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
글을 쓸 때면, 맺지 못한 문장을 두고 커서만 깜빡이는 순간이 있다. 그 자리에 꼭 맞는 단어가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질거린다. 그런 망설임이 찾아오는 건 어휘가 부족해서다. 물론 거침없이 글을 완성해 내는 방법도 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떠오르는 단어들로 문장을 이어가면 된다. 그럴 경우, 대체로 평이하고 단조로운 글이 탄생한다.
여러 필자들의 원고를 읽다 보면 언어 감수성이 뛰어나서 적확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쓰는 이가 있고, 모호한 개념으로 뭉개듯이 글을 쓰는 이가 있다. 비슷한 뜻이지만 딱 들어맞지는 않는 단어를 대충 그 자리에 놓는 경우도 흔하다.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지만, 자유자재로 적절히 부릴 줄 아는 어휘력을 갖추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른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국가교육위원회가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 대책을 논의할 ‘문해력 특별위원회’를 가동하면서 40여 년 해묵은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더라, 시발점을 욕으로 알더라, 족보를 족발보쌈세트로 알더라’ 등등 아이들의 문해력을 둘러싼 우려가 ‘한자교육 강화’로 이어지려는 추세다.
아이들의 문해력 논란은 긴 글을 진득이 읽지 않는 디지털 시대의 문제이지, 한자교육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이들의 학습량과 사교육 부담을 걱정하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문학작품 교육 등으로 맥락을 읽는 힘을 키우는 것이 일일이 낱말의 뜻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찬반을 막론하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을 문제시하고 있다.
<우리만 모르나? 사전>
청소년들과 여러 해째 국어 수업을 하고 있는 나는 아이들에게 부족한 건 문해력보다 어휘력이라고 느낀다. 둘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엄연히 다르기도 하다. 한자의 의미를 잘 모르면 부릴 줄 아는 단어의 수, 즉 어휘가 부족해진다. 어휘가 부족하면 문해력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메타인지나 유추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 눈치가 백단인 아이들은 단어 뜻을 정확히 몰라도 맥락상 의미를 제대로 읽어낸다. 다만 개개인의 역량에 기대기엔 그 비율이 너무 적다.
간혹 자기 이름의 한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 ‘김○우’라는 아이가 제 이름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하자, 다른 아이가 해석해준다며 말을 거들었다. “소 우(牛) 아니야? 부자되라고?” 쉬운 한자 중에 벗 우(友)도 있고, 비 우(雨)도 있는데 이 아이가 떠올린 한자는 소 우(牛)밖에 없었던 거다. 소 우(牛), 돼지 돈(豚), 개 견(犬)처럼 가축을 뜻하는 한자는 이름에 잘 쓰지 않는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청소년들의 빈약한 어휘력을 고민하다가 매 학기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만 모르나? 사전>이다. 텍스트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동그라미를 치게 한다. ‘혹시 나만 모르나?’ 하면서 망설이던 아이가 묻는다. “알긴 아는데 정확히는 모르는 건 어떻게 해요?”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다가,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장족의 발전이다. 대략이라도 뜻을 설명하지 못하면 모르는 걸로 치자고 기준을 정하고 나면, 한 지문에서 대여섯 개 정도의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 대부분은 한자어이고 간혹 포퓰리즘, 리터러시 등 아이들에게는 낯선 외국어도 있다.
일단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교사가 단어 뜻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수업이 끝나면 그 단어들을 온라인 공유 문서에 쭉 나열하고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 뜻을 적게 한다. 단어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예문까지 만들어보게 하면, 이렇듯 잘못 이해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소급(遡及) :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미치게 함. (출처_표준국어대사전)
예문) 중2 때 반항이 지금 소급되어서 우리 엄마가 너무 힘들다. (사전에 표기된 ‘미치게 함’을 ‘영향을 미치게 함’이 아니라 ‘사람을 미치게 함’으로 오해하고 만든 어색한 문장이다.)
한 학기가 지나고 <우리만 모르나? 사전>을 살펴보면, 그간 어떤 단어를 새로 알게 되었는지 한눈에 확인된다. 함께 만든 수십 개의 단어 사전을 보면서 제법 지식이 쌓인 것 같다고 뿌듯해하는 아이도 있다.
