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들이 있다. 교사, 학생과 함께 학부모를 교육 3주체라 칭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얼마 전, 새 학기를 앞두고 한 중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을 때다. 긴장한 채로 귀를 쫑긋하고 있는 신입생 학부모들에게 물었다. “학부모는 교육의 주체인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만난 참여자들 얼굴에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짧은 침묵을 뚫고 한 보호자가 답했다. “그...렇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선생님하고 같이 교육을 의논하는 입장이니까 교육 주체가 맞죠.” 곰곰 생각하던 또 다른 보호자는 이렇게 답했다. “학부모는 교육 주체가 아닌 거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하고 애들이 주인공이죠. 학부모는 조력자 정도이지,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주체란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이라는 사전적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답이었다.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명료히 규정되지 않은 이 역할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교육 주체로서 학부모의 역할’을 논하는 자리에서 새삼 개념을 따지고 든 것은 그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부모가 학부모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고민했으면 해서다. 오늘날 학부모 민원이 빗발치고 교권이 추락한 사태의 원인이 이 용어의 오남용에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교사, 학생, 학부모는 교육 주체가 아니라 학교구성원 또는 교육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학교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정과의 연계가 필수이지만 (...)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것도, 교육을 직접 실행하는 것도 그 주체는 교사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교육부가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교육의 주체가 아닌데도 계속 주체라고 명명하며 소통과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의 월권을 부추기는 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_하민영 ‘교육의 3주체? 다시 생각 필요’, 《교육언론 창》
‘학’부모는 뭔가 부모와는 다른 역할을 요구받는 존재로 느껴진다. ‘학생의 부모’인 동시에 ‘학교에서의 부모’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부모’와 가장 다른 점은 ‘학부모’라는 말에는 공적 의미가 부여된다는 사실이다. 내 자녀를 포함해 학교라는 공간에서 여러 아이들의 교육이 잘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공적’ 존재로서의 부모인 것이다. 개인적인 부모의 역할로 보더라도, 가정을 떠나 사회로 발을 딛은 아이에게 기존의 양육과는 다른 형태의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역할을 잘 해내려면 내 아이를 넘어 아이를 둘러싼 환경을 넓은 시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민들레가 엮어낸 『부모 되기, 사람 되기』에는 공적 부모, 즉 사회적 부모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부모 되기, 사람 되기』, 민들레 편집실, 2020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학부모’가 되리라 결심한 저자 이현주는 어떤 교사든 ‘직업을 훌륭히 수행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의 품위를 지키려고 하는 분일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며 학교에서의 갈등을 헤쳐나간다. 부모 역할을 해보니 자신도 아이에게 엄청나게 많은 실수를 하고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교사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거라고.(61쪽) 우리 모두는 부족하지만 애쓰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선생님과 부모로서의 자신을 포용한다.
‘부모 되기의 교육적 의미’에 천착한 서덕희 교수는 생후 2개월의 아기를 달래다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무언가 ‘엄숙한 명령’을 내리는 듯했다고. 그 후 저자는 육아 과정에서 수없이 묻는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긴 물음 끝에 이런 답을 얻어낸다. “타인의 얼굴을 책임져본 사람은 자신이 책임진 그 타인 외에도 그와 같이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167쪽) 나를 넘어, 한 아이의 부모로서의 나를 넘어, 공적 존재로서의 나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넘쳐나는 육아 정보는 편리와 불안을 동시에 선사한다. 급기야 부모들은 ‘내가 모르는 자녀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학원, 놀이터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건 그 두려움의 발로다. 부모 노릇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시절에 ‘학부모’의 역할까지 고민해야 하다니. 그러나 서덕희 교수의 말처럼 “자신보다 연약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의 얼굴에 직면하여 그 얼굴이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160쪽) 이렇게 보면 본질적으로 부모-되기와 학부모-되기는 그리 다르지 않은 길이다.
