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는 우정으로 통한다
“놀면 안 돼, 놀면 안 돼!”를 주문처럼 외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놀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철없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교육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중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워주자면서 자유학기제가 도입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날마다 100분씩 놀이 시간을 주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자 강원도교육청과 전북교육청도 이에 동참했다. 최근에는 전국진보교육감협의회에서 어린이 놀이헌장을 선포했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일까.
근대 이후 부국강병을 추구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해왔다. 경쟁구조 속으로 아이들을 밀어넣고는 숨도 못 쉬게 조이다가 아이들이 점점 망가지는 낌새가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 조금 풀어주다 또 다시 조이는 상황을 반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사회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리 사회의 경우 지금은 조금씩 풀리고 있는 단계인 듯하다. 일제고사를 부활시키면서 아이들을 못살게 굴더니, 이제 너무 못살게 굴었나 하고 반성하는 기미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런 반성이 얼마나 근본적인 성찰로 다가갈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리 쉽지 않을 게다. ‘더 잘 살아보자’는 욕망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한 이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럼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설령 이 고리를 아주 끊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이들에게 ‘노는 맛’을 알게 하는 거다. 그래서 제대로 놀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거다. 그러면 문화가 바뀐다. 일을 더 해서 돈을 좀더 벌기보다 노는 시간을 확보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도 좀더 인간적인 사회로 바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고 놀이 시간을 확보해주려는 어른들의 노력은 반가운 일이지만, 놀이는 무엇보다 여럿이 함께 어울리는 데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여럿이 함께 어울려 노는 것처럼 재미난 일도 드물다. 무엇보다 웃음은 사람들이 어울릴 때에야 터져 나온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여럿이 어울려서 해야 제맛이 난다. 영화 <써니>에서 소녀들이 그렇게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면 그처럼 빛나는 십대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놀이본능을 일깨우는 길은 우정을 일깨우는 길로 통한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경쟁문화에서 건강한 놀이문화가 꽃피기는 힘들다.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 십대들의 놀이문화를 잘 가꾸는 데 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아이들을 경쟁 속으로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협력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건강한 경쟁심이 아닌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심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죽이게 된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삶을 염려한다면, 그리고 창의성을 키우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줘야 한다. 친구들끼리 어울려 노는 가운데 창조성도 살아나고 세상을 살아갈 힘도 얻게 된다. 문화예술교육의 바탕 또한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창의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아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친구를 돌려줘야 한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뭔가를 작당하고 만들어내는 그 에너지가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놀이는 우정을 키우고, 우정은 놀이를 만들어낸다. 이 선순환의 고리가 아이들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리는 고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만 놀아야 할까?
놀이는 어린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삶에서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자. 어린 시절에 구슬치기, 비석치기 하면서 날 저무는 줄 모르고 놀았던 어른들은 지금 잘 놀 줄 아는가? 우리 사회 어디나 어른들의 놀이문화는 비슷하다. 술집 그 다음은 노래방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석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뭔가 다른 놀이문화가 필요한데 지금의 어른 세대는 그걸 갖추지 못한 것 같다. 고스톱과 내기 골프 정도를 추가할 수 있을까?
그나마 자기 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놀거리를 찾기가 비교적 쉽지만,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고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어려서 아무리 많이 놀았어도 청소년기에 제대로 놀아보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잘 놀 줄 모르는 게 아닐까? 대개 십대 시절에 경험한 문화가 성인기에까지 이어진다. 이십대 이후의 삶의 질은 대체로 십대 시절의 삶의 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아는 법이다. 최근 직장인 밴드가 유행하고, 온갖 동호회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그래도 놀이에 목마른 어른들이 나름의 살 길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십대 시절에 조금이라도 놀아본 사람들이 많다. 기타줄이라도 튕겨본 거다.
