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론 다시 보기
아이들의 신체 발달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출생 후 십수 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다가 대체로 10대 후반(드물게는 20대)에 멈춘다. 정신적 성장 또한 뇌의 변화와 함께 진행되는데, 논리적 사고 기능을 맡는 전전두엽이 왕성하게 발달하는 시기는 키가 가장 빨리 자라는 시기와 맞물린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보자면 단선적 발달론이 맞는 것 같다. 성장기 동안 키는 꾸준히 자라고(대개는 계단식으로 자라지만 줄어들지는 않는다), 논리적 사고력도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점점 발달한다.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을 ‘발달’이라고 한다면, 어른은 아이보다 더 ‘발달한’ 인간인 셈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다른 것이 보인다. 자유로운 상상력, 사물을 의인화하는 물활론적 사유는 어린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인데, 논리적 사고력이 자라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능력 을 잃는다. 뼈가 단단해지면서 유연성을 잃는 것과 유사하다. 뼈가 단단해지는 것을 성장이라 볼 수도 있지만 유연성을 잃는 것을 퇴행으로 볼 수도 있다. 물활론적 사유를 미숙한 세계관 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피카소나 장욱진 같은 대가들의 작품은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과 유사하다. ‘어린아이 같아지는 것’은 성숙의 최고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치매 환자처럼 지적 능력이 퇴행하면서 어린아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천진함은 자유로움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아이는 미숙하기도 하고 성숙하기도 한 존재다. 미숙함은 아이들만의 특성이 아니며, 아이보다 미숙한 어른도 적지 않다. 평소 어른스러운 듯한 성인도 미숙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미숙함이 아이들만의 속성이 아니듯 성숙함이 어른들의 속성도 아니다. 어떤 상황과 맥락 속에서 모든 사람은 때로 미숙하고 때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이 나이에 비해 신체 발달은 빠른 반면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사회활동 시기가 늦추어져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이를 마냥 어린아이 취급하며 사사건건 관리하려 드는 어른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가 잘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느 만큼 성장해야 정상적인 발달인지 노심초사 지켜보며 성장판을 자극해 키를 늘이고, 두뇌 발달이 좋아지게 영양제를 먹이기도 하면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아이의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발달을 재촉하는 부모의 그늘 아래서 아이가 잘 자라기는 힘들다. 그늘에서 잘 크는 나무는 없다.
핀란드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로 아동기 담론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카린 무리스는 행위주체성을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상호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아이를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에 실재하면서 주변과 주체적으로 관계 맺는 존재로 보는 무리스의 철학은 양자역학적 세계관과도 통한다. 상황에 따라 아이도 얼마든지 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으며 어른도 아이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에게도 어른 못지않게 성숙한 면이 있으며, 아동기가 끝난다고 해서 아이 같은 면이 아주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이 같은 면’에도 양면성이 존재한다.
독이 되는 부모와 교사
자신이 믿는 ‘좋은 삶’으로 아이를 인도하기 위해 자녀의 인생 스케줄을 짜고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는 부모들이 있다. 어떤 부모는 심지어 아이의 친구 관계까지 개입하며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연출가처럼 아이의 인생을 설계한다. 자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야 마는 부모도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이중구속 이론에 의하면 부모가 발신하는 모순된 메시지를 해독하느라 자기 내면의 진실을 거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아이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치명적 손상을 입는다.
