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민주주의와 리더십

민들레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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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과 민주주의 사이

 18년째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는 참 어려운 문제라는 걸 매번 절감하곤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 다른 성장과정을 겪고, 다른 조건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에서 공존의 질서와 규범을 합의하고 유지하는 일은 인류가 감당해야 할 최대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가끔 민주주의를 어떤 이상적 상태, 일정한 전제가 충족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상태로 보는 인식을 마주하게 된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평등한 문화, 다른 의견이나 주장을 상대방이 다치지 않게 표현할 수 있고 상대의 언어를 왜곡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집단의 결정을 수용하고 내 생각이 다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부단히 설득하는 인내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가 출현한 이래 지구상에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 적은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향한 인류의 오랜 고민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살아왔던 역사를 보면, 위계는 인간들에게 참으로 편리하고 친숙한 질서인 것 같다. 수렵사회에서 우두머리의 강한 리더십은 안전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고, 농경사회에서 고령자의 농익은 경험은 생명과 안전을 유지하는데 또 필수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민주주의의 실험이 등장한 것도 귀족정과 참주정의 오랜 경험을 거친 뒤였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고령자의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 많이 아는 이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담당하는 가부장의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여러 가지 위계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일인 지배자나 소수 지배집단이 항상 선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린 다는 보장만 있다면, 그만큼 효율적인 질서도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리는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온갖 골치 아픈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공동체의 안전을 도모하고, 내부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여 혼란을 줄이며, 생계유지를 위해 필요한 각종 인프라를 구축하고, 한정된 자원을 합리적 원칙에 따라 배분하는 일은 동서고금의 어느 공동체나 직면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다.

 

 효율성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민주주의만큼 비효율적인 질서도 없다. 한 가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재산이 있거나 없거나, 현명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여자거나 남자거나 간에 모두에게 의견을 말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어떤 규칙을 사용하든 전체가 승복 가능한 방식으로 다수의 결정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체제는 1명의 결정자나 소수의 결정자가 이끄는 질서보다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등장한 것은 ‘항상 선하고 옳은 소수’의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였다. 언제든 나쁜 소수가 출현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다수의 운명을 내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달은 후에야,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비효율적이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체제가 그나마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평화롭게 잘 살아가던 공동체에 나쁜 소수가 등장하여 전쟁을 벌이거나 공동체의 자원을 전횡하게 되면 한순간 공동체가 괴멸되는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다수에게 나쁜 소수가 내릴 결정의 위험을 분산시킨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이미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잘 훈련된 구성원들을 전제로 한 질서가 아니다. 이때 평범한 다수는 당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 가끔 합리적이지만 대개는 감정에 휘둘리고, 공익보다는 사익에 더 민감하며, 불충분한 정보환경에서 부정확한 판단을 내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때가 더 많은 그런 사람들. 그래서 민주주의가 항상 선하고 올바른 결정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보통선거권 체제는 아니었지만 히틀러는 당대 선거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어 선출된 자였다. 보통선거권이 보장된다고 해도, 다수의 결정이 결과의 선함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라크 침공을 결정했을 때 미국인의 압도적 다수는 그 결정을 지지했다. 근대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핵심요소이긴 하지만, 선거권위주의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지나온 역사가 그걸 증명하지 않는가.

 

 여전히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것은 맞다. 하지만 다수의 결정이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확률을 높이려면 다른 장치들이 필요했고, 인류는 여러 부대장치들을 민주주의에 장착했다. 다수의 결정이 일순간 다수의 전횡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판들을 만들었고, 각 구성원들이 더 정확한 판단에 이르도록 돕는 정보환경을 위해 여러 원리와 제도들을 고안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이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원리가 된 것은 민주주의에서 결정의 주체가 되는 구성원들이 더 선한 결정에 이를 확률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는 그저 인간본성에 따라 이른 자연적 귀결이라기보다 인류의 경험과 학습이 누적되어 만든 일종의 고안물이다. 그랬기에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민주주의 훈련과 학습도 중요한 요소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 훈련이란 국가 혹은 공동체의 어느 특정 집단이 만들어 주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 사회의 전체 시스템과 제도, 전체 구성원들의 행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전 과정으로부터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주장되는 국가규제적인 민주주의 이해는 실상 민주주의와 무관할 뿐 아니라 해롭다. 국가가 나서서 나쁜 정보와 좋은 정보를 가리고 허위사실유포죄, 비방죄, 모욕죄 등으로 정보를 제약하는 것은 민주주의 훈련에 매우 해악적인 대표적인 행위들이다.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정보환경은,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를 판단할 권리를 각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제한 없는 정보 교환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시민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정보,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판별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중대결정을 해야 할 때 그 경험과 학습의 성과가 나타날 수 있다. 반대로 제약된 정보환경에서 주어

