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아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민들레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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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학대받는 아이들

 

민간에 전승되어오는 민담이나 설화 속에는 아동유기나 학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지 않다. 어린 남매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숲을 헤매면서 고난을 겪는 독일 민담 ‘헨젤과 그레텔’도 그런 이야기다. 19세기 이후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근대적 가족 개념이 생겨나면서 자식을 버리는 것에 대한 심리적 금기가 작동하여 이야기 속에서 친모는 계모로 바뀌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행위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이가 위험에 처하는 형태로 굴절된다.

이 이야기들은 궁핍한 시대에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 민담에는 괴물이나 신적 존재에게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은혜 갚은 두꺼비, 에밀레종 설화, 심청전 등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아이는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의 (여자) 아이다. 지네에게 제물로 바쳐진 덕이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이다. 그 마을의 가장 약자라고 볼 수 있다. 에밀레종에 제물로 바쳐진 아이도 시주조차 할 수 없었던 가난한 홀어미의 아이였다. 심청이는 눈 먼 홀아비의 딸이다. 돈 있고 권세 있는 부모를 둔 아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은혜 갚은 두꺼비’에서는 덕이가 제 먹기에도 모자란 밥을 나눠주며 기른 두꺼비가 덕이를 구한다. 이 옛이야기를 듣거나 책에서 읽는 아이들은 대개 두꺼비에게 관심이 쏠려 다른 것은 생각지 않지만, 조금 생각이 별나거나 삐딱한 아이라면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를 괴물에게 제물로 바치는 비정한 어른들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품을 법도 하다.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마을에서 날마다 보고 지내는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어른들이라니!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어른들은 이야기 속에서 내내 뒷전에 숨어 있을 따름이다.

유아사망률이 높고 아이 목숨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시대였다 해도 그렇게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서 마을이 과연 안녕할 수 있을까? 비록 이야기라 하지만 말이 안 된다. 그런 심성을 지닌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공동체성을 지녔을 리가 없고, 아이를 잃은 집집마다 웃음꽃이 필 리가 없다. 아이들인들 어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여차하면 마을을 탈출할 꿈을 꾸지 않을까? 하지만 저 민담들은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를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약자가 희생당하는 현실을.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 석에 장사꾼들에게 팔려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졌다가 연꽃 봉오리 속에 구조되어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가난한 집 아이가 장사꾼들에게 제물로 팔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사회에서나 구전될 법한 슬픈 이야기다. 장사꾼들이 저들 살겠다고 여자아이를 바다 속에 수장시키는 것이 이 세상의 냉정한 현실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효심에 감동할 용왕도 없고, 연꽃이 구명정 노릇을 해줄 리도 만무하니, 뒷이야기는 희망사항이라고 봐야 한다.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약자인 아이를 희생시키는 것은 내부지향적이고 과거지향적인 부족사회의 특징이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은 아기장수 우투리 이야기도 부족사회의 전형적인 민담이다. 외부의 적보다 부족사회 내부의 권력 서열이 위협당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투리는 범상찮은 아이에 지레 겁먹은 부모에 의해 아기 때 살해된다. 영아살해인 셈이다. 무덤에서 콩과 팥이 변한 군사들과 함께 다시 살아나려던 우투리를 이번에는 관군이 와서 죽인다. 부족(국가)과 부모가 손잡고 기성질서를 위협하는 아이를 억압하는 구조다.

 

 새로운 민담이 필요한 시대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일은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다만 베이비박스를 설치하거나 해서 유기 아동을 돌보는 사회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대기근 같은 재해가 아니어도, 아이를 낳았지만 기르기 힘든 사정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나 있기 마련이다. 원치 않았던 아이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사람들도 있고, 평범한 부모들 가운데도 아이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숨겨진 욕망이 괴담 같은 이야기의 형태로 회자된다. 현대의 민담인 도시전설은 그렇게 생겨난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레 부모가 되어버린 이들 중에는 아이를 학대하면서 세상에 대한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름날 뙤약볕 아래 주차된 차 안에 어린아이를 두고 내렸다가 아이가 사망하는 사건은 부주의로 인한 사고로 간주되지만, 도시전설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아기 침대를 자동차 지붕 위에 올려두고 젊은 부부가 언쟁을 하다 깜박 잊고 그대로 출발해서는 한참 뒤에야 알아차린다는 이야기는 아동유기 민담의 변형된 버전이다.

동서를 불문하고 아동을 보호하는 문화는 근대에 접어들어서야 생겨났다. 한국 사회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예로부터 친권이 강한 편이었다. 아동인권에 대한 의식은 동학운동 이후 방정환을 거치면서 서서히 생겨났지만,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생존권보다 부모의 친권이 우선하는 것이 현실이다. 1998년 영훈이 남매 사건으로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제고되면서 ‘가정폭력범죄 및 성폭력범죄에 대한 특례법’이 제정되어 직계존속이라 하더라도 고소할 수 있게 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서구에서도 아이와 여성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보편화된 건 20세기 들어서다. 18세기 무렵 ‘아동기’라는 개념이 생겨났지만, 산업혁명 초기만 해도 아동노동 착취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였다. 19세기 들어서 아동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트면서 의무교육제도가 생겨났다. 이 제도는 아이들을 노동착취에서 보호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국가가 바라는 인적자원으로 양성하려는 취지도 있었다.

의무교육제도 덕분에 아이들은 부모와 자본가들로부터 학대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반면 다른 한편으로 이제 국가가 관리하는 인적자원 신세가 되었다. 국가의 보호 아래 들어간 아이들은 또 다른 억압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자녀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부모들은 국가주도 교육에 발맞춰 아이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공장 대신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기계노동 대신 학습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댈 곳 없이 극심한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학교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국가와 부모가 손을 맞잡고 아이들을 사지로 몰아세운 것이다.

국가주도 공교육이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근대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진보적인 정권도 기본 노선은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당시 교육부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뀐 것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선착순 달리기를 강요하는 학교 시스템에 사교육시장까지 가세하면서 아이들은 밤낮으로 학습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이를 제물로 바치던 시대가 가고 이제는 아이를 떠받드는 시대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아이들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지네괴물이 입시괴물로 바뀌었을 뿐.

하지만 입시괴물은 훨씬 거대해서 아이 한두 명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 아이도 부잣집 아이도 제물 신세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입시 동굴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 아이들은 대체로 부잣집 아이들이니, 예나 제나 없는 집 아이들의 운명은 그리 다르지 않다. 옛이야기에서 덕이를 구한 것은 덕이보다 더 약자였던 두꺼비였다. 영웅이 나타나 불칼을 휘둘러 괴물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아이한테 밥풀을 얻어먹고 살던 두꺼비가 자기 목숨을 던져 아이를 구한다. 의리의 연대다.

교육개혁의 칼날도 입시괴물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영웅을 기다릴 일이 아니라 약자들이 연대하여 스스로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무책임한 어른들과 무력한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전승되어야 한다. ‘아기장수 우투리’처럼 서글픈 이야기도 그만 전승할 일이다. 아기장수를 지키는 어른과 그런 어른다운 어른들을 보고 자라 진짜 어른이 된 아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이 시대의 새로운 민담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오늘날 두꺼비의 역할을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부모일까 교사일까. 현실에서 덕이네 부모는 밥벌이도 힘겨운 상황이니, 그나마 학교와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사들은 비록 국가의 녹을 먹는 처지이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두꺼비가 되어 입시괴물과 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부모들이 괴물과 한패가 되어 아이들을 동굴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용기 있는 교사들의 연대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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