놀면 안 되는 줄 알았던 모범생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잘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책이나 보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관을 찾는 정도다. 시험공부 외에 그나마 하던 짓들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 취미란에는 거의 대부분 독서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집에 전축이라도 있는 아이들은 음악감상을 꼽기도 했다. 영화관은 단체관람 때나 가는 곳이거나, 간혹 날라리들이 선생님 눈을 피해 드나드는 곳이었다.(요즘처럼 밥 먹듯이 일상이 된 영화 관람 그 자체를 놀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벼르고 벼르다 큰 맘 먹고 찾게 되는 영화관, 그것도 선생님 눈을 피해 즐기는 것이야말로 놀이가 아니었을까. 그러고서 교실에서 떠벌이게 되는 무용담은 놀이의 여흥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골목에서 놀 수도 있었지만 십대가 되면 더 이상 골목에서 놀기도 어려웠다. 시골 아이들은 그나마 산을 찾거나 강이나 바다에서 놀 수도 있었지만 도시 아이들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수영장이나 스케이트장을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은 딱히 놀거리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거나 농구를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저렴하게 놀 수 있는 길이었다. 최근 산행 바람이 불면서 아웃도어 시장이 달아오른 것도 어린 시절 자연과 친숙했던 세대가 먹고살 만해지면서 다시금 자연에 눈을 뜨면서 생겨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좀더 살 만한 이들 사이에서 골프 바람이 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문화센터를 찾는 것이 나름 놀거리를 찾는 길이 되고 있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문화예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셈이다. 춤과 노래, 시와 그림 같은 모든 문화와 예술은 사실상 인간의 놀이본능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놀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호모 루덴스』 저자 하위징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각성의 힘은 그 시대에 널리 퍼진 놀이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는 곧 ‘놀이의 황금기’라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놀이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는 놀이도 사업의 대상이 되어 산업의 일부가 되고 있다. 여가산업은 갈수록 덩치를 키워가고 있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산업 역시 사교육 시장 못지않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간다. 거기에 ‘치료’를 빙자한 갖은 요법들이 등장하면서 놀이는 점점 다른 뭔가를 위한 수단이 되어간다. 어른들에게 놀이는 다음의 노동을 위한 휴식과 재충전의 수단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치료와 학습을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잘 놀아야 공부도 잘한다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아이들은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놀이 속에서 배운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어울려 놀면서 진짜 중요한 ‘삶의 기술’을 배운다. 죽었다 살아나고, 죽었다 살아나는 놀이를 하면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친구들과 밀고 당기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그런 건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놀이다운 놀이의 본질 중 하나는 ‘무목적성’이다. 아이들은 그저 논다. 무엇을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고 싶어 노는 것이다. 그렇게 노는 가운데 많은 일들이 저절로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나고, 성장도 일어나고, 창의성도 꽃핀다.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놀이가 빠진 삶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삶이다. 놀이본능은 곧 삶의 본능이다. 이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자기답게 사는 길이다.
놀이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마도 모든 동물들이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새끼들이 뒹굴며 노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포유류에게는 유전자에 놀이본능이 내재된 것 같다. 학원을 뺑뺑이 도는 그 틈새를 비집고서라도 노는 것이 아이들이다. 시간과 공간만 주어지면 이 본능은 깨어나게 되어 있다. 이는 사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비싼 원목으로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친구들이다. 아이들의 놀이본능을 가로막는 으뜸 장애물은 다름아닌 어른들이다. 그중에서도 애들이 노는 꼴을 못 봐주는 부모들이다.
최근 들어 놀이터를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놀이터는 사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한 차선책일 따름이다. 어떤 놀이터도 모래와 자갈, 강물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천연의 놀이터를 흉내낼 수 없다. 어릴 적 강에서는 해마다 한두 명씩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강은 매혹적이었다. 아이들은 여름날이면 강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어른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삶이란 그렇게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임을 알았던 것일까.
강물이 오염되고 수영장이 늘어나면서 강변을 찾는 이들도 사라지고,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도 사라졌다. 강에서 노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강변을 도배해서 강을 망쳐놓고는 삐까번쩍한 놀이터를 안겨준들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강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놀이터라도 안겨줘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인 것을.
