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호칭과 관계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받은 국어교육으로 말미암아 언어생활이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경상도 시골에서 어머니로부터 익힌 ‘모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어’와 부딪혀 생기는 혼란이었다. 불행하게도 모범생 기질을 타고난 탓에 그 혼란은 더했다. “다음 중 표준말이 아닌 것은?” 이런 시험문제를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표준말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 국어가 모어를 밀어내는 과정이었다.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집이 많았던 그 시절, 조부모에게도 ‘할배’, ‘할매’라 부르며 말을 놓던 아이들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집에는 엄마밖에 없었다. 당연히 우리는 ‘엄마’라고 불렀고, 말을 놓았다. 그런데 국어 교과서에서는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엄마”라 부르는 아이들은 괜히 기가 죽었다. ‘어머니’란 호칭은 왠지 ‘뼈대 있는’ 집안에 더 어울리는 듯하고 “어머니”라 부르는 친구들이 괜히 더 어른스러워 보여 흉내를 내보긴 했지만, “어머니”라 부르면 꼭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 피천득 선생이 환갑이 넘어서도 당신 어머니를 언제나 “엄마”라 부르는 모습이 좋아 보이면서 엄마 호칭 콤플렉스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무골’ 집안에서 자란 것을 내심 다행스러워하며.

사실 어머니는 ‘마음 속의 어머니’ 같이 글에서 어울리는 용어이지, 일상에서 쓰기에는 아무래도 딱딱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어머니’보다 ‘엄니’, ‘어무이’, ‘오마니’ 같은 호칭이 더 많이 쓰였고, 이제는 ‘엄마’가 거의 표준 호칭으로 자리 잡았다. 교과서가 아무리 ‘어머니’라 가르쳐도 아이들과 엄마의 관계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어머니 은혜’라는 말도 충효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관념일 것이다. 아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것은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라 ‘엄마의 정’이다. 어머니보다는 엄마가 왠지 더 정이 많을 것 같기도 하다.

사회에서 호칭을 적절히 구사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말문을 터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흔히 쓰이는 호칭은 거개가 가족 관계나 직업 또는 직급을 나타내는 명칭들이다. 형님, 언니, 이모, 아저씨, 아주머니, 사장님, 부장님…. 잘 모르는 성인 남성에게 가장 만만한 호칭은 ‘사장님’이다. 자영업 전성시대에 어울리는 호칭문화인 셈이다. ‘아주머니’보다 격을 높인 ‘여사님’이나 ‘사모님’은 사장님만큼 보편적으로 쓰이진 않는다. ‘사모님’은 원래 스승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만큼 격에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저씨’, ‘아주머니’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은 부모 외의 어른이 모두 아저씨, 아주머니인 씨족사회 문화의 유산이다. ‘선배’는 근대학교가 생겨나면서 정착된 호칭으로 보인다.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도 상당히 위계적인 관계이지만, 직장문화가 권위적이지 않은 곳에서는 상사를 선배라 부르기도 한다.(JTBC 방송국에서는 신참기자도 손석희 사장을 ‘선배님’이라 부른다.)

존댓말과 마찬가지로 호칭 또한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변하고 있다. 대통령을 ‘각하’라 부르던 시절은 일찍이 끝나고 판검사들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영감’도 사라지는 중이다. ‘스승님’이 ‘선생님’으로 바뀐 것은 근대학교가 생겨나면서 보편교육이 시행된 결과일 것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 학생과 선생이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시대가 되었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친구 관계처럼 되는 것이 꼭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배움이 작동하는 구조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라는 존재가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있을 때 그를 뒤좇는 제자의 수행력이 더 좋아진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말한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선생은 좀더 친근한 존재인 것이 나을 것이다. 정신적 성장 속도가 점점 늦춰지고 있고 부모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니 십대 중반까지는 친근한 선생님이 더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배움터에서 학생이 선생님을 부를 때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이다. 초등 대안학교, 그중에서도 공동육아어린이집 조합원이었던 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학교의 경우 어린이집 문화가 학교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아이들이 부모나 교사를 별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코알라, 진달래, 반달, 바람개비, 이런 별명을 스스로 짓기도 하고 서로 지어주기도 한다.

