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수꾼이 될 것인가 간수가 될 것인가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학교폭력이라 부르면서 언어의 왜곡이 일어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학교폭력이라
정의한다면 거기에는 학생들 간의 폭력뿐만 아니라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
시스템이 안고 있는 폭력성도 문제 삼아야 마땅하다. 사실 문제의 본질은 학교폭력이 아니라 ‘폭력학교’다. 문제학생이 다른 학
생을 괴롭히는 것을 학교폭력이라 부르면서, 문제는 학생들에게 있고 문제학생들 때문에 선량한 학생들과 학교까지 피해를 입
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학교 자체가 폭력의 온상이자 가해자이건만, 언론이나 교육 관계자
들은 문제의 책임을 너무 간단히 문제학생들에게로 돌려버린다.
이백 년 전에 태동한 근대학교가 국가 간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자원양성소였고, 그 본질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기에 폭력
성은 학교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이들을 통제하고,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 경쟁을 조장하는 것이 학교폭
력의 본질이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희생당한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도,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도, 그런 상황을 방관하는 아이도 영혼에 상처를 입는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폭력조직의 하수인으로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들이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한낱 월급쟁이로 전락한 것은 정부나 학부모,
학생들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교사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깨어 있는 소수의 교사들도 있지만 거대한 시스템을 바꾸는 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시스템을 탓하고 시대와 사회를 탓하는 것은 자신의 실존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그럼에
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있기에 위대하다. 교사는 아이들과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도 있고 학교라는 감옥의 간수
가 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며, 매순간 스스로 결단해야 할 몫이다. 폭력사건이나 다른 불미스런 일
이 일어나면 학교는 문제를 덮기에 급급한다.
‘긁어 부스럼’이란 말이 있다. 괜히 긁어서 덧내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이 말을 그냥 문제를 덮어두는 게 좋다
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좀 긁는다고 부스럼이 나는 몸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게다. 건강한 몸은 긁는다고 해서 부스럼
이 생기지 않는다. 부스럼은 일종의 징조다. 긁어서 부스럼이 난다면 아직 큰 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면역계에 이상이 생
겼다고 봐야 한다. 이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부스럼은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이를 무시하면 부스럼은 머지않
아 암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학교는 그동안 부스럼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이제 말기암 환자 지경에 이르렀다. 각성한 교사들과
아이들이 강력한 면역세포가 되어 면역계가 되살아난다면 학교의 기사회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학생들 간의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괴롭힘과 싸움, 이 둘은 종류가 다른 폭력이다. 싸움이 쌍방이 주고받는 폭력이라
면 괴롭힘은 일방적이면서 교묘한 폭력이고 심리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주로 ‘괴롭힘’이다. 집단
괴롭힘은 폭력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폭력이기에 교육현장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싸움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
다. 설령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맞짱을 뜨는 것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싸움에 지는 것도 이기
는 것도 살아가면서 해볼 만한 경험이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몸싸움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서로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울 때, 그 싸움이 공정하고 또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니면
계속하도록 허용한다. 가까이에 어른 한 명이 있으면서 안전한지 확인도 하고, 필요하다면 그 결투에서 서로 완결의 느낌을 갖고 화
해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48쪽)
프리스쿨 설립자 메리의 표현대로 ‘경험의 정치역학’이라 부르는 지점에 아이들 스스로 도달하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교육과정의 하
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40여 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다.
성장과정에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침 좀 뱉는 친구가 자존심을 건드릴 때도 피
하기만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하는 말은 흔히 비겁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된다. 싸워서 코피가 터지더라도 제대로 싸워보는 것
은 성장과정에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부당함과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자존감을 키워준다. 고등학교 시절 공설운동장에 전
교생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서는 쌍욕을 해대는 교련 선생에게 분노하면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뒷담이나 깐 것은 두고두고 후
회되는 일이다.