자연을 안겨줄 수 없다면 괜찮은 놀이터라도 만들어주고, 좀더 자라면 친구를 만나게 할 일이다. 친구랑 어울려 놀면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즐길 수 있게 하자. 재미있는 일은 놀이가 되고 재미없는 놀이는 고역이 되는 법이다. 리누스도 “걍 재미로” 하다 보니 리눅스를 만들게 되었다지 않는가. 자기가 하는 일을 놀이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은 인간의 가장 고등 능력일 것이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누가 아는가, 잘 놀다보면 공부를 즐길 줄도 알게 될지. 사실 마지못해 하는 공부가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일하며 놀며 배우며
노는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여가를 보내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싸움 구경처럼 놀이 구경도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스스로 노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안방과 영화관에서 구경꾼의 인생을 사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구경꾼의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 드라마의 주역이 되어 제대로 살아보게 돕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바보 만들기』를 쓴 개토는 정규 학교에서 스스로 고안한 ‘게릴라 학습’을 시도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현실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포장된 세상을 화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지워진 구경꾼으로서의 삶을 집어던질 수 있도록 돕겠다. 그래서 자기 삶의 플레이어가 되도록 할 거다.”(『수상한 학교』 168쪽) 아이들은 학교 바깥으로 나가 인턴십과 다양한 활동들을 시도하며 “삶의 바다에 풍덩 빠지면서” 놀랍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상의 삶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놀이의 세계가 될 수 있다. 어른들의 삶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흥미거리다. 그 삶이 비록 어른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일지라도. 아이들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어른의 세계에 둘러친 울타리를 허물 일이다. 그리고 교과서라는 가짜 책과 무슨무슨 체험이라는 가짜 삶 말고 진짜 책과 진짜 삶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잘 이용(?)하면 무궁무진한 놀잇감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삶터를 놀이터로 바꿀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일하며 놀며 배우며’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 일터가 가정이든 회사든 학교든 일과 놀이와 배움이 함께 일어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동료와 친구처럼 잘 지낼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된다. 어려서 친구랑 어울려 잘 놀다보면 그런 능력은 저절로 길러진다. 일과 놀이와 배움에서 공통된 점은 자기주체성이 살아 있고 협력할 줄 알 때 즐겁게 더 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녕 아이들이 내일 행복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면 오늘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충분히 놀게 할 일이다. 내일은 오늘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기에.
_현병호 (민들레 발행인)
놀이는 우정으로 통한다
“놀면 안 돼, 놀면 안 돼!”를 주문처럼 외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놀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철없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교육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중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워주자면서 자유학기제가 도입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날마다 100분씩 놀이 시간을 주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자 강원도교육청과 전북교육청도 이에 동참했다. 최근에는 전국진보교육감협의회에서 어린이 놀이헌장을 선포했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일까.
근대 이후 부국강병을 추구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해왔다. 경쟁구조 속으로 아이들을 밀어넣고는 숨도 못 쉬게 조이다가 아이들이 점점 망가지는 낌새가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 조금 풀어주다 또 다시 조이는 상황을 반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사회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리 사회의 경우 지금은 조금씩 풀리고 있는 단계인 듯하다. 일제고사를 부활시키면서 아이들을 못살게 굴더니, 이제 너무 못살게 굴었나 하고 반성하는 기미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런 반성이 얼마나 근본적인 성찰로 다가갈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리 쉽지 않을 게다. ‘더 잘 살아보자’는 욕망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한 이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럼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설령 이 고리를 아주 끊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이들에게 ‘노는 맛’을 알게 하는 거다. 그래서 제대로 놀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거다. 그러면 문화가 바뀐다. 일을 더 해서 돈을 좀더 벌기보다 노는 시간을 확보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도 좀더 인간적인 사회로 바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고 놀이 시간을 확보해주려는 어른들의 노력은 반가운 일이지만, 놀이는 무엇보다 여럿이 함께 어울리는 데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여럿이 함께 어울려 노는 것처럼 재미난 일도 드물다. 무엇보다 웃음은 사람들이 어울릴 때에야 터져 나온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여럿이 어울려서 해야 제맛이 난다. 영화 <써니>에서 소녀들이 그렇게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면 그처럼 빛나는 십대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놀이본능을 일깨우는 길은 우정을 일깨우는 길로 통한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경쟁문화에서 건강한 놀이문화가 꽃피기는 힘들다.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이 십대들의 놀이문화를 잘 가꾸는 데 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아이들을 경쟁 속으로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협력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건강한 경쟁심이 아닌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심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죽이게 된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삶을 염려한다면, 그리고 창의성을 키우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줘야 한다. 친구들끼리 어울려 노는 가운데 창조성도 살아나고 세상을 살아갈 힘도 얻게 된다. 문화예술교육의 바탕 또한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창의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아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친구를 돌려줘야 한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뭔가를 작당하고 만들어내는 그 에너지가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놀이는 우정을 키우고, 우정은 놀이를 만들어낸다. 이 선순환의 고리가 아이들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리는 고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만 놀아야 할까?