언어의 해상도
초임 교사 시절,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 사상에 동화해서 아이들에게 고유어를 쓰도록 가르쳤다. 한자어를 되도록 고유어로 풀어쓰고, ‘~의’ ‘~적’ 같은 일본식 표현을 피하려고도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구분에 매이지 않는다. 우리말에서 60% 가까운 한자어를 피해 고유어만 쓰기는 불가능하거니와, 그럴 때 언어의 세계가 오히려 빈곤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적절히 활용하는 한자어가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고, 표현을 다채롭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같은 장면이라도 해상도가 높은 화면에서 보면 생생함이 살아나듯, 어휘가 늘어나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한자어를 씀으로써 의미 전달이 더 명료하고 강렬해지는 경우도 꽤나 많다.
한때 이동진 평론가의 <기생충> 영화평이 회자되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대중이 막연하게 느끼던 영화의 핵심을 압축된 문장으로 정확히 표현해냈다고 평가받은 이 한 줄 평은 조사와 접사 빼곤 전부 한자어다. 이 문장을 고유어로 풀어쓰려면 한 줄로는 어려운 데다,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져 문장에 맥이 빠지고 만다.
물론 한자를 많이 안다고 깊은 사고를 하는 것도, 어려운 한자어를 구사한다고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언어를 풍성하게 경험할수록 사고의 결이 섬세해지는 건 사실이다. ‘비판’, ‘비평’, ‘비난’의 차이를 이해하고, ‘가능’과 ‘역량’을 구분하며, ‘이해’와 ‘납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수록 세계를 구별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휘는 단순히 말을 꾸미는 재료가 아니라 생각의 경계를 세우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단순한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도 어휘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수록된 단어가 별로 없는 국어사전을 열심히 들척여봐야 제 마음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과 같다. 언어가 빈약하면 감정도, 사고도 덩달아 뭉툭해진다. 그래서 문해력 논쟁은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느냐를 넘어, 얼마나 정교하게 세계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많은 문장을 읽고,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써보고, 틀린 표현을 고쳐보며 조금씩 언어 감각이 자란다. 풍부한 언어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힘은 깊이 읽고 오래 쓰는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간다. 꼭 한자를 암기해 쓰는 법까지 익히지 않아도 좋다. 음을 읽고 의미를 구분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세계와 선명하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커서만 깜빡이는 화면 앞에서 끝내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려고 망설이는 순간에 시작된다.
_장희숙(편집장)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
글을 쓸 때면, 맺지 못한 문장을 두고 커서만 깜빡이는 순간이 있다. 그 자리에 꼭 맞는 단어가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질거린다. 그런 망설임이 찾아오는 건 어휘가 부족해서다. 물론 거침없이 글을 완성해 내는 방법도 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떠오르는 단어들로 문장을 이어가면 된다. 그럴 경우, 대체로 평이하고 단조로운 글이 탄생한다.
여러 필자들의 원고를 읽다 보면 언어 감수성이 뛰어나서 적확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쓰는 이가 있고, 모호한 개념으로 뭉개듯이 글을 쓰는 이가 있다. 비슷한 뜻이지만 딱 들어맞지는 않는 단어를 대충 그 자리에 놓는 경우도 흔하다.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지만, 자유자재로 적절히 부릴 줄 아는 어휘력을 갖추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른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국가교육위원회가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 대책을 논의할 ‘문해력 특별위원회’를 가동하면서 40여 년 해묵은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더라, 시발점을 욕으로 알더라, 족보를 족발보쌈세트로 알더라’ 등등 아이들의 문해력을 둘러싼 우려가 ‘한자교육 강화’로 이어지려는 추세다.
아이들의 문해력 논란은 긴 글을 진득이 읽지 않는 디지털 시대의 문제이지, 한자교육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이들의 학습량과 사교육 부담을 걱정하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문학작품 교육 등으로 맥락을 읽는 힘을 키우는 것이 일일이 낱말의 뜻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찬반을 막론하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을 문제시하고 있다.
<우리만 모르나? 사전>
청소년들과 여러 해째 국어 수업을 하고 있는 나는 아이들에게 부족한 건 문해력보다 어휘력이라고 느낀다. 둘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엄연히 다르기도 하다. 한자의 의미를 잘 모르면 부릴 줄 아는 단어의 수, 즉 어휘가 부족해진다. 어휘가 부족하면 문해력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메타인지나 유추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 눈치가 백단인 아이들은 단어 뜻을 정확히 몰라도 맥락상 의미를 제대로 읽어낸다. 다만 개개인의 역량에 기대기엔 그 비율이 너무 적다.
