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린학습자를 위한 다양한 읽을 거리를 생산하는 ‘피치마켓’은 경제학 용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보의 불균형으로 저급한 상품이 넘쳐나는 ‘레몬마켓’과 반대로 ‘피치마켓’은 상품의 정보가 균등해 좋은 제품이 활발히 유통되는 시장을 말한다. ‘피치마켓’이란 이름에는 개인의 수준에 맞춘 정보 제공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담겼다. 정보가 권력이 된 사회에서 그 격차를 줄이는 데 힘쓰고 있는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_편집실
2015년이면 ‘느린학습자’라는 용어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처음부터 느린학습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어요. 정보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쉬운 글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하면서, 이후 대상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했죠. 처음엔 발달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었어요. 현장 조사를 했더니, 발달장애인들이 청소년기나 성인기가 됐는데도 계속 아동용 동화책이나 뽀로로 시리즈 같은 유아 그림책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어요.
첫 책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는데, 결과는 실패였죠. 성인 발달장애인 두 분에게 감수받으며 진행했는데 이분들의 문해력이 상당히 높은 편이란 걸 몰랐던 거죠. 다수의 발달장애인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책이었어요. 그 후 특수학급을 찾아가 수업에 참여하면서 그들과 그들이 쓰는 언어에 대해 새로 배웠어요. 그 내용을 반영해 그들이 진짜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었죠.
보통 느린학습자는 경계선 지능인과 같은 개념으로 쓰이는데, 피치마켓이 말하는 느린학습자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교육현장에 느린학습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 그 실태를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가요.
피치마켓에서 느린학습자는 사회에서 말하는 경계선 지능, 발달장애뿐 아니라 문해력이 부족한 모든 사람들을 포괄합니다. 연령으로 보면 참여자 중에 아동 청소년이 많기는 하지만 성인들도 있어요. 최근에는 후천적 인지 저하나 문해력 저하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 다문화 가정, 또는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언어 차이가 있는 새터민 학생들도 만납니다.
우리나라에 경계선 지능인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한 현황은 몰라요. 통계 조사를 진행 중인데 아직 결과가 발표되지 않았어요. 경계선 지능인이 전체 국민의 13.6%라고 추정하는 것은 해외 연구 사례를 기반으로 하는 건데,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아요. 소년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 느린학습자 비율이 34%라는 연구 결과가 있어서, 그곳을 찾아가서 모두를 대상으로 독서교육을 하는 중에 느린학습자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최근 발달장애인이나 경계선 지능인이 늘었다기보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예요. 사회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포용하는 문화가 생겨서 더 많아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당사자나 보호자들이 예전보다 두려움 없이 “느린학습자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10여 년 사이 체감하는 큰 변화죠.
조금 앞선 듯했지만 시대적 흐름에 꼭 필요한 일이었네요. 쉬운 글 도서 만들기에서 최근 다양한 분야로 활동을 넓히고 있는데요.
사업 단위로 보면 다양해진 것 같지만 맥락상으로는 같은 일을계속하고 있어요. 규모를 확장하려고 한 건 아니고 느린학습자를 위한 책을 만들었는데 독서 습관화가 안 되어 있다 보니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독서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또 우리 힘만으로는 어려우니까 특수교사라는 현장의 훌륭한 전문가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니까 도서문화재단 씨앗과 협력해 2022년에 서울 대학로에 라이브러리 피치라는 도서관을 열었어요. 이 도서관에서 교사와 보호자, 기타 관계자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쉬운 글 도서가 비치된 라이브러리 피치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공간은 모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어요. 보통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곳에선 책을 소리 내서 크게 읽어도 괜찮고, 대화를 나눠도 괜찮아요. 소리를 내는 것이 발달장애인, 느린학습자들의 특성 중 하나라고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목표는 느린학습자를 빠른학습자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치료’라는 말도 쓰지 않습니다. 인지 능력이나 문해력을 향상시키려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인지 능력과 문해력으로도 일상에 불편함이 없게 만들고 싶은 거죠. 각자의 다름을 인정받으면서 그들이 자기 속도대로 세상의 정보를 차별없이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입니다.