놀이는 어린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삶에서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자. 어린 시절에 구슬치기, 비석치기 하면서 날 저무는 줄 모르고 놀았던 어른들은 지금 잘 놀 줄 아는가? 우리 사회 어디나 어른들의 놀이문화는 비슷하다. 술집 그 다음은 노래방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석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뭔가 다른 놀이문화가 필요한데 지금의 어른 세대는 그걸 갖추지 못한 것 같다. 고스톱과 내기 골프 정도를 추가할 수 있을까?
그나마 자기 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놀거리를 찾기가 비교적 쉽지만,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고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어려서 아무리 많이 놀았어도 청소년기에 제대로 놀아보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잘 놀 줄 모르는 게 아닐까? 대개 십대 시절에 경험한 문화가 성인기에까지 이어진다. 이십대 이후의 삶의 질은 대체로 십대 시절의 삶의 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아는 법이다. 최근 직장인 밴드가 유행하고, 온갖 동호회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그래도 놀이에 목마른 어른들이 나름의 살 길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십대 시절에 조금이라도 놀아본 사람들이 많다. 기타줄이라도 튕겨본 거다.
놀면 안 되는 줄 알았던 모범생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잘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책이나 보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관을 찾는 정도다. 시험공부 외에 그나마 하던 짓들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 취미란에는 거의 대부분 독서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집에 전축이라도 있는 아이들은 음악감상을 꼽기도 했다. 영화관은 단체관람 때나 가는 곳이거나, 간혹 날라리들이 선생님 눈을 피해 드나드는 곳이었다.(요즘처럼 밥 먹듯이 일상이 된 영화 관람 그 자체를 놀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벼르고 벼르다 큰 맘 먹고 찾게 되는 영화관, 그것도 선생님 눈을 피해 즐기는 것이야말로 놀이가 아니었을까. 그러고서 교실에서 떠벌이게 되는 무용담은 놀이의 여흥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골목에서 놀 수도 있었지만 십대가 되면 더 이상 골목에서 놀기도 어려웠다. 시골 아이들은 그나마 산을 찾거나 강이나 바다에서 놀 수도 있었지만 도시 아이들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수영장이나 스케이트장을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은 딱히 놀거리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거나 농구를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저렴하게 놀 수 있는 길이었다. 최근 산행 바람이 불면서 아웃도어 시장이 달아오른 것도 어린 시절 자연과 친숙했던 세대가 먹고살 만해지면서 다시금 자연에 눈을 뜨면서 생겨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좀더 살 만한 이들 사이에서 골프 바람이 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문화센터를 찾는 것이 나름 놀거리를 찾는 길이 되고 있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문화예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셈이다. 춤과 노래, 시와 그림 같은 모든 문화와 예술은 사실상 인간의 놀이본능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놀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호모 루덴스』 저자 하위징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각성의 힘은 그 시대에 널리 퍼진 놀이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는 곧 ‘놀이의 황금기’라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놀이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는 놀이도 사업의 대상이 되어 산업의 일부가 되고 있다. 여가산업은 갈수록 덩치를 키워가고 있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산업 역시 사교육 시장 못지않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간다. 거기에 ‘치료’를 빙자한 갖은 요법들이 등장하면서 놀이는 점점 다른 뭔가를 위한 수단이 되어간다. 어른들에게 놀이는 다음의 노동을 위한 휴식과 재충전의 수단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치료와 학습을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잘 놀아야 공부도 잘한다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아이들은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놀이 속에서 배운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어울려 놀면서 진짜 중요한 ‘삶의 기술’을 배운다. 죽었다 살아나고, 죽었다 살아나는 놀이를 하면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친구들과 밀고 당기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그런 건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놀이다운 놀이의 본질 중 하나는 ‘무목적성’이다. 아이들은 그저 논다. 무엇을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고 싶어 노는 것이다. 그렇게 노는 가운데 많은 일들이 저절로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나고, 성장도 일어나고, 창의성도 꽃핀다.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놀이가 빠진 삶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삶이다. 놀이본능은 곧 삶의 본능이다. 이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자기답게 사는 길이다.
