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교육은 서비스가 아니다

민들레
2023-01-12
조회수 707


윤석열 대통령의 언행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1월 5일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새해 정책 방향 보고회에서 혼자 43분 동안 강의를 했다거나 교육부 관료들이 수첩에 받아 적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10여 년 전에도 자주 봤던 풍경이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로 보고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교 다양화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 후에는 반도체 인재 양성을 국가적 교육과제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교육부도 경제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 또한 새삼스럽진 않다. 십여 년 전 MB정부의 정책 방향과 비슷하다. 교육부장관도 그때와 같은 인물이다.

사실 교육을 서비스로 바라보는 시각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90년대 초부터 대두되었다. 행정서비스헌장 제도도 그 연장선에 있다. 행정서비스헌장은 행정을 규제·절차 중심에서 고객·결과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행정에 경쟁과 경영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1991년 영국의 시민헌장(Citizen’s Charter)을 계기로 많은 선진국이 행정서비스의 질 향상을 도모하여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와 만족도를 높였다고 평가된다. 우리나라도 1998년 국민의정부에서 정부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하여 2000년에 모든 행정기관으로 확산되었다. 각 행정부처와 기관들이 서비스의 기준과 내용, 제공 방법과 절차 그리고 부적절한 서비스에 대한 시정과 보상조치 등에 대한 규정을 정해 공표하고 고객만족도를 조사해 발표하면서 시정조치를 해왔다. 민원제일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부터다. 


학부모가 민원인이 되면 교육이 무너진다

국가 행정이 지향하는 것이 규제가 아닌 서비스라는 발상의 전환은 분명 진일보한 사회정책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 또한 만만찮은 것이 현실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기업처럼 고객의 비위를 맞추게 되면서 민원이 폭증하고, 공무원들이 민원인에 쩔쩔 매는 상황이 벌어졌다. 각 시도교육청이 교육행정서비스헌장을 공포하고 홈페이지에 민원 창구를 개설하면서 교육 현장에도 민원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진상 고객이 업주의 약점을 알고 갑질을 하듯이 진상 민원인은 평가에 예민한 공무원의 약점을 알고 권력행사를 한다. 진상 학부모는 잘못한 자식을 나무라기보다 교사를 나무라고, 교사가 무릎을 꿇지 않으면 갖은 방법으로 괴롭힌다. 교장을 찾아가고 교육청, 교육부에 민원을 넣는다.

학교교육을 자신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로 바라보는 학부모는 급식 메뉴부터 수업까지 학교에서 제공되는 모든 것을 평가하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걸핏하면 갑질을 일삼는 사회에서 진상 학부모의 갑질이 횡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시민의식이 채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행정서비스 개념을 섣부르게 확대하면서 생겨나는 부작용인 셈이다. 부작용을 줄이는 길은 먼저 교육행정과 교육이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교육행정서비스헌장이지 교육서비스헌장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혼동한다. 여기에는 교사를 말단 교육행정가로 취급하는 정부의 오랜 관행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행정이 서비스라는 개념에는 민주주의 가치가 담겨 있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 서비스 개념을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교육행정과 교육을 뒤섞는 우를 범하면서 교육현장이 무너지고 있다. 교육행정은 서비스일 수 있지만 교육은 전혀 다르다. 부모가 교사를 내려다보면 자식은 교사 머리꼭대기에 앉는다. 이는 아이를 망치는 길이다. 부모와 학생이 ‘고객’이 되면 배움이 일어날 수 없다. 마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고객은 (손에 뭔가가 들려 있을 뿐) 같은 사람이지만 배움터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학생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만약 같다면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마트는 화폐를 지불하고 뭔가를 사서 나오는 곳이지만 배움터는 사람이 바뀌는 곳이다. 

교육을 서비스로 보는 시각은 마트에서 물건을 사듯 학교에 학비를 지불하고 졸업장을 손에 쥐고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교육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경제는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하지만 교육은 증여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지불한 만큼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등가교환 시스템인 화폐 시스템은 같은 화폐 가치를 갖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거래하는 사람도 서로 대등한 존재가 된다. 교육을 서비스로 간주하게 되면 학생이 교사와 맞먹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교육도 배움도 불가능해진다.

교사는 학부모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 아이를 성장시키는 파트너다. 공교육의 본질적 역할은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후세대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기르는 것이다. 국가가 무상교육을 책임지는 이유다. 비록 세금으로 이루어질지라도 공교육은 아이들을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오늘날 각국의 헌법이 교육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와 부모가 아이들을 시민으로 성장시킬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는 뜻이다. 서비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만 책임을 지운다.

교사는 학부모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 아이를 성장시키는 파트너다. 공교육의 본질적 역할은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후세대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기르는 것이다. 국가가 무상교육을 책임지는 이유다. 비록 세금으로 이루어질지라도 공교육은 아이들을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오늘날 각국의 헌법이 교육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와 부모가 아이들을 시민으로 성장시킬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는 뜻이다. 서비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만 책임을 지운다.


교육행정과 교육은 다른 것이다

최근 혁신학교를 둘러싼 갈등도 교육행정과 교육을 혼동하면서 일어나는 문제다. 혁신학교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혁신학교 지정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초창기 혁신학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을 살리고자 하는 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하지도 않은 혁신학교에 와서 괜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이 늘어나면 혁신성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혁신학교가 인기 있으니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학교를 혁신학교로 승인해 수를 부풀리는 식으로 교육행정을 하다 보면 어느덧 귤이 탱자가 되고 만다. 교육의 장기적 비전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선거를 대비해 당장 실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선출직 공무원들의 생리다. 교육감 직선제의 부작용 중 하나는 행정의 실패를 교육의 실패로 오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상 직선제는 수요자중심주의와 맥이 닿아 있다. 여하튼 표를 많이 얻는 사람을 공무원으로 뽑음으로써 재선을 꿈꾸는 선출직 공무원은 민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행정서비스헌장제도와 직선제가 맞물려 행정이 민원에 휘둘리게 된다. 행정은 사익에 앞서 공공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다. 가로수가 가게 간판을 가린다는 민원이 제기된다고 가로수 가지를 잘라서는 안 된다. 상가 주인의 이익을 지켜주는 것이 공공정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가로수는 공공재다. 공교육도 공공재다. 민원제일, 고객중심, 수요자중심, 학습자중심 논리는 맥을 같이한다. 좋은 의도로 기획된 제도일지라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민도를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그러나 교육을 서비스로 보는 시각은 오히려 민도를 낮출 따름이다. 그것이 이 정부가 내심 바라는 것일까?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 1월 7일자에 실린 칼럼을 손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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