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아파트와 학교, 닮은꼴의 공간

민들레
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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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와 마을, 닮은 듯 다른 공간

 

의식주(衣食住). 아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우선순위는 어떻게 될까? 식­의­주일까, 주­의­식일까?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도 옷을 음식보다 앞세운 까닭은 사회적 존재로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옷차림이어서일 것이다. 요즘 아이들 역시 먹는 것보다 옷이나 신발에 더 민감하다. 끼니는 대충 때워도 옷은 브랜드를 고집한다. 브랜드와 평수로 비교 대상이 되는 아파트도 아이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심사의 우선순위로 보자면 의­식­주 또는 의­주­식이 아닐까.

의식주에서 ‘주’는 단지 주거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거지, 곧 거주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사람이 하나의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관계의 집합체이듯, 집도 관계의 결정체다. 단독주택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또는 자연이라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성에 주목할 때 집이 갖는 속성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주거지인 아파트 단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을 이룬다. 단지 이름에 ‘달빛마을’ 같은 낭만적인 이름이 붙는 걸로 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자 하는 욕구가 사람들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집이 수백 수천 채가 모여 있어도 마을다운 마을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곳에 뿌리내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에서도 반상회를 하지만 주된 관심사는 아파트값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다. 값을 높일 수 있다면 동네(단지) 이름을 바꾸는 것도 불사한다. 투자수익을 더 올릴 수 있으면 이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구당 이사 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단지화는 공용공간을 사유화한다.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던 길이 단지 주민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고 담장까지 둘러쳐 지역 주민들을 가로막는다. 아파트 단지에는 복도와 보도만 있지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이 없다. 보도마저도 대개는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닫힌 공간이다. 외부와 분리된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성, ‘캐슬’이다. 옛날의 성과 다른 점은 성 안의 집들도 또 하나의 성처럼 외부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은 성들이 모인 거대한 성이 한국식 아파트 단지다. 재테크라는 마법에 걸린 을씨년스런 성에 온기를 불어넣어줄 존재가 어디 있을까?

마을을 이루는 데는 집과 집을 잇는 물리적인 길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더 중요하다. 그 길은 대개 아이들이 맡는다. 아이라는 매개 고리를 통해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에 생기가 돈다. 아이가 어른들이 왕래하는 길이 되는 셈이다. 원래 마을은 육아공동체였다. 한때 항간의 관심을 끌었던 가상의 성 ‘스카이 캐슬’도 어떤 의미에서는 또 하나의 육아공동체다. 아이를 SKY 대학에 보내기 위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시기질투하면서 이웃 관계를 맺는다.

오늘날 도시에서 시도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 또한 육아와 교육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린이집을 매개로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학교를 중심으로 기존 마을을 되살리기도 한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은 죽어가는 마을이듯이, 육아와 교육은 한 사회의 재생 또는 소생의 기반을 닦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재생은 낙후된 건물을 새 건물로 바꾸는 게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좋은 이웃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웃 관계를 맺는 데 아이들만큼 좋은 매개 고리가 없다.

서울 노원구에 자리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는 그 지역을 소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아이들이 지역을 살리는 매개이자 주체임을 잘 알고 있는 이승훈 센터장은 아이들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 관심을 갖고, 지역에서 ‘잘’ 살고 있는 동네 어른들을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는 데 열심이다. ‘마을운동은 마을 공기 바꾸기’라는 그이의 말처럼, 재생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던 것을 발견하고 눌려 있던 것을 일깨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를 복원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길’을 내는 것이다. 그 길에서 소통이 활발히 일어나는 것이 좋은 사회의 조건이다.

주민자치도 민주주의도 자신이 사는 지역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있을 때 가능하다. 돈 벌면 더 좋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는 꿈을 꾸는 사람들뿐이라면 마을의 소생은 힘들다. 부모가 지금 사는 곳을 떠날 궁리만 한다면 아이들 역시 자기가 사는 지역에 애착을 갖기 어렵다. 자기 삶터를 긍정하는 일은 자기의 뿌리, 자기의 존재를 긍정하는 일이다. 어른들한테는 집값이 싸서 잠깐 들어와 살게 된 곳일지라도, 아이들한테는 그곳이 자기가 살아온 일생이 담긴 곳이기 마련이다. 아이를 위한다면 지역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하고, 지역을 살리고자 한다면 아이들부터 살려야 한다.