쉬운 글로 만들어진 책을 어떻게 활용하나요. 실제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특수학교로 찾아가서 학급별로 교육을 하다가, 전국으로 확장되고 나서는 온라인 교육도 병행하고 있어요. 라이브러리 피치를 중심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전국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생겼어요. 읽기가 습관화되려면 교육 이후에도 반복적인 활동이 필요한데 여기까지 찾아오기엔 힘들어 전국으로 교육 기회를 넓히려고 시도하는 중입니다. 현재 강릉, 영월, 강화 등 전국의 독립서점 10군데와 연계해 피치마켓이 만든 책이나 학습지를 비치하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어요. 서점 사장님들이 특수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책을 읽고 하나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정도만 해주셔도 느린학습자들의 반복교육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서점과 연계하는 데는 각 지역에 느린학습자들이 가고 싶은 곳, 환대받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싶은 목적도 있습니다.
그동안 만든 책이 3백 권이 넘더군요. 어떤 종류의 책들인지, 출간 선정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펴내는데 대표적으로 문학의 경우, 교과서 수록 작품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학업과 관련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예요. 그런 취지에서 최신 뉴스도 신경을 쓰는 편이구요.
근로기준법 같은 취업 관련 책, 학대 피해를 입은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책,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특수교육 대상자들을 위한 책 등 느린학습자들에게 필요한 주제의 책을 창작하기도 합니다. 외부 기관에서 특정 콘텐츠를 쉬운 글로 바꾸어 달라고 의뢰해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용뿐 아니라 서체도 신경을 써서 자체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단어를 아무리 쉽게 바꾸어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여자인지 몰랐다”라는 표현에서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느린학습자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여자인지”를 사자성어처럼 하나의 단어로 인식한 거죠. 글자의 조합 자체도 이들한테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용뿐 아니라 서체와 디자인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요.
자음과 모음의 위치나 크기 등도 중요한 요소예요. 바탕체나 궁서체처럼 끝이 가늘고 긴 글자는 오독률이 높아요. 그나마 가독성이 높은 것이 고딕체인데, 같은 자음이라도 초성과 종성 (받침)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 문제가 돼요. 미음이 받침에 들어가면 ‘임산부’를 ‘입산부’로 읽게 되는 거죠. 발달장애인 서른 명, 경계선 지능인 서른 명을 대상으로 6개월 동안 아이 트레킹을 했어요. 글을 읽을 때 어떤 요소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측정해서 ‘피치마켓체’라는 서체를 개발했죠.

책을 쉽게 만든다고 하면 흔히 글을 조금 넣고 그림을 많이 넣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디자인 측면에선 어떤 요소를 고려하는지요.
글이 적다고 이해가 잘 되는 건 아니에요. 글이 적으면 몰입도는 높아지지만, 중간에 생략되어 있는 정보들을 유추해서 해석해야 하는 더 큰 과제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쉬운 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건 원작보다 분량이 훨씬 늘어나기도 합니다.
책의 부피도 중요한데, 중간에 백지를 여러 장 넣어서라도 되도록 볼륨감 있게 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었구나’ 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요. 이들의 자존감,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습니다. 표지도 좀 어려워 보이게끔 디자인하고, 제목에도 ‘느린 학습자를 위한’ 이런 문구는 넣지 않아요. 시중에 나와 있는 성인들 책이랑 별 차이가 없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문해력을 기르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강사도 많이 필요할 텐데 교육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요.
온라인 교육은 전국 어디든 가능하고, 오프라인 교육은 서울, 경기, 부산 세 군데에서 진행하고 있어요. 개인별 교육은 아직 여건이 되지 않아서, 대부분 특수학교에서 학급 단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독서활동을 했을 때 참여자들한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추적 조사, 연구하려는 목적도 있어요. 장기적으로 보고 느린학습자를 위한 강사 양성도 하고 있어요. 과정을 마치고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도 일 년 정도는 저희와 피드백 과정을 거칩니다. 그 후로 복지관 등에서 교육 요청이 들어오면 강사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피치마켓이 하고 있어요.
