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관계의 언어

 

 

언어의 해상도

 

어렸을 때 곧잘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라며 놀림을 받곤 했다. 정말 그럴까?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말았다. 진짜 그런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 알려주는 사람도 책도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인간의 발달단계와 심리에 대한 이해가 생긴 덕분이기도 하고, 언어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음을 짓는 것은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춘기에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 사춘기는 음모가 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울다가 웃어서 털이 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신체와 정서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인 셈이다. ‘똥구멍에 털 난다’라는 말은 ‘음모가 난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한 말일 것이다. 실제로 항문 주변에도 털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저 말은 주로 어린아이들을 놀릴 때 써먹었다. 사실 어린아이들이 울다가 웃는 경우는 사춘기 아이들이 보이는 복잡한 감정의 기복과는 다르다. 대개는 장난감을 빼앗겼다가 찾았을 때처럼 상황의 반전에 따른 자연스런 감정의 전환이다. 사춘기 아이들을 저런 말로 놀리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말로 놀리지는 않는 법이다. 저 말은 어린아이의 조숙함을 놀리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이들은 세상의 복잡함을 어렴풋이 알아채기 시작한다. 세상이 ‘나쁜 놈과 착한 사람’, ‘도둑과 순경’처럼 명쾌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우러러보던 경찰이 ‘짭새’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양면성을 알게 되면서 복잡미묘한 감정 세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제 동화의 세계에서 소설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복잡한 세상에서는 감정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웃프다’라는 말은 ‘웃기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서글픈 감정을 표현하는 신조어다. ‘서글프다’에 비하면 상황이 좀더 복잡하고 우스운 경우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그런 상황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낯선 세상이다. 이 세계는 동화의 영역이 아니라 소설의 영역이다. 세상을 좀 살아보면 마주치게 되는 복잡한 세상이다. 이런 복잡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복잡한 언어가 필요하다.

서글픔, 슬픔, 설움은 비슷한 감정을 나타내는 순우리말이지만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써야 한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책을 통해 다양한 장면에서 이런 낱말을 접하면 간접 경험으로나마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 그 차이를 알 수 있으려면 꽤 오랜 세월을 살면서 비슷한 감정 상태를 경험해봐야 한다.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려면 성장기에 소설 등을 통해 간접 경험이 해볼 필요가 있다.

감정이 풍부해지면서 세밀하게 나눌 수 있게 되면 감정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그 해상도에 따라 언어도 복잡해진다. 표정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애매하고 복잡한 감정을 근사치로나마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에 매우 중요하다. 언어를 갖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비슷한 감정을 읽고 공감할 수도 있다. 언어가 없으면, 서글픔과 슬픔이 어떻게 다른지 자각도 전달도 힘들다.

에스키모인들이 눈을 표현하는 낱말이 수백 개라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졌지만, 수십 개는 넘는다고 한다. 어떤 문화권이든 자신들의 삶과 관련성이 높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구분하는 어휘를 갖기 마련이다. ‘해상도가 높은’ 언어를 갖추면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려면 먼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십대 아이들의 어휘력이 줄어들고 있는 현상은 우려할 만하다. 짜증난다, 화난다, 답답하다, 난감하다 같은 다양한 상황을 ‘짱난다’는 말 하나로 퉁친다. 매우, 아주, 몹시, 너무, 대단히, 굉장히 같은 낱말은 비슷한 의미지만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를 ‘졸라’ 하나로 대신하는 것은 얼핏 매우 효율적인 언어 사용처럼 보이나 해상도가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다. 해상도가 낮은 사진처럼 흐릿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대단하다, 굉장하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미쳤다’라는 표현을 광범위하게 쓰기도 한다.

어휘력이 줄어드는 것은 책을 읽지 않는 탓이 크다. 일상에서 구어로 쓰이는 어휘는 많지 않다. 구어만으로도 웬만한 의사표현은 할 수 있지만, 세밀한 묘사나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려면 쉽지 않다. 복잡미묘한 어휘는 문학작품에서 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새로운 어휘를 발견할 때면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흥분되는 시기가 사춘기다. 자기 내면의 미지의 영역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언어가 늘어나는 만큼 세상이 조금씩 넓어지고 복잡한 얼개가 보이기 시작한다.

‘말미암아’ 같은 새로운 낱말을 배운 아이가 그 낱말을 익히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말미암아’를 집어넣어 말을 하는 것은 성장의 징표다. 아이들이 해상도 높은 언어를 갖출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사춘기 아이들에게는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의 내면과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입체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신체적 사춘기는 언어의 사춘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주변에 입체적인 인간 군상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동화의 세계, 수평선의 세계에서 수직선의 세계를 발견하면서 아이는 성숙한다.

그런 점에서 중등 과정에서는 같은 가치관을 가진 교사들이 모여 있는 대안학교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교사들이 있는 일반 학교가 교육적으로 더 나은 환경일지 모른다. 왼 다리과 오른 다리를 교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듯이 인간은 갈등 속에서 성장한다. 아이의 성장에는 아버지와 삼촌이, 엄마와 이모가 상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인류학적 통찰은 인간의 성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다. 핵가족 시대인 오늘날 삼촌이나 이모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사람은 교사일 것이다.