『독이 되는 부모Toxic parents』 저자 수전 포워드는 “부모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세뇌를 당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녀는 좌절하게 되고, 그럴수록 부모는 더 자녀에게 관심과 투자를 쏟으면서 기대가 커져가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일본에서는 ‘독친毒親’이란 말이 널리 쓰일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다. 최근 <독친>이란 한국 영화가 개봉한 것은 부모의 잘못된 사랑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노심초사하는 부모 중에는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다 큰 아이를 마치 유치원생 대하듯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아이를 덤덤하게 지켜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개입하고 주의를 준다.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넘어지니까 뛰지 마라’는 부모의 말을 귀담아들을 중학생은 없다. 다 큰 자녀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부모는 걱정이 지나치게 많거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자녀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부모가 있듯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교사들이 있다. 이는 자녀 수가 줄고, 학급 정원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자녀가 네댓 명이 넘고 먹고살기 바쁜 부모가 아이들에게 일일이 간섭할 여력이 없듯이 한 반 학생이 60명이 넘던 시절의 교사는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아이들은 어느 정도 어른들 눈 밖에 방치된 채 숨 쉴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눈 밖에서 자란다. 아이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할 줄 아는 것은 좋은 부모, 좋은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교사는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애정을 쏟는다고 교육이 되는 건 아니다.
한 엄마가 말했다. “아이는 뭔가를 채워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가는 어린 사람”*이라고. 아이를 미숙한 인간이 아니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존재로, 내가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잘 모르는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하지만, 인생의 모든 시절은 그 시절만의 온전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새싹의 아름다움이 꽃의 아름다움 못지않으며, 신록의 아름다움이 단풍의 아름다움만 못하지 않다. 인생의 화양연화 같은 시절을 시험공부만 하며 보내게 하면서 아이의 발달을 이야기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힘껏 자라서 기껏 취업 잘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런 발달을 원할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생물학과 심리학, 뇌과학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밝혀주었지만 성장을 곧 발달의 과정으로 보게 만들기도 했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나비가 되는 과정을 ‘발달’의 과정으로 보기보다 ‘변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꽃들에게 희망을』 우화집은 애벌레를 미숙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만, 애벌레의 삶에는 나비의 삶에서는 볼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갈 그 시간을 함께하며 그들을 돌볼 기회를 갖게 된 어른들이, 지난날 무심코 지나쳐버린 아름다운 순간들을 다시 음미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를!
* 유보라, 육아서를 버리고 육아가 가벼워졌다,《민들레》150호.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이 글은《민들레》150호 단상 글의 일부입니다. )
발달론 다시 보기
아이들의 신체 발달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출생 후 십수 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다가 대체로 10대 후반(드물게는 20대)에 멈춘다. 정신적 성장 또한 뇌의 변화와 함께 진행되는데, 논리적 사고 기능을 맡는 전전두엽이 왕성하게 발달하는 시기는 키가 가장 빨리 자라는 시기와 맞물린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보자면 단선적 발달론이 맞는 것 같다. 성장기 동안 키는 꾸준히 자라고(대개는 계단식으로 자라지만 줄어들지는 않는다), 논리적 사고력도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점점 발달한다.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을 ‘발달’이라고 한다면, 어른은 아이보다 더 ‘발달한’ 인간인 셈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다른 것이 보인다. 자유로운 상상력, 사물을 의인화하는 물활론적 사유는 어린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인데, 논리적 사고력이 자라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능력 을 잃는다. 뼈가 단단해지면서 유연성을 잃는 것과 유사하다. 뼈가 단단해지는 것을 성장이라 볼 수도 있지만 유연성을 잃는 것을 퇴행으로 볼 수도 있다. 물활론적 사유를 미숙한 세계관 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피카소나 장욱진 같은 대가들의 작품은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과 유사하다. ‘어린아이 같아지는 것’은 성숙의 최고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치매 환자처럼 지적 능력이 퇴행하면서 어린아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천진함은 자유로움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아이는 미숙하기도 하고 성숙하기도 한 존재다. 미숙함은 아이들만의 특성이 아니며, 아이보다 미숙한 어른도 적지 않다. 평소 어른스러운 듯한 성인도 미숙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미숙함이 아이들만의 속성이 아니듯 성숙함이 어른들의 속성도 아니다. 어떤 상황과 맥락 속에서 모든 사람은 때로 미숙하고 때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이 나이에 비해 신체 발달은 빠른 반면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사회활동 시기가 늦추어져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이를 마냥 어린아이 취급하며 사사건건 관리하려 드는 어른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가 잘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느 만큼 성장해야 정상적인 발달인지 노심초사 지켜보며 성장판을 자극해 키를 늘이고, 두뇌 발달이 좋아지게 영양제를 먹이기도 하면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아이의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발달을 재촉하는 부모의 그늘 아래서 아이가 잘 자라기는 힘들다. 그늘에서 잘 크는 나무는 없다.
