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지금, 여기’를 질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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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답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질문을 찾아가는 행위다. 때때로 답을
찾긴 찾는다. 그러나 그 답이라는 것도 기실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 위한 예
비 단계일 뿐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질문을 멈추고 답을 찾는 순간, 그 사람
은 그 정답에 따라 타성적으로 살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질문하고 답을 얻
고, 좀더 깊이 질문하고 답을 얻고, 좀더 나은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러다가
죽기 전에 관을 짜면서, 어떤 나무가 좋은지, 수의는 뭐가 좋은지 질문하고
답을 얻고, 죽기 바로 직전에는 천국이오, 지옥이오? 윤회요, 해탈이요? 질
문하고, 죽으면서는 결국 또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제 죽
는다. 너는 잘 살았나?”라고. 그러니 알고 죽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만약 그
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만 지가 알고 죽었다고 착각했을 뿐이거나 죽은
사람과 신통방통 소통하는 영매의 구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대안교육 이후가 아니라 대안교육 그
자체가 아닐까? 졸업 이후의 진로를 물음으로서 질문을 유예할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대안교육 자체를 질문해야 되는 거 아닐까? 지금 여기를 제
대로 묻는다면 진로 따위야 절로 그 질문 속에 용해되어 스스로 걸어 나오
지 않을까?

 

‘대안’은 죽을 때까지 추구해야 할 가치다. 대안이 지금과는 다른 삶, 다른
교육, 다른 사회, 다른 세상, 다른 관계, 다른 판을 꿈꾸는 것이라면 말이다.
3년, 6년 대안을 찾는다고, 대안적이었다고, 대안이 완성된다면 그것은 아
마 대안이 아니라 대체거나 대리이거나 대충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본

(시스템)은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 얄짤 없다. 대안교육을 주장한다고, 대

안교육을 실시한다고, 대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대안은 그 모든 대안의 실
패를 딛고 어렵사리 고개를 내미는, 밀고 올라오는 어떤 싹 같은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싹은, 그 대안을 완수할 수 있는 가장 큰 책임은, 가장 큰 가능성은

어쩌면 참혹한 실패를 겪은 대안교육 1세대들이자 지금 대안교육 전선에
들어선 2세대들이리라. ‘어쩌면’ 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나는 거기에 한
표 던진다. 나는 도무지 그들이 아니면, 실패와 성취, 희망과 절망을 함께 겪
은 그들이 아니면 누가 대안을 찾아낼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은 곤란과 불우의 모든 책임을 단지 시스템으로 돌릴 수는 없다.



대안은 결국 끝까지 질문하는 것이다. 끝까지 질문을 놓치지 않고, 판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수많은 질문은 그 판에서 미리 짜놓

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판 그 자체로 수렴되는 질문일지도 모르니까.
진로 문제는 살아가는 동안, 학교를 나오거나 말았거나, 젊었거나 늙었거나,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간에 생길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조건이다. 죽을 때까지

나아갈 길 ‘진로’를 묻지 않고는, 누구라도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을 가게될 뿐.

그러니까 진로는 다가올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늘 지금 여기의 문제다.

 

- 격월간 민들레 82호, 「질문이 대안이다 」, 황경민,  17~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