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다시 일어서는 힘, 회복탄력성

민들레
2023-10-12
조회수 869

크기와 빈도는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려움을 만난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에서 왜 누구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누구는 덜 고통스러운가. 왜 누구는 상처받아 주저앉고, 누구는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가. 순탄치 않은 가정사를 함께 겪은 여러 형제, 자매, 남매들도 성인이 되고 난 후에 보면 똑같은 시련을 마주해온 방법이 각자 다르다.

그 차이가 회복탄력성resilience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물체마다 탄성이 다르듯이 사람에 따라 역경에 대처하는 탄성이 다르다. 회복탄력성이란 마주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말한다. 다시 일어설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역경과 실패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이라고 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은 미국 심리학자 에밀리 워너Emily Werner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들을 40여 년간 연구하면서 알려진 심리학 용어다. 원래 이 연구의 목적은 알코올중독이나 가정폭력 등에 노출된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에 비해 사회 부적응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구 과정에서 예상과 다른,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고위험 아동 중 3분의1이 문제가 있는 발달 이력에도 불구하고 배려심 있고 유능하며 자신감 있는 성인으로 자랐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동료 연구자들은 이 아이들의 위험 요인에 균형을 맞추어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부모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대리 부모가 있다.

● 뛰어난 사회적 기술과 의사소통 기술이 있다.

● 삶이 힘들 때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배출구가 있다.

●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있다.

● 종교적인 믿음이 있다.

 

하버드대에서 아동발달을 연구한 지니 킴은 회복탄력성을 좌우하는 요소로 타고난 기질, 자존감, 대인 관계, 소통 능력, 대처 능력을 손꼽는다. 타고난 기질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상적인 습관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말이다. 회복탄력성의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다른 말이다. 사회복지학에서는 이를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숙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자기 존엄성에 대한 신뢰’라고 정의한다. 오랜 시간 존중받으며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해, 크고 작은 일들을 성취해가며 스스로를 믿게 되는 것이다. 긍정적인 경험을 거듭하면 신경회로가 더 긍정적인 변화를 향해 확장되고, 두려움과 걱정, 불안과 관련된 신경회로는 위축되는 원리다.

스트레스를 건강한 방법으로 다뤄본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인 아이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 가지 방법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간 갈고닦아온 필살기를 써보고, 그게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해본다. 사용해‘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안 되어도 괜찮다,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해결책을 궁구해보는 거다. 결과에 대한 부담도 덜 수 있고, 안 되었을 때 낙담도 덜할 수 있으니,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자존감의 기반이 된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에겐 소위 말하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 허세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근자감은 삶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해보지 않았지만 하면 될 것 같은 마음, 겪어보지 않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맞서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매사가 걱정스럽고 두렵기보다 기대되고 기다려지지 않을까.

어떤 일에 ‘걱정’이 앞서는 건 생존 본능이다. 본능적으로 무서운 것, 힘든 것, 끔찍한 것을 보면 저절로 질끈 눈을 감게 된다. 안전하고 싶은, 회피 심리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제대로 느끼도록 배우는 일’은 눈 감지 않고 그것을 직면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요즘 아이들이 ‘고통을 제대로 느끼기’를 배우기가 어려운 까닭은 문제를 인지하기도 전에 부모가 나서서 해결해주는 경험이 반복되어서일 것이다.

 단단한 내면을 가진 아이, 독립적인 아이로 기르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바람이다.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위해서’라는 부모의 사랑과 헌신은 다 부모의 선택이다. 낳은 것도, 자신에게 매달려 헌신적으로 산 것도. 자녀에게만 집중하는 부모를 겪어온 아이는 그 사랑과 헌신이 고마우면서도 한편 빚진 기분이 들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실제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겪는 청소년들의 양육 환경을 살펴보면, 성장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놀랍게도 정반대의 경우가 있다. 어떠한 고통도 다루어본 적이 없어 그에 맞설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이다. 몸은 자랐는데 마음이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발견한 아이는 부모를 원망하거나, 혹은 부모에게 모든 것을 보살핌받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부모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주체적으로 키우고 싶어, 정서적 결핍 없이 키우고 싶어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는데 우울증, 공황장애라니. 부족해도 안 되고 넘쳐도 안 된다니. 그 넘침과 부족함의 기준은 뭐란 말인가.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잠시라도 균형을 잃으면 넘어지는 외발자전거를 타는 일 같다.

그런 면에서 부모라는 역할은 방학도 휴가도 없는 ‘극한 직업’이다. 퇴근, 퇴사의 기회도 없으며(최소 20년 근속), 힘들다고 휴직할 수도 없다. 낳았으니 키우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 속에서 그 노고를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다. 아이가 무난하게 잘 성장하는 건 기본값이고, 어떤 문제라도 있을라치면 “부모가 어떻게 키운 거냐”며 사회적 질타를 받는다.

물러설 곳 없는 부모라는 자리에서 한 인간을 인간답게, 행복한 사람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최소한 사회에 해가 되지 않은 사람으로 길러내는 일은 고단하고 대단한 일이다. 그 위치에 놓였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무게를 감당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부모 역할을 잘하는 길일지 모른다.

50년 넘게 다양한 문화권의 양육 관습을 연구해온 미국의 부부 인류학자는 아동 발달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력이 서구 사회에서 과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부모가 아이의 심리적·정신적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전문가 조언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양육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말라고, 아이는 그렇게 약하지 않으며 상당 수준의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안심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쓴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책에는 ‘미국의 가족은 안심하고 쉬어도 된다American families should just relax’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이를 믿고 ‘마음을 놓으시라just relax’는 조언은 한국 부모들에게도 해당되는 듯하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아이 곁에 있는 나를 믿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족해도 괜찮아. 네 곁엔 내가 있으니, 넌 나를 닮아 괜찮은 사람으로 자랄 거야.’ 숱한 고난을 겪으며 삶을 이어온 모든 인간의 유전자에는 ‘회복탄력성’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만큼이나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결국 아이를 보호할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므로.”

아이가 ‘마땅히 괴로워해야 할 것에 고통을 느끼며’ 인생을 배워나가야 한다면, 부모인 나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더 많은 실패와 괴로움을 경험하길 바라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모진 풍파를 뒤늦게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그게 가장 안전하게 아이를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아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고 필요할 때 손잡아주는 어른 곁에서, 아이도 용감하게 고통을 마주하며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해갈 것이다.


_장희숙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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