 

 높임말과 반말

 

언어의 해상도가 높은 것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말의 경어체계는 해상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데, 이는 그만큼 위계적인 사회임을 반증한다. ‘하다’라는 용언의 종결형 어미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위계에 따라 미묘하게 바뀐다. (그렇게) 해, 해라, 하게, 하세요, 하시게, 하시오. 하십시오, 하소서, 하옵소서, 하시옵소서. 이처럼 복잡한 경어체계가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단순화되고, ‘하시옵소서’ 같은 극존칭은 이제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높임말이 쓰이는 것은 어떤 사회든 권력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면서 고객을 높이는 존댓말 어법이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다. “이 제품은 할인이 안 되세요”, “주문 되셨어요” 같은 어색한 존댓말을 곳곳에서 듣게 된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이상한 표현인 줄 알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반말로 오해하고 따지는 손님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쓰게 된다고 한다.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진상 고객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고 하니, 콤플렉스에 절어 있는 사람들이 엉터리 존대를 강요하는 셈이다.

언어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말이 사람을 가깝게도 멀게도 만든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관계가 깨어지기 쉽다. 가족 관계가 어려운 것은 그만큼 서로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집이나 학교 같이 가까운 이들끼리 부대끼는 곳일수록 말을 함부로 하기가 쉽고 그만큼 갈등이 일어나기도 쉽다.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와 아이들이 다 같이 높임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줄어든 사례는 언어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말해준다.

대안학교 가운데는 교사와 학생이 다 같이 평어를 쓰는 곳도 있고 경어를 쓰는 곳도 있다. 높임말이 만들어내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적당한 거리가 배움의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긴밀한 관계 형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가 처한 상황과 아이들의 상태를 고려해 말이 갖는 문화적 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반 초등학교를 다니다 대안학교로 전학 온 한 아이는 처음에 교사에게 말을 아주 함부로 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에게 ‘즐’을 서슴없이 썼다. 그런데 아이 속에 억눌렸던 것들이 풀어지면서 말이 부드러워지면서 행동도 달라졌다. 만약 이 학교의 언어문화가 존댓말을 쓰는 문화였다면 아마도 아이 내면의 억압이 그렇게 빨리 풀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신뢰가 쌓이면서 풀리긴 했겠지만 치유 효과 면에서는 아마도 덜했을 것이다.

어른에게는 반드시 높임말을 쓰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모들도 있다. 부모에게 존댓말을 쓰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는 사회 전반의 위계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평어체가 확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반말을 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듯이, 교사와 학생 사이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아이가 살아갈 사회의 말법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 적절한 거리가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줄 아는 것은 주요한 삶의 기술이다. 학교에서 평어를 쓰는 대안학교 학생들도 바깥 어른들을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경어를 쓴다.

경어와 평어는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로 기능하기도 한다. 친구 간에도 회의석상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쓴다. 공적인 자리에서 반말을 주고받는 것은 공사 구분을 못하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한편 말이 아닌 글의 경우에는 평어가 공적인 언어다. 논문을 존댓말로 쓰는 사람은 없다. 불특정 독자들을 향한 신문 사설도 평어체다. 독자를 높이는 문체는 은연중 독자에게 아부하는 글이 되어 정론으로서 자격을 잃기 쉽다.

높임말의 반대는 낮춤말이다. ‘저’나 ‘저희’처럼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이는 말이니 높임말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평어는 높임말도 낮춤말도 아닌 대등한 말이다. 평어를 순 우리말로 반말이라 한다. 반말은 반쪽짜리 말, 곧 짧은 말이라는 뜻이다. ‘하시겠습니까’를 1/2, 아니 1/3로 뚝 잘라 ‘할까’로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매우 경제적인 소통법이다. 대화에서 반말을 쓸 수 있는 경우는 두 사람이 이미 친한 관계일 때다. 서로 공유하는 토대가 있으므로 에너지를 반만 들이고도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

반면에 낯선 사람한테는 높임말을 써서 거리를 두면서 서로 공유하는 토대를 탐색하는 시간을 번다. 물론 낯설지 않아도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에게는 높임말을 쓰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가 채택하는 언어문화다. 이 경우도 높임말이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로 기능하는 것은 비슷하다. 경어체계는 그 사람이 쓰는 언어만으로 쌍방의 사회적 위치가 드러나는 구조다. 양반은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 (이리) 오너라, 오게, 오시오, 오시게, 오소서, 오시옵소서 식으로 어미를 달리 썼다.

우리말에는 상대방을 높이는 말법과 자신을 낮추는 말법이 따로 있다. ‘자다’의 높임말인 ‘주무시다’는 잠자는 주체를 높이는 말이고, ‘주다’의 높임말 ‘드리다’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이는 말이다. 이처럼 복잡한 경어법을 구사하는 것은 그만큼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복잡함을 반증한다. 한자 어원상 경(敬)은 귀신처럼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를 멀리하는 행위다. 공경의 태도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약자의 처세술인 셈이다. 높임말로 만들어지는 그 거리는 안전거리이기도 하다.

경어법이 자신을 해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기술이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사회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경어를 익히는 것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경어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경어의 교육적 의미가 또 다르게 다가온다. 성장 과정에서 오랫동안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대다수 아이들에게 적절한 경어법을 구사하는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존댓말 문화가 위계적인 상하관계를 만들어내고 소통을 방해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긴급한 상황에서 존댓말을 하다 보면 타이밍을 놓칠 가능성이 높다. 1999년 12월 런던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화물기 추락 사고는 기장과 부기장의 권위적인 위계 관계로 인해 조종실에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긴급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해 일어난 것으로 분석되었다. 대한항공은 이후 조종실의 권위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 기장과 부기장 간 대화를 영어로 하도록 규정을 바꿨다고 한다(그 후 대한항공은 인명 사고로 이어진 추락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기장은 반말, 부기장은 높임말을 하는 문화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듯이 팀플레이가 중요한 경우에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언어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맡았을 때 선후배 간의 위계적 관계가 경기를 방해한다고 보고 함께 평어를 쓰도록 한 것이 월드컵 신화를 이루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분석이 있다. 선배는 반말을 하고 후배는 존댓말을 하면서 패스가 원활해지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