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다중 문해력 시대에 읽고 쓴다는 것


 

근대는 문자의 대중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성경과 대중소설이 인쇄되어 널리 읽히면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마녀감별법’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문자의 대중화는 계몽주의 시대를 열고 근대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땅의 근대를 연 것도 한글의 대중화였다. 한글의 역사는 5백 년이 넘지만 4백여 년 동안은 홀대를 받아 거의 쓰이지 않다가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되면서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말과 글을 빼앗길 뻔했던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우리말글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한글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지난 1세기 동안 우리글의 변천사는 괄목할 만하다. 최초의 한글 신문이었던 《독립신문》과 1세기 뒤 최초의 가로 쓰기 한글 신문인 《한겨레신문》의 창간사를 비교해보자. “우리가 독닙신문을 오ᄂᆞᆯ 처음으로 츌판ᄒᆞᄂᆞᆫᄃᆡ 조션 속에 잇ᄂᆞᆫ ᄂᆡ외국 인민의게 우리 쥬의를 미리 말ᄉᆞᆷᄒᆞ여 아시게 ᄒᆞ노라.” 백 년 뒤의 문장은 이렇게 바뀌었다. “우리는 떨리는 감격으로 오늘 이 창간호를 만들었다. 세계에서 일찍이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국민 모금에 의한 신문 창간 소식이 알려지자 ….”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 못지않게 우리의 언어생활 또한 빠르게 변했다. 근대화에 발맞춰 표준말이 보급되었고, 문맹률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스마트폰과 SNS가 널리 쓰이면서 거의 모든 이들이 일상적으로 짧은 글이나마 써서 의사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책자와 강좌가 쏟아지고 있다. 언어는 많은 이들이 쓸수록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백 년 뒤에는 우리글이 어떻게 변화할지 자못 기대된다.

궁서체 일변도였던 한글 서예가 캘리그라피로 진화하고 있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의미 전달의 수단인 문자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서예의 역사는 오래지만, 한글 전용 시대에 맞춰 전통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표현 기법이 선보이고 있다. 캘리그라피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2천년대 들어서인데, 이제는 길거리 간판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뿐더러 영화나 드라마 제목으로도 쓰이면서 한글의 조형미에 대중들도 눈을 뜨게 되었다. 문자의 시대에서 이미지의 시대로 전환되는 큰 흐름을 반영하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문자보다 이미지의 힘이 더 부각되고 있다. 백만 권이 팔리는 소설은 거의 없지만 영화는 천만인이 본다. 열 마디 말보다 이모티콘 하나로 메시지를 더 잘 전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면서 사진과 동영상 콘텐츠가 텍스트를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다중 문해력이 주목받는 시대다. 책과 신문만 읽을 줄 알면 되었던 20세기와 달리 다양한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미디어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미디어 문해력, 디지털 문해력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문해력의 기초는 사고력과 상상력이다. 사고력은 어휘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아이들의 어휘력이 줄어들고 텍스트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런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 촌철살인의 댓글을 곧잘 쓰지만 긴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면 깊이 있는 사고는 힘들다. 소수의 엘리트들만 깊이 있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아도 사회는 돌아가겠지만 민주적인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문해력을 기초로 성립한다. 문해력이 있는 시민은 공동체의 주요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맥락이 왜곡된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성장기 아이들의 언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언어감각은 감성이 발달하는 사춘기 시절에 폭발적으로 발달한다. 언어의 사춘기에 형성된 감수성과 어휘력이 평생을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초중고 과정의 언어교육이 중요하다.

엄마의 언어가 아이에게 전해지면서 가족문화를 만들듯이, 한 시대의 언어는 대중들의 언어감각을 형성하면서 시대문화를 만들어낸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문화가 주목받을수록 우리말글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언어는 하나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토대다. 우리말글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우리 삶을 가꾸는 일이자 동시에 인류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