일반학교에서도 아이들이 흔히 교사를 별명으로 부르지만, 2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만 쓴다. 아이들 사이에서 은어로 통하는 교사의 별명은 대개 아이들이 싫어하는 교사들에게 붙여진다. ‘독사’ ‘미친개’ ‘배둘레햄’ 같은 별명 속에는 경멸의 시선이 스며 있다.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교사에게 존경을 표하도록 강요하는 권위주의 문화의 반작용일 것이다. ‘존중받고 싶으면 존중하라.’ 이는 모든 관계의 불문율이다.

대안학교에서 쓰이는 별명에는 상대를 놀리는 요소가 전혀 없다. 단지 부르는 이름으로 쓰이는 현대식 호(號)인 셈이다. ‘선생님’이라는 일반 호칭보다 개개인의 독자적인 호칭을 부름으로써 서로 더 친숙하고 만만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끼리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일반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서로 놀리듯이 별명을 지어주고 부르는데, 조롱 섞인 별명이 서로의 관계를 해치는 것은 물론이다.

별명과는 조금 다른 것이지만, 초등 대안학교인 전인새싹학교에서는 '이르름’이라는 별칭을 스스로 짓거나 서로 지어준다. 자기가 이르고 싶은 밝고 긍정적인 상을 정해서 스스로를 높이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햇살, 큰살림, 미소, 봄향 같은 이름을 흔히 짓는다. 전통적으로 관례를 치르면서 짓게 되는 자(字)에 해당하는 이름인 셈이다.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올리면서 자(字)를 짓고, 여자는 혼인을 약속하면 계례를 행하고 자를 지었다.

성인이 되면서 갖게 되는 자(字)는 인생의 지표가 될 덕목을 담아 손윗사람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성년식에 즈음하여 새로운 이름자를 지어 부르는 것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의미도 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부모가 지어준 친숙한 이름을 두고 서로 낯선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할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교실에서 토론할 때 서로 존댓말을 쓰면서 이름을 그냥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그렇다고 아이들끼리 ○○씨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일반 학교에서 토론 시간에 아이들은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해한다. “아니, 댁은…”, “당신은…” “○○씨는…” 여러 호칭이 뒤엉키곤 한다. 참으로 불편한 문화다. 영어권에서는 간단히 ‘you’ 하나로 해결되는 것을. 이럴 때 서로 ‘자’나 ‘호’에 해당하는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토론이 활성화되는 데 적잖게 도움이 될 것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성장과정에서 여러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이름(名) 외에, ‘아명’이라 해서 어린아이 시절에만 불리는 이름을 따로 갖는 경우도 많았다. 성인이 되는 관례를 치르고부터는 자(字)를 불렀다. 어른의 이름(名)은 부모나 스승 외에는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었기에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별도의 호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 또한 가벼이 입에 올릴 수 있는 호칭은 아니어서 좀더 편한 호칭으로 호(號)를 지어 불렀다.(율곡, 퇴계, 추사, 다산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의 이름은 거의가 호다. 유명인의 경우에도 자는 잘 불리지 않았다.) 호는 오늘날의 별명이나 온라인상에서 쓰는 닉네임에 가까운 이름이다.

어떤 홈스쿨링 가정에서는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다양한 별명을 지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를 부른다고 한다. 한 사람 속에 다양한 면들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다른 모습을 띄는 만큼 그때그때 적절한 이름을 부름으로써 관계가 살아나는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한다. 때로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 자식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배움의 기회가 되고 있다면서. 관계의 질을 바꾸고 싶을 때, 가족문화나 학교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서로의 이름을 새롭게 지어 부르는 것은 괜찮은 방법일 듯하다.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지어주는 ‘자’와 달리 ‘호’는 스스로 짓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호를 달리 ‘아호’라 일컫는 까닭이기도 하다. 오늘날 필명이나 예명, 닉네임도 거의가 스스로 짓는다). 추사 김정희의 호는 몇백 개에 이른다. 다양한 필체만큼이나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과 정서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 ‘백반거사’ 같은 장난스런 호도 있다. 누구나 자신 안에 다양한 모습의 ‘나’가 있기 마련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설 때 그에 어울리는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객관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