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vol 09] 학교와 교육_존 테일러 개토의 사상을 중심으로

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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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제도는 지배계급의 음모일까

 

미국의 공교육 교사로서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를 고발하며 ‘올해의 교사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존 테일러 개토는 『바보 만들기』라는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교육사상가라기보다 교육운동가에 가깝지만 그의 주장은 미국의 민주교육 진영뿐만 아니라 한국의 공교육 교사들과 대안교육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에 그의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존 홀트와 마찬가지로 전직 교사였던 개토는 자신이 몸담았던 학교 시스템의 문제를 내부자 시각에서 이렇게 고발한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학교제도의 신화와 신분제도에 근거한 경제체제의 신화를 공고히 하는 보이지 않는 교과과정입니다. (…)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투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의 생활을 국가가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 즉 소수의 사람들이 제 몫보다 더 많이 누리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계획을 알려달라고 조릅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대답합니다. “그런 지옥 같은 도시를 건설할 방법을 알려주긴 하겠소만, 내 얘기가 마음에 들진 않을 거요.” 일곱 가지 가르침을 전파하는 학교의 최초 청사진은 그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혼란, 자기 자리 알기, 무관심, 정서적 의존성, 지적 의존성, 조건부 자존감, 그리고 감시입니다. 이 일곱 가지 가르침을 통해 하층민은 자신만의 천재성을 발견할 길을 영원히 차단당한 채 죽을 때까지 하층민으로 살도록 훈련받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이 훈련은 하층민 통제라는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교육 관료제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그리고 학교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거기에 기생해서 돈을 버는 여러 산업들 역시 성장을 거듭하면서, 학교제도는 그 마수를 중산층 자녀에게까지 뻗게 된 것입니다.(『바보 만들기』,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가운데)

 

개토처럼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지닌 교사가 국가주도 학교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일하면서 혼란과 자괴감에 빠지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더욱이 20세기 중반의 미국 학교는 아이들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초등교사였던 홀트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배움에 실패하는지에 주목했다면 개토는 학교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제도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학교제도에 대해 음모론에 가까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보 만들기』에서 엿보이는 이런 시각은 『수상한 학교』에서는 더욱 확신에 가까워진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출신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에서 학교는 사회통합 장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이민자들이 미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려면 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은 1837년 메사추세츠 주 교육장관으로 부임하면서 ‘공립 보통학교 운동(Common School Movement)’을 이끌었다. 시민들이 기본적인 문해력을 갖추고 사회 이념을 공유하도록 교육하지 않고는 미국이란 나라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이전까지는 사적이고 시혜적으로 이루어졌던 학교교육이 그 후 공공 재원으로 뒷받침되는 공교육으로 바뀌게 된다.

개토는 호레이스 만을 군국주의에 기반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모방해 미국 공교육의 첫 단추를 잘못 꿴 사람으로 지목하면서 이후 교육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미국민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를 고발한다.(『수상한 학교』, ‘우리에게 정말 학교가 필요할까’, 11-25pp) 그 비판이 나름 근거가 없지 않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사회에는 계급주의 문화가 팽배했고 20세기 초반에도 우생학과 사회개량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미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개토의 문제의식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가 해법으로 제시하는 방향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모든 사회제도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의료 시스템이 환자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듯이 교육제도는 아이들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제도가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과정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들 간의 힘겨루기와 타협의 과정이다.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초기의 부실한 제도는 약자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하기 쉬우며, 제도의 허점을 악용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사회는 진보해왔으며, 실제로 인류사회는 더디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상수도 시스템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 중 하나다. 공교육제도도 마찬가지다. 수돗물의 수질을 개선하고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것이 공공성을 높이는 길이듯 공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민주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생수를 사다 먹거나 집집마다 정수기를 설치하는 것은 각자도생 사회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지 공동체적인 해법이 아니다.*  “제도적 학교를 해체하고, 교사자격증제도를 폐지합시다.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선택하도록 교육을 민간에 전면적으로 개방합시다.”(『바보 만들기』, 166쪽) 개토의 이 주장대로 간다면 결국 신자유주의의 각자도생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상수도 사업을 민영화해서는 안 되듯이 공교육의 존재 의미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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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까닭은 수돗물에 대한 과도한 불신과 정수기 업체의 막강한 마케팅 전략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나라 수돗물 품질은 전 국민 대상의 상수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세계 122개국 중 최상위에 속한다.