힘없는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권력욕의 왜곡된 표출이다.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내어주라는 예수의 비폭력 가르침은 자칫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말이다. 맞짱 뜰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뺨을 때리는 자를 위
해서도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보다 불합리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맞짱을 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간
은 쉽사리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한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먼저 생각하자 교육당국은 가해학생들만 따로 모아놓는 대안학교를
대책으로 내놓기도 한다. ‘대안’학교는 그 이름에도 걸맞게 모든 문제의 대안이 되고 있다. 과연이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가해
자들을 솎아내고 나면 원 집단 안에서 또 새로운 가해자가 생겨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저 약간의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규
모를 줄이고, 경쟁을 완화하고, 자율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학교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단기적인 해결책도 함께 병행해가야 할 것이다.
가해학생들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피해학생을 돕는 방안을 찾는 것이 효과적인 방책임이 외국의 사례에서 입증되고 있다. 노르웨
이는 30년 전에 심각한 학교폭력으로 청소년 세 명이 자살하는 사건을 계기로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토론회를 열고 대책을 마련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방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공하고 교육을 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단 괴롭힘 같은 것은 없지만 드물게 왕따도 생겨나고 주먹다짐도 일어
난다. 그럴 때 흔히 묵언수행, 108배 등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수행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애쓰는데, 연좌제에 가까운 이런 문화는 일
종의 전체주의 경향을 띠고 있어, 아이들로 하여금 공동체 문화에 질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폭력성의 뿌리는 아이들의 성장과정 만큼
이나 다양해서 한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나 폭력성은 그 본질에서 사랑과 다르지 않은 에너지다. 어
린 나이에 자기성찰의 힘으로 에너지 변환의 연금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순진한 기대다.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증
오가 뒤섞여 발효되는 폭력성은 다른 출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파괴적인 에너지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하듯이
어린아이들의 경우 발버둥치면서 분노의 에너지를 마음껏 표현하도록 어른이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십대의 경우
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으므로, 에너지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포츠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분노와 증오는 마음만 굳게 하는 게 아니라 몸의 근육도 경직시킨다. 몸을 풀어주는 것이 마음을 푸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폭력적인 아이들의 경우 레슬링 같이 몸을 격렬하게 부딪히는 운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애와 공감력을 키우는 길
학교가 폭력의 온상이라고는 하지만, 학교에만 그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온당치 않다. 학교는 국가로부터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따
름이다. 경쟁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성을 불식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성 속에 내재한 폭력성을 다
스리는 것은 인간 사회의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폭력성을 상쇄할 만한 우애와 연민의 마음도 있다. 폭력성을 없
애려 애쓰기보다 우애와 연민,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길 아닐까. 성장과정에서 우애와 공감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형제자매 없이 자라는 요즘 아이들의 경우는 그런 경험을 하기가 쉽
지 않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나 대안학교는 이 점에서 그나마 대안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먹고살기에 바빠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는 가정도 많다. 유아 단계에서부터 공감의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한쪽에는 더 잘살려는 욕심으로 아이를 한계상황까지 몰아부치는 부모도 적지 않다. 학교와 사회가 아이를 전쟁
터로 몰아가더라도 적어도 가정은 아이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엄마만큼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때 아이의
영혼은 숨쉴 틈을 찾게 된다. 엄마가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는커녕 아이의 등을 떠밀어 전쟁터로 몰아넣는 시대에 아이들이 온전하기
란 어렵다. 요즘 심심찮게 보도되는 우등생들의 잔인한 행동은 의미를 찾기 힘든 시험공부에 시달리면서 의지할 곳 없는 심리 상태가
빚어내는 막장 드라마 같은 것이 아닐까. 불행한 시대다. 아이들도 교사도 부모도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서로의 오늘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
누군가 끊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부터 그 고리에서 빠져나와 우애와 공감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나부터’가 답이다.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교사나 부모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삶에 책
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글 | 발행인 현병호
그림 | 공간민들레 김단
파수꾼이 될 것인가 간수가 될 것인가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학교폭력이라 부르면서 언어의 왜곡이 일어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학교폭력이라
정의한다면 거기에는 학생들 간의 폭력뿐만 아니라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
시스템이 안고 있는 폭력성도 문제 삼아야 마땅하다. 사실 문제의 본질은 학교폭력이 아니라 ‘폭력학교’다. 문제학생이 다른 학
생을 괴롭히는 것을 학교폭력이라 부르면서, 문제는 학생들에게 있고 문제학생들 때문에 선량한 학생들과 학교까지 피해를 입
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학교 자체가 폭력의 온상이자 가해자이건만, 언론이나 교육 관계자
들은 문제의 책임을 너무 간단히 문제학생들에게로 돌려버린다.
