가는 시민교육이기도 하다. 교육청 소속 관계회복지원단으로 활동해온 한 교사는 “학기 초에 갈등에 대한 정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해를 넘기 게 되고 갈등의 반복되게 나타난다. 학기 초에 발생한 갈등을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정리하면 그 갈등이 다음해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어느 대안학교에서 두 청소년이 주먹을 휘두르며 싸운 일이 벌어졌다. 공개회의 끝에 친구들이 이들에게 내린 벌은 ‘일주일 동안 아침마다 손잡고 산책하기’였다. 꼴도 보기 싫은 상대와 손을 잡고 걸으라니, 생각보다 가혹한 벌일 수 있지만 그 의도는 ‘서로 대화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똥 씹은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돌리고 새끼손가락만 겨우 걸친 채 걷던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사나흘이 지나서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진작 화해한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산책을 즐겼고, 서로 치고받은 사건도 별것 아닌 게 되었다. 갈등이 아주 심각한 경우에는 (교사 동반 하에) 며칠 동안 ‘걷기 여행’을 떠나는 벌을 주기도 했는데, 원수지간이 아니고서는 먹고 자고 걷는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이해와 화해를 이끌어내기까지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시간, 머리를 맞대고 해결을 도모할 시간,  대화하고 화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몇 주 혹은 몇 달이 걸리는 일이기도 했다. 친구와 교사, 당사자의 노력도 있었지만 당사자 부모들의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 자식이 쥐어 터졌다는데 속상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당장 교사에게 책임을 따지거나 상대 아이를 나무라지 않고 해결 과정을 기다려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다툼이 일어난 즉시 달려와 부모가 개입했다면 둘의 갈등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서는 아이들의 물리적, 심리적 여유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교육현장에 확산되고 있는 ‘회복적 생활교육’도 그런 맥락이다. 비폭력 대화에서 시작한 회복적 생활교육은 서클 방식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다. 심각한 학교폭력의 경우 에도 당사자들이 만나 피해 학생과 그 가족이 당한 고통을 듣고, 그 피해를 인지하며, 진심으로 사과하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이다. 처벌에 그치지 않고 대화와 소통을 통해 서로의 마음과 관계를 회복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이들의 문해력을 길러주고 싶어 날마다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시를 나누는 일을 꾸준히 했더니 다툼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교실의 사례(민들레 147호, 진혜련)도 갈등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서로의 이해와 친밀도를 높이면 갈등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사이라면 갈등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법정으로 치닫는 대응법을 쉽사리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안학교를 탐방하는 공교육 교사들은 대개 교육과정, 학사일정 같은 형식에 주목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주는 대안학교의 비결은 깊은 만남, 따뜻한 돌봄, 민주적 문화 같은 비형식 교육에 있다.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은 교사 입장에서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그래서 아이들 개개인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촘촘히 짜인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하는 공교육 현장에 이런 이야기는 너무 꿈같은 해결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교육은커녕 민원과 소송에 휘말릴까 마음을 졸이며 중요한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제도와 법치를 넘어 ‘인간적인 만남이 가능한 학교’를 만드는 노력이 절실하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난다. 갈등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애초에 내려놓는 것이 좋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을 직면할 용기,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해결해가려는 교육적 의지일 것이다. 아이들 사이의 갈등을 심판하고 단죄하기 전에,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 개개인보다 폭력적 구조를 조장하고 강화하는 기성세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_장희숙 (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