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vol 07] 부모는 자녀의 거울일까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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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양육 분야 서가에 들어서면 숨이 막힌다. 아들 키우는 법, 영재 만드는 법, 사회성 길러주는 법, 사춘기 자녀와 잘 지내는 법…. 칸칸이 책장에는 온갖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로 빼곡하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데 이토록 많은 방법론이 난무하는 것은 육아에 왕도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양육의 결과를 전적으로 부모 책임으로 여기는 풍조 탓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부모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곱지 않다. ‘맘충’ ‘괴물 부모’ 같은 신조어들은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자기 아이만 챙기는 (부)모’란 이미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부모들의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면 불안, 욕심을 지나 그 기저에 막중한 ‘책임감’이 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라는 말 앞에서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삶을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살아간다. 성적, 진로, 성격 형성까지 부모의 성패로 돌리는 사회적 압박에 부모들은 불안과 죄책감을 느낀다. 고된 육아의 과정이 날마다 후회와 반성으로 얼룩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더 잘했더라면 하는 가정은, 부모라면 벗어나기 힘든 자기 의심이다. 혹시 더 일찍 개입했더라면, 조금 더 잘 돌봐주었더라면, 그것 말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자녀는 부모의 작품’이라는 생각의 역사는 유구하다. 16~18세기 유럽에서는 아이가 기형으로 태어나는 이유가 엄마 마음속의 음란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했고(모성 상상주의 이론), 20세기까지도 동성애, 조현병, 자폐증 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부모의 성향 혹은 무의식적 소망 때문이라 여겼다. 21세기인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 사고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아이를 보면 먼저 그의 부모를 떠올리는 문화는 여전하다. 정말 그럴까? 자식은 부모 하기 나름일까?

수 크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홍한별 옮김, 반비, 2017


수 크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999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두 명의 학생이 총기를 난사해 열세 명이 숨지고 스물네 명이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저자인 크리볼드는 이 총기 난사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다. 사건 이후 그는 세상의 무자비한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도대체 어떤 부모였기에 아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나”라는 질문은 오래도록 그를 따라다녔고 “괴물을 키운 부모”라는 소리도 들었다. 자신 또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책 속에서 그는 아들을 돌봐온 일상을 묘사한다. 가족은 다정히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했고, 엄마는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아이는 교회와 학교 활동에도 성실히 참여했다. 딜런은 학교에선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집에선 잘 웃는 아들이었다.
총격 직후 딜런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아들의 글을 통해 엄마는 알게 된다. 아이가 내면의 고통과 분노, 스스로를 ‘투명한 존재’라 여기는 절망을 품고 살아갔다는 것을. 크리볼드는 뒤늦게 아들의 일기와 이메일을 통해 그 어둠을 접하며 “나는 아이를 알지 못했다”라고 절절히 고백한다. 긴 몸부림 끝에 그는 깨달았다. 부모가 자녀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며, 아무리 헌신해도 아이의 내면에는 부모가 끝내 알 수 없는 고유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딜런뿐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부모와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아이들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아이와 부모를 유착 관계로 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하고, 부모들은 점점 더 자녀에게 집착하게 된다. 미국의 두 경제학자가 함께 쓴 『기울어진 교육』에서 짚어낸 ‘집약적 양육’ 방식도 거기서 기인한다. 부모가 아이의 삶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며, 학업 성취와 사회적 성공을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이 새로운 형태의 양육 방식은 사회구조의 산물이다. 부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 불평등이 심하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부모는 아이의 성취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크리볼드는 책의 말미에 “부모는 아이의 선택을 모두 책임질 수 없다. 그러나 아이를 끝까지 사랑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 중 하나이지만, 그렇기에 제대로 사랑하는 건 참으로 어렵다. 부모들의 사랑이 불안과 욕망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먼저 사회가 변해야 한다. 이 사회가 부모에게 전능성을 요구하지 않을 때 부모 역시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 아이의 잘못에 부모의 책임을 먼저 추궁하지 않는 관용, 공동체 구성원이자 사회적 부모로서 기꺼이 그 부담을 나누어지려는 실천이 필요하다. 

 

_장희숙(민들레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