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율 π 백만 자리까지를 구해서 만든 책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사이에서
수학은 패턴의 예술이라 일컬어진다. 수와 도형에서 패턴을 발견하여 이를 군더더기 없는 공식과 정리로 표현한다. 일찍이 유클리드는 10개밖에 되지 않는 공리에서 465개나 되는 명제들을 유도해냈다. 일본의 세계적인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수학의 본질이 ‘조화’이며, 그 중심은 ‘정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는 만물 사이에 오가는 마음을 일컫는다. 만유의 연결성에 대한 자각이다. 수학적 직관력이 시적 감수성과 통한다는 폴 록하트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는 법칙을 넘어선 세계도 있음을 안다. 무리수는 법칙이 없는 수다. 소수점 아래도 법칙 없이 무한히 이어지지만 무한소수들 사이에도 법칙이 없어 어떤 수가 무한소수인지를 쉽게 확인하기 힘들다. 인간의 머리로 풀 수 없는 세계가 있기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고,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수학이기도 하다. 근대수학인 위상수학과 해석학으로 넘어오면 수학에도 경외심이 생겨난다.
수학의 세계가 ‘그러므로(=, ∴)’의 세계라면, 다른 한 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는 법칙의 세계를 대변하는 반면 ‘그럼에도’는 사랑의 세계를 대변한다. 법칙의 세계가 인과응보의 세계라면 사랑의 세계는 용서와 이해의 세계다. 인간의 삶에서 두 세계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법(율법)과 사랑은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무(0)와 무한대(∞)라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 덕분에 온갖 수가 존재할 수 있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을 찾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 줄 아는 사람, 그럼에도 그 법칙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잃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미국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판사로 재직하던 대공황 시절 손녀를 위해 빵을 훔친 할머니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내린 판결은 법칙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의 시민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나 자신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여러분들에게도 각자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건네받은 할머니는 벌금 10달러를 낸 후 나머지 돈을 갖고 법정을 떠났다고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법칙만이 아니다. 수학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법칙 너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무한의 세계가 있음을 동시에 깨닫게 해준다. 법칙 없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처럼. 대안적인 수학교육의 길을 찾는 과정이 ‘그러므로’와 ‘그럼에도’가 공존하는 세상의 비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이 될 수 있다면, 수학은 우리를 철학과 종교의 세계로도 안내해줄 것이다.
π, 신의 다른 이름
수학은 신비로운 학문이다. 일찌기 그 신비에 눈을 떴던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모든 존재를 수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두 변이 1인 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가 √2 =1.4147…라는 알 수 없는 소수임을 알고는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만물을 정수와 정수의 비율인 분수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제자 히파수스가 그 사실을 발설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어쩌면 자신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신비의 껍데기만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수는 1에 대한 비례를 나타낸다. 1=1/1, 2=2/1...처럼 모든 정수에는 /1이 숨어 있다. 정수의 비례(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수를 유리수(有理數), 그렇지 않은 수를 무리수(無理數)라 한다. 법칙(理) 있는 수, 법칙 없는 수라는 뜻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수와 헤아릴 수 없는 수로 정의할 수도 있다.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원주율(&pi=3.14159...)은 대표적인 무리수다. 무리수가 발견되면서 기하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무한소수로 이어지는 ‘무리수’라는 이상한 수야말로 이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는 수가 아닐까. 이 무리수들도 유리수와 마찬가지로 무한히 존재한다. π는 이 세계가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임을 웅변해준다. 원의 둘레 나누기 지름 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 π가 나온다. 분명 둘레도 한정되어 있고 지름도 정해져 있는데 그 비율은 한정될 수 없는 수라니…. 하지만 아무리 작은 원도 아무리 큰 원도 그 비율은 똑같다. 혹 아닌 게 있을지도 모른다며 π의 소수점 아래를 백만 자리까지 구해본들 시간낭비다.