 

학교제도의 양면성

 

개토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모농가헬라의 공동체적 문화와 조합교회의 민주적인 문화를 예찬하지만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 사회가 그런 긍정적인 면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대륙에서 성공해보려는 욕망을 품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이들로 가득한 사회에서 질서를 만들어내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토 스스로 고발했듯이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고, 중산층은 신분 상승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상황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꿈같은 일이다. 

공교육이 정착되기 전 미국에서는 마을 단위로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마을의 유지나 교회가 설립한 학교에서 저마다 형편 닿는 대로 교육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시절 교사를 구하는 이들은 배에서 내리는 이민자들 중 적당한 사람을 물색해 교사로 채용하곤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사회에서 교직은 달리 할 일 없는 남자들이 마지못해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새로운 산업이 번창하는 신대륙에는 더 나은 일자리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여성들이 교직으로 진출하면서 교사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미국의 반지성주의』, 425-440pp)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공교육은 사회를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사회는 출신 성분이 각양각색인 이민자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교회, 스포츠 경기장 등등-을 마련하고 있지만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십여 년 이상을 교육하는 학교만큼 효율적인 장치도 없다. 공교육제도를 만들지 못했다면 오늘날 미국은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부족국가로 나뉘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2차 대전은 추축국들의 승리로 끝나 히틀러와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가 세계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제도가 아니라 최악을 막는 제도다. 마찬가지로 공교육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공교육이 “소수의 사람들이 제 몫보다 더 많이 누리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면도 있지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태를 막고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측면이 더 크다. 부정적인 요소를 줄이고 긍정적인 면을 확대하는 것이 사회개혁의 방향이다.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바라보는 국가수준의 교육이 놓치기 쉬운 인간성과 개별성에 기반한 교육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비례한다.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시설을 갖추려면 예산이 필요하듯이 개별성을 존중할 수 있으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개별성 교육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경제가 성장하면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덕분일 것이다. 국가 수준의 보편교육이 간과하기 쉬운 개별성을 살리려면 제도의 변화도 필요하지만 교사의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교사들이 “일곱 가지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환경을 만들고 교사 역량을 키우는 제도 개혁과 함께 교사 개개인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시골 어르신들이 ‘올콩은 감꽃 필 때,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으라’고 말한다. 오랜 농사 경험으로 터득한 파종의 적기를 일러주는 말이다. 농사일에서는 경험의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농경사회에서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 농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지역에 최적화된 농법이다. 하지만 농업기술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콩 종자를 개량하거나 새로운 재배법을 개발하는 일은 경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고 과학적인 사고의 힘을 빌어야 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개인 또는 마을 수준의 교육은 경험중심으로 풀 수 있지만 국가 수준 교육은 연구와 제도를 기반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 교육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만들고 그걸 구체적인 현실, 다시 말해 저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모인 교육현장에 적용해 구현해야 한다. 교육주체의 하나인 국가는 합리주의에 기반해 교육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학교교육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다. 아이들 역시 자신의 흥미나 학습 속도를 배려하지 않는 표준화된 교육과정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해보면서 배운다’는 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이나 그를 잇는 진보주의 교육은 ‘삶이 곧 교육’이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다. 개토가 말했듯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 외딴 곳에서 차가 고장이 났는데 팬벨트도 갈아 끼울 줄 모르면서 피타고라스 정리를 아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에게 교사가 공감할 수는 있지만 자동차 정비 기술과 수학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실용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나 인류가 이룬 지적 성취를 전수하는 것도 교육의 중요한 과제다. 삶과 동떨어진 지식을 맥락 없이 집어넣기에 바빴던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지식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삶과 교육이 분리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삶 그 자체가 교육이 될 수는 없다. 삶이 교육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달리 교육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모든 순간,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움을 얻을 수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을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공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경험주의에 기반한 교육관은 지식의 가치를 폄하하고 교육을 개인의 일로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보편교육을 추구하는 공교육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사회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개인과 사회의 긴장 관계 속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를 위한 교육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볼 줄 아는 역량이 요구된다. 

“교육개혁은 실패할 운명이다. 학교가 실패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질수록 교육예산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되고, 미완의 개혁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언뜻 암울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제도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를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고 수선하면서 가야 하는 것이 모든 인간사회가 처한 조건이다. 개토가 그랬듯이 “학교제도의 톱니바퀴에 모래를 끼얹으며 게릴라 학습을 시도하는” 것이 교사가 개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일지도 모른다. 뜻이 맞는 동료가 있다면 학교 차원의 개혁을 시도할 수도 있다. 사회와 개인의 긴장 관계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긴장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사회가 정체되거나 퇴보하지 않게 만든다. 


글쓴이  현병호 _ 계간《민들레》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