이백 년 전에 태동한 근대학교가 국가 간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자원양성소였고, 그 본질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기에 폭력
성은 학교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이들을 통제하고,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 경쟁을 조장하는 것이 학교폭
력의 본질이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희생당한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도,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도, 그런 상황을 방관하는 아이도 영혼에 상처를 입는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폭력조직의 하수인으로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들이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한낱 월급쟁이로 전락한 것은 정부나 학부모,
학생들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교사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깨어 있는 소수의 교사들도 있지만 거대한 시스템을 바꾸는 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시스템을 탓하고 시대와 사회를 탓하는 것은 자신의 실존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그럼에
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있기에 위대하다. 교사는 아이들과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도 있고 학교라는 감옥의 간수
가 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며, 매순간 스스로 결단해야 할 몫이다. 폭력사건이나 다른 불미스런 일
이 일어나면 학교는 문제를 덮기에 급급한다.
‘긁어 부스럼’이란 말이 있다. 괜히 긁어서 덧내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이 말을 그냥 문제를 덮어두는 게 좋다
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좀 긁는다고 부스럼이 나는 몸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게다. 건강한 몸은 긁는다고 해서 부스럼
이 생기지 않는다. 부스럼은 일종의 징조다. 긁어서 부스럼이 난다면 아직 큰 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면역계에 이상이 생
겼다고 봐야 한다. 이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부스럼은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이를 무시하면 부스럼은 머지않
아 암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학교는 그동안 부스럼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이제 말기암 환자 지경에 이르렀다. 각성한 교사들과
아이들이 강력한 면역세포가 되어 면역계가 되살아난다면 학교의 기사회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학생들 간의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괴롭힘과 싸움, 이 둘은 종류가 다른 폭력이다. 싸움이 쌍방이 주고받는 폭력이라
면 괴롭힘은 일방적이면서 교묘한 폭력이고 심리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주로 ‘괴롭힘’이다. 집단
괴롭힘은 폭력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폭력이기에 교육현장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싸움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
다. 설령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맞짱을 뜨는 것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싸움에 지는 것도 이기
는 것도 살아가면서 해볼 만한 경험이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몸싸움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두 아이가 서로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치고받고 싸울 때, 그 싸움이 공정하고 또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니면
계속하도록 허용한다. 가까이에 어른 한 명이 있으면서 안전한지 확인도 하고, 필요하다면 그 결투에서 서로 완결의 느낌을 갖고 화
해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48쪽)
프리스쿨 설립자 메리의 표현대로 ‘경험의 정치역학’이라 부르는 지점에 아이들 스스로 도달하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교육과정의 하
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40여 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다.
성장과정에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한 번도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침 좀 뱉는 친구가 자존심을 건드릴 때도 피
하기만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하는 말은 흔히 비겁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된다. 싸워서 코피가 터지더라도 제대로 싸워보는 것
은 성장과정에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부당함과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자존감을 키워준다. 고등학교 시절 공설운동장에 전
교생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서는 쌍욕을 해대는 교련 선생에게 분노하면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뒷담이나 깐 것은 두고두고 후
회되는 일이다.