가장 완전하고 보편적인 형태인 원이 정수의 비가 아니라 딱 떨어지지 않는 수의 비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무리수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법칙이 없는 수이지만 관계 속에서는 명확한 법칙에 의해 정의된다. 수학은 그 법칙을 밝히는 학문이다. 비례는 곧 관계를 나타낸다. 세상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면 달리 말해 세상은 비례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하면서 완전한 도형, 이 우주에서 가장 흔한 형태인 ‘원’에 숨어 있는 이 비밀 속에 삶과 죽음의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유한한 형태 속에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지탱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무한한 ‘무엇’이다.
테스트
수는 무한하다. 그런데 그 무한하고 알 수 없는 수의 세계를 지탱하는 수가 0이다. 아무것도 없음, 無가 모든 있음과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다니! 없음을 뜻하는 기호가 동그라미인 것도 여러 모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존재(有)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원을 없음(無)의 기호로 삼은 것도 그렇지만, 그 원을 원답게 만드는 알 수 없는 수 π가 그 속에 숨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없음과 있음. 알 수 없는 세계와 알 수 있는 세계, 그 오묘한 조화 속에 우주가 펼쳐지고 우리의 삶이 지탱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듯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π도 그 무엇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모든 원의 둘레가 지름의 3.1415926...배가 되는 이유를 안다면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그런 의미에서 신의 또 다른 이름을 π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나님, 야훼, 알라, 브라만… 그 수많은 이름들보다 신의 본성을 표현하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이름일 것이다. π가 초월수라 불리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정확한 원주율 값을 얻고자 애를 썼다. 16세기 독일 수학자 루돌프는 거의 평생을 바쳐 소수점 아래 35자리까지 계산해내고는 자신의 묘비에 그 수를 새겨주기를 바랬다고 한다. 몇 해 전 일본에서는 슈퍼컴퓨터의 힘을 빌어 π의 소수점 32억 자리까지 계산해냈다. 슈퍼컴퓨터도 신의 옷자락 한 끄트머리도 붙들기가 어렵다. 사실 붙들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π값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발사와 같은 경우도 소수점 다섯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3.1416 정도 값이면 충분하다. 일상의 현실을 위해 신비를 끝까지 파헤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무리수는 삼각형, 원 같이 가장 단순한 도형 속에 숨어 있는 무한성을 일깨워준다. 그렇듯이 무한과 신비는 바로 우리 주변,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신 또한 그렇게 자신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바로 우리 곁에서 미소를 띠고….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신비로움에 눈을 뜰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그리하여 경이감 속에서 배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면, 무한소수의 그 막막함을 즐기며 수의 바다에서 유영할 수 있다면 수학교육 또한 성공한 것이리라.
수학의 생명, 비실용성
중국과 한국, 일본 아이들이 서구 아이들보다 계산을 잘하는 이유가 언어 때문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한자문화권 언어는 숫자를 10단위마다 끊어 읽고, 수를 표기하는 낱말 수도 인도유럽어에 비해 적다. 11, 12를 한국어로 읽으면 ‘십일’ ‘십이’, 중국어로는 ‘스이’ ‘스얼’, 일본어로는 ‘쥬이치’ ‘쥬니’인데, 영어는 ‘일레븐’ ‘트웰브’처럼 완전히 다른 단어를 필요로 한다. 우리말은 14개 단어로 억 단위까지의 모든 숫자를 나타낼 수 있지만 영어는 24개 단어가 필요하다. 10단위마다 끊어 읽으면 10진법 연산을 이해하기도 더 수월하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계산을 잘하고 암산에도 능한 것은 이런 언어적 특성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실제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상위권을 아시아 학생들이 싹쓸이하고 있다. 하지만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의 역대 수상자 60명 중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한 명도 없다(일본인은 3명이다). 계산 능력과 수학적 사고력은 다른 능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산술학과 대수학이 발달했지만 기하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연역적 추론이 발달하지 못했다.