‘학부모는 교육 주체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이 사회에서 한 생명을 길러내고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실존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를 새로운 세상과 연결하는, 자식이라는 “타인을 통해 늘 나 자신에게로 환원하는 데서 벗어나 나를 넘어서게 된다.”(163쪽) 사회적 부모 되기. 조그만 생명체로부터 부여받은 이 어렵고도 중한 숙제가 어쩌면, ‘나’로부터 해방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장희숙_ 편집장
너무 익숙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들이 있다. 교사, 학생과 함께 학부모를 교육 3주체라 칭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얼마 전, 새 학기를 앞두고 한 중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을 때다. 긴장한 채로 귀를 쫑긋하고 있는 신입생 학부모들에게 물었다. “학부모는 교육의 주체인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만난 참여자들 얼굴에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짧은 침묵을 뚫고 한 보호자가 답했다. “그...렇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선생님하고 같이 교육을 의논하는 입장이니까 교육 주체가 맞죠.” 곰곰 생각하던 또 다른 보호자는 이렇게 답했다. “학부모는 교육 주체가 아닌 거 같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하고 애들이 주인공이죠. 학부모는 조력자 정도이지,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주체란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이라는 사전적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답이었다.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명료히 규정되지 않은 이 역할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교육 주체로서 학부모의 역할’을 논하는 자리에서 새삼 개념을 따지고 든 것은 그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부모가 학부모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고민했으면 해서다. 오늘날 학부모 민원이 빗발치고 교권이 추락한 사태의 원인이 이 용어의 오남용에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교사, 학생, 학부모는 교육 주체가 아니라 학교구성원 또는 교육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학교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정과의 연계가 필수이지만 (...)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것도, 교육을 직접 실행하는 것도 그 주체는 교사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교육부가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교육의 주체가 아닌데도 계속 주체라고 명명하며 소통과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의 월권을 부추기는 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_하민영 ‘교육의 3주체? 다시 생각 필요’, 《교육언론 창》
‘학’부모는 뭔가 부모와는 다른 역할을 요구받는 존재로 느껴진다. ‘학생의 부모’인 동시에 ‘학교에서의 부모’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부모’와 가장 다른 점은 ‘학부모’라는 말에는 공적 의미가 부여된다는 사실이다. 내 자녀를 포함해 학교라는 공간에서 여러 아이들의 교육이 잘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공적’ 존재로서의 부모인 것이다. 개인적인 부모의 역할로 보더라도, 가정을 떠나 사회로 발을 딛은 아이에게 기존의 양육과는 다른 형태의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역할을 잘 해내려면 내 아이를 넘어 아이를 둘러싼 환경을 넓은 시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민들레가 엮어낸 『부모 되기, 사람 되기』에는 공적 부모, 즉 사회적 부모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부모 되기, 사람 되기』, 민들레 편집실, 2020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학부모’가 되리라 결심한 저자 이현주는 어떤 교사든 ‘직업을 훌륭히 수행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의 품위를 지키려고 하는 분일 거라는 믿음’에 의지하며 학교에서의 갈등을 헤쳐나간다. 부모 역할을 해보니 자신도 아이에게 엄청나게 많은 실수를 하고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교사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거라고.(61쪽) 우리 모두는 부족하지만 애쓰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선생님과 부모로서의 자신을 포용한다.
‘부모 되기의 교육적 의미’에 천착한 서덕희 교수는 생후 2개월의 아기를 달래다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무언가 ‘엄숙한 명령’을 내리는 듯했다고. 그 후 저자는 육아 과정에서 수없이 묻는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긴 물음 끝에 이런 답을 얻어낸다. “타인의 얼굴을 책임져본 사람은 자신이 책임진 그 타인 외에도 그와 같이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167쪽) 나를 넘어, 한 아이의 부모로서의 나를 넘어, 공적 존재로서의 나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넘쳐나는 육아 정보는 편리와 불안을 동시에 선사한다. 급기야 부모들은 ‘내가 모르는 자녀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학원, 놀이터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건 그 두려움의 발로다. 부모 노릇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시절에 ‘학부모’의 역할까지 고민해야 하다니. 그러나 서덕희 교수의 말처럼 “자신보다 연약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의 얼굴에 직면하여 그 얼굴이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160쪽) 이렇게 보면 본질적으로 부모-되기와 학부모-되기는 그리 다르지 않은 길이다.
‘학부모는 교육 주체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이 사회에서 한 생명을 길러내고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실존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를 새로운 세상과 연결하는, 자식이라는 “타인을 통해 늘 나 자신에게로 환원하는 데서 벗어나 나를 넘어서게 된다.”(163쪽) 사회적 부모 되기. 조그만 생명체로부터 부여받은 이 어렵고도 중한 숙제가 어쩌면, ‘나’로부터 해방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장희숙_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