핀란드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로 아동기 담론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카린 무리스는 행위주체성을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상호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아이를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에 실재하면서 주변과 주체적으로 관계 맺는 존재로 보는 무리스의 철학은 양자역학적 세계관과도 통한다. 상황에 따라 아이도 얼마든지 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으며 어른도 아이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에게도 어른 못지않게 성숙한 면이 있으며, 아동기가 끝난다고 해서 아이 같은 면이 아주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이 같은 면’에도 양면성이 존재한다.
독이 되는 부모와 교사
자신이 믿는 ‘좋은 삶’으로 아이를 인도하기 위해 자녀의 인생 스케줄을 짜고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는 부모들이 있다. 어떤 부모는 심지어 아이의 친구 관계까지 개입하며 마치 영화 <트루먼 쇼>의 연출가처럼 아이의 인생을 설계한다. 자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야 마는 부모도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이중구속 이론에 의하면 부모가 발신하는 모순된 메시지를 해독하느라 자기 내면의 진실을 거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아이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치명적 손상을 입는다.
『독이 되는 부모Toxic parents』 저자 수전 포워드는 “부모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세뇌를 당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녀는 좌절하게 되고, 그럴수록 부모는 더 자녀에게 관심과 투자를 쏟으면서 기대가 커져가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일본에서는 ‘독친毒親’이란 말이 널리 쓰일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다. 최근 <독친>이란 한국 영화가 개봉한 것은 부모의 잘못된 사랑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노심초사하는 부모 중에는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다 큰 아이를 마치 유치원생 대하듯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아이를 덤덤하게 지켜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개입하고 주의를 준다.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넘어지니까 뛰지 마라’는 부모의 말을 귀담아들을 중학생은 없다. 다 큰 자녀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부모는 걱정이 지나치게 많거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자녀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부모가 있듯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교사들이 있다. 이는 자녀 수가 줄고, 학급 정원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자녀가 네댓 명이 넘고 먹고살기 바쁜 부모가 아이들에게 일일이 간섭할 여력이 없듯이 한 반 학생이 60명이 넘던 시절의 교사는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아이들은 어느 정도 어른들 눈 밖에 방치된 채 숨 쉴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눈 밖에서 자란다. 아이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할 줄 아는 것은 좋은 부모, 좋은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교사는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애정을 쏟는다고 교육이 되는 건 아니다.
한 엄마가 말했다. “아이는 뭔가를 채워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가는 어린 사람”*이라고. 아이를 미숙한 인간이 아니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존재로, 내가 다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잘 모르는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하지만, 인생의 모든 시절은 그 시절만의 온전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새싹의 아름다움이 꽃의 아름다움 못지않으며, 신록의 아름다움이 단풍의 아름다움만 못하지 않다. 인생의 화양연화 같은 시절을 시험공부만 하며 보내게 하면서 아이의 발달을 이야기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힘껏 자라서 기껏 취업 잘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런 발달을 원할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생물학과 심리학, 뇌과학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밝혀주었지만 성장을 곧 발달의 과정으로 보게 만들기도 했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나비가 되는 과정을 ‘발달’의 과정으로 보기보다 ‘변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꽃들에게 희망을』 우화집은 애벌레를 미숙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만, 애벌레의 삶에는 나비의 삶에서는 볼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갈 그 시간을 함께하며 그들을 돌볼 기회를 갖게 된 어른들이, 지난날 무심코 지나쳐버린 아름다운 순간들을 다시 음미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를!
* 유보라, 육아서를 버리고 육아가 가벼워졌다,《민들레》150호.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이 글은《민들레》150호 단상 글의 일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