동아시아에서 산술이 발달한 것은 단순히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산술은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치수사업을 벌이는 데도 필요한 기술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이루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산술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이룬 한반도도 사정은 비슷했다. 조선시대에는 회계나 세무 일에 종사하는 관리들을 뽑는 ‘산과’라는 과거 시험이 있었다.*
산술은 학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이다. 개수를 헤아리고, 치수와 무게를 재는 데 요긴한 기술이다. 중국 상인들의 거래 기술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상인들만이 아니라 관리나 학자들도 소매깃 속에 저울을 넣어 다니면서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관습이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 출신 사신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에 몰두한 반면 실용적인 분야는 중인계급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성리학이 수학이나 과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수학이 수를 세는 기술에서 나왔고, 기하학이 땅의 넓이를 측량하는 기술에서 출발했으니 수학의 출발은 실용성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실용을 넘어 수와 도형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원리를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없이는 기술 발달에 한계가 있다. 원주율을 모르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고, 지구와 화성의 공전 속도를 모르면 화성 탐사선을 보낼 수 없다.
문제풀이식 수학교육이 아니라 연역적 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유클리드의 『원론』 등을 번역 출간하면서 서구의 연역적 학문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수학이 패턴의 예술이라 불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문제풀이에 능숙하다 해도 수학을 아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기보다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신비를 엿보는 놀이 같은 것이다. 과학과 기술에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수학의 목적은 아니다. 수학의 세계는 수학자들에게도 어려운 세계일 것이다.(수학자들이 대체로 겸손한 이유가 그래서일일까.)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용어도 낯설고 개념도 어렵고 연역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뒤늦게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인이 수학 공부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세계에 겸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것이 수학 공부의 가장 중요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와 조심스럽게 친해지기. 무리수와 허수를 품고 있는 수의 세계가 끝내 알 수 없는 세계이듯이,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이도 사실은 무리수만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앎은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근원적인 앎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 방정식의 근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 방정식이 몇 차 방정식인지, 미지수가 몇 개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삶이 다하기 전에 가능한 더 많은 해를 구할 수 있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 실용적인 분야를 담당하는 관리를 뽑는 잡과에는 산과 외에도 역과(통역), 율과(법률), 의과(의료), 음양과(천문지리) 등이 있었는데, 주로 향리나 서얼 출신이 응시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원주율 π 백만 자리까지를 구해서 만든 책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사이에서
수학은 패턴의 예술이라 일컬어진다. 수와 도형에서 패턴을 발견하여 이를 군더더기 없는 공식과 정리로 표현한다. 일찍이 유클리드는 10개밖에 되지 않는 공리에서 465개나 되는 명제들을 유도해냈다. 일본의 세계적인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수학의 본질이 ‘조화’이며, 그 중심은 ‘정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는 만물 사이에 오가는 마음을 일컫는다. 만유의 연결성에 대한 자각이다. 수학적 직관력이 시적 감수성과 통한다는 폴 록하트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는 법칙을 넘어선 세계도 있음을 안다. 무리수는 법칙이 없는 수다. 소수점 아래도 법칙 없이 무한히 이어지지만 무한소수들 사이에도 법칙이 없어 어떤 수가 무한소수인지를 쉽게 확인하기 힘들다. 인간의 머리로 풀 수 없는 세계가 있기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고,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수학이기도 하다. 근대수학인 위상수학과 해석학으로 넘어오면 수학에도 경외심이 생겨난다.
수학의 세계가 ‘그러므로(=, ∴)’의 세계라면, 다른 한 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는 법칙의 세계를 대변하는 반면 ‘그럼에도’는 사랑의 세계를 대변한다. 법칙의 세계가 인과응보의 세계라면 사랑의 세계는 용서와 이해의 세계다. 인간의 삶에서 두 세계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법(율법)과 사랑은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무(0)와 무한대(∞)라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 덕분에 온갖 수가 존재할 수 있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을 찾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 줄 아는 사람, 그럼에도 그 법칙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잃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미국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판사로 재직하던 대공황 시절 손녀를 위해 빵을 훔친 할머니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내린 판결은 법칙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의 시민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나 자신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여러분들에게도 각자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건네받은 할머니는 벌금 10달러를 낸 후 나머지 돈을 갖고 법정을 떠났다고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법칙만이 아니다. 수학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법칙 너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무한의 세계가 있음을 동시에 깨닫게 해준다. 법칙 없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처럼. 대안적인 수학교육의 길을 찾는 과정이 ‘그러므로’와 ‘그럼에도’가 공존하는 세상의 비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이 될 수 있다면, 수학은 우리를 철학과 종교의 세계로도 안내해줄 것이다.