 

아파트와 학교, 다른 듯 닮은 공간

 

아파트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물리적 영향을 계량화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할 것이다. 평수와 브랜드에 따라 어울리는 친구들이 나뉘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담장이 쳐져 있듯이, 아이들 사이에도 담장이 쳐져 있다. LH공사에서 공급하는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휴거’ ‘엘사’라 놀림을 받는다. 브랜드와 평수에 따라 너무도 쉽게 비교 대상이 되는 아파트 문화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에도 교육적 관점에서 아파트에 대한 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교육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협소한 시각을 말해준다.


아파트는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야단을 맞고 혼자 어디엔가 틀어박혀 울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집이다(권문성, 2008: 207). 물론 자신의 방문을 잠그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아무도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혼자만의 비밀스런 공간도 아니며, 사색의 공간이 되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을 회피하거나 대화를 단절하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자기 스스로에게로 끝없이 침잠하는 사색은 어렵다.(강기수, 2010: )


우리 사회에 히키코모리보다 가출 청소년이 많은 것 또한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의 영향이 클 것이다. 효용을 극대화한 공간인 아파트에는 숨을 곳이 없다 보니, 가출한 아이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의 구석진 곳으로 숨는다. 하지만 그곳은 안식처가 아니라 몸도 영혼도 피폐하게 만드는 공간이기 십상이다. 안전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의 깊은 곳에 가 닿기 어렵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데 필요한 고치의 시간은 인간의 성장에도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 사회의 집과 학교는 그런 시공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아파트는 그나마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도 있지만, 학교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 쉴 공간조차 마땅찮다. 많은 학생들이 쉬는 시간이면 계단에서 수다를 떠는 것은 그나마 그곳이 쉴 만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통제와 효율을 우선시한 일자형 복도 건물에는 숨을 공간도, 홀로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공간도 없다(기껏해야 화장실에 숨어 담배를 피울 수 있을 뿐이다). 학급당 학생 수가 60여 명에 이르던 시절에는 선생의 눈을 피해 아이들 속에 숨을 수도 있었지만, 정원이 절반으로 줄어든 요즘 교실에서는 교사의 눈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대놓고 엎드려 자는 건지도 모른다.

효용성만 있는 공간은 숨이 막힌다. 마찬가지로 효용성으로 가득 차 숨 쉴 틈이 없는 시간은 아이들을 질식시킨다. 학교를 마치고도 학원을 몇 군데나 뺑뺑이 돌아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비어 있는 시간이 없다. 빈틈없이 빡빡하게 기획되어 있는 시간 속에서는 상상력도 주체성도 생겨나기 어렵다. 시간을 스스로 꾸려보지 못하면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갈 힘을 기를 수 없다. 텅 빈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끊임없이 어딘가로 도피하기 마련이다. 많은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면서 아파트가 재테크 수단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삶의 터전이기보다 ‘부동산’으로 인식되는 아파트는 사고팔기가 쉽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산에 더 가깝다. 삶이 거세된 집은 삶이 거세된 학교와 쌍을 이룬다. 표준화된 아파트 구조와 생활양식은 근대학교의 표준화된 건물과 교육과정을 닮았다. 공급자 위주라는 점에서도 주택정책과 교육정책은 닮은꼴이다. 표준화와 규격화는 기본적으로 공급자에게 맞춰진 것이지 수요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본질과도 배치된다. 편리함을 우선 가치로 내세우지만 “이 편한 세상”을 노래하는 것은 공급자들이다. 거기에 세뇌되어 편리함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게 되면 삶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편리한 삶은