특수교사 연구모임, 피치 클래스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어느 교육청에서 쉬운 글을 활용한 독서교육 연수를 요청해온 계기로 특수교사들과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연수에 참여한 교사 중 적극적인 몇몇 분이 후속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면서, 쉬운 글 교재로 수업 활동자료를 만들어 전국의 특수교사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활동이 교재를 활용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교수법을 연구, 배포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죠. 150명 정도의 특수교사들이 같이 연구도 하고 공유회를 열기도 해요.
힘들겠지만 보람도 크겠어요. 이 일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때는 언제인가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힘들게 낸 책 중에서 일부가 베스트셀러에 선정되기도 하고,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고, 임용고시에 지문으로 인용되기도 했어요. 처음엔 특수교사들마저도 “장애아동은 책으로 교육하기 어려워요”라고 했는데, 이제는 전국 곳곳의 특수학급에서 우리가 만든 책으로 독서교육을 하는 변화가 생겼어요.
대기업에서 협업을 의뢰해오는 것도 반가운 변화죠. 얼마 전 신한카드와 협력해서 느린학습자를 위한 금융 교재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디지털 금융사기 등에 경계선 지능인이 취약했기에 카드사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동안 특수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경제교육을 할 때면 물건 구매 방법 익히기, 돈 계산하기 정도밖에 못했는데 신한카드의 도움으로 생활경제를 주제로 하는 교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교재를 가지고 느린학습자들에게 금융교육도 하고 있어요. LG전자에서 제품설명서를 쉬운 글로 바꿔 달라고 의뢰하기도 했어요. 단순한 사회공헌 차원이 아니라, 이런 고객들을 위한 제품설명서도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거죠. 그들을 고객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데 작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장기적으로 느린학습자의 교육 슬세권(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구역)이 전국 곳곳에 형성되길 바라고 있어요. 느린학습자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 멀리 이사를 가야 하거나 장거리를 오가지 않아도 되도록 가까운 지역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 인터뷰 원문은 계간 민들레 156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느린학습자를 위한 다양한 읽을 거리를 생산하는 ‘피치마켓’은 경제학 용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보의 불균형으로 저급한 상품이 넘쳐나는 ‘레몬마켓’과 반대로 ‘피치마켓’은 상품의 정보가 균등해 좋은 제품이 활발히 유통되는 시장을 말한다. ‘피치마켓’이란 이름에는 개인의 수준에 맞춘 정보 제공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담겼다. 정보가 권력이 된 사회에서 그 격차를 줄이는 데 힘쓰고 있는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_편집실
2015년이면 ‘느린학습자’라는 용어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처음부터 느린학습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어요. 정보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쉬운 글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하면서, 이후 대상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했죠. 처음엔 발달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었어요. 현장 조사를 했더니, 발달장애인들이 청소년기나 성인기가 됐는데도 계속 아동용 동화책이나 뽀로로 시리즈 같은 유아 그림책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어요.
첫 책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는데, 결과는 실패였죠. 성인 발달장애인 두 분에게 감수받으며 진행했는데 이분들의 문해력이 상당히 높은 편이란 걸 몰랐던 거죠. 다수의 발달장애인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책이었어요. 그 후 특수학급을 찾아가 수업에 참여하면서 그들과 그들이 쓰는 언어에 대해 새로 배웠어요. 그 내용을 반영해 그들이 진짜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었죠.
보통 느린학습자는 경계선 지능인과 같은 개념으로 쓰이는데, 피치마켓이 말하는 느린학습자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교육현장에 느린학습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 그 실태를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가요.
피치마켓에서 느린학습자는 사회에서 말하는 경계선 지능, 발달장애뿐 아니라 문해력이 부족한 모든 사람들을 포괄합니다. 연령으로 보면 참여자 중에 아동 청소년이 많기는 하지만 성인들도 있어요. 최근에는 후천적 인지 저하나 문해력 저하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 다문화 가정, 또는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언어 차이가 있는 새터민 학생들도 만납니다.