π, 신의 다른 이름
수학은 신비로운 학문이다. 일찌기 그 신비에 눈을 떴던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모든 존재를 수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두 변이 1인 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가 √2 =1.4147…라는 알 수 없는 소수임을 알고는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만물을 정수와 정수의 비율인 분수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제자 히파수스가 그 사실을 발설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어쩌면 자신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신비의 껍데기만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수는 1에 대한 비례를 나타낸다. 1=1/1, 2=2/1...처럼 모든 정수에는 /1이 숨어 있다. 정수의 비례(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수를 유리수(有理數), 그렇지 않은 수를 무리수(無理數)라 한다. 법칙(理) 있는 수, 법칙 없는 수라는 뜻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수와 헤아릴 수 없는 수로 정의할 수도 있다.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원주율(&pi=3.14159...)은 대표적인 무리수다. 무리수가 발견되면서 기하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무한소수로 이어지는 ‘무리수’라는 이상한 수야말로 이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는 수가 아닐까. 이 무리수들도 유리수와 마찬가지로 무한히 존재한다. π는 이 세계가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임을 웅변해준다. 원의 둘레 나누기 지름 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 π가 나온다. 분명 둘레도 한정되어 있고 지름도 정해져 있는데 그 비율은 한정될 수 없는 수라니…. 하지만 아무리 작은 원도 아무리 큰 원도 그 비율은 똑같다. 혹 아닌 게 있을지도 모른다며 π의 소수점 아래를 백만 자리까지 구해본들 시간낭비다.
가장 완전하고 보편적인 형태인 원이 정수의 비가 아니라 딱 떨어지지 않는 수의 비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무리수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법칙이 없는 수이지만 관계 속에서는 명확한 법칙에 의해 정의된다. 수학은 그 법칙을 밝히는 학문이다. 비례는 곧 관계를 나타낸다. 세상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면 달리 말해 세상은 비례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하면서 완전한 도형, 이 우주에서 가장 흔한 형태인 ‘원’에 숨어 있는 이 비밀 속에 삶과 죽음의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유한한 형태 속에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지탱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무한한 ‘무엇’이다.
테스트
수는 무한하다. 그런데 그 무한하고 알 수 없는 수의 세계를 지탱하는 수가 0이다. 아무것도 없음, 無가 모든 있음과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다니! 없음을 뜻하는 기호가 동그라미인 것도 여러 모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존재(有)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원을 없음(無)의 기호로 삼은 것도 그렇지만, 그 원을 원답게 만드는 알 수 없는 수 π가 그 속에 숨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없음과 있음. 알 수 없는 세계와 알 수 있는 세계, 그 오묘한 조화 속에 우주가 펼쳐지고 우리의 삶이 지탱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듯이,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π도 그 무엇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모든 원의 둘레가 지름의 3.1415926...배가 되는 이유를 안다면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그런 의미에서 신의 또 다른 이름을 π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나님, 야훼, 알라, 브라만… 그 수많은 이름들보다 신의 본성을 표현하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이름일 것이다. π가 초월수라 불리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정확한 원주율 값을 얻고자 애를 썼다. 16세기 독일 수학자 루돌프는 거의 평생을 바쳐 소수점 아래 35자리까지 계산해내고는 자신의 묘비에 그 수를 새겨주기를 바랬다고 한다. 몇 해 전 일본에서는 슈퍼컴퓨터의 힘을 빌어 π의 소수점 32억 자리까지 계산해냈다. 슈퍼컴퓨터도 신의 옷자락 한 끄트머리도 붙들기가 어렵다. 사실 붙들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π값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발사와 같은 경우도 소수점 다섯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3.1416 정도 값이면 충분하다. 일상의 현실을 위해 신비를 끝까지 파헤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무리수는 삼각형, 원 같이 가장 단순한 도형 속에 숨어 있는 무한성을 일깨워준다. 그렇듯이 무한과 신비는 바로 우리 주변,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신 또한 그렇게 자신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바로 우리 곁에서 미소를 띠고….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신비로움에 눈을 뜰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의 역할일 것이다. 그리하여 경이감 속에서 배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면, 무한소수의 그 막막함을 즐기며 수의 바다에서 유영할 수 있다면 수학교육 또한 성공한 것이리라.