표준화된 주거 공간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멀쩡한 아파트 실내를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대안은 아니다.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포기할 수 없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경기도 남양주 별내 지역에 들어선 조합형 아파트 단지는 재테크의 수단이 아니라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는 마을을 지향한다. 가족들의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개방형 설계나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만드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다. 선분양 제도 같은 공급자 위주의 주택정책을 바꾸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다. 최근 주문형 아파트가 뜨는 것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린 스마트’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인가

 

표준화의 시대가 저물고 다양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표준화의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삶터도 배움터도 획일화되는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학교의 교실이 칸칸이 나누어져 있듯이 수업 시간도 칸칸이 나누어지고, 과목도 분절되었다. 교육이 삶과 동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아이들의 고유성을 고려하지 않는 표준화 교육의 시효가 다해가면서 학교공간에 대한 문제의식도 높아졌다. 2천년대 들어 신축 교사의 경우 새로운 공간 설계가 시도되고, 기존 학교에서도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아리실을 만들고, 휑한 운동장 한켠에 텃밭이나 작은 숲을 조성하기도 한다.

올해부터 정부 주도로 ‘그린스마트 미래학교’를 만드는 학교공간혁신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지어진 지 40년 이상 된 노후 건물을 개축 또는 리모델링하는 대규모 국책 사업이다. 하지만 공사 기간 동안 운동장에 설치하기로 한 이동형 임시 교실의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고, 1~2년의 공사 기간 동안 전학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 학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경우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 뒤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 지정 후 의견 수렴에 나서다 보니 혼란을 가중시킨 측면이 크다.

스마트하지 못한 정책 집행 과정의 문제는 개선하면 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미래학교 구상에 대한 합의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그린’ ‘스마트’라는 이름이 미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모든 학생들에게 태블릿PC를 나눠주고, 교과서를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바꾸고, 분필가루 날리는 칠판 대신 전자 칠판을 쓴다고 교육의 질이 달라질까? 에어컨 시설이 완비된 교실에서 첨단 기자재를 동원해 ‘스마트한’ 수업을 한다 해도 아이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교육은 공염불일 따름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시도된 알트스쿨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2013년 IT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설립된 알트스쿨은 몇 년 후 폐교되거나 다른 교육기관에 인수되었다. 『민들레』 131호  ‘서로를 연결하는 교육’ 참고.)

스마트한 시설이 완비된 첨단 아파트에 산다고 삶이 고양되지는 않는다.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스마트교육은 최신 기기를 소비해주는 얼리어답터를 양산해내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디지털 시대의 창조적인 인재를 길러내고자 한다면 스마트 칠판보다 오히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학교교육의 문제는 스마트하지 못한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의 혁신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아이들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다. 학교와 학원이 다 가져가버린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뭔가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시간을 아이들은 더 바란다.

교육의 질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첨단 시설이 있는 공간보다 좋은 사람이 있는 공간을 더 매력적으로 느낄 것이다. 아이들은 마음 맞는 친구가 있으면 웬만큼 이상한 학교도 견뎌낸다. 거기에 좋은 교사가 있으면 학교는 오고 싶은 곳이 된다. 게다가 시설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아무리 좋은 시설도 좋은 친구와 선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인간의 DNA가 달라지지 않는 한 이는 미래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움과 성장은 친구들과 교사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첨단 기자재와 시설은 보조재일 뿐이다. 상호작용이 더 활발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미래학교의 방향이어야 한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기 힘들지만 상호작용의 총량이 급격히 늘어날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분리와 배제의 원리로 조직된 근대적 공간과 교육과정을 통합과 소통의 원리로 다시 조직해야 한다. 교사와 학생, 학생들 상호간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을 높여야 한다. 산업혁명이 근대학교 시스템을 만들어냈듯이 정보혁명과 기후위기, 코로나 팬데믹은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낼 것이다. 학교 시스템에 작용하는 관성의 힘이 크다 해도 사회와 경제의 변화는 교육의 변화를 추동할 수밖에 없다. 교육은 사회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민들레 137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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