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풍향계

진보주의 교육과 반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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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탐구한 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에 흥미로운 실험이 소개됐다.  ‘판다, 원숭이, 바나나’ 그림을 보여주고 이 중 두 개를 묶게 했더니, 서양인들은 ‘판다와 원숭이’를 묶은 반면 동양인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었다. 서양인들은 ‘동물’이라는 ‘범주’로 바라보는데 반해 동양인들은 ‘바나나를 좋아하는 원숭이’처럼 ‘관계’로 연관 짓는 성향이 더 강하다고 해석했다. 이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차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주의를 지향하는 서양에도 오랜 경험주의 전통이 있다. 17세기 초 영국의 베이컨이 경험론을 주장한 이래 존 로크를 거쳐 존 듀이의 실용주의에 이르기까지 경험주의는 영국과 미국 등 앵글로색슨계 나라에 풍미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험주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가닿는다. 이데아에 집착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세계에 대한 관측과 귀납적 방법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관찰과 경험이 연역적(deductive) 추론을 거쳐 원리로 구성된다고 보는 점에서 서양의 경험주의는 합리주의 전통을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야구 이야기를 빌어 경영 이론을 풀어내는 머니볼 이론은 몸값 높은 선수에 의존하기보다 출루율 등의 데이터 분석을 통해 몸값은 낮지만 가능성 있는 선수들로 팀을 짜서 승률을 높이는 이론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라는 경제학 원리와 통계학을 접목해 팀 전략을 짠 에슬레틱스 팀은 2002년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20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거둔다. 가난한 구단의 단장을 맡은 빌리 빈이 경제학을 전공한 (야구 배트를 잡아본 적도 없는) 한 젊은이와 함께 이룬 이 신화 같은 실화는 2011년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머니볼>로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가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출루율을 계산하며 팀 전략을 짜는 빌리에게 29년 동안 야구밥을 먹었다는 코치는 “숫자놀음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직관을 중시하는 장인(경험주의자)의 편견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머니볼 이론은 몸값 높은 선수의 개인기에 기반한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전략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한다.* 전투에서는 이겨도 전쟁에서 지는 격이다.  단기전에 강한 손자병법이 전술 중심이라면, 장기전에 강한  오자병법은 전략 중심이다. 오자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국가의 기본부터 다져야 한다고 말한다. 76전 무패를 기록한 불패의 신화는 꼼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전술은 대체로 경험에 근거하는 데 비해 전략은 원리를 따른다. 

앵글로색슨계가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사상적 기조는 대륙의 합리주의 대신 영국의 경험주의 노선을 따르면서 실용주의로 치달았다. 서부개척 열풍과 함께 경제적, 정치적 격동기를 겪고 있던 신대륙에서는 벤자민 프랭클린, 카네기처럼 실용적인 정신으로 무장한 자수성가형 개인들이 여론을 선도했다. 출신이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사회, 자유분방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격동기의 미국 사회에서 경험주의 철학이 유효했다. 인식론에서도 귀납적 방법을 주창한 경험주의 철학이 풍미하면서 정치적 평등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데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출신이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사회, 자유분방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격동기의 미국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은 시민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철인왕이나 귀족정 같은 엘리트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일반 대중의 경험과 판단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 거기에는 계약의 주체, 경험의 주체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거라는 신뢰,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거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개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는 개인주의로 귀결된다. 로크나 루소, 듀이에게 공통되는 민주주의와 경험주의 사상은 평범한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고, 이는 모든 진보적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진보주의 교육이 민주주의와 경험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듀이의 경험주의와 실용주의 교육관은 미국의 반지성주의 문화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아동의 경험을 중시하는 듀이의 철학이 의도치 않게 교육과정에 혼란을 주고 교육목표를 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미국사회에 팽배한 반지성주의에 진보교육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 에슬레틱스의 20연승 기록 이후 레드삭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의 다른 구단들도 머니볼 이론을 받아들여 통계와 수학에 기초해 전략을 짜게 되었다. 하지만 NFL(미식축구 리그)과 NBA(미국 프로 농구)에서는 머니볼 이론이 실패했는데, 야구와 달리 축구와 농구는 모든 선수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무쌍한 전술을 구사하는 종목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변수가 많은 단체 경기에서는 통계학에 근거한 이론을 적용하기 어려운 반면 기본적으로 투수와 타자가 1:1로 경기를 펼치는 야구는 비교적 이론을 적용하기 쉬운 스포츠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