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통신사 광고 문구가 떠오른다.
“1살에 걸음마가 늦으면 지는 걸까? 4살에 영어유치원 못 가면 지는 걸까?
8살에 반장이 못 되면 지는 걸까?
15살에 영어발음이 된장이면 지는 걸까?
26살에 대기업 못 가면 지는 걸까? 34살에 외제차 못 타면 지는 걸까?
광고의 요지는 다른 사람들 기준대로 살지 말고 자기 기준으로 살자는 건데,
실제로 이 광고는 은근히(또는 노골적으로) 경쟁심을 부추긴다.
대기업은 고사하고 아무 데도 취업 못한 몇 백만 명의 20대 백수들이 이 광고를 보면서 무엇을 느낄까.
우리 사회가, 학교가 지난 20년 동안 그렇게 불철주야 몰아부쳐 길러낸 이 젊은이들에게
저 광고는 “너는 패배자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실 저 광고에 담겨 있는 문제의 본질은 걸음마, 영어유치원, 반장, 대기업, 외제차라는
평가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지는 걸까?’라고 하는 경쟁 패러다임에 있다.
삶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보도록 은근히 강요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 광고 대부분의 공통된 기조다.
한때는 공익광고에도 ‘당신의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 같은 카피가 쓰였다.
이런 사회에서, 이윤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자본이 소비자들의 우월감과
뒤처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교묘하게 부추기는 광고를 해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광고 못지않게 우리들의 경쟁심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들이다.
민들레에서 오래 전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세요’라는 주제로 좌담을 연 적이 있었다.
<민들레> 잡지도 보고 교육 강좌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래 맞아, 흔들리면 안 돼!’
마음을 다잡아도 옆집만 놀러갔다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다는 어느 엄마의 고백에서 기획된 좌담이었다.
아파트 문화는 이중성을 띤다.
벽을 마주하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독립성과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같은 광고카피가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다.
집 평수에 따라 자존감의 평수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비슷한 평형대의 아파트에서도
서로 끊임없이 눈치보고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수반한다.
뒤처지는 데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쟁은 맹목적이 되어간다.
선착순 달리기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정이니 전우애니 하는 것들도
두려움과 경쟁심 속에서 얼마나 쉽게 바스라지는지.
오늘날 우리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경쟁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두려움을 먹이로 자가증식을 되풀이해 오고 있다.
수십조에 이르는 사교육 시장이 바로 이 두려움을 먹이로 성장하고 있고
공교육 또한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아이들을 통제하고 있다.
경쟁기제인 시험이나 수행평가 같은 것들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옭아매는지 학교를 다녀본 이들은 안다.
우리 학교교육의 패러다임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필승’ 참고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입시전에서, 국가적으로는 북한과의 다툼에서,
나아가 세계의 무역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완전정복’ ‘필승’ 같은 군사 용어가 학습 참고서 이름으로 쓰여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우리 사회의 경쟁 이데올로기는 뿌리가 깊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이 폭력적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흔히 왕따나 폭행 사건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학교폭력은 우리 교육과 사회 속에 내재된 폭력성의 반증일 뿐이다.
경제체제와 교육체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방불케 하는 우리 교육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의 뒷면일 뿐이다.
근대 학교교육과 자본주의는 쌍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국민교육‘을 시작한 것이 근대 학교교육의 출발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말해주듯 자본주의 경제는 ‘부국’을 위한 것이었고,
교육이 하는 일은 국민을 부국에 필요한 인적자원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기본 패러다임은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을, 아이들을 석유나 석탄 같은 자원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교육목표인 점은 이백 년 전의 프로이센이나 21세기의 대한민국이나 똑같다.
단지 그 방식이 다를 뿐.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이 말 잘 듣는 노동자나 관료, 군인들이었다면
탈근대 정보화 사회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은 보다 창의성 있고
세계화에 걸맞는 국제감각을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근대 초기에는 국가간 ‘무력’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교육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무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교육을 추구하는 셈이다.
전쟁을 위한 교육. 국가 주도의 교육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학교가 섬이 될 수 없듯이 교육은 사회를 떠날 수 없다.
학교에서 잘 한다는 사회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렇게 경쟁심과 두려움에 물들고
폭력에 둔감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경쟁심을 부추기고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우월감과 좌절감을 조장하면서
과연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울 수 있을까?
이제는 개근상 받은 근면성실한 인적자원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기업과 정부는 ‘창의성’을 노래하고 있지만 창의성이란 경쟁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래전 어느 통신사 광고 문구가 떠오른다.
