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군사독재 시절에는 노골적인 길들이기 방식을 선호한 데 반해 문민독재 시대는 은밀한 방식이 선호된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집회 참가자들에게 걸핏하면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벌금형을 매겨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게 만드는 것은 양극화 시대에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은밀한 길들이기라 할 수 있다.
지금 정부와 수구 세력이 손잡고 밀어붙이고 있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에서는 다시금 노골적인 방식으로 선회하는 낌새가 엿보인다. 유신헌법 체제에서 밀어붙인 국정제를 40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시도하려는 데는 유신의 딸인 박대통령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겠지만 그 체제의 덕을 입은 기득권 세력의 동조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 억지를 일컬어 자칭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한다. 데자뷰가 느껴진다. 4대강 살리기! 멀쩡한 강을 죽이는 짓을 하면서 거기에 ‘살리기’라 이름 붙인 그 뻔뻔함과 교활함이 교육판에서 되풀이되는 모양새다. 역사도 4대강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말장난으로 자신들의 속셈을 감추는 교활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정화’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단일화’, ‘단일교과서’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강제노동수용소를 쾌락수용소, 전쟁성은 평화성, 고문 전담 기구는 애정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고 가치체계의 전도를 유도하는 대중선전술의 일종이다. 미국방부가 폭격을 ‘공중지원’,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인 손실’로 돌려 말하는 것처럼.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런 짓이 유감스럽게도 위력을 발휘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말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국사교과서는 해방 이후 1973년까지 검정제로 발행되다가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2년 뒤인 1974년 국정제로 바뀌었더랬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유신독재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시도했던 개발지상 시절의 억지를 되풀이하려는 데는 그 나름의 절박함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고 존립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바다. 친일과 독재를 통해 획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성과 상식의 기반 위에 행동해야 어느 정도 봐줄 수 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사회 기득권 세력의 뻔뻔함과 몽매함은 그 도가 지나치다.
최근 경향신문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사설(10월 8일자)에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막말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카톡 감청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한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짚고 있다. 무리한 감시와 통제는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을 낳기 마련이다. 사회의 활력이 떨어지는 조짐이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세력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임을 자라는 세대가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그것이 몇백 년, 몇천 년을 이어져온 유구한 역사인 것 같으니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너무 초조해하지들 마시라!
시대를 거스르는 무리수를 두는 데서 기득권 집단의 초조함이 읽힌다.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단 한 군데 학교에서만 선정되었다가 그마저도 학부모들의 반대로 채택이 되지 않은 데 더 자극을 받은 걸까. 하지만 무리수가 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월 2일 초중고 역사교사 1,034명(전체 역사교사의 약 20%)이 실명을 걸고 국정화를 반대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국정화를 끝내 추진할 경우 헌법소원을 통해 국정교과서 폐지운동과 대안적인 역사교육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23개 사범대 역사교육과 학생회, 학부모 단체들, 16개 역사학회에서도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대 역사학 교수 34명은 교육부장관에게 전달한 의견서에서 “하나의 역사 교재로 전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상상력과 문화 창조 역량을 크게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는 물론 경제발전에도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성명서에 말했듯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이 미래세대의 역사교육을 독점하여 정권 재창출의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꼼수 이상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상식적인 시민들의 시각일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교과서 집필을 거부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냐 거꾸로 세우기냐를 놓고 한바탕 충돌이 일어나겠지만 이번 국정화 파동이야말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시험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끝내 국정화를 밀어붙인다면 박근혜 정권에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득보다 실이 클 가능성이 높다.
만약 우여곡절 끝에 국정교과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학교 현장에서는 이를 교과서 폐지와 대안적인 역사교육의 기회로 삼아볼 만하다. 교과서 없이도 교육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수능시험이라는 굴레를 씌워 교과서를 강제하는 것은 국가주도 교육의 초라함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다. 교과서는 사실 집단적 교육에 필요한 도구이지 배움을 위한 진짜 책이 아니다. 진짜 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지성을 벼려야 할 시기에 허접한 교과서나 읽어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책의 힘은 대단하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뭘 모르고 있다. 교과서는 ‘무늬만’ 책이라는 사실을. 진짜 책의 힘은 대단하지만 교과서는 그저 시험 전까지 잠시 힘을 쓸 뿐이다. 교과서를 책장에 모셔두는 사람은 없다. 시험만 끝나면 다들 버린다. 머리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너무 걱정들 마시길. 이번 사태가 국정화를 문제 삼는 것을 넘어서 교과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교육의 본질에 한 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지난 군사독재 시절에는 노골적인 길들이기 방식을 선호한 데 반해 문민독재 시대는 은밀한 방식이 선호된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집회 참가자들에게 걸핏하면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벌금형을 매겨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게 만드는 것은 양극화 시대에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은밀한 길들이기라 할 수 있다.