우리나라에 경계선 지능인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한 현황은 몰라요. 통계 조사를 진행 중인데 아직 결과가 발표되지 않았어요. 경계선 지능인이 전체 국민의 13.6%라고 추정하는 것은 해외 연구 사례를 기반으로 하는 건데,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아요. 소년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 느린학습자 비율이 34%라는 연구 결과가 있어서, 그곳을 찾아가서 모두를 대상으로 독서교육을 하는 중에 느린학습자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최근 발달장애인이나 경계선 지능인이 늘었다기보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예요. 사회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포용하는 문화가 생겨서 더 많아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당사자나 보호자들이 예전보다 두려움 없이 “느린학습자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10여 년 사이 체감하는 큰 변화죠.
조금 앞선 듯했지만 시대적 흐름에 꼭 필요한 일이었네요. 쉬운 글 도서 만들기에서 최근 다양한 분야로 활동을 넓히고 있는데요.
사업 단위로 보면 다양해진 것 같지만 맥락상으로는 같은 일을계속하고 있어요. 규모를 확장하려고 한 건 아니고 느린학습자를 위한 책을 만들었는데 독서 습관화가 안 되어 있다 보니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독서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또 우리 힘만으로는 어려우니까 특수교사라는 현장의 훌륭한 전문가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니까 도서문화재단 씨앗과 협력해 2022년에 서울 대학로에 라이브러리 피치라는 도서관을 열었어요. 이 도서관에서 교사와 보호자, 기타 관계자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쉬운 글 도서가 비치된 라이브러리 피치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공간은 모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어요. 보통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곳에선 책을 소리 내서 크게 읽어도 괜찮고, 대화를 나눠도 괜찮아요. 소리를 내는 것이 발달장애인, 느린학습자들의 특성 중 하나라고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목표는 느린학습자를 빠른학습자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치료’라는 말도 쓰지 않습니다. 인지 능력이나 문해력을 향상시키려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인지 능력과 문해력으로도 일상에 불편함이 없게 만들고 싶은 거죠. 각자의 다름을 인정받으면서 그들이 자기 속도대로 세상의 정보를 차별없이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입니다.
쉬운 글로 만들어진 책을 어떻게 활용하나요. 실제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특수학교로 찾아가서 학급별로 교육을 하다가, 전국으로 확장되고 나서는 온라인 교육도 병행하고 있어요. 라이브러리 피치를 중심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전국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생겼어요. 읽기가 습관화되려면 교육 이후에도 반복적인 활동이 필요한데 여기까지 찾아오기엔 힘들어 전국으로 교육 기회를 넓히려고 시도하는 중입니다. 현재 강릉, 영월, 강화 등 전국의 독립서점 10군데와 연계해 피치마켓이 만든 책이나 학습지를 비치하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어요. 서점 사장님들이 특수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책을 읽고 하나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정도만 해주셔도 느린학습자들의 반복교육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서점과 연계하는 데는 각 지역에 느린학습자들이 가고 싶은 곳, 환대받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싶은 목적도 있습니다.
그동안 만든 책이 3백 권이 넘더군요. 어떤 종류의 책들인지, 출간 선정 기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펴내는데 대표적으로 문학의 경우, 교과서 수록 작품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학업과 관련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예요. 그런 취지에서 최신 뉴스도 신경을 쓰는 편이구요.
근로기준법 같은 취업 관련 책, 학대 피해를 입은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책,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특수교육 대상자들을 위한 책 등 느린학습자들에게 필요한 주제의 책을 창작하기도 합니다. 외부 기관에서 특정 콘텐츠를 쉬운 글로 바꾸어 달라고 의뢰해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용뿐 아니라 서체도 신경을 써서 자체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단어를 아무리 쉽게 바꾸어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여자인지 몰랐다”라는 표현에서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느린학습자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여자인지”를 사자성어처럼 하나의 단어로 인식한 거죠. 글자의 조합 자체도 이들한테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용뿐 아니라 서체와 디자인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요.
