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경전과 법전

민들레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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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각 나라의 법체계 (청색: 대륙법 / 적색: 영미법 / 갈색: 대륙법+영미법 / 황색: 샤리아)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표적인 제도에 종교, 사법, 교육 제도가 있다. 이 제도가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경전과 법전, 교과서다. 이 셋은 다른 듯하지만 사실상 각각의 분야에서 비슷한 기능을 한다. 경전에 주해서가 따라오듯이, 법전에는 판례라는 주해서가 있고, 교과서에는 참고서라는 주해서가 있다. 법전과 교과서의 모태가 경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제와 법관, 교사의 제복도 비슷하다. 오늘날 교사와 교수들이 입는 옷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지만, 이른바 명문 학교의 경우 졸업식 같은 주요 행사 때는 사제복 비슷한 가운을 걸친다. 법관들이 걸치는 법복의 기원도 사제복이다. 법관과 교사는 고대의 사제 역할이 분화되어 생겨난 것이다.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경전이 법전 기능까지 한다. 교육현장에서는 교과서 역할도 한다. 성경과 사서삼경은 오랫동안 경전이자 교과서였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면서 경전이 법전과 교과서의 역할을 내려놓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오늘날에도 쿠란이 법전과 교과서 기능을 일부 맡고 있다. 이슬람의 법체계가 기반하고 있는 종교 율법인 샤리아는 영미법, 대륙법과 함께 세계 3대 법체계를 이룬다. 쿠란(이슬람교 경전)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전승록), 이즈마(이슬람 율법학자와 지도자가 동의한 사항)를 근거로 만들어진 샤리아를 살펴보면 율법과 법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제도를 만들어가는지 알 수 있다.(‘샤리아’는 고대 아랍어로 지켜야 할 계율을 뜻한다.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이것이 신이 내린 완전한 법이며 모든 무슬림은 이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록을 기록한 하디스는 쿠란의 해설이 주 내용을 이루는데, 법체계로 비유하자면 시행령 또는 시행규칙에 해당한다. 정기적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명시한 쿠란의 가르침에 대해 하루에 몇 회, 몇 번 부복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문제는 이 기록이 무함마드 사후 여러 대에 걸쳐 구전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는 데 있다.* 구전과 기록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므로 당연히 판본마다 내용이 다르고, 어떤 집단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용이 왜곡된 판본도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예배 방식이 다른 것은 이들이 따르는 하디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중에는 하디스에서 필요한 내용만 짜깁기해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법전은 시행령과 시행규칙, 조례가 구체성을 담보하지만 경전은 그 종교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게다가 해석에 대한 해석이 덧붙여지면서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 사실상 다른 경전이 만들어진다. 종교마다 끝없이 분파가 생겨나는 이유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통일교 산하 철장선교회라는 단체는 소총을 소지하고 예배를 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요한계시록의 “말세에 그리스도가 쇠지팡이(철장)를 사용해 권위를 보일 것”이라는 구절에 나오는 ‘철장’을 소총으로 해석한 데 따른 것이다.**  통일교다운 신박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이 경전의 구절들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경전과 법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힌두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를 인정받는 법전인 마누법전은 브라만 계급의 특권에 기반한 힌두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항들로 가득하다. 경전이 법전을 겸하거나 지배하는 제정일치 사회는 윤리와 법이 분화되지 않은 사회다. 오늘날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사회가 정체되는 이유다. 서구사회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일찍부터 성경과 분리된 법전을 갖추었다. 조선 역시 유교를 국교로 했음에도 경국대전이라는 매우 발달한 법전을 갖추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불교가 국가종교이다시피 했지만 불경이 법전을 대신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명국가는 국가의 질서를 경전이 아닌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이야말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이다. “가난한 이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성경은 선언하지만, 정작 가난한 이를 구원하는 것은 인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헌법이다. 천부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종교적 의미의 자유와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다르지만,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종교적 의미의 자유란 현실도피적인 자유일 따름이다. 부르카를 써야만 하는 여성이 종교적 의미의 구원을 얻었다 한들 그것이 여성인권운동을 통해 헌법으로 구현되지 않는 한 그의 삶은 부르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경전과 법전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전이 한번 만들어지면 일점일획도 달라지지 않는데 비해 법전은 끊임없이 개정된다는 점이다. 이는 헌법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국가조직의 기본원칙을 정한 입헌주의적 의미의 헌법은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근대적 헌법이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따라 국민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자유권에 치중했다면, 그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생존권적 기본권을 우선하게 되었다. 헌법학자들은 이를 근대적 헌법과 분리해 ‘현대적 헌법’이라 일컫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형적인 현대적 헌법에 속한다.

현대적 헌법은 20세기 말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또 한 차례 커다란 변화를 겪는데, 기존 헌법을 고전 헌법, 새로운 헌법을 선진 헌법이라 부른다. 고전 헌법이 권력체계 기능에 치중한 반면 선진 헌법은 권리장전 기능이 강해 국민의 의무보다 국가의 의무를 먼저 규정한다. 인권지향적인 선진 헌법은 고전 헌법이 보장했던 기본권 외에 인간의 존엄성, 여성 인권, 환경권, 종교를 갖지 않을 권리와 징병 거부권, 심지어 망명권까지도 보장하고 있다. 이는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있고 국가가 있다는 사상이 반영된 결과다.(선진 헌법에서는 권리의 주체로 ‘국민’ 대신 ‘인민’이란 표현을 쓴다.)

법은 사회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본질상 보수적이다. 개정을 용인하지 않는 경전은 한술 더 떠 수구적인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20세기 이전에 생겨난 경전 중에 여성인권을 보장하는 경전은 없다. 경전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그만큼 사회안정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지만,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것이 경전이다. 법전은 그나마 사회변화를 좇아 변신하기라도 하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경전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넘어 정체시키기 십상이다. 삶을 개선하고 사회를 진보시키고자 한다면 경전을 공부하기보다 헌법을 공부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  하디스 판본들이 너무 다양하여 무함마드 사후 2세기쯤 지난 9~10세기에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검증 작업을 시작해 이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구전한 사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판본, 곧 무함마드가 말한 것을 A가 듣고 그것을 B에 전하여 또 C와 D로 전해졌다는 식으로 전승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된 판본을 가장 높은 등급의 하디스로 분류한다.

**  철장선교회를 설립한 이는 문선명의 막내아들 문형진이며, 그의 형 문국진은 총기 제조사인 ‘Kahr Arms’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의 열렬히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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