간혹 자기 이름의 한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 ‘김○우’라는 아이가 제 이름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하자, 다른 아이가 해석해준다며 말을 거들었다. “소 우(牛) 아니야? 부자되라고?” 쉬운 한자 중에 벗 우(友)도 있고, 비 우(雨)도 있는데 이 아이가 떠올린 한자는 소 우(牛)밖에 없었던 거다. 소 우(牛), 돼지 돈(豚), 개 견(犬)처럼 가축을 뜻하는 한자는 이름에 잘 쓰지 않는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청소년들의 빈약한 어휘력을 고민하다가 매 학기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만 모르나? 사전>이다. 텍스트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동그라미를 치게 한다. ‘혹시 나만 모르나?’ 하면서 망설이던 아이가 묻는다. “알긴 아는데 정확히는 모르는 건 어떻게 해요?”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다가,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장족의 발전이다. 대략이라도 뜻을 설명하지 못하면 모르는 걸로 치자고 기준을 정하고 나면, 한 지문에서 대여섯 개 정도의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 대부분은 한자어이고 간혹 포퓰리즘, 리터러시 등 아이들에게는 낯선 외국어도 있다.
일단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교사가 단어 뜻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수업이 끝나면 그 단어들을 온라인 공유 문서에 쭉 나열하고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 뜻을 적게 한다. 단어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예문까지 만들어보게 하면, 이렇듯 잘못 이해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소급(遡及) :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미치게 함. (출처_표준국어대사전)
예문) 중2 때 반항이 지금 소급되어서 우리 엄마가 너무 힘들다. (사전에 표기된 ‘미치게 함’을 ‘영향을 미치게 함’이 아니라 ‘사람을 미치게 함’으로 오해하고 만든 어색한 문장이다.)
한 학기가 지나고 <우리만 모르나? 사전>을 살펴보면, 그간 어떤 단어를 새로 알게 되었는지 한눈에 확인된다. 함께 만든 수십 개의 단어 사전을 보면서 제법 지식이 쌓인 것 같다고 뿌듯해하는 아이도 있다.
언어의 해상도
초임 교사 시절,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 사상에 동화해서 아이들에게 고유어를 쓰도록 가르쳤다. 한자어를 되도록 고유어로 풀어쓰고, ‘~의’ ‘~적’ 같은 일본식 표현을 피하려고도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구분에 매이지 않는다. 우리말에서 60% 가까운 한자어를 피해 고유어만 쓰기는 불가능하거니와, 그럴 때 언어의 세계가 오히려 빈곤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적절히 활용하는 한자어가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고, 표현을 다채롭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같은 장면이라도 해상도가 높은 화면에서 보면 생생함이 살아나듯, 어휘가 늘어나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한자어를 씀으로써 의미 전달이 더 명료하고 강렬해지는 경우도 꽤나 많다.
한때 이동진 평론가의 <기생충> 영화평이 회자되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대중이 막연하게 느끼던 영화의 핵심을 압축된 문장으로 정확히 표현해냈다고 평가받은 이 한 줄 평은 조사와 접사 빼곤 전부 한자어다. 이 문장을 고유어로 풀어쓰려면 한 줄로는 어려운 데다,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져 문장에 맥이 빠지고 만다.
물론 한자를 많이 안다고 깊은 사고를 하는 것도, 어려운 한자어를 구사한다고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언어를 풍성하게 경험할수록 사고의 결이 섬세해지는 건 사실이다. ‘비판’, ‘비평’, ‘비난’의 차이를 이해하고, ‘가능’과 ‘역량’을 구분하며, ‘이해’와 ‘납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수록 세계를 구별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어휘는 단순히 말을 꾸미는 재료가 아니라 생각의 경계를 세우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단순한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도 어휘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수록된 단어가 별로 없는 국어사전을 열심히 들척여봐야 제 마음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과 같다. 언어가 빈약하면 감정도, 사고도 덩달아 뭉툭해진다. 그래서 문해력 논쟁은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느냐를 넘어, 얼마나 정교하게 세계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많은 문장을 읽고,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써보고, 틀린 표현을 고쳐보며 조금씩 언어 감각이 자란다. 풍부한 언어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힘은 깊이 읽고 오래 쓰는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간다. 꼭 한자를 암기해 쓰는 법까지 익히지 않아도 좋다. 음을 읽고 의미를 구분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세계와 선명하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커서만 깜빡이는 화면 앞에서 끝내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려고 망설이는 순간에 시작된다.
_장희숙(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