자음과 모음의 위치나 크기 등도 중요한 요소예요. 바탕체나 궁서체처럼 끝이 가늘고 긴 글자는 오독률이 높아요. 그나마 가독성이 높은 것이 고딕체인데, 같은 자음이라도 초성과 종성 (받침)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 문제가 돼요. 미음이 받침에 들어가면 ‘임산부’를 ‘입산부’로 읽게 되는 거죠. 발달장애인 서른 명, 경계선 지능인 서른 명을 대상으로 6개월 동안 아이 트레킹을 했어요. 글을 읽을 때 어떤 요소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측정해서 ‘피치마켓체’라는 서체를 개발했죠.
책을 쉽게 만든다고 하면 흔히 글을 조금 넣고 그림을 많이 넣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디자인 측면에선 어떤 요소를 고려하는지요.
글이 적다고 이해가 잘 되는 건 아니에요. 글이 적으면 몰입도는 높아지지만, 중간에 생략되어 있는 정보들을 유추해서 해석해야 하는 더 큰 과제가 생기기도 하거든요. 쉬운 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건 원작보다 분량이 훨씬 늘어나기도 합니다.
책의 부피도 중요한데, 중간에 백지를 여러 장 넣어서라도 되도록 볼륨감 있게 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었구나’ 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요. 이들의 자존감,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습니다. 표지도 좀 어려워 보이게끔 디자인하고, 제목에도 ‘느린 학습자를 위한’ 이런 문구는 넣지 않아요. 시중에 나와 있는 성인들 책이랑 별 차이가 없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문해력을 기르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강사도 많이 필요할 텐데 교육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요.
온라인 교육은 전국 어디든 가능하고, 오프라인 교육은 서울, 경기, 부산 세 군데에서 진행하고 있어요. 개인별 교육은 아직 여건이 되지 않아서, 대부분 특수학교에서 학급 단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독서활동을 했을 때 참여자들한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추적 조사, 연구하려는 목적도 있어요. 장기적으로 보고 느린학습자를 위한 강사 양성도 하고 있어요. 과정을 마치고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도 일 년 정도는 저희와 피드백 과정을 거칩니다. 그 후로 복지관 등에서 교육 요청이 들어오면 강사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피치마켓이 하고 있어요.
특수교사 연구모임, 피치 클래스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어느 교육청에서 쉬운 글을 활용한 독서교육 연수를 요청해온 계기로 특수교사들과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연수에 참여한 교사 중 적극적인 몇몇 분이 후속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면서, 쉬운 글 교재로 수업 활동자료를 만들어 전국의 특수교사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활동이 교재를 활용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교수법을 연구, 배포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죠. 150명 정도의 특수교사들이 같이 연구도 하고 공유회를 열기도 해요.
힘들겠지만 보람도 크겠어요. 이 일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때는 언제인가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힘들게 낸 책 중에서 일부가 베스트셀러에 선정되기도 하고,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고, 임용고시에 지문으로 인용되기도 했어요. 처음엔 특수교사들마저도 “장애아동은 책으로 교육하기 어려워요”라고 했는데, 이제는 전국 곳곳의 특수학급에서 우리가 만든 책으로 독서교육을 하는 변화가 생겼어요.
대기업에서 협업을 의뢰해오는 것도 반가운 변화죠. 얼마 전 신한카드와 협력해서 느린학습자를 위한 금융 교재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디지털 금융사기 등에 경계선 지능인이 취약했기에 카드사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동안 특수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경제교육을 할 때면 물건 구매 방법 익히기, 돈 계산하기 정도밖에 못했는데 신한카드의 도움으로 생활경제를 주제로 하는 교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교재를 가지고 느린학습자들에게 금융교육도 하고 있어요. LG전자에서 제품설명서를 쉬운 글로 바꿔 달라고 의뢰하기도 했어요. 단순한 사회공헌 차원이 아니라, 이런 고객들을 위한 제품설명서도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거죠. 그들을 고객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데 작은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장기적으로 느린학습자의 교육 슬세권(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구역)이 전국 곳곳에 형성되길 바라고 있어요. 느린학습자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 멀리 이사를 가야 하거나 장거리를 오가지 않아도 되도록 가까운 지역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 인터뷰 원문은 계간 민들레 156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