놀이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마도 모든 동물들이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새끼들이 뒹굴며 노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포유류에게는 유전자에 놀이본능이 내재된 것 같다. 학원을 뺑뺑이 도는 그 틈새를 비집고서라도 노는 것이 아이들이다. 시간과 공간만 주어지면 이 본능은 깨어나게 되어 있다. 이는 사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비싼 원목으로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친구들이다. 아이들의 놀이본능을 가로막는 으뜸 장애물은 다름아닌 어른들이다. 그중에서도 애들이 노는 꼴을 못 봐주는 부모들이다.
최근 들어 놀이터를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놀이터는 사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한 차선책일 따름이다. 어떤 놀이터도 모래와 자갈, 강물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천연의 놀이터를 흉내낼 수 없다. 어릴 적 강에서는 해마다 한두 명씩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강은 매혹적이었다. 아이들은 여름날이면 강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어른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삶이란 그렇게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임을 알았던 것일까.
강물이 오염되고 수영장이 늘어나면서 강변을 찾는 이들도 사라지고,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도 사라졌다. 강에서 노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강변을 도배해서 강을 망쳐놓고는 삐까번쩍한 놀이터를 안겨준들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강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놀이터라도 안겨줘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인 것을.
자연을 안겨줄 수 없다면 괜찮은 놀이터라도 만들어주고, 좀더 자라면 친구를 만나게 할 일이다. 친구랑 어울려 놀면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즐길 수 있게 하자. 재미있는 일은 놀이가 되고 재미없는 놀이는 고역이 되는 법이다. 리누스도 “걍 재미로” 하다 보니 리눅스를 만들게 되었다지 않는가. 자기가 하는 일을 놀이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은 인간의 가장 고등 능력일 것이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누가 아는가, 잘 놀다보면 공부를 즐길 줄도 알게 될지. 사실 마지못해 하는 공부가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일하며 놀며 배우며
노는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여가를 보내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싸움 구경처럼 놀이 구경도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스스로 노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안방과 영화관에서 구경꾼의 인생을 사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구경꾼의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 드라마의 주역이 되어 제대로 살아보게 돕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바보 만들기』를 쓴 개토는 정규 학교에서 스스로 고안한 ‘게릴라 학습’을 시도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현실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포장된 세상을 화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지워진 구경꾼으로서의 삶을 집어던질 수 있도록 돕겠다. 그래서 자기 삶의 플레이어가 되도록 할 거다.”(『수상한 학교』 168쪽) 아이들은 학교 바깥으로 나가 인턴십과 다양한 활동들을 시도하며 “삶의 바다에 풍덩 빠지면서” 놀랍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상의 삶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놀이의 세계가 될 수 있다. 어른들의 삶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흥미거리다. 그 삶이 비록 어른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일지라도. 아이들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어른의 세계에 둘러친 울타리를 허물 일이다. 그리고 교과서라는 가짜 책과 무슨무슨 체험이라는 가짜 삶 말고 진짜 책과 진짜 삶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잘 이용(?)하면 무궁무진한 놀잇감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삶터를 놀이터로 바꿀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일하며 놀며 배우며’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 일터가 가정이든 회사든 학교든 일과 놀이와 배움이 함께 일어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동료와 친구처럼 잘 지낼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된다. 어려서 친구랑 어울려 잘 놀다보면 그런 능력은 저절로 길러진다. 일과 놀이와 배움에서 공통된 점은 자기주체성이 살아 있고 협력할 줄 알 때 즐겁게 더 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녕 아이들이 내일 행복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면 오늘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충분히 놀게 할 일이다. 내일은 오늘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기에.
_현병호 (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