진 경로에 따른 판단만 훈련받은 사람은 공동체의 중대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도 누군가가 미리 설계해놓은 결정에 이르기 쉽다. 나쁜 소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민주주의가 나쁜 소수의 위험을 정당화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학교나 기관에서의 교육이 곧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편견도 상당하다. 예컨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민주주의 훈련이 더 잘 되어 있다는 편견이 이에 해당한다. 민주주의에 필요한 훈련은, 자신의 생계와 생활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하거나 이익추구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나의 권리만큼 소중한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것은 경험 없이 머리로 습득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제도적 장치들이 갖춰진다 해도 여전히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체제다. 다수결이 나쁜 결정에 이를 확률을 0%로 만들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다수가 내린 결정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조차 다수결에 맡겨지는 게 이 체제의 특성이므로, 오랜 시간이 흘러 결정 당시 소수가 다수가 되었을 때 당대 결정의 악함을 말할 수 있을지언정 당대엔 옳고 그름의 판단조차 다수의 결정에서 독립적이지 않은 것이 이 체제의 특성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진행형인 체제다. 주기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바뀌며 그들이 대면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중대 문제도 달라진다. 사회변화와 구성원의 변화 속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나쁜 다수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서의 리더십

 리더십이란 조직이나 집단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정신이나 규범, 능력 정도로 정의될 수 있다. 사람에게 속한 특정한 정신이나 능력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리더십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민주주의의 불완전성도 결국 원리와 규범을 내면화하고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는데 좀더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능력은,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도를 원리에 맞게 운영해가는 것이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집단 내부의 갈등을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조정해 합의된 결정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집단들이 있고 각 집단이 대표를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다. 선거를 할 수도 있지만 순번제나 추첨을 활용하기도 하고 선임자 우선원칙을 적용하기도 한다. 혹은 명망가들이 스스로 대표를 자임하기도 한다. 각 집단은 성격이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제도를 두기도 하고, 대표의 권한도 합의하에 사전에 규정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렇듯 다양한 제도와 권한을 가지는 대표들이 공통적으로 감당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합의된 결정을 만들어내고 집행을 책임지는 일이다.

 

동호회 대표는 모임 일정을 잡고 장소를 정하며 모임을 진행하는 일을 담당할 것이다. 학생회 대표는 학생들의 중대 문제들에 대해 논의를 조직하고 결정을 만들어내며 결정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합의된 결정을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기 마련이고, 다른 의견들 사이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사전에 만들어 놓은 규칙에 정해져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할 때가 많다. 비공식적인 논의를 조직해야 할 때도 있고 잠정적인 타협안을 만들어 협상을 유도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대개 일일이 조직의 규칙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국 그 조직의 목표와 규율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의 창조적 노력이 투영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이렇게 볼 때 리더십은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노력을 중요한 요소로 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리더십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리더십은 조직이나 집단을 전제로 한 개념이며, 개체로 존재하는 뛰어난 인간에게 기대되는 능력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훌륭한 석학이나 문학가에게 리더십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리더십의 다른 중요한 요소는 좋은 리더십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이나 집단 자체의 능력’이다. 집단의 구조와 문화가 대표들의 공간을 보장하지 않을 때 리더십은 발휘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발생했던 ‘통합진보당 사건’은 집단과 리더십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그 당의 국회의원이나 개별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에 훌륭한 식견을 가졌을 수 있고, 다른 집단의 대표들이었다면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개개인이 살아온 이력을 보면 나름 다른 집단이나 조직의 대표로서 직무를 수행해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 사건에서 그들은 파국적 갈등을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조정할 수 없었고, 합의된 결정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당헌, 당규에 명시된 의사결정 절차는 준수되지 못했고, 사전에 합의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결정도 조직의 의견으로 존중받지 못했으며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승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사안에 따라 찬성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적인 리더십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질적인 구성원들 사이에서 집단의 결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사전에 합의했던 규칙이 작동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합의된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의견에 승복이 가능해야 한다. 이견을 가진 소수의 구성원들이 기존의 다수결정을 뒤집기 위해서는 사전에 합의했던 다른 절차를 이용하거나 자신의 의견이 다수의 지지를 얻을 때까지 설득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결정을 무력화하려 든다면 사실 민주주의 테두리 안에서 다른 대안을 찾기는 어렵다. 폭력을 동원하는 등 민주주의가 아닌 방식의 해결밖에 남지 않게 된다.

 

 한 나라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거나 한 집단이 민주적 규율에 따라 성립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집단의 경계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겠다는 합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전제 위에서만 내부 갈등을 해결하고 결정을 만들어낼 규칙이 작동할 수 있다. 이럴 때만이 당장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에 대해 승복할 이유가 생기고, 다시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가능해진다. 특정한 조건에 따라 경계 밖에서, 혹은 사전에 합의한 규칙이 아닌 예외적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겠다는 구성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에서는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이질적인 시민들이 ‘하나의 경계’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항상 현재진행형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 체제는,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별한 이해와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 노력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수행이 아니라, 현실의 제도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집단적 실천이다. 이 집단적 실천을 만들어내는 데 리더십의 창조적 영역은 중요한 구성요소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상황을 해석하고, 그 안에서 중대 문제들을 정의하고, 갈등의 민주적 해결 방안을 찾으며 합의에 의한 결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는 민주주의의 빈 공간이다. 인간의 창조적 노력은 영원히 불완전한 체제인 민주주의의 빈 공간을 채우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이 글은 2013년 8월에 발행된 격월간 <<민들레_89호>> 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서복경 :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으로 재직했고, 지금은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에서 한국의 선거, 정당, 의회정치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성미산학교 학부모이기도 하다. stillhuman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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