지금 정부와 수구 세력이 손잡고 밀어붙이고 있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에서는 다시금 노골적인 방식으로 선회하는 낌새가 엿보인다. 유신헌법 체제에서 밀어붙인 국정제를 40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시도하려는 데는 유신의 딸인 박대통령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겠지만 그 체제의 덕을 입은 기득권 세력의 동조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 억지를 일컬어 자칭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한다. 데자뷰가 느껴진다. 4대강 살리기! 멀쩡한 강을 죽이는 짓을 하면서 거기에 ‘살리기’라 이름 붙인 그 뻔뻔함과 교활함이 교육판에서 되풀이되는 모양새다. 역사도 4대강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말장난으로 자신들의 속셈을 감추는 교활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정화’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단일화’, ‘단일교과서’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강제노동수용소를 쾌락수용소, 전쟁성은 평화성, 고문 전담 기구는 애정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고 가치체계의 전도를 유도하는 대중선전술의 일종이다. 미국방부가 폭격을 ‘공중지원’,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인 손실’로 돌려 말하는 것처럼.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런 짓이 유감스럽게도 위력을 발휘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말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국사교과서는 해방 이후 1973년까지 검정제로 발행되다가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2년 뒤인 1974년 국정제로 바뀌었더랬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유신독재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시도했던 개발지상 시절의 억지를 되풀이하려는 데는 그 나름의 절박함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고 존립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바다. 친일과 독재를 통해 획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성과 상식의 기반 위에 행동해야 어느 정도 봐줄 수 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사회 기득권 세력의 뻔뻔함과 몽매함은 그 도가 지나치다.
최근 경향신문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사설(10월 8일자)에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막말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카톡 감청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한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짚고 있다. 무리한 감시와 통제는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을 낳기 마련이다. 사회의 활력이 떨어지는 조짐이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세력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이 나라의 역사임을 자라는 세대가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그것이 몇백 년, 몇천 년을 이어져온 유구한 역사인 것 같으니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너무 초조해하지들 마시라!
시대를 거스르는 무리수를 두는 데서 기득권 집단의 초조함이 읽힌다.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단 한 군데 학교에서만 선정되었다가 그마저도 학부모들의 반대로 채택이 되지 않은 데 더 자극을 받은 걸까. 하지만 무리수가 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월 2일 초중고 역사교사 1,034명(전체 역사교사의 약 20%)이 실명을 걸고 국정화를 반대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국정화를 끝내 추진할 경우 헌법소원을 통해 국정교과서 폐지운동과 대안적인 역사교육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23개 사범대 역사교육과 학생회, 학부모 단체들, 16개 역사학회에서도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대 역사학 교수 34명은 교육부장관에게 전달한 의견서에서 “하나의 역사 교재로 전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상상력과 문화 창조 역량을 크게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는 물론 경제발전에도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성명서에 말했듯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이 미래세대의 역사교육을 독점하여 정권 재창출의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꼼수 이상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상식적인 시민들의 시각일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교과서 집필을 거부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냐 거꾸로 세우기냐를 놓고 한바탕 충돌이 일어나겠지만 이번 국정화 파동이야말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시험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끝내 국정화를 밀어붙인다면 박근혜 정권에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득보다 실이 클 가능성이 높다.
만약 우여곡절 끝에 국정교과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학교 현장에서는 이를 교과서 폐지와 대안적인 역사교육의 기회로 삼아볼 만하다. 교과서 없이도 교육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수능시험이라는 굴레를 씌워 교과서를 강제하는 것은 국가주도 교육의 초라함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다. 교과서는 사실 집단적 교육에 필요한 도구이지 배움을 위한 진짜 책이 아니다. 진짜 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지성을 벼려야 할 시기에 허접한 교과서나 읽어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책의 힘은 대단하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뭘 모르고 있다. 교과서는 ‘무늬만’ 책이라는 사실을. 진짜 책의 힘은 대단하지만 교과서는 그저 시험 전까지 잠시 힘을 쓸 뿐이다. 교과서를 책장에 모셔두는 사람은 없다. 시험만 끝나면 다들 버린다. 머리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너무 걱정들 마시길. 이번 사태가 국정화를 문제 삼는 것을 넘어서 교과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교육의 본질에 한 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