“1살에 걸음마가 늦으면 지는 걸까? 4살에 영어유치원 못 가면 지는 걸까?
8살에 반장이 못 되면 지는 걸까?
15살에 영어발음이 된장이면 지는 걸까?
26살에 대기업 못 가면 지는 걸까? 34살에 외제차 못 타면 지는 걸까?
광고의 요지는 다른 사람들 기준대로 살지 말고 자기 기준으로 살자는 건데,
실제로 이 광고는 은근히(또는 노골적으로) 경쟁심을 부추긴다.
대기업은 고사하고 아무 데도 취업 못한 몇 백만 명의 20대 백수들이 이 광고를 보면서 무엇을 느낄까.
우리 사회가, 학교가 지난 20년 동안 그렇게 불철주야 몰아부쳐 길러낸 이 젊은이들에게
저 광고는 “너는 패배자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실 저 광고에 담겨 있는 문제의 본질은 걸음마, 영어유치원, 반장, 대기업, 외제차라는
평가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지는 걸까?’라고 하는 경쟁 패러다임에 있다.
삶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보도록 은근히 강요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 광고 대부분의 공통된 기조다.
한때는 공익광고에도 ‘당신의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 같은 카피가 쓰였다.
이런 사회에서, 이윤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자본이 소비자들의 우월감과
뒤처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교묘하게 부추기는 광고를 해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광고 못지않게 우리들의 경쟁심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들이다.
민들레에서 오래 전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세요’라는 주제로 좌담을 연 적이 있었다.
<민들레> 잡지도 보고 교육 강좌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래 맞아, 흔들리면 안 돼!’
마음을 다잡아도 옆집만 놀러갔다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다는 어느 엄마의 고백에서 기획된 좌담이었다.
아파트 문화는 이중성을 띤다.
벽을 마주하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독립성과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같은 광고카피가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다.
집 평수에 따라 자존감의 평수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비슷한 평형대의 아파트에서도
서로 끊임없이 눈치보고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수반한다.
뒤처지는 데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쟁은 맹목적이 되어간다.
선착순 달리기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정이니 전우애니 하는 것들도
두려움과 경쟁심 속에서 얼마나 쉽게 바스라지는지.
오늘날 우리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경쟁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두려움을 먹이로 자가증식을 되풀이해 오고 있다.
수십조에 이르는 사교육 시장이 바로 이 두려움을 먹이로 성장하고 있고
공교육 또한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아이들을 통제하고 있다.
경쟁기제인 시험이나 수행평가 같은 것들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옭아매는지 학교를 다녀본 이들은 안다.
우리 학교교육의 패러다임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필승’ 참고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입시전에서, 국가적으로는 북한과의 다툼에서,
나아가 세계의 무역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완전정복’ ‘필승’ 같은 군사 용어가 학습 참고서 이름으로 쓰여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우리 사회의 경쟁 이데올로기는 뿌리가 깊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이 폭력적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흔히 왕따나 폭행 사건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학교폭력은 우리 교육과 사회 속에 내재된 폭력성의 반증일 뿐이다.
경제체제와 교육체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방불케 하는 우리 교육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의 뒷면일 뿐이다.
근대 학교교육과 자본주의는 쌍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국민교육‘을 시작한 것이 근대 학교교육의 출발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말해주듯 자본주의 경제는 ‘부국’을 위한 것이었고,
교육이 하는 일은 국민을 부국에 필요한 인적자원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기본 패러다임은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을, 아이들을 석유나 석탄 같은 자원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교육목표인 점은 이백 년 전의 프로이센이나 21세기의 대한민국이나 똑같다.
단지 그 방식이 다를 뿐.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이 말 잘 듣는 노동자나 관료, 군인들이었다면
탈근대 정보화 사회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은 보다 창의성 있고
세계화에 걸맞는 국제감각을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근대 초기에는 국가간 ‘무력’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교육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무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교육을 추구하는 셈이다.
전쟁을 위한 교육. 국가 주도의 교육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학교가 섬이 될 수 없듯이 교육은 사회를 떠날 수 없다.
학교에서 잘 한다는 사회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렇게 경쟁심과 두려움에 물들고
폭력에 둔감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경쟁심을 부추기고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우월감과 좌절감을 조장하면서
과연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울 수 있을까?
이제는 개근상 받은 근면성실한 인적자원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기업과 정부는 ‘창의성’을 노래하고 있지만 창의성이란 경쟁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