힘없는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권력욕의 왜곡된 표출이다. 오른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뺨도 내어주라는 예수의 비폭력 가르침은 자칫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말이다. 맞짱 뜰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뺨을 때리는 자를 위
해서도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보다 불합리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맞짱을 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간
은 쉽사리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한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먼저 생각하자 교육당국은 가해학생들만 따로 모아놓는 대안학교를
대책으로 내놓기도 한다. ‘대안’학교는 그 이름에도 걸맞게 모든 문제의 대안이 되고 있다. 과연이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가해
자들을 솎아내고 나면 원 집단 안에서 또 새로운 가해자가 생겨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저 약간의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규
모를 줄이고, 경쟁을 완화하고, 자율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학교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단기적인 해결책도 함께 병행해가야 할 것이다.
가해학생들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피해학생을 돕는 방안을 찾는 것이 효과적인 방책임이 외국의 사례에서 입증되고 있다. 노르웨
이는 30년 전에 심각한 학교폭력으로 청소년 세 명이 자살하는 사건을 계기로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토론회를 열고 대책을 마련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방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공하고 교육을 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단 괴롭힘 같은 것은 없지만 드물게 왕따도 생겨나고 주먹다짐도 일어
난다. 그럴 때 흔히 묵언수행, 108배 등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수행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애쓰는데, 연좌제에 가까운 이런 문화는 일
종의 전체주의 경향을 띠고 있어, 아이들로 하여금 공동체 문화에 질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폭력성의 뿌리는 아이들의 성장과정 만큼
이나 다양해서 한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나 폭력성은 그 본질에서 사랑과 다르지 않은 에너지다. 어
린 나이에 자기성찰의 힘으로 에너지 변환의 연금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순진한 기대다. 자기혐오와 세상에 대한 증
오가 뒤섞여 발효되는 폭력성은 다른 출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파괴적인 에너지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하듯이
어린아이들의 경우 발버둥치면서 분노의 에너지를 마음껏 표현하도록 어른이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십대의 경우
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으므로, 에너지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스포츠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분노와 증오는 마음만 굳게 하는 게 아니라 몸의 근육도 경직시킨다. 몸을 풀어주는 것이 마음을 푸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폭력적인 아이들의 경우 레슬링 같이 몸을 격렬하게 부딪히는 운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애와 공감력을 키우는 길
학교가 폭력의 온상이라고는 하지만, 학교에만 그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온당치 않다. 학교는 국가로부터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따
름이다. 경쟁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성을 불식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성 속에 내재한 폭력성을 다
스리는 것은 인간 사회의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폭력성을 상쇄할 만한 우애와 연민의 마음도 있다. 폭력성을 없
애려 애쓰기보다 우애와 연민,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길 아닐까. 성장과정에서 우애와 공감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형제자매 없이 자라는 요즘 아이들의 경우는 그런 경험을 하기가 쉽
지 않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나 대안학교는 이 점에서 그나마 대안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먹고살기에 바빠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는 가정도 많다. 유아 단계에서부터 공감의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한쪽에는 더 잘살려는 욕심으로 아이를 한계상황까지 몰아부치는 부모도 적지 않다. 학교와 사회가 아이를 전쟁
터로 몰아가더라도 적어도 가정은 아이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엄마만큼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때 아이의
영혼은 숨쉴 틈을 찾게 된다. 엄마가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는커녕 아이의 등을 떠밀어 전쟁터로 몰아넣는 시대에 아이들이 온전하기
란 어렵다. 요즘 심심찮게 보도되는 우등생들의 잔인한 행동은 의미를 찾기 힘든 시험공부에 시달리면서 의지할 곳 없는 심리 상태가
빚어내는 막장 드라마 같은 것이 아닐까. 불행한 시대다. 아이들도 교사도 부모도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서로의 오늘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
누군가 끊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부터 그 고리에서 빠져나와 우애와 공감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나부터’가 답이다.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교사나 부모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삶에 책
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글 | 발행인 현병호
그림 | 공간민들레 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