수학의 생명, 비실용성
중국과 한국, 일본 아이들이 서구 아이들보다 계산을 잘하는 이유가 언어 때문이라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한자문화권 언어는 숫자를 10단위마다 끊어 읽고, 수를 표기하는 낱말 수도 인도유럽어에 비해 적다. 11, 12를 한국어로 읽으면 ‘십일’ ‘십이’, 중국어로는 ‘스이’ ‘스얼’, 일본어로는 ‘쥬이치’ ‘쥬니’인데, 영어는 ‘일레븐’ ‘트웰브’처럼 완전히 다른 단어를 필요로 한다. 우리말은 14개 단어로 억 단위까지의 모든 숫자를 나타낼 수 있지만 영어는 24개 단어가 필요하다. 10단위마다 끊어 읽으면 10진법 연산을 이해하기도 더 수월하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계산을 잘하고 암산에도 능한 것은 이런 언어적 특성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실제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상위권을 아시아 학생들이 싹쓸이하고 있다. 하지만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의 역대 수상자 60명 중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한 명도 없다(일본인은 3명이다). 계산 능력과 수학적 사고력은 다른 능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산술학과 대수학이 발달했지만 기하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연역적 추론이 발달하지 못했다.
동아시아에서 산술이 발달한 것은 단순히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산술은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치수사업을 벌이는 데도 필요한 기술이다. 중국은 일찍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이루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산술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중앙집권국가를 이룬 한반도도 사정은 비슷했다. 조선시대에는 회계나 세무 일에 종사하는 관리들을 뽑는 ‘산과’라는 과거 시험이 있었다.*
산술은 학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이다. 개수를 헤아리고, 치수와 무게를 재는 데 요긴한 기술이다. 중국 상인들의 거래 기술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상인들만이 아니라 관리나 학자들도 소매깃 속에 저울을 넣어 다니면서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관습이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 출신 사신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에 몰두한 반면 실용적인 분야는 중인계급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성리학이 수학이나 과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수학이 수를 세는 기술에서 나왔고, 기하학이 땅의 넓이를 측량하는 기술에서 출발했으니 수학의 출발은 실용성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실용을 넘어 수와 도형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원리를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없이는 기술 발달에 한계가 있다. 원주율을 모르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고, 지구와 화성의 공전 속도를 모르면 화성 탐사선을 보낼 수 없다.
문제풀이식 수학교육이 아니라 연역적 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유클리드의 『원론』 등을 번역 출간하면서 서구의 연역적 학문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수학이 패턴의 예술이라 불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문제풀이에 능숙하다 해도 수학을 아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기보다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신비를 엿보는 놀이 같은 것이다. 과학과 기술에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수학의 목적은 아니다. 수학의 세계는 수학자들에게도 어려운 세계일 것이다.(수학자들이 대체로 겸손한 이유가 그래서일일까.)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용어도 낯설고 개념도 어렵고 연역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뒤늦게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인이 수학 공부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세계에 겸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것이 수학 공부의 가장 중요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낯선 세계와 조심스럽게 친해지기. 무리수와 허수를 품고 있는 수의 세계가 끝내 알 수 없는 세계이듯이,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이도 사실은 무리수만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닐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앎은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근원적인 앎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 방정식의 근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 방정식이 몇 차 방정식인지, 미지수가 몇 개인지조차도 모르지만, 삶이 다하기 전에 가능한 더 많은 해를 구할 수 있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 실용적인 분야를 담당하는 관리를 뽑는 잡과에는 산과 외에도 역과(통역), 율과(법률), 의과(의료), 음양과(천문지리) 등이 있었는데, 주로 향